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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위로, 굳건한 소망

LNCK 2021. 1. 4. 07:32

 https://www.youtube.com/watch?v=df5yogsWIWM

 

◈넘치는 위로, 굳건한 소망                고후1:1~11            2021.01.03.출처

 

(설교 전 기도) 하나님 아버지 대한민국을 이처럼 번영된 나라로 세워 주시고

수많은 교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나라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죄악과 타락한 문화 가운데 휩쓸려가는

이 나라와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이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는 나라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에 만연한 거짓과 부정, 음란과 헛된 우상과 헛된 이념들이

이 땅을 뒤덮지 못하도록 지켜 주시옵시고

이 코로나 팬데믹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다시 정결함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한국교회 성도들, 이 위기의 때에 더욱 믿음을 견고히 지키게 하시고

주께 소망을 두게 하시고

연약해지거나 위축되지 않게 해 주시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에 치우치지 않게 해 주시고

그날이 다가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이 기간이 되길 원합니다

헌혈로 생명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 대학 청년들이 비전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90일의 기적>(연초~부활절까지 90일의 새벽 온라인 집회)이 축복의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고

주님이 부활하신 그 날을 우리가 기념하는 날에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며 풍성해지며

변화를 경험하는 이 90일의 여정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 영상으로 함께 참여하지만

그곳에서도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고

있는 그 곳이 예배당이 되게 하시며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나갈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살아 계신 하나님,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재난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거룩을 회복하고, 정결함을 회복하는 기간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바르게 지키는 이 나라와 민족이 되기를 원합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이 번성하는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나라에 만연한 거짓과 부정과 음란, 헛된 우상과 탐심의 죄악들이

이 재난의 기간을 통과하며 온전히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게 하여 주옵소서

 

<90일의 기적>이란 이름으로 부활절을 맞이할 때까지

우리가 함께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 앞에 더 간절히 나아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재난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생명을 나누는 헌혈 캠페인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대학 청년들이 비전을 발견하고자 저녁마다 온라인으로 함께 집회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모든 계획 가운데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내려 주셔서

우리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고 소망가운데 거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모든 심령들에게

주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설교 시작

 

새해를 시작하면서 "소망의 복음을 굳게 잡으라"는 이 표어를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하기 위해서

고린도후서 말씀을 함께 매주마다 나누게 되었습니다

 

소망의 복음을 굳게 잡은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사도바울일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시아와 유럽 전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영혼들을 양육했습니다

 

그는 또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도들보다 어떤 성도들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며 고난 받아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과 신앙, 그리고 그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받았던 모든 고난의 여정은

우리에게 바울의 서신서들로 잘 남아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기록, 그 사역의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복음 안에 있는 이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그 모든 고난의 여정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그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망의 복음' 이었습니다

 

▲바울의 사역의 여정 가운데 가장 큰 고난을 주었던 두 도시를 든다면

에베소와 고린도 입니다

 

에베소는 당시 아시아 지역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그곳에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곳에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범 도시적인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만큼 복음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죠

 

복음이 증거되면 우상이 무너집니다

그 우상이 무너지는 그 현상을 보며

우상에 붙어서 세상적인 이득을 취했던 이들이 반드시 반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복음이 전해지면 영적 전쟁이 일어나며

또한 복음을 반대하는 악의 세력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때로는 물리적인 충돌, 또 육체적인 핍박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가장 힘들었던 도시는 고린도 입니다

고린도는 당시에 가장 유명한 도시 가장 번영한 도시며, 가장 음란한 도시며

(바울에게) 가장 상처가 많았던 도시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받았던 고난은, 복음이 증거되는 '사역'에 대한 반대 라기보다는

복음을 증거했던 '바울 자신'에 대한 공격 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에게 퍼부어진 많은 모함, 중상모략, 거짓된 소문으로 인하여

바울이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이 엄청난 공격 앞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은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고통일 것입니다

 

바울이 개척했던 고린도 교회에 외부로부터 들어온 거짓 사도들에 의해서

자칭 사도라 하는 이들에 의해서 바울의 사도권이 부정당하고

또 바울을 믿지 않게 하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일에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휩쓸렸고

결국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마음에 고통으로 담아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복음안에는 포기할 수 없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는 이 모든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인내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번 편지를 보내며, 방문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 했고

결국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과 건강한 관계로 다시 회복 되게 됩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바울은 참된 복음의 능력을 더 깊이 체험합니다

자신의 고난 속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포기할 수 없는 굳건한 소망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약할 때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더욱 체험합니다

 

'두 번째 회심' 이라고 말할 만큼

자신이 가장 연약할 때 자신에게 가장 큰 능력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체험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입니다

 

 

◑고린도후서를 쓰게 된 배경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네 번째 편지입니다

 

고린도후서 라고 하면 우리에게 고린도에 보낸 두 번째 편지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네 번째 편지가 되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전해져 있지 않지만, 성경에 분명히 근거를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편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말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간에 주고 받은 이 편지들이 아주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첫 시간이기 때문에 이 편지들을 개괄적으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보낸 첫 번째 편지> 남아있지 않음  

이 편지는 고린도전서 5장 9절에 근거합니다

'나는 내 편지에 여러분에게 음행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썼습니다'

 

주후 53년 말 경에 이 편지를 쓴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편지는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죠

 

이 편지는, 바울이 고린도교회 안에 음행하는 자들, 우상숭배, 탐욕과 약탈하는 자들이 있다

라는 것을 알게 된 직후에 보낸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경고, 그들에 대한 올바른 치리, 올바른 권면,

공동체가 그 죄를 정결케 하는 일에 앞장서야 된다는 것을 권면하는 편지였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이 편지에 대한 응답을 받습니다>

역시 고린도 전서에 그 응답의 내용이 나오는데요

 

글로에의 집 사람들을 통해서 이 편지에 대한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 나옵니다 

"내 형제들이여 글로에의 집 사람들을 통해 여러분의 대한 말,

곧 여러분 가운데 다툼이 있다는 말을 내가 들었습니다" 고전1:11 

 

또한 스데바나와 그 일행이 바울에 대한 또 다른 소식을 전해 줍니다

 

이 말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첫 번째 보낸 그 권면의 편지에 대하여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7:1 "이제 여러분이 써 보낸 질문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의견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관련된 질문도 보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보낸 첫 번째 편지에 대한 응답으로 받은 그 내용에는

많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결혼의 문제,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에 관한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들과 함께 바울은 안타까운 소식을 듣습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 안에 다툼과 분열이 심하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로 나뉘어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또 나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

서로를 비방하는 이 다툼과 분열로 인해서

마땅히 치리해야 되고, 마땅히 올바른 징계를 해야 될 사람을 처리하지 못한채

오히려 다툼과 분열 속에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2 여기에 대한 안타까움 속에서 <두 번째로 쓴 편지>가

바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고린도전서>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주후 54년 초, 에베소에 있던 바울이

자신의 첫 번째 편지가 간 것에 대한 응답(서신)을 받고 보낸 편지입니다

 

이 고린도전서를 고린도교회에 보내고 전달하고

그 소식을 전해 온 사람이 디모데 제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는 디모데와 함께 쓰게 되는데

디모데를 통해서 듣게된 소식은 고린도교회의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분열로 시작하고, 그리고 바울이 권면한 그들을 치리하지 못하고 방치하게 된 상태에서

이제는 이 고린도전서를 전달하고 되돌아온 디모데를 통해 들은 소식은

이제는 바울에 대해서도 불신하는, 반대하는, 대적하는 흐름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온 거짓된 사람들이 바울을 음해하고 모함하고 공격하는 일에

성도들이 휩쓸려 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큰 고통가운데 처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고린도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의 두 번째 고린도 방문>입니다

 

첫 번째 방문은, 고린도교회를 개척할 때 일어났던 방문이고

 

고린도전서를 보내고 나서, 디모데에게 그 형편을 전해 듣고

심각한 상황을 보살피기 위하여

두번째로 고린도를 방문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있던 (지금의 터키 지역) 바울이

바다를 직선으로 건너면 그곳이 고린도 입니다 (지금의 그리스 지역)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달려 가게 됩니다

 

육로로 에베소에서 고린도를 가려면 저 내륙지방으로 우회하게 되는데

배를 타고 급히 가게 된 것은, 그만큼 바울이 긴급한 상황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그만큼 바울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죠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세례를 주고, 복음으로 양육했던 바울 자신에 대한 공격,

그것을 바울은 방문해서 실제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 번째 방문을 '고통스러운 방문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후 54년 중반이죠.

 

아마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과 바울이 서로 대면하여 만나는 시간이 있었을 겁니다

모일 수 있는 모든 성도들이 다 모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때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공개적으로 바울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이들이 나타났는데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도 않고, 오히려 호응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바울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반응하거나 대적하거나 복수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조용히 고린도를 떠나게 됩니다

 

큰 슬픔과 고통을 안고 떠나죠

침묵하며 떠나는 그 뒷모습을 향해 도리어 '연약한 자다, 무능한 자다,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는 자다' 그렇게 비방하는 소리를 들으며 고린도를 떠나 옵니다

 

▲3 그러나 바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세 번째 편지>를 쓰게 됩니다 (남아있지 않음)

 

이 세 번째 편지에는 고통스러운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엄한 편지, 매우 심각한 편지를 주후 54년 말 경에 보내게 됩니다.

 

이 편지는 디도라는 제자를 통해서 보내게 됩니다

눈물의 편지입니다

 

바울이 겪은 모든 고통이 담긴 편지입니다

그러나 매우 엄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편지입니다

 

고린도후서 2:4절에 이 편지의 내용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큰 환란과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많은 눈물로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이런 여러분을 근심하게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 대해 넘치는 사랑이 내게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후2:4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많은 눈물로 쓴 편지가.. 세 번째 편지입니다

바울은 고통 속에 눈물로 썼지만

그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이 자신에게 있음을 여전히 밝힙니다

 

이 편지를 보낸 이후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 지역으로, 북쪽으로 옮겨갑니다

그곳에 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역이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 안에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로 인한 근심과 염려가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또 디도가 이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고 더디게 돌아오자

그 소식이 궁금하여 마음에 큰 고통이 더해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2:12~13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드로아에 갔을때 주 안에서 내게 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않아

그들과 작별하고 마케도니아로 갔습니다" *고후2:12~13

 

드로아에 가서도 디도를 기다렸는데 그가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이 더 힘들고 심령이 편치 않아

사역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결국 바울은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로 또 옮깁니다

마케도니아에서 고난 당하고 있는 성도들과 함께 고난을 받습니다

 

그 고난당하는 과정에, 디도가 드디어 고린도교회로부터 바울에게로 오게됩니다

디도를 통해 온 소식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고통가운데 눈물로 썼던 그 바울의 편지를 읽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변화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치리해야 될 사람을 치리하고, 바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그동안 이 모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기쁨의 보고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후서 7:5~6절 해서 이렇게 고백하죠

"우리가 마케도니아 이르렀을 때 우리의 육체는 편치 못했고

사방으로는 환란을 당했습니다

밖으로는 다툼이 있었고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도를 돌아오게 하심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고후7:5~6

 

마케도니아에서 그곳 성도들과 함께 환란 가운데 있을 때

디도가 전해준 이 소식, 고린도 교회의 대한 소식이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대적하는 무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으로 포기하지 않는 소망으로 대했던 그 열매가 맺어진 것입니다

 

도무지 변화될 것 같지 않았던 고린도교회 성도들,

거짓과 음모에 휩싸여서 영적인 아버지인 바울을 대적했던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서 바울은 큰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 하셨구나!'

 

'하나님은 이 복음 증거의 역사가 고린도에서 더 능력있게 일어나기를 원하시는구나'

'하나님은 고린도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구나!'

 

바울은 소망을 품고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 이렇게 디도로부터 이 소식을 받고

<네 번째로 고린도 교회에 이 소망가운데 보낸 편지가 바로 고린도후서> 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순서대로는 고린도후서 이지만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관계에서 바울이 보냈던 네 번째 편지가 뒤죠

주후 55~56년에 기록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관련되었던 이 갈등과 고통의 여정이 담겨 있어요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바울이 믿었던 복음, 그 복음 안에 어떤 능력이 있기에

이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었는지..

 

바울이 그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받았던 모든 시련에 대한 그 바울의 속마음,

그리고 자신이 가장 연약할 때 능력이 되셨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

 

바울은 무능력자고, 계시를 받지 못한 자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지 못한다는

수많은 비방에 대하여

불필요하지만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좀 자랑하겠다..

불필요하지만 내 자신을 좀 설명하겠다.. 그렇게 완곡하게 설명하며

자신이 체험한 그 놀라운 신비로운 계시와,

자신이 받았던 그 엄청난 고통, 연약함 속에서 그 복음의 능력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바울이 잊지 않았던 것은,

고린도교회 가운데 자신을 대적하고 비방했던 무리에 대한 용서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2:6~7 "그러한 사람에게 여러분은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가 더 큰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오히려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십시오"

 

자신을 대적했던 이에 대한 용서까지 권면하는 바울의 넓은 마음,

그것은 주의 사랑이요 주의 위로가 풍성했기 때문이요,

그 안에 소망의 복음이 그를 붙잡아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고린도교회에게, 사도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까지 다 참여 시켰어요

이제 함께 복음의 동역자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제 세 번째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게 되죠.

주후 57년 경입니다

마케도니아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고린도에 와서 석달동안 머무르게 됩니다

 

바로 이때 로마서를 기록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3개월 동안 이제 평안한 마음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회복된 마음으로

그는 이제 로마 복음화와 그리고 스페인 복음화와 유럽 복음화를 위한 비전을 나누며

로마서를 이곳에서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깊이 있는 서신이었던 로마서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로마교회를 향한 사랑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과의 갈등과 고통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 이렇게 바울이 4번에 걸쳤던 편지,

그리고 3번에 걸친 방문이 얽혀 있는

고린도교회의 관계 속에서

바울이 자신의 삶과 신앙과 사역의 정당성, 진정성을 변호하는 책이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그래서 때로 장황하리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하여, 이슈에 대하여 선언문 식으로 서술했던 고린도전서와

다른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같은 교회에 보낸 편지이지만, 고린도전서의 분위기와 고린도후서의 분위기는 전혀 다릅니다

 

고린도전서는 중요한 질문에 대한 소논문 식으로 잘 정리된 대답을 하지만

고린도후서는 때로 조직할 수 없는, 구분하기 힘든 바울의 속내를 털어놓고 있는

그러한 자기 고백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학자들은 이 고린도후서의 헬라어 문장이 가장 어려운 문장들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깊은 자기 속마음을 털어내면서 쏟아낸 단어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린도후서 안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지탱해 주었고, 또한 바울을 괴롭힌 그 대적자 들을 변화시키고

바울을 신뢰하지 않았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변화시킨

이 소망의 복음이 고린도후서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바울의 자기 경험, 고난 가운데 넘치는 위로

 

특별히 오늘 본문은 1장 1절에서 11절 가운데

바울이 그동안의 경험을 압축하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두 가지를 복음 안에서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1. 첫째로 그는 복음 안에서, 고난 속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3~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바울이 고난속에서 넘치는 위로를 경험했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이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 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동급의 고난이란 뜻이 아닙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주는 축복을 전하면서 요구되는 고난,

그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증거 되기 위해 필요한 고난입니다

그 고난이 그에게 넘쳤어요

어떤 사도, 어떤 성도보다 고난을 많이 받았죠

 

그러나 그 모든 고난이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것은

고난이 넘친 것과 같이,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더욱 넘쳤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짧은 구절에 '위로' 라는 단어를 9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위로는 가까이 있을 때만 주어지는 거죠

<고난>은, 때로 우리가 하나님이 나를 멀리 하신다고 느껴지는 겁니다

그렇지만 <위로>는 하나님이 나와 너무나 가깝게 느껴질 때 위로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한다고 할 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진정한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 사람 가까이 가는 거예요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겁니다 그 옆에 가는 겁니다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겁니다

그리고 함께 시간을 보내 주고 함께 눈물 흘려 주는 겁니다

 

그 슬픔까지 함께 내려가지 않으면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진정 위로할 때는, 그 사람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는 겁니다

 

나에게는 없는 고난이지만, 그 사람이 겪는 고난의 깊이까지 내려가야 진짜 위로가 되는 거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 하신다고 할 때

저 하늘에서 '내가 너를 위로한다' 그런 말로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 하시기 위하여.

고통가운데 있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나를 버리시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러나 그 고난을 뚫고 임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 가장 가까이, 우리 곁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위로' 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파레클레시스' 입니다

그런데 보혜사 성령님을 가리킬 때 '파라클레토스' 같은 단어입니다

 

성령님은 위로자이십니다

영어로 성령님을 Comforter 위로자 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고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으로 임하십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위로하시는 성령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임하심으로, 그 고난을 이기도록 위로하셨어요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 성령 안에서 부어진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두 가지 선택의 기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삶이요

-또 하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저는 하나님의 위로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그냥 고난도 피하겠습니다'

-고난도 없고 위로도 없는 삶!

-또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삶!

위 두 가지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할 때, 그러면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대개는 '저는 하나님의 위로는 안 받아도 좋으니, 고난도 없는 편이 좋겠습니다'

라는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의 고난을 다 씻어내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그리고 그 고난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이 우리는 담대하게 이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고난 속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위로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자비의 하나님' 그 분이 곧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이라 말할 때,

아무 고난 없는, 고난을 면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그것을 하나님의 자비로 생각하지만

 

바울이 경험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고난과 함께 넘치는 위로를 경험케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을 위한 위로자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결코 머무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또 다른 사람에게 위로자가 되게 하십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어느 인도의 원주민 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원주민 마을의 어느 여인의 두 아들을 잃게 되었어요

 

그녀는 슬픔속에 매일 매일 같은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제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둘 다 모두 내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이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누구의 위로도, 누구의 용기 불어 넣어 주는 말도 다 거절했습니다

 

그 마을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님이 하루는 그 원주민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자기와 함께 사역하던 한 동역자 여자 선교사,

인도의 원주민 옷인 흰 사리를 입고 사역하는 그 선교사를 가리키며

'저 여인 보이시죠? 저 여인도 당신과 똑같이 두 아들을 잃어버린 여인입니다!'

 

그 원주민 여인은 그 여 선교사에게 달려갔습니다

'선교사님, 선교사님도 저처럼 두 아들을 잃은 여인입니까?'

 

'맞습니다 저도 당신과 같이 두 아들을 잃은 여인입니다

그러나 저희 아들들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예수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여인의 손을 붙잡고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원주민 여인은 자기 마음을 열고, 이 여선교사가 자기와 같은 고난속에 있음을 알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 선교사를 따라 양육을 받고 귀한 동역자로 변화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통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 속에 위로가 필요합니다

누가 그들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과 같이 고난 속에 경험한,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로 치유받고 극복한 이들이

그들을 위로할때

하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증거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20대 아들을 사고로 잃은 기독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코프는

예일대 교수였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눈물을 통해서 세상을 볼 것이다

그러면 마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되리라"

 

'아들을 잃은 그 아픔을 통해서, 나는 눈물을 통해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눈물 없이는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다는 것이고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로하는 위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거예요

고난 속에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은

고통 속에 있는 자를 위로할 수 있는 자격증을 얻은 것입니다

 

마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 세상에 고통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위로자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 수많은 고난 속에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고

그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가운데 이제는 많은 영혼들을 위로할 수 있는 위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자신을 공격했던 이들까지도 용서하고 위로하게 된 것입니다 4

 

▲2. 둘째로 바울은 고난을 통해 굳건한 <소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1:7~10절의 말씀이죠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소망하노라)

 

이 7절과 10절은 소망으로 시작해서 소망으로 끝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소망, 굳건한 소망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소망으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는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으로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체험을 고백합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인하여 살 소망이 끊어진 때가 있었다는 거예요

 

▲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이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에 대해

여러분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 즉 알기를 원한다 그랬는데

사실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정보는 없어요, 우리에게, 아쉬운 부분이죠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추정합니다

 

1)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 이라 그랬으니 *1:8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사역한 곳이 에베소 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에서 당한 환란을 추적해보면

행19장에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경제적인 위축이 되자

폭동을 일으켜서 바울 일행을 쫓아내는 그 체험,

 

그러나 후반부에 보면 에베소 시청 공무원이 나와 가지고 그 폭동을 진정 시킵니다

강제진압 이 아니라 '너희들이 불만이 있으면 법정에 고소를 하라 이런 방법은 안 된다'

그래서 해산시킵니다

 

그러니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이 그 정도로 산 소망이 끊어졌을까?

그런 의아함이 있는 거죠

 

2) 또 고린도전서 15:32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에베소에서 진짜 맹수와 싸운 것일까? 라고 한다면 거기에도 의문이 생깁니다

왜냐면 당시에 맹수로 원형경기장에 던져진 사람들은 노예계층,

또는 심각한 범죄를 저지런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신분도 아니었죠 로마시민권자였습니다

그가 그런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맹수는 '바울을 맹렬하게 대적했던 대적자 혹은 악한 세력'을

은유적으로 표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겠죠

 

그렇다면 사도행전이나 다른 기록을 통해서는

바울로 하여금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할 위기가 무엇인지는 정확하진 않습니다

 

추정해 보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어떤 감옥에 투옥이 됐다든지

그래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든지..

 

혹은 여행 중에 죽을 수 있는 건강에 심각한 그런 문제가 생겼다든지..

 

3) 또 어떤 학자는, 바울은 이런 육체적인 일들로 살 소망이 끊어질 사람은 아니다

왜냐면 배고픔과 목마름과 매맞음과 옥에 갇힘,

심지어 감옥에 갇혀서 빌립보서를 기록해서 기뻐하라고 권면한 사람 아닌가!

그는 모든 것들은 다 인내했다.

 

그런 그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반역과 대적이었을 것이다.. 정신적인, 심리적인 충격이었을 것이다

매우 설득력 있죠

 

4) 그리고 이 모든 고난이 합쳐져서, 이 고난이 누적되고 누적되면

한 순간에 심리적으로 소위 패닉상태가 올 수 있는 거지요 큰 우울감과 절망이 올 수 있는 거죠

 

그러나 정확하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환란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 가운데 그는 어떻게 소망을 찾았습니까?

그 구절 바로 다음 구절에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우리는 마음에 사용 선고를 내리려 했습니다) 1:9

 

마음에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것은 스스로 죽기를 결심했다는 뜻처럼 보입니다만

 

이 구절을 직전 구절과 연결시켜 해석하면

즉 '심한 고난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질 지경이 됐습니다'와 연결해서 해석하면

'그냥 죽고 싶어, 그냥 목숨을 끊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이 구절을 그 뒷 부분과 연결시켜 해석하면, (이 해석이 맞습니다)

그 다음 부분은 '그것은 우리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위함입니다' 와 연결하면

 

'마음에 사형선고'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대한 죽음을 선언하는 거예요

(우리는 마음에 사용 선고를 내렸는데 이것은 우리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위함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고백한 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신을 죽은자로 여기는 사형선고인 것입니다

 

바울만큼 고난이 많은 사람이 없고 많이 헌신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깨달은 것은, 자신 안에도 여전히 자기를 의지하는 모습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고난을 겪으면서 '살 소망이 끊어졌다' 라는 절망을 왜 느낍니까?

역설적으로 아직도 자기를 의지하는 게 살아 있기 때문이에요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의지에 사형 선고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살 소망이 끊어지는 절망을 느끼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는, 죽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거예요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에, 죽고 싶은 거예요

살 소망이 끊어졌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기가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복음을 설명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 사도조차도

고난이 닥쳐오니까 자기 안에 여전히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을 경험하고

이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이 위기를 극복하는 바울의 비결은 뭐였습니까?

 

자아의 죽음을 다시 한번 선언하는 거예요

'너(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다'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것, 그것은 여전히 살아있는 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아에 대한 십자가의 죽음을 선언하고

사형을 선고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오히려 하나님만 의지하는 소망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로 내 몰렸더니

환란은, 그에게는 독한 약이었지만, 효과 있는 약이었습니다

매우 고통스러운 약이었지만, 살아나게 하는 특효약이 되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우리가 지금 엄청난 환란과 재난 가운데 처해있지만

이것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질 위기에 처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으로 해결이 안 된다는 걸 깨닫는 것입니다

 

내 자아 의지를 내려놓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때

우리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비로소 체험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 설 때, 내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무 소용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는 걸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큰 혼란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직후에 쓴 로마서를 보면 로마서 15: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죠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환란을 겪으면서 경험한 것은

역설적으로 <소망의 하나님>이에요

그것은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내리는 믿음의 결단을 통과해야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환란을 당하면서도, 한 사람은 살 소망이 끝나는 것으로 끝나지만

또 한 사람은 소망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차이는 뭡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옛 자아의 죽음을 선언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자유의지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입니다

'너는 죽었다 너는 끝났다!'

 

살 소망이 없다는 것은 네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므로

죽음을 선언할때, 죽은 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소망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소망의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7절에서 '여러분의 대한 우리의 소망은 굳건합니다'

자신을 어떻게 대적하던, 비방하던, 거짓으로 모함하던 그 성도들을 향한

굳건한 소망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그 환란 가운데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으며

그 환란 가운데 <소망의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 속에, 이 고난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넘치는 위로를 경험한 수도 있고

그 고난 속에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 고난속에 굳건한 소망의 사람으로 변할 수 있으며

그 고난 속에서 살 소망이 끊어진 상태로 절망 속에서 세상 속으로 휩쓸려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삶이란, 고난을 위로로 바꾸는 것입니다

고난을 소망으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2021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들이 어떠한 고난이 오든지,

바울처럼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하는 환란이 온다면

마음에 사형선고를 내리라는 신호입니다

 

'네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네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으라

그러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너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의 소망이 흘러 넘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충만한 위로가 흘러넘칠 겁니다

 

바울은 이 <위로>와 <소망>을 경험했습니다

<위로>와 <소망>을 경험하는 2021년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찬양을 부르고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를 향한 기도, 그 기도에 넘치도록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위로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 가운데 임하시고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며

더 넘치도록 역사하실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기도하는 것보다 더욱 응답하실 하나님" 함께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나의 기도 하는 것보다

더욱 응답하실 하나님

나의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

능력대로 우리들의

간구함을 넘치도록

능히 하실 주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 찬양과

경배를 돌릴지어다

모든 영광과 존귀 찬양과

​경배를 돌릴지어다

 

(기도) 환란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환란 가운데 하나님의 소망을 경험했던 사도 바울의 신실한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고난의 한복판에 있는 이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주의 백성들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