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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3장 히브리서의 마지막 결론

LNCK 2022. 8. 18. 06:31

 

◈히브리서의 마지막 결론        히13장        여러 설교 정리            히브리서 설교모음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5대 논증>의 맥락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선지자(천사)와 예수님   1~2장
-모세와 예수님                3~4장   
-대제사장과 예수님         5~7장
-율법과 새언약의 예수님 8~10장
-믿음의 조상들과 예수님 11~13장

이 5가지 논증에 모두 공통적으로 예수님이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선지자(천사)보다, 모세보다, 대제사장보다, 율법보다, 믿음의 조상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시고, 우월하신 분이시다는 거죠.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그렇지만 이 당연한 얘기를
2천년 전 당시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아직 잘 몰랐을 수도 있었죠.

왜냐면 당시에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못했고, 
구약 성경 두루마리를 각자가 갖고 있지도 못했고, (그저 회당에서 귀로 들었을 뿐)
또 유대교라는 구약 신앙 전통에 꽉 묶여서 살고 있었고,  
무엇보다 성육신하신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천년의 교회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예수가 지난 2천년 동안, 정경이 완성되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성경적으로 증명되었죠.

그 외에도, 
2천년이란 교회 역사의 시간 동안, 충분히 검증되고,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확인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신앙에 대한 큰 어려움이.. 사실 없다면 없습니다.  

그러나 수천년을 유대교 전통에 의한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 신앙 전통보다 얼마나 더 우월한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고 설명해 줄 필요는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히브리서 전체를 단 한 줄로 축약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13절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입니다.

 

◑적용 / 우리도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3

히브리서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예수님이 ‘유대교의 5대 자랑’보다 훨씬 더 뛰어나신 그리스도이시다..를
가르쳐 주려는 목적으로만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신학 강의가 아니라는 뜻이죠.

히브리서는 서두에서 마지막까지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따라가자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를 독려하고 있는데, 

이것이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그저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차원으로 끝냅니다. 
(이것은 출발일뿐 종착역이 아닙니다)

히브리서가 설교하는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따라가자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이 셋은 다 같은 의미

즉, 너희가 믿는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라,
머리로만 믿지 말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 그리스도를 뒤따르라..고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히브리서의 몇 군데에서 그 말씀을 계속 연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1) 히2:10 구원의 창시자 그리스도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2:10 

여기서 ‘창시자’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앞서 달려가신 분(선구자)’란 뜻입니다.   *앞 선, 달릴(몰) 구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요. 성경을 검색하면 수차례 나옵니다.
예수님이 어디 가시는 길에, 내 뒤를 졸졸 따라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어린애들입니까.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뒤따르라, 곧 제자도를 말씀하신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나처럼 살아라, 내가 가는 길을 너희도 가라’
그래서 예수님은 조금 뒤에는 ‘너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고도 하셨죠. 막10:38

히2:10절의 ‘구원의 창시자’는,                *아르케고스 : chief leader
옛날 개역에서는 “구원의 주”라고 번역했었죠.
   
2) 12: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주”가, 그 의미는 “선구자” 혹은 “창시자”입니다.   *2:10과 똑같은 '아르케고스'
앞서 우리 믿음의 ‘알파와 오메가’되시는 분이라고 설명했었습니다.      ☞ 히12장 
 
이 구절은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을 소개하는 11장의 결론적 적용입니다.
온갖 역경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믿음으로 살았던 조상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인내하며 달려가자는 권고입니다.
 
3) 히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앞서 가신”은 선구자(先驅者, forerunner)로 묘사됩니다.          *프로드로모스
헬라어는 2:10, 12:2절과 다르지만, 의미가 비슷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forerunner 로 번역했는데, ‘앞서 달려가신자’ 란 뜻입니다. 
 
그럼 왜 앞서 달려가셨을까요? 그 목적은
자기를 뒤따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종종 영화에서 보면, 장군이나 지휘관이 앞서 달려갑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 거죠.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 존경을 받았던 것은, 적진을 향하여 대열의 맨 앞에서 달려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하셨다는 거죠.
2:10절의 ‘구원의 창시자’도.. 앞서 가셨다는 뜻이고 (동시에 끝마치게 하시는 분도 됩니다)
12:2절의 ‘믿음의 주’라는 말도.. 앞서 가셨다는 뜻이고 (끝마치다는 온전케하다는 뜻도 되죠)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셨고, 믿음의 조상들보다 더 앞서 가신 분이십니다.
6:20절은 ‘앞서 달려가셨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구원의 길을,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여정으로 비유합니다.
예전에 지성소는 휘장으로 막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그 속에 먼저 들어가 자신을 제물로 드렸고,
이로써 이 휘장 가운데로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당당하게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서 가신 거죠.
 
4) 그리고 본문 13:13절 (아래에서 설명)

 

▲여기서 ‘앞서 가셨다’라는 말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1) 앞서 가셔서 ‘구원의 길’을 개척하셨다.. 라는 뜻도 되고요.
휘장을 찢으시고, 가운데로 지나가셔서 하나님 보좌 앞으로 우리가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하셨죠. 10:19~20
골고다 길에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2) 앞서 가셔서 우리 삶에 모범 model 을 보여주셨다는 뜻입니다. 
구원 받은 자의 삶의 모범을, 예수님이 친히 먼저 보여주셨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은, 
‘나를 본받으라’ 하신 것이며, ‘나의 삶과 인격과 성품을 본받으라, 내가 앞서 모범을 보였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1)을 많이 강조해 왔고
2)는 상당히 소홀히 해 왔습니다. 
2)는 ‘아예 따르기 불가능하다’ 라는 완벽주의적 관점을 가진 분들이 대세였습니다. *주로 장로교의 구원론

그런데 2)를 강조하는 분은, 대표적으로 잭 푸닌(인도의 설교자)입니다.  *맨 아래 '추천설교' 보세요
물론 그 외에도 많습니다. 

이들의 논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러만 오셨다면, 
공생에 3년 반이 필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단번에 1주일 만에 죽으실 수도 있었고, 
더 짧게는 목요일 밤에 잡히시고, 금요일 낮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주일에 부활하시고
이렇게 사나흘만 걸려도 1)의 목적을 달성하기엔 충분했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이 3년반이나 공생애를 사시고, 
제자들을 뽑아서 제자양육시키시고 하신 것은
‘(구원 받은 자의) 삶의 본’을 몸소 보여주기 위해서.. 라고 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삶의 목표를
1)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죽으신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2)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뒤따르는.. 그의 인격과 성품과 십자가까지 본받는 삶을 강조합니다. 

1)만 믿는 사람들은, 1)만 강조할 것이고
2)까지 믿는 사람들은, 2)까지 강조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2)까지 설교하며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히2:10, 6:20, 12:2절의 의미가 ‘예수를 본받으라’는 의미이고
히브리서 끝장인 본문 13:13절에서도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즉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자’고 선포하면서, 
히브리서를 대단원의 마무리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어째서인지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만 강조하지  1)
그의 삶을 뒤따라가자는 부분은 점점 도태되고 있습니다. 미혹이며 온전한 구원론이 아닙니다.  2)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가 되시는데 히12:2
오늘날 신자들은 ‘믿음의 주’로만 믿습니다. 

  

‘온전케 하시는 이’, 즉 성숙하게 하시는 분, 장성하게 하시는 분, 마치게 하시는 분으로서는
강조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구원론, 성화론이 취약한 것입니다. 불충분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뒤따라가자’는 논지는, 히브리서 기자 외에도
사도 베드로도 똑같이 강조했습니다. 사도요한도, 사도바울도 똑같이 강조했습니다. 성경의 강조입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 발자국을 따른다, 그 걸어가신 길을 뒤따른다’는 뜻인데,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을 뜻합니다.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어찌 즐거운 일 아닌가’ 라는 찬송을 많이 불렀는데,
바로 이 구절에서 나온 찬송입니다. 상당히 성경적인 찬송이었죠.

사도요한의 강조를 보겠습니다. 
요일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
단순하게 예수 따르기

    
사도바울의 강조를 보겠습니다.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 사도바울,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등 신약성경의 모든 기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예수님을 본받는' 믿음의 도리를 제쳐두고,

왜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두루 보아야 합니다.

 

▲똑같은 내용을, 히브리서 기자는 본 서신의 말미에 이렇게 전달합니다. 

히13: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영문’은.. 구약적 의미로는 ‘진 camp’을 의미합니다. 12지파가 광야에서 쳤던 ‘진’.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성문 밖, 예루살렘 밖은 신앙의 영역 밖으로 인식됩니다. 
이방인들의 세계나, 정결하지 못한 이들의 자리로 인식된다는 의미이죠. 

문둥병이 들면 성문 밖으로 나가 있었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면 바로 <세상>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영문 밖으로 가자는 권면은 결국 세상으로 나가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구약 유대교의 5대 자랑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에만 그치지 말고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속으로 나아가자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 뜻의 일환으로, 그 예를 15~16절에서는 이렇게 찬송과, 선행과 구제를 들고 있습니다.
찬송과 선행과 구제를 특별히 ‘제사’라고 표현했는데,
‘제사’라는 이 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의 제사에 빗대어 표현한 11~12절의 연장선입니다.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의 제사)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그럼 이렇게 영문 밖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신 분들의 예는, 누가 있을까요?

물론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 같은 순교자들이 계십니다. 그 외에도 많이 계시죠.

 

그런데 살아서 '순교의 삶'을 사셨던 분 중에는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장로님이 대표적이십니다.

 

이 두 분이 존경을 받는 것은, 무슨 사역의 큰 업적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큰 업적도 이루셨죠)

사역의 큰 업적을 이루신 분들은 많은데, 그렇다고 다 존경을 받는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분들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들의 사랑,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어린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떠 주는 것과 같은 사랑의 실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더 테레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더 테레사와 같은 사역 규모적 업적을 남긴 사람은 세상에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사랑의 정신, 긍휼의 실천, 인간애,

'나는 하루에 한 사람밖에 섬기지 못합니다' 하면서도, 그 한 사람에게 보여주었던 예수님의 사랑...

이런 그의 진심이 그를 마더 테레사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요즘 '진심'이란 말이 유행입니다만

 

우리 나라의 대기업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탁월한 경영능력으로 인하여 한 쪽으로는 존경을 받지만,

또 다른 한쪽으로는 'OOO 물러가라!'는 구호의 주인공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진심의 부족' 때문이라고 봅니다.

 

거대 기업의 지도자로서 직원 개개인에게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랑, 관심, 배려의 진심,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사회적 소외계층에 보일 수 있는 따뜻한 인간미, 도움의 손길의 진심!

이런 것은 거의 없고, 물론 기업 차원에서 무슨 기부금도 내고, 무슨 선행도 베풀고 하겠지만,

있어도 형식적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상시적으로 매일같이 흘러나오는 '따뜻함, 배려, 도움, 사랑..의 진심'

이런 것이 상당히 부족하기 때문에... 한 편으로는 존경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티들이 생기는 거죠.

 

기업인들은, 기업의 경영실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것이.. 사람들 눈에 뜨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따뜻함, 배려, 도움, 사랑..의 진심'등으로,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유한양행처럼요!

 

앞서 언급한 한경직 목사님, 장기려 장로님 두 분은,

그런 '따뜻함, 배려, 도움, 사랑..의 진심'이 있으셨습니다. 물론 겸손도 있으셨지요.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로부터 길이길이 존경을 받는 것이지,

그저 업적, 규모, 성취... 와 같은 외적인 면만으로는, 

후대에 존경을 받지도 못할 것이며,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예수님이 앞서 가신 길'도 아닌 것입니다!

 

▲관련글

 

2:10  선구자 그리스도

 

4:9  예수님이    가지셨던    삶의    자세    P2    / 잭    푸닌    

 
5:8~9      걸음씩    온전함으로    P2    /     푸닌

 

12:1~2  거룩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옵니다    5/16 잭 푸닌   

 

요일2:6  단순하게 예수 따르기

 

 




◑절별 해석 ..........................................................................................................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형제 사랑'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결 법전과 연결되는 것으로(레 19:18)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형제와 자매를 연결하여 연대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22, 23절, 2:11,12,17, 3:1,12, 10:19).

 

저자는 당시의 수신자들 사이에 신앙이 약해진 자들을 결속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다.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저자는 앞절에서 권면한 '형제 사랑'을 더 확대하여

'손님 대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손님 대접'에 관한 권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반영한 것이다(마 25:3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 여행과 숙식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복음 전도 사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행 21:4,7,16,17).

 

그러기에 손님 대접에 대한 권면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메시지였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였다(딤전3:2, 딛1:8, 벧전 4:8,9).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본문은 아브라함의 일을 암시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영접하고 대접하였을 때 세 손님은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에 대해 예언하였다(창 18:1-21).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본문에서 저자는 '형제 사랑'에서(1절) '손님 대접'으로(2절), '손님 대접'에서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에 대한 대접'으로 확대하고 있다.

당시 '갇힌 자들'은 심한 대우를 받아서 음식이나 의복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다면 그들은 감옥에서 굶주려 죽어야만 했다.

 

한편 '학대받는 자'는 신앙 때문에 악한 대우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11:36,37).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소외된 자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몸이 학대받는 것처럼 생각하여 그들과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10:32-34).

 

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침소'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테'는 성적인 정결(淨潔)과 함께 사용된 용어로

성생활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

성적인 범죄를 통해 침소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결혼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17절). 저자는 성적인 죄를 범하는 자에 대해 두 부류로 묘사한다.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돈에 대한 탐욕은 타인의 권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게 할 뿐 아니라

마음에 두 주인을 섬기게 하여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범죄하게 만든다(마6:24, 눅 16:13, 딤전 6:10).

 

그 결과 우상 숭배의 결과를 초래하기때문에 저자는 본절에서 현재 주어진 여건과 물질에 대해

만족할 것을 권면한다. 저자는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나님께서 돕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죽음의 위협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며 담대해질 수 있다(2:14,15).

한편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는 부정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대항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롬 8:31).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17절과 24절은 현재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반면에

본절의 '인도하던 자들(톤 해구메논)'은 신앙을 가르치며 지도하다가 죽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심지어 죽기까지 한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며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굳게 잡은 사실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따라야 한다.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다른 교훈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식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마신'은 9:10에서 사용된 '먹는 것'과 동일한 단어로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자들은 이러한 식물을 통한 의식이나 규례에 의해서 온전하여지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와 연관된

혼합주의적인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식물'은 육체에 제한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된 예법에 블과한 것이었다(9:10). 그러기에 식물과 의식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유익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고 단지 외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뿐양심을 정결케 할 수 없다(9:13,14).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익과 풍성함은 식물과

그에 따른 의식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2:9)과

기도를 통해서(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온전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이나 그 의식에 의해서 온전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과 그에 따른 규례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도래할 때까지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혹자는 '제단'의 헬라어 '뒤시아스테리온'이 문자적인 희생 제단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희생 제사'에 대한 환유(換喩)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8:1-5, 9:11-14,24-26, 10:11,12).

 

이것은 은유적으로 영문 밖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암시한다(12절, 12:2).

십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은혜를 유지하는 원천이 된다.

 

그러기에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이나 그에 따른 규례에 의해서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희생 제사에 의해서 거룩해지며(12절, 9:14, 10:10,14)

 

그 제단은 레위기에 규정된 법을 따르는 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으며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6:5).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제사는 구약에서 규정한 제사 규례나 정결 규례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며 온전케하는 것이다.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 갔으며(레 16:14,15)

희생 제물의 시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렸다(레 16:27).

한편 '영문 밖에서'라 함은 다음 절에서 언급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한다.

구약의 성소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시하는 제단에서 먹을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며

여전히 구약의 제의에 따라 사는 자들은 골고다에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된

속죄 사역의 결과인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없다.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저자는 본절에서 '영문 밖에서' 희생 제물을 불살라 버린 것과(11절)

성문 밖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고난을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성문 밖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속죄일의 속죄제를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의 고난이 대제사장적인 속죄 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조건임을 시사한다(10:12).

 

2)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예수께서 정죄받으심은 물론 백성들에 의해 배척당하심과

급기야 처형 당하심을 시사한다.

 

한편 '거룩케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세'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가 제시하지 못했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시사하는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거룩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이것은 유대교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영문'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영문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12절)

거룩한 영역에서 제외 되었으며 부정하고 부끄러운 것로 이해되었다(레 13:46, 민5:2-4, 신 23:11, 눅 6:22).

 

그러나 전에 거룩하던 영문은 부정하여졌고, 전에 부정하던 영문 밖은 거룩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아직도 옛 언약과 유대교의 범주인 영문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새 언약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 능욕을 지고’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능욕을 지는 일' 즉 유대교를 떠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 곧 십자가 상의 죽음은 이방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신 21:22,23, 갈 3:13).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그와 동일하게 수치와 치욕으로 이해된

십자가를 짐으로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복음서의 제자도와 동일하다(마10:37,38, 막 8:34-38).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에 나아가기 위해서 '능욕'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는 이 세상이나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하늘의 도성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인 도성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장차 올 도성은

사라질 도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11:10,16)

곧 하늘의 도성이다. 그들은 하늘에 기록된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오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예수로 말미암아'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 옛 언약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희생제사가 단번에 드려졌으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미하는 제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하게 열납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항상'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계속적으로 경험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확신할 때 이루어진다.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옅매니라’

본문은 호 14:2(LXX)의 인용으로 '찬미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다.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사용하는 '말'에 대한 셈어적인 표현이다(잠 10:31, 12:14, 13:2, 18:20).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으로서(LXX 시 49:23)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있도록 하는 조건이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저자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찬미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역설한다.

 

'선을 행함'의 헬라어 '유포이이아스'는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눠 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스'는 돈이나 물건은 물론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누는 관용을 가리킨다.

 

타인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없는 찬미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본절의 '인도하는 자'는 7절의 '죽은 지도자'와는 달리 현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지도자들에 대해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7,24절)

당시 배교의 위험과 이해 관계에 직면하여 지도자들을 잘 따르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2:1-4, 3:7-12, 5:11-6:12, 10:23-29, 12:12-17,25-29).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본문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존경을 받고 복종함을 받는 근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부여하신 목회적 권위와 책임감이다.

 

'경성하기를'의 헬라어 '아그뤼프누신'(*)은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목자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종말론적인 '깨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그들의 영적 생활과 복리를 위해서(10:39) 날마다 깨어 있어 돌보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권위가 있다.

 

한편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는 지도자들의 책임을 나타낸다.

참된 지도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책임 이행에 대한 답을 요구하실 때

응답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 교사들과 같이 이상한 다른 가르침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인을 돌보고 양육한다.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본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도자들을 섬기고 순종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서

경성(警醒)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불순종과 고집으로 인해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근심스러운 일이 된다면 그 지도자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1인칭 복수인 '우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우리'가 순수한 복수로 저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 '우리'가 서간체 복수로 저자 자신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1인칭 단수인 '내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도자로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수신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문 즉 저자가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이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더럽혀진 양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져야 한다(9:14).

저자가 본절에서 자신의 '선한 양심'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방에 대한 방어책으로, 저자 자신이 지도자로서 선한 행동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를 잘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

 

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에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재방문을 위한 기도 요청은 저자와 수신자들간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었으며

또한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를 방문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방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저자의 투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23절에서 디모데가 감옥에서 나오면 함께 방문할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에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확실히 있으나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본문은 송영이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본문은 사 63:11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를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 본문은 모세에 대한 진술이다. 저자는 모세에 대한 진술인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여

미디안의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부터 이끌어 낸 모세를 유형론적으로 해석하여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

 

저자는 예수께 '큰 목자'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 사 63:11에서 모세에게 칭한

'양 무리의 목자'와 대조를 이루게하며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보다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께서 더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영원한 언약의 피로’ 본문은 슥 9:11(LXX)의 영향을 받았다.

'언약의 피'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약의 희생 제사임을 시사하며(9:20, 출 24:8)

'영원한'은 예수의 속죄 사역이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1:8, 5:6,9, 6:20)

 

예수의 사역과 희생은 영원한 언약을 이루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러한 영원한 언약은 새 언약과 동일한 것으로 옛 언약올 대신하였다.

 

본문은 다음에 언급될 예수의 부활과 연결된 것으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신 영원한 언약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나타낸다(9:20).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본문은 본서 내에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구절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비준(批准)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본문은 앞서 언급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와 상호 보완적이다.

'즐거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12:2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15,16절) 부름을 받은 존재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중재자이시며

새 언약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중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형제들아'와 '용납하라'는 말은 저자가 앞서 기술한 배교나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격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

그리고 지도자와 수신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훈계와 비교되어 부드럽고 애정이 서려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진술한 내용을 '권면의 말'이라고 정의함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진술한 것이 책망보다는 격려차 위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다시 한번 본서의 내용에 주목해 줄 것을 암시하고 있다.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부른 것은

디모데가 수신자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서로 교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놓인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렐뤼메논'은 완료 시상으로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사역의 임무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아폴렐뤼메논'이 전자의 견해처럼 사용되었을 경우는 목적어를 동반하나

본절에서는 목적어를 동반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아폴렐뤼메논'이라는 단어는 흔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모데가 언제 어디에 있는 감옥에 갇혔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먼저 알고 전하면서

디모데가 속히 올 경우 함께 방문할 것을 밝히고 있다.

 

24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