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가정에서의 신앙수업 엡6:4 2022.05.01.출처
신앙이란 관계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고 둘째는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마무리하면서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을 때, 가장 가까운 이웃이 누구입니까? 가족입니다.
인류를 사랑하기 이전에, 가족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교회 생활’은 많이 강조했는데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은 간과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자녀 돌봄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영역입니다.
자녀를 낳는 일도 어렵지만 키우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바울은 자녀와의 관계에서 소극적인 면을 먼저 강조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 왜 바울은 처음부터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했을까요?
이것이 부모들이 가장 실수할 가능성이 높은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문화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상당히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부모가 어떤 때 자녀들을 노엽게 합니까?
1) 첫 번째로 ‘지나친 간섭할 때’입니다.
부모는 자녀보다 삶의 경험도, 지혜도 많습니다.
그리고 내 자녀가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많은데, 문제는 지나친 강요를 하는 것입니다.
과욕이 문제입니다.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로 보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부모는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게 됩니다.
자녀의 행동에 지나치게 간섭을 할 때 자녀는 분노합니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집착,
그 집착이 낳은 과잉보호가 자녀를 분노하게 만듭니다.
2) 두 번째는 ‘무관심’입니다. 지나친 간섭도 문제지만 방치도 문제입니다.
자녀는 세심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아이는 부모의 관심 속에서 자랍니다.
관심이 곧 사랑입니다. 어릴수록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집에서 기르는 작은 식물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잎사귀가 파릇파릇해집니다.
반대로 조금만 방심해도 시들고, 더 방심하면 죽어버립니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3) 세 번째는 ‘비교’하는 것입니다.
비교는 아이들이 질색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부모에게는 비교하고 싶은 유혹이 충동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비교하면 안 됩니다.
전혀 다르게 지음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자꾸 누군가를 끌어들여 자녀가 주눅 들게 만듭니까?
우리 아이만이 가진 독특함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잠재력, 가능성을 보십시오.
우리 아이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얼마나 잘났는지, 얼마나 유능했는지가 아닙니다.
우리 자녀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알게 하고,
자기에게만 있는 고유한 하나님의 은사를 발휘하며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4) 네 번째로는 부부간의 불화입니다.
부부간의 잦은 말다툼이나 가정불화는 아이들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듭니다.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 좋은 부부의 관계입니다.
부부의 갈등은 자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부부의 문제는 단순히 부부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부의 불화는 자녀들의 정서적 불안 등으로 후유증을 앓게 합니다.
5) 다섯 번째는 자녀에 대한 높은 요구입니다. 언제나 부모의 욕심이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경쟁이 심합니까? 입시철이 되면 압력은 최고조에 이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기준을 맞추려고 애쓰지만, 그럴수록 내면에는 분노가 쌓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을 닦달하는 이유는 부모의 위신과 체면 때문인 것을 압니다.
부모의 과도한 욕망의 희생물이 될 때, 그때 자녀들은 노여워합니다.
6) 여섯 번째로는 부모의 엄격함입니다.
조금만 실수해도 용납하지 않는, 자비와 용서가 없는 가정은 자녀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합니다.
특히 율법적인 신자들의 가정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가정인데 아이들의 표정은 어둡습니다.
자발적이지 않고 강요가 많은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갈 때도 옷 입는 것으로 싸움이 납니다.
예배 시간에도 자녀들을 계속 예의주시합니다.
이런 엄격한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면 나중에 신앙을 거부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7) 일곱 번째는 ‘언어 폭력’입니다.
부모의 말은 생각보다 힘이 강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있다고 했습니다.
신체의 상처보다 더 심각한 상처는 영혼의 상처입니다. 어떤 말은 일평생 지워지지 않습니다.
폭력적인 언어는 자녀의 가슴 속에 분노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어의 폭력, 언어의 학대를 조심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툭 내뱉었는데 그것이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자녀에게 분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을 때는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있지만 요약해서 몇 가지만 나누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녀의 인격을 존중하라”라는 것입니다.
어리고 철이 없다고 할지라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도 그 아이는 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자녀들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어야 합니다.
사실 모든 문제는 부모로부터 출발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자녀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요즘 부모들이 자녀들의 눈치를 얼마나 봅니까? 수험생이 있는 집안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불만이 많습니다.
“아빠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자녀들의 대답은 부모의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온도 차가 큽니다.
이유는 부모의 ‘자기식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 사랑, 자기만족을 위한 사랑은 도리어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자녀들은 마치 깨어지기 쉬운 그릇과 같습니다.
노여움은 자녀들을 반항적인 기질로 만들게 되고, 부모와 자녀 간의 의미 있는 대화를 단절시켜 버립니다.
부모의 일방적 강요는 자녀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2.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이들의 문화를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몸에 새긴 문신들, 어울리지 않는 장신구들…
요즘 여자아이들은 초등학교 5학년만 되어도 화장을 합니다.
노출이 심한 옷차림, 버릇없이 보이는 행동들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주일에 부모의 위신이나 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교회를 나서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
참 난감합니다.
아이들을 이해하라면 별수 없이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언더스탠딩(이해, understanding)이라는 영어 단어가 그렇습니다.
‘같은 위치’도 아니고 ‘위’도 아닙니다. 그 아래로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시고 죄인과 같은 모양을 가지셨습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수준까지 올라오도록 노력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직접 세상에 내려오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입장으로 내려가는 일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형과 동생 사이에도 문화적 차이와 세대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와의 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소통은 어렵고 공감은 더 어렵습니다.
이때 부모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입니다. 인내는 부모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자녀를 양육해가는 과정에서 부모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의 성숙입니다.
자녀 교육의 현장이, 결국 부모 수업의 현장으로 바뀌게 됩니다.
부모가 미성숙할수록 자녀들은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갈등과 충돌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 교육은 인간적 힘으로는 안 됩니다.
한국의 유명한 교육학 박사님인데 자기 자녀의 문제로 힘들어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교육학 전문가인데도 자녀에게는 안 통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온전한 인격으로 성숙해 갈 때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그 시간을 메꾸는 작업은 부모의 몫입니다.
그동안은 인내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해 철야를 하고 금식기도를 하는 것도 좋지만
자녀의 실수 앞에서 얼마나 사랑으로 참아내고 품어내느냐가 중요합니다.
가정은 부모의 신앙과 인격훈련의 치열한 현장입니다.
아이들이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할 때 부모는 시험대에 오릅니다. 분노는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따르는 일은 어렵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선교지에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자녀들을 양육하는 현장 속에서도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징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방임하면 나중에 통제가 안 됩니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기죽이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방목이 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과 징계는 함께 가야 합니다. 성경은 체벌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잠13:24절에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23:13~14절에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14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라며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의 기를 살려주는 것과 버릇없이 커가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세 살 이전에 매를 들면 나중에는 체벌할 일이 적어집니다.
사춘기가 되면 체벌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권위 있는 교육학자들이 인정하는 이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체벌할 때 조심스러운 것은 부모의 감정처리입니다. 아이에게 화풀이하듯 하면 역작용이 일어납니다.
징계를 하되 아버지는 힘의 절제를 해야 하고, 어머니는 입의 절제를 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절제된 감정으로 자녀를 훈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미성숙한 인격을 드러낸 다음에는 모든 말과 행동이 마이너스가 됩니다.
▲자녀 교육의 어려움은 부모들 자신이 죄성을 가진 연약한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 역시 죄성 아래에 있습니다.
특히 사춘기를 둔 부모들은 첨예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때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주도권 싸움이 벌어집니다. 부모가 집에서 순교를 경험하게 됩니다.
부모 노릇을 잘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구약의 인물 중에 요셉이나 사무엘은 일찍부터 부모의 영향을 떠나 살았던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훌륭한 인물들로 자랐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양육해주셨습니다.
어설픈 자녀 교육은 자녀들의 영혼을 망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생각보다 빨리 부모의 품을 떠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녀들은 내 집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귀한 손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녀들이 곁에 있을 때 사랑으로 잘 양육하고 훈련을 받게 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탁해 주신 귀한 주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겸허함을 가지고 자녀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3.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바울은 부모의 적극적인 역할도 강조합니다.
‘노엽게 하는’ 것이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긍정적인 부모의 역할입니다. 엡6:4
노엽게 만드는 것이 역기능적이라면 주의 교훈과 훈계는 순기능적입니다.
이 두 가지는 깊은 연관성이 있고 상호 보완적입니다.
▲주의 교훈과 훈계란 무엇일까요? 교훈과 훈계는 차이가 있습니다.
교훈은 예방적 차원이라면 훈계는 치료적 면이 있습니다.
자녀가 바르게 살아가도록 교훈을 주어도 그 가르침 대로 살지 못하고
실수하고 옆길로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훈계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의 교훈과 훈계란 부모의 철학이나 신조는 아닙니다.
자녀 교육의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이 있습니다.
부모의 잔소리로는 자녀의 인생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의 교훈과 훈계는 세속적 교육 방식과 구별됩니다.
교육의 주도권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녀들 스스로가 주님의 인도와 통제 가운데 들어갈 수 있도록
부모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불완전한 틀 속으로 자녀를 집어넣으려고 할수록 위험할 뿐입니다.
특히 부모가 가진 편견, 잘못된 가치관, 세속적인 가치관을 심어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성공해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에 이겨야 한다.”라는
잘못된 세속적 가치관을 심어줄 수가 있습니다.
자녀의 삶을 바꿀 힘은 세속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확고한 부모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어떤 유산을 남겨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것은 못 주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을 물려주면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물려준다면 그 다음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씀이 아이의 인생을 책임져 주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라는 말씀은 부모에게 부담이 됩니다.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려면 먼저 부모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모 자신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어떤 말도 의미가 없습니다.
부모가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보여준 대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에게 가장 안 좋은 것은 이중성입니다. 부모가 말과 행동이 다를 때,
부모의 신앙과 삶이 괴리가 느껴질 때 자녀들은 혼란을 느낍니다.
가장 치명적으로 좋지 않은 교훈은 부모의 위선입니다.
부모가 위선을 보이기 시작하면 자녀들은 부모를 따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데 집에 가면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부모의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알아보는 일에 대단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상태가 어떤가를 자녀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자녀들은 정말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이 최고라는 아버지가 집에서 돈 이야기만 한다면 자녀들은 헷갈립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자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리가 없습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는 것보다 중요한 게 없습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만큼 자녀들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부모가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정성, 진실성은 보여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실수하고 연약한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였을 때
그것을 합리화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명령을 누구에게 주었습니까?
“아비들아” 일차적인 책임은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아버지는 일종의 제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비란 부모를 이야기합니다.
자녀에 대한 신앙 교육의 책임은 교회의 주일 학교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지내는 시간은 고작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됩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가 져야 합니다.
▲말씀이 가정에서 적용되고 경험되어야 하는 일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가정에 신앙교육은 입시에 뒷전으로 밀려 버렸습니다.
입시는 당면한 문제이고 신앙은 당면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잘못 가르칩니다.
신앙이 뒤로 밀리는 순간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신앙의 우선순위가 밀리고 나면 미래가 불투명해집니다.
그 대가는 생각보다 큽니다. 갈수록 자녀 교육이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혼탁하고 유해한 세상의 문화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만 괜찮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장성해서도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결혼 이후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세속적 문화에 떠밀려 가고 맙니다.
부모가 최선을 다하지만 자녀의 앞날을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이나 환경이 두려운 게 아닙니다.
자녀들에게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주고자 합니까?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모에게 주어진 거룩한 책임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들이 부모보다 믿음이 더 좋은 세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부모와 비슷한 믿음을 가진 세대로 갈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부모의 신앙에서 훨씬 더 떨어진 세대가 될 것인가?
다음 세대에서 신앙의 대가 끊겨 버린다면 기가 막힌 일입니다.
부모가 가진 재산의 대물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만
부모의 신앙의 대물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불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세대보다 다음 세대가 더 나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다음 세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그 삶을 부모세대가 살아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모가 할 일은, 자녀를 위해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부모의 한계를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최선을 다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시편 127편 1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자녀들을 지켜 주지 아니하시면
부모가 날마다 두 눈을 뜨고 깨어 있어도 헛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잘 자라게 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자녀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의 눈물과 기도가 자녀를 아름답게 세워 갑니다. 그것은 부모가 해야 할 책무입니다.
한 아이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아름답게 자라는 것은 축복입니다.
자녀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큽니다.
때로는 울기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날이 올 줄로 믿고 기도하고 사랑하며 돌봅니다.
시편 127편 3절에는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자녀는 이 세상에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선물이요 기업이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양육할 때
선한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아름답게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 자녀를 양육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부모를 성숙함으로 이끌기 원하십니다.
자녀를 통하여 부모들을 철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자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와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인간은 쉽게 성숙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하여,
속 썩이는 자녀들을 통하여 우리를 다듬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은 성숙에 이르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봅니다.
자녀가 빨리 변하지 않는 모습에서 결국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더디게 변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가정 수업이 신앙 수업입니다.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빚어가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가정 안에서 승리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