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단원에 한 번씩 총 5번의 논증과, 이어서 각 한 번씩 총 5번의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 비교 대상은, 선지자(천사), 모세, 대제사장, 율법, 믿음의 조상들 인데요,
이렇게 5 대상이 특별히 선정된 이유는,
그것들이 유대교가 하늘 같이 여기는, 중요한 신앙의 대상들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다섯 대상과 예수님은 아예 비교 불가능한 대상들이다. 그런데 너희는 왜 훨씬 크시고 높으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버리고,
옛 유대교로 돌아가려 하느냐? 배도하려 하느냐?
이것이 히브리서의 전체 흐름이요, 주제입니다.
*첫 번째 비교 대상은 선지자(1:1~2)이기도 하고, 또 천사(2:2)이기도 한데,
본 서에서 선지자나 천사는 같은 그룹으로 보시면 됩니다.
왜냐면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존재들인 셈이죠. 본 서에서는 역할이 같습니다.
그래서 위 도표를 머리에 그려 놓고는,
본문을 한 장씩 읽어나가면, 애매한 히브리서가 이해가 한층 쉬워집니다.
참고로, 신학자의 말에 의하면, 히브리서는 '고급 헬라어'로 쓰여졌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고전을 읽으면 이해가 쉽지 않고 까다롭듯이,
헬라어 자체로도 이해가 쉽지 않은 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읽어도, 사실은 애매하고, 많은 해설과 해석이 필요한 책입니다.
그냥 성경 자체로만 읽는다면, 이해가 아주 힘들고.. 반드시 해석과 해설이 필요한 책입니다.
▲ '안식'이라는 단어가 생소합니다.
그런데 본문 히4장은, 주제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4:11)' 입니다.
위 도표에 의하면, 히브리서에 다섯 주제가 있는데,
그 범주를 벗어나는 또 다른 논증인데요, 쉽게 말해서 '삽입장(소주제)' 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히브리서의 전체 주제가 '배도하지 말라,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라'인데,
저자가 4장에서 덧붙여 권면하는 것은,
배도하면, 즉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떠나면 '삶에 안식이 없어진다' 입니다.
그런데 제 입장에서 생소하고 낯선 것은,
신약의 여러 다른 곳에서는 '구원, 천국, 영생' 이런 표현을 씁니다.
즉 '안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안식'(카타파우시스)이란 말은 오직 히브리서 여기에만 나옵니다.
'그러면 구원 못 받는다' 또는 '천국 못 들어 간다, 영생 못 얻는다' 라는 익숙한 표현을 하지 않고,
왜 '안식에 못 들어간다,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런 생뚱 맞은, 낯선 표현을 쓰고 있을까요? 주1)
그 이유를 추측해 보건데,
'지금 수신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핍박으로 인해 안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앞서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히2:14~15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하심이니’
이 말씀은 '당시 성도들이 핍박으로 인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런 분위기의 연장 선상에서
저자는 본 장에서 '예수 믿는 것은 안식하는 것이다'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데, 4:1~11
만약 자기 삶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또는 핍박을 두려워하거나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지 안식이 없으면.. 그것은 제대로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것이란 뜻이죠.
정리하면 '너희가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너희에게는 안식이 없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으면, (금생과 내세에) 안식하게 된다'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4:1~11절로, 4장에서 가장 큰 주제입니다. 주2)
또 한 가지 이유는, 여러분들이 지금의 위험을 피하고자, 지금의 핍박의 위기에서 안전(안식)을 찾고자
그리스도를 떠나서 과거로 돌아가려 하는데, 거기는 안식이 정말 없다는 것입니다.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다는 거죠. 일종의 환란통과설입니다. 환란 속에서의 안식을 누리자는 거죠!
어떤 신학자는 성경에는 '구원'을 의미하는 단어가 약 60가지가 나온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안식'도 .. 결국은 '구원'을 의미하는 또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안식'에 관련된 본문 구절 해석
1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여기서 '안식'은 출애굽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이죠. 안식이나 구원에는 '이미 아직 already not yet' 의 개념이 적용되며,
이는 현재적 구원과 미래적 안식과 구원을 모두 포함합니다.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자는 과거 출애굽 1세대를 상기시킵니다.
그처럼 너희도 안식(구원, 천국)에 못 들어갈 수도 있다는 거죠. 배도하게 되면!
그런데 여기서 '안식'은 꼭 미래 천국 뿐만 아니라, 현재 천국의 안식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입니다.
2절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역시 출애굽 1세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진정 믿지 않았고, 애굽으로 되돌아가자 했으므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감을 뜻합니다.
그 안식은 세상을 창조할 (창1장) 때부터, 하나님이 안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출애굽에 빗대어 보면, 당시 이스라엘은 광야와 가나안이라는 두 가지 삶이 있었습니다. 광야의 특징은 '방황'이며, 가나안의 특징은 '안식,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온전히 믿으면, 안식의 복이 현재천국 가운데서 주어지는데,
그 특징은 '안식, 평안'입니다.
그럼 오늘 나는 '방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안식,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만약 '방황'하고 있다면,
나는 지금 광야 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가나안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3절 표현에 의하면 '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즐기시는 안식에
그리스도인들이함께 동참하게 됨을 뜻하기도 합니다.
4절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하나님이 쉬셨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일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상태에 들어가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섭리 가운데 인간을 구속하시고 유지하시며 통치하시는 일을 행하십니다(요5:17). 본절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르바 던은「안식」 책에서 진정한 안식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안식이란 일하는 것을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걱정과 근심을 그치는 것이다”
안식은 단지 일을 하지 않거나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염려, 근심이 예수님께 맡겨지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맡겨져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 평안은 죽음까지도 초월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진 후에는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수21:44, 22:4)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린 안식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완전한 안식에 대한 상징, 예표로서 진정한 안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입니다.
처음 '예수'(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하였으나 *여호수아 = 예수아 = 예수 나중의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심을 암시합니다.
9절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구약의 예수(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 정복이 완전한 안식이 아니라는 뜻이죠. 본절은 앞에서 언급된 내용에 대한 결론으로 6a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다'
는 말씀과 병행을 이룹니다. 반복되었죠. 미래적 신약의 안식이 아직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10절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누리게 된 안식의 시제성은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현재 우리는 안식을 누리고 있으며, 장차 죽어서 완전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 구절의 '쉰다'는 의미입니다. 아무 일도 안 한다는 뜻이 아니라,
불안, 초조, 강박, 조급, 위험이 없고.. 대신에 안정, 평안, 안전, 행복의 상태를 뜻합니다.
11절,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열심히 믿어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본 장의 제목을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고 정했습니다.
본 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로 제가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고,
여기에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3절'
기독교 신앙에는 이렇게 언제나 양면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쪽 면만 이해하는, 부분적 이해에 빠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수여해 주시는 안식이 있고,
-또한 우리가 힘써 안식에 들어가야 하는 면의.. 양면성이 있는 것입니다.
저자가 본문에서 '구원'을 '안식'으로 표현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 합니다.
내가 구원은 받았는데, 불안하게 살면, 안식이 없으면,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구원은 받았는데, 내 죄의 결과들로 인해 늘 시달리면,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평안, 안정, 쉼)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되는데,
이는 배도하지 않고, 주님을 신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일을 하루에 10시간씩 열심히 하면서도 쉬는 것입니다. 일이 휴식인 것입니다.
(일을 안 해 보십시오. 거기엔 쉼이 없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1 본절은 6절과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 저자는 본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한 것을 경계로 삼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함을 권면합니다. 그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적용 '안식'을 사실 우리는 매일 누리는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밤에 자는 수면입니다. 하루에 천금같은 24시간 중에, 약 1/3에 해당하는 오랜 시간
우리가 잠을 자면서 보내는 것은 <언젠가 인생에 영원한 잠(안식)이 있다>는 것을 매일 일깨워 주심입니다.
또한 매일 천금같은 소중한 날들 중에서, 우리가 안식일로 하루 쉰다는 것은 <언젠가 그 소중한 너의 직업도 중단할 날이 온다>는 것을 미리 미리 평소에 연습하고 살아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사실은 모두 다 '전세'에 사는 것입니다.
'내 집 마련' 했다고 하지만, 그것도 다 길면 50년 전세로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전월세 사시는 분들도, 집 때문에 불안해 하지 마시고, 안식을 누리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 '안식'을 누리며 감사히 살면서도
동시에 '영원한 안식'을 내다보는 믿음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히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믿음을 화합지 않았다는 뜻은, 믿음대로 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번 세네갈 선교현장에서 만난 사역자들의 모습에서 안식을 보았습니다.
세네갈에서 30년 동안 사역하고 계시는 백원경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에게 세네갈을 떠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왜 없었겠느냐’고 대답을 하면서
“자녀들이 미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고 영주권이 있어서
언제든지 미국으로 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곳에 있으라고 하시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것이 가장 마음이 편합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열악한 지역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마음의 안식이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그의 나이 55세 때 비로소 안식을 발견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신앙론]이란 글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신앙생활을 했지만, 10대 때 신앙을 떠나 55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주님께 돌아왔다.
나의 지나간 55년간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 최초의 15년 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나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했다.
안식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내가 18세 되던 때, 한 친구가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말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의 종교, 가족의 종교인 기독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심지어 종교는 속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나이 55세, 이제 나는 내가 버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온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안식'의 헬라어 '카타파우신'은 출애굽 세대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다(신12:9-10).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대인 사이에서 이 안식의 개념은 주로 회당에서의 가르침과 토론을 통해 형성된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시95:11의 '내 안식'은 본절에서 종말론적인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택한 백성들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의 안식을 의미한다(요14:1-4).
한편 '약속'(에팡겔리아스)이라 함은 '안식'에 대한 약속을 말한다. 출애굽한 제1세대는 죽었으나 제2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측면에서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저자는 지역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약속의 성취로 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1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안식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이행되지 않았으나 그 약속은 변치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계속되어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되었다(1:14;6:12,17;9:15).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자는 비록 안식이 약속되었을지라도 그 약속을 상실한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하나님의 좋은 소식은 가데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졌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그 언약을 잘 지키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복된 소식을 전해들었다(출19:3-6; 23:20-33). 이와 동일하게 당시 수신자들도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즉 안식에 대한 약속은 동일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화합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전혀 유익하지 못했다.
'믿음'의 헬라어 '피스테이'(*)는 본서에서 '순종'과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3:18,19). 따라서 '믿음'은 정적인 신앙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동적이며 실천적인 신앙임을 시사한다.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고 밝히고 있다.
'들어가는도다’ 이 단어를 근거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시기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에이세르코메다'가 현재형으로 이미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미래에 보장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2)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현재이나 그 완성은 미래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의 완성이 미래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에 누리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안식'(카타파우신)은 시95:11의 '내 안식'(카타파우시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안식'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즐기시는 안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절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즐기시는 안식에 그리스도인들이함께 동참하게 됨을 시사한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이 구절은 시95:11의 인용이다(3:1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받은 하나님의 안식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하나님의 길을 의도적으로 거역한 결과이다. 그들이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안식이 폐지되었거나 혹은 안식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아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 세상 창조 때 완성된 하나님의 안식은 창2:2을 암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안식이 창세 이후로 지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든 이가 참여해서 즐길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
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저자는 본절에서 창2:2을 인용하면서(출20:11;31:17) '어디 이렇게'(푸 후토스)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당시 성경에 장, 절의 구별이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인 출처를 밝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 어느곳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저자는 창2:1-3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그의 안식을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 자신이 행하신 일의 완성과 만족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일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상태에 들어가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섭리 가운데 인간을 구속하시고 유지하시며 통치하시는 일을 행하신다(요5:17). 본절에서 저자가 인용문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이 미래에 인간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 이래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본절은 3절에서 인용한 시95:11의 반복(또 다시)으로서 저자는 이 반복된 인용을 통해서 창조 이후에 취하신 '하나님의 안식'과 '구원받은 인간에게 약속된 안식'을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안식에 대한 약속의 특성을 설명하여 수신자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한다. 그래서 본절에서는 시95:11a에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가 생략되어 있다.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본절은 앞에서 진술한 내용의 요약이다.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나 하나님께 순종하며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식에 들어가는 일이 남아 있다.
'남아 있거니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레이페타이'는 '뒤에 남겨두다'라는 의미로(9절) 설사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유효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들은 성령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하는 자들이다(3:7).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본절은 3:16-18과 4:2에 대한 요약이다.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이란 시95:8-11에서 언급된 출애굽 세대를 가리킨다(민13:26;14:9). 출애굽 세대들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민14:11,12;21-23). '순종치 아니함'이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시사한다(11절, 3:10, 롬11:30).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한편 '다윗의 글에'는 인용문인 시 95편의 저자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편의 저자 문제가 아니라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본절은 시 95:7b, 8a의 인용으로 그초점은 '오늘날'에 있다. '오늘날'이라 함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폐지된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유효함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절은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과거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현재에도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성취되는 종말론적인 것임을 나타낸다.
그러기에 저자는 본절의 인용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행했던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권면한다.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안식'의 개념은 가나안 땅의 정착을 의미했다(신3:20, 12:9, 25:19, 수1:13). 그래서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진 후에는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나타난다(수21:44, 22:4).
그러나 본절에서는 구약의 여호수아를 통한 '가나안에 들어감'이라는 전통적인 안식과 시95편에서의 '내 안식'사이에 차이점이 발생한다.
전통적인 안식의 개념인 가나안에서의 정착은 진정한 의미의 안식에 대한 성취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실체인 다른 안식을 상징한다.
만일 여호수아에 의해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시95편에서 안식에 대한 새로운 약속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린 안식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완전한 안식에 대한 상징으로서 진정한 안식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이다.
한편 '여호수아'(예수아)라는 명칭은 '예수'라는 헬라식 발음을 히브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상관 관계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 처음 '예수'(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하였으나 나중의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심을 암시한다.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본절은 앞에서 언급된 내용에 대한 결론으로 6a절과 구조적으로 병행을 이룬다.
결국 본절은 6절에서 내려진 결론을 다시 반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에 사용된 '안식'의 헬라어 '삽바티스모스'의 의미에 대한 견해는 세가지이다.
1)혹자는 이것이 영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역적이며 세상적인 의미의 안식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혹자는 '삽바티스모스'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완수하고 그곳에 정착해서 누리는 안식을 의미할 수 있으나(신25:19),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영적인 의미의 완전한 안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3)혹자는 이것이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안식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삽바티스모스'를 '축하한다'라는 뜻의 동사 '삽바티제인'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안식'이라는 의미보다, 미래에 누릴 '안식하는 즐거움'을 강조한다.
세 가지 중 1)의 견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종말론적 의미로서의 영적인 안식을 강조하는 본서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타당치 않으며 그외 나머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따라서 '삽바티스모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영적인 의미의 안식으로서(마11:28-30) 그 안식이 기쁘고 즐거운 것임을 나타낸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로 해석한다. 2)혹자는 '그리스도인들'로 해석한다. 이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장의 전후 문맥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들어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셀돈'은 부정 과거 분사이나 일반적인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형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안식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누리게 된 안식의 시제성은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안식'은 안식일의 주인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하늘나라에서온전하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안식을 누리고 있으나 아직 완전한 안식을 누린 것은 아니다. 완전한 안식은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힘쓸지니'의 헬라어 '스푸다소멘'은 '재촉하다', '열심히 노력하다'라는 의미로 의지를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지적인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3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본절은 6절과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을 암시한다(3:17,18).
저자는 본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한 것을 경계로 삼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함을 권면한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앞에서 인용된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 말씀 전체를 가리킨다.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는 표현은 그 '말씀'이 '인격성'과 '역동성'을 지녀서 행위를 동반함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이들에게는 경고와 심판을 행하게 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약속된 말씀을 성취케 하는 말씀이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 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수신자들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지닌 말씀으로서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한다.
그 말씀은 '검'과 같아서 하나님의 음성에 계속 불순종할 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거 역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아말렉과 가나안인들의 '검'에 패배(敗北)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민14:43-45).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악독(롬1:29) 등의 온갖 죄악을 예리하게 심판하는 '검'이 된다.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를 '큰 대제사장'(아르키에레아 메간)으로 지칭하고 있다. '큰 대제사장'은 '대제사장'에 '큰'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으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우월함을 나타낸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돕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58히 나아갈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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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사복음서나 사도행전에 '안식일'이 나오지만, 그것은 토요일을 뜻하는 의미고요,
'안식'은 그야말로 평온함, 안정감, 쉼을 뜻하는데,
'구원'을 의미하는 '안식'이란 말은, 본문 히4장에 6번 외에는 신약에 나오지 않습니다.
(행7:49에 한 번 나오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이지, 우리 성도의 안식이 아닙니다)
왜 저자는, 낯설고 생소한 개념인 '안식'을, 히4장에 쓰는 것일까요?구원,영생이란 말이 이해가 쉬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