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히6장, 성숙하지 못하면, 한 번 비췸을 받고도 타락한다

LNCK 2022. 8. 9. 16:37

◈성숙하지 못하면, 한 번 비췸을 받고도 타락한다       히6장      여러 설교 정리

 

히6장 본문은, 히4:14~8:5절까지 이르는 “인간 대제사장과 그리스도 대제사장”이라는

히브리서 5대 논증 가운데 포함된 본문입니다.

 

<히6장의 개요>

 

1~3절,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라  

4~8절, 신앙이 정체되면, 한 번 비췸을 받고도 타락, 배도할 수 있다

9~20절,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오래참아 약속을 받으라

(그래서 너희가 구원받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이다! :20)

 

 

◑해석 및 적용

 

▲1~3절, 신앙이 더욱 성숙해져라  (안 그러면 배도한다 :4~6)

 

로마서에 보면

롬1~4장은 '칭의'로서의 구원

롬5~8장은 '성화'로서의 구원, '영화'로서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칭의 구원’만 강조합니다.

‘칭의’만 받으면, 구원을 100% 다 받은 줄로 압니다.

그것은 롬1~4장만 인정하고, 롬5~8장은 무시하는 것입니다. ☞관련글 보기

그래서 본문은 칭의 받은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완전(성숙)으로 나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2절,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이 말은,

'완전'의 헬라어 '텔레이오테스'는 '성숙'이라는 의미입니다. 완전하라의 의미 (강추)

본문 히6장의 키워드는 '완전(또는 성숙)'입니다.

 

3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이것'은 '완전한 데 나아가는 것'(2절)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곧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6:20, 2:10(창시자, 선구자 click)

 

칭의를 받은 후에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성도와,

칭의에 계속 머물러 있는 성도는 7~8절에 이렇게 대조되어 나옵니다.

 

7절,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성숙한 성도)

8절,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성장이 정지된 자)

 

신앙 성숙이 중요한 이유는,

이어서 4~8절에 나오는 배도의 경고는

‘믿음이 온전해지지 못한 = 믿음이 성숙해지지 못한 = 믿음으로 칭의 받은 후에 머물러 있는’

신자들에게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쓰였던 비슷한 시기에, 베드로가 그 당시 흩어져 있던 교인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성숙에 관한 주제였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끝이 아니다.. 믿음이 있으면 덕이 있어야 돼요!  (벧후1:5~8)

덕이란 일종의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행실이지요.

 

근데 그 덕만 세우면 끝이 아니에요. 바른 지식이 필요해요. 바른지식을 알아야 돼요.

이게 점점 신앙과 믿음이 발전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지식의 절제가 필요하다..

그 다음에는 인내를..

그 다음에는 경건을..

그 다음에는 형제 우애를..

이렇게 믿음을 가진 신앙인은, 계속 성숙해 나가는 거에요.

믿음(칭의)을 가졌으니 그것을 끝! 이 결코 아닙니다. ‘성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 성숙’ 관련글

   

6:1  죽은  행실의  회개  / 잭 푸닌

 

6:1~2   걸음씩 온전으로   P1

 

6:2  더 성숙으로 나아갑니다

 

6:2  회개도 점진적입니다

  

6:4~6  복음 들은 사람의 책임    2 / Spurgeon

 

완전하라의 의미 (강추)

 

 

▲4~8절, 한 번 비췸을 받고도 타락(배도)할 수 있다

 

히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진정 회개하고 회심한 참 성도는, 보통은 ‘성도의 견인’이 적용되어서,

영원히 타락,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은 강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경우에만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이 적용됩니다.

신학적으로는 '성도의 견인'이라 부르죠.

 

그렇지만 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있듯이,

히6:4~6절처럼, 한 번 진정 구원 받았으나 배도하고 타락하는 자들도,

그래서 구원을 놓쳐버리는 신자도... 극소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나 신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안 되고,  유연하게 이해함이 건전합니다)

 

문제는, 진정 회개하지 않고, 회심하지 않고.. 지적 동의로 예수 믿은 신자들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본문 히6:4~6절이, 정확하게 적용될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이 경우도 유연하게 적용해서, 타락했다가도 탕자처럼 다시 돌아올 신자도 일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본문이 적용되는 신자들은

-진정 회개하고 예수 믿은 극소수의 신자들과 아울러

-회개 없이 지적 동의로 예수 믿은 대다수의 신자들에게.. 이 경고의 말씀이 적용됩니다.

 

1) "한 번 빛을 받고" once enlightened

복음을 듣고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고서

감옥에만 안 가면 자기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던 사람이

생애 최초로 ‘나는 죄인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의 빛을 받고

자기에게는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have tasted of the heavenly gift

은사는 ‘선물’을 뜻하지요.

그러므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또는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3)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and were made partakers of the Holy Ghost

이것은 칭의 이상이고, 자기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로

성령님과 개인적으로 한 때 교제한 단계에 이르른 것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도 배도할 수 있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마음으로 부인하진 않겠지만,

-죽음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우상에게 절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순교할 수도 있고)

-마귀의 유혹 앞에서, 뻔히 죄인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범죄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믿음을 지킬 수도 있죠)

 

가룟유다도 은 30개의 유혹 앞에서, 예수님을 팔고 말았고,

발람 선지자도.. 뇌물을 받고서 이스라엘을 파멸시키려는 발락의 요청에 응하고 말았듯이

우리는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다윗도 밧세바의 유혹 앞에서 무너진 적이 있었듯이요.

 

예수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부인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행위로는 얼마든지 배도하고, 주님/성령님/하나님을 배신하고 등 돌릴 수 있다니까요.

딛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물론 행위로 기독교 신앙을 한 때 배신했다가, 즉 타락했다가

다시 회개하고, 돌이키고, 새사람이 될 수는 있습니다만

다윗 왕의 경우에서 보듯이 거기엔 죄의 결과 consequence of sin 이 따릅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 내내 환난과 고난과 어려움, 즉 가시와 엉겅퀴가 뒤따르게 되므로, 가급적 배도하지 말아야죠!

 

위 구절은, 성령 충만, 즉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을 말합니다.

상당히 성숙한 크리스천이지요.

그렇지만 히브리서 6장 본문은, 그래도 타락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비록 그 비율은 높지 않겠지만요.

 

4)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히6:5 And have tasted the good word of God

 

이것은 유아기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3)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성숙한 신자도.. 타락, 배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문은 경고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들도, 타락하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신앙 성장이 멈출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자전거가 달리지 않으면 쓰러지고 말듯이,

우리 신앙이 끊임없이 경주하지 않으면,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이라도, 유명한 말씀 강해자라 하더라도

(마음은 아니더라도) 행위로는 얼마든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마귀가 던지는 미끼를 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5)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tasted) the powers of the world to come 히6:5

 

여기서는 구약의 예언을 따라 오신 이스라엘의 메시야 예수님을 통해서 도래된

새로운 세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의 영생을 맛 보았다는 뜻이죠.

 

6절,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지금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서,

배도의 위험에 노출된 신자들입니다.

그래서 6절의 '타락한 자들'은 '배도자들'인 것이죠.

 

그들이 '다시 회개하게 할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죄'를 지은 것인데,

이것은 다름 아닌 배도를 의미하며, 본 서의 주제가 '배도하지 말라, 배도자에 대한 경고'인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범하는 도덕적 죄가 아닌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범하는 행위도 주님을 부인함으로써, 배도하는의 죄를 지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적어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는 아닌 것이죠. *약한 배도

이것은 영적인 죄, 예수님이 구세주 이심을 부인하는 수준의 배도의 죄를 뜻합니다. *강한 배도

 

사실 이들 중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거나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는 신자들도 있었을 것이며,

생전에 예수님을 직접 보았거나, 그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30년 전 당시 유월절에, 예수님 생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가담했죠.

그렇게 지금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지 말라는 거죠. 또 다시 부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부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고 외쳤던 사람들처럼,

한때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치 예수님이 구세주가 아닌 것처럼,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버리는 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30년 전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작연대 AD65년경

그런 못된 행위가 되어버리는 것이고, 그럴 경우에 '다시 회개케 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럼 문제는, 히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어떻게 타락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답은,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찬양했던 자들도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부르짖을 수 있다는 거죠.

 

그들이 다 과거에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 본' 자들입니다. 단, -단회적으로-

오늘날로치면, 부흥회 한 번 가서, 한 번 은혜받고도, 얼마든지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이것이 가짜 은혜는 아니었고 진짜 은혜 였지만,

그들은 그 이후로 '영적 성숙'을 이루지 못하고, '단회적, 반짝 은혜 받음'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죠.

 

본서에서 자주 상기시키고 있는, 출애굽 광야 1세대 조상들도

어마무시한 기적과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나서도.. 결국 광야에서 다 엎드러지고 말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죄를 짓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정도의 죄를 지어서는 안 되고 (이때는 돌이키면 되지요)

그러나 '관성의 법칙'이란 게 있습니다.

죄도 너무 많이 지으면, 너무 계속 지으면.. 관성의 법칙으로 더 멀리 튕겨나가기가 쉽지,

반대로 원심력을 회복하기란..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걸 본문에 '다시 돌이켜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했죠. :6

 

난해한 본 절을 전후 문맥과 연계해서 해석해 보면,

1~3절, 영적 성숙을 추구하라, 안 그러면 배도하게 된다.

4~6절, 배도가 계속되어서.. 아주 심한 경우는, 되돌아오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할 수도 있다.

7~8절, 그래서 평소에 좋은 밭이 되어서 비를 맞아 채소를 내어야지,

  영적 성장을 추구하지 못하고, 그래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하다 하다 안 되면 지옥에서 불살라진다! :8

 

그러나 9절을 보면,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대부분 배도자'들이 아니고, 그들은 일부 소수이고,

대부분은 하나님께 신실한 성도들, 영적 성숙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었음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9

   

△본 단락 추천 설교 

 

6:4~6  가짜 신부

 

6:4~8  히브리서의 교훈 (강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 있습니까? / 존 파이퍼 

 

 

▲9~20절,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오래참아 약속을 받으라

 

아래 절별 해석을 참조하세요.

 

6:2~15  오래  참아  약속을  받음

 

 

 

◑절별 해석 ........................................................................................................ 출처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저자는 5:11-14에서 언급한 신앙상의 권면 즉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

을 계속 권고한다.

 

그는 본절에서 더이상 독자들을 젖을 먹는 어린아이(5:13)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본절 하반절과 2절에 세개의 쌍으로 된 6가지 항목으로 상술되고 있다.

본서의 수신자들이 유대인 공동체였기에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유대교 관습과 연관된 것이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죽은 행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생명을 주지 못하는 구약 시대 율법의 제사 의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9:10).

2)혹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의 실제적인 모든 악행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나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타당하다. 또한 죽을 수밖에 없던 지난 날의 행실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인 '회개'는 세례 요한이나(마3:2), 예수 그리스도(막1:15)

그리고 그의 제자들(행2:38)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상의 것으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믿음은 참된 신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창15:6, 합2:4).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세례들과 안수와’ '세례들'은 기독교의 '세례'를 의미하지 않고(롬6:4, 엡4:5, 골2:12)

유대교의 일반적인 정결 예식을 의미한다(레11-15장).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죄 씻음을 받은 표징(表徵)을 세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으며(요3:25, 행19:1-5)

처음 믿는 개종자들은 이 '세례들'에 관한 교훈에 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안수'는 구약시대부터 널리 시행되던 관습이었다(민8:10, 신34:9).

신약시대에도 새로운 개종자(행8:17)나 전도사역자(딤전4:14)에게 종종 안수를 시행하기도 하였다(행8:17-19).

본절의 '안수'는 주로 개종자들에게 행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이것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관한 마지막 세번째 쌍으로서 미래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중대 관심사인 종말론적 교리이다.

(사26:19, 단7:9,10, 12:2, 눅20:37,38, 행23:8).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완전'의 헬라어 '텔레이오테타'는 '성숙'이라는 의미로

공동체 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개종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그러한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권한에 순종하기를 권면한다.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이것'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혹자는 '완전한 데 나아가는 것'(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자의 것은 이미 버리라고 저자가 권면했기 때문이다(1절).

그리스도인들이 완전 곧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1,7절).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한번 비췸을 얻고’ 저자는 4-8절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헛된 교훈에 미혹된 배도자(背道者)의 결말에 대해 경고한다.

본절과 다음절은 개종자들의 첫 신앙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그 표현이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해석하기에 다소 난점이 있다.

 

'비췸을 얻고’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리스도 자신을 암시하는 '세상의 빛'으로 묘사되고 있으며(요1:9, 고후4:4,6, 벧후1:19)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세상의 빛'(마5:14, 요8:12)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행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하늘의 은사'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성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 왜냐하면 '맛보고'의 헬라어 '규사메누스'가

문자적으로 '음식을 맛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혹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의 '하나님의 은사'는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어렵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선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을 가리킨다.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의미인 듯하다.

한편 '내세의 능력'은 미래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장차 올 세계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재에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

 

이와같이 4-5절에 걸쳐 진술된 영적인 체험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4, 5절에서 언급한 영적 체험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좋은 은사를 체험하였다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를 가리킨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다.

구약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알고 지은 고의적으로 배도한 본절의 '타락한 자들'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하여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자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것은 타락한 자들이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십자가 위에 못박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던 자들과 다를 것이 없음을 시사한다.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개역 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절과 다음 절이 앞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본절은 그리스도인의 장성함에 대한 비유로 사5:1 이하의 '포도원의 노래'와 내용 면에서 유사하다.

'땅'은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이며(마13:18-23)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등을 비유한 것이다(사44:3, 55:10).

 

밭을 가는 자가 열심을 다해 밭을 갈았을 때 밭이 그에 맞는 소출을 내면

밭을 가는 농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배도하지 아니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아갈 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본절은 배교자에 대한 비유이다. '가시와 엉겅퀴'는 창 3:17, 18의 내용과 연관된다.

창세기에서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야기된 저주의 산물이었다.

본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배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의 '마지막' 즉 결과는 불사름을 당하는 것이다.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공동번역)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이런 말을 하지만

여러분은 더 좋은 구원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저자는 4-8절에서 배도자들의 결국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엄숙한 경고를 하였으나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자신이 말한 그러한 배도자들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의 헬라어 '아가페토이'는 본서에서 오직 본절에서만 사용된 표현으로

수신자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어린 호칭이다.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구원에 가까운 것'의 헬라어 '에코메나 소테리아스'에서

'에코메나'는 '소유하다 have'라는 의미를 지닌 '에코'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수신자들이 구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수신자들은 배도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결코 배도자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구원받은 것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선행의 열매가 있었다(10절).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시키고 있다.

 

10 하나님이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수신자들의 행위를 기억하신다.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수신자들의 행위를 근거로 앞절에 언급된 확신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수신자들의 선행이 그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선행은 자신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고백되어지는 진실한 것임을 나타내준다.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저자는 '너희 각 사람' 즉 모든 사람이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 부지런하여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끄럼없는 삶

즉 믿음에서 난 선행을 행하며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고 있다.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는 '온전한 소망을 지니다'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참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롬8:24,25).

 

본절에서 소망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앞절에서는 '사랑'

그리고 12절에서는 믿음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세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종종 함께 쓰여졌다.

(10:22-24, 롬5:2-5, 고전13:13, 갈5:5,6, 골1:4,5, 살전1:3, 5:8, 벧전1:21,22).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균형잡힌 신앙생활에 위의 세 요소가 필수불가결함을 암시한다.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그리스도 도에 대해 초보자들은 말씀을 듣기에 게으르고 둔하여서 해석하기 어려웠다(5:11).

그러나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앞절에서 부지런하라고 권면하며

동시에 본절에서는 게으르지 아니하여 말씀을 잘 이해하고 계속 성장하여 나아가기를 권면한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란

13절의 아브라함과 같은 자들을 말한다.

그런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대해 오래참고 기다려

기업을 받은 자들이다.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3-15절의 아브라함에 관한 서술은 믿음의 모범으로서

12절의 '본받으라'는 권면에 대한 내용이다.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본절은 70인역의 창22:17을 다소 변형시킨 인용구이다.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과 인내에 대해

엄격한 시험을 거친 후에 약속에 대한 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창22:1,15-18).

약속의 성취는 이삭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마저도 제물로 바치려 하였다. 이것은 어떠한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그와 같은 믿음은 약속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였다.

 

'약속을 받았느니라'는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손자인 에서와 야곱의 출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것은 약속의 완전한 성취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보다 깊은 의미를 내다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본절은 '히나'('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 하나님께 맹세하신 목적을나타낸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이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13절과 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가리킨다.

 

'약속'은 모든 날 마지막에 나타난 말씀인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1:2),

하나님께서 '맹세'하여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통해 성취되었다(20절, 히5:6,10, 7:17,21,28, 시110:4)

 

이것은 성경의 단편적인 한 두 구절에서 유추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다(민23:19, 삼상15:29, 시89:35, 사31:2).

 

저자는 '앞에 있는 소망' 즉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구속의 소망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으로 인해 이중의 보장을 받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소망을 바라보고 삶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죄악을 피해가야 한다.

 

한편 '큰 안위'는 앞서 언급한 '두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오는 '용기'

혹은 '위로'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 즉 자신이 행하신 약속과 맹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현재 구원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인해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고 현재 지상의 삶 가운데서 위로를 받게 된다.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휘장'은 구약 시대의 성막 안에 있던 두 개의 방 즉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천을 가리킨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16: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들어가심으로(20절) 휘장은 찢어졌고(마27:51, 막15:38)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 자유롭게 지성소 즉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를 통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앞서 가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드로모스'는 본절에서와 같이 단수로 사용된 용례가

고전에서나 헬라 문헌에는 거의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어의 복수 형태인 '프로드로모이'는

주력 부대 앞에 나가있는 '첨병'이나(Herodotus, Polybius),

'주력 함대를 앞서 인도하는 배들'(Alciphron), '처음 익은 열매'(민13:20, 사28:4),

혹은 '전령'(Herodotus)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용례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프로드로모스'는 '선구자', 혹은 '선두주자'라는 의미를 지니며

동시에 누군가가 '프로드로모스'의 뒤를 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선구자(先驅者)로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직 수행을 위해

먼저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5:7-10).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셨으며 그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씻어 백성들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10:14).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구속을 힘입어 뒤따라

하나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는 확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