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의 마지막 결론 히13장 여러 설교 정리 히브리서 설교모음
지금까지 히브리서를 <5대 논증>의 맥락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선지자(천사)와 예수님 1~2장
-모세와 예수님 3~4장
-대제사장과 예수님 5~7장
-율법과 새언약의 예수님 8~10장
-믿음의 조상들과 예수님 11~13장
이 5가지 논증에 모두 공통적으로 예수님이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선지자(천사)보다, 모세보다, 대제사장보다, 율법보다, 믿음의 조상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시고, 우월하신 분이시다는 거죠.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그렇지만 이 당연한 얘기를
2천년 전 당시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아직 잘 몰랐을 수도 있었죠.
왜냐면 당시에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못했고,
구약 성경 두루마리를 각자가 갖고 있지도 못했고, (그저 회당에서 귀로 들었을 뿐)
또 유대교라는 구약 신앙 전통에 꽉 묶여서 살고 있었고,
무엇보다 성육신하신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천년의 교회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예수가 지난 2천년 동안, 정경이 완성되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성경적으로 증명되었죠.
그 외에도,
2천년이란 교회 역사의 시간 동안, 충분히 검증되고,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확인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신앙에 대한 큰 어려움이.. 사실 없다면 없습니다.
그러나 수천년을 유대교 전통에 의한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 신앙 전통보다 얼마나 더 우월한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고 설명해 줄 필요는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히브리서 전체를 단 한 줄로 축약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13절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입니다.
◑적용 / 우리도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3
히브리서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예수님이 ‘유대교의 5대 자랑’보다 훨씬 더 뛰어나신 그리스도이시다..를
가르쳐 주려는 목적으로만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신학 강의가 아니라는 뜻이죠.
히브리서는 서두에서 마지막까지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따라가자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를 독려하고 있는데,
이것이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그저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차원으로 끝냅니다.
(이것은 출발일뿐 종착역이 아닙니다)
히브리서가 설교하는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따라가자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이 셋은 다 같은 의미
즉, 너희가 믿는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라,
머리로만 믿지 말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 그리스도를 뒤따르라..고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히브리서의 몇 군데에서 그 말씀을 계속 연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1) 히2:10 구원의 창시자 그리스도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2:10
여기서 ‘창시자’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앞서 달려가신 분(선구자)’란 뜻입니다. *앞 선, 달릴(몰) 구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요. 성경을 검색하면 수차례 나옵니다.
예수님이 어디 가시는 길에, 내 뒤를 졸졸 따라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어린애들입니까.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뒤따르라, 곧 제자도를 말씀하신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나처럼 살아라, 내가 가는 길을 너희도 가라’
그래서 예수님은 조금 뒤에는 ‘너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고도 하셨죠. 막10:38
히2:10절의 ‘구원의 창시자’는, *아르케고스 : chief leader
옛날 개역에서는 “구원의 주”라고 번역했었죠.
2)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주”가, 그 의미는 “선구자” 혹은 “창시자”입니다. *2:10과 똑같은 '아르케고스'
앞서 우리 믿음의 ‘알파와 오메가’되시는 분이라고 설명했었습니다. ☞ 히12장
이 구절은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을 소개하는 11장의 결론적 적용입니다.
온갖 역경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믿음으로 살았던 조상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인내하며 달려가자는 권고입니다.
3) 히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앞서 가신”은 선구자(先驅者, forerunner)로 묘사됩니다. *프로드로모스
헬라어는 2:10, 12:2절과 다르지만, 의미가 비슷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forerunner 로 번역했는데, ‘앞서 달려가신자’ 란 뜻입니다.
그럼 왜 앞서 달려가셨을까요? 그 목적은
자기를 뒤따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종종 영화에서 보면, 장군이나 지휘관이 앞서 달려갑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 거죠.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 존경을 받았던 것은, 적진을 향하여 대열의 맨 앞에서 달려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하셨다는 거죠.
2:10절의 ‘구원의 창시자’도.. 앞서 가셨다는 뜻이고 (동시에 끝마치게 하시는 분도 됩니다)
12:2절의 ‘믿음의 주’라는 말도.. 앞서 가셨다는 뜻이고 (끝마치다는 온전케하다는 뜻도 되죠)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셨고, 믿음의 조상들보다 더 앞서 가신 분이십니다.
6:20절은 ‘앞서 달려가셨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구원의 길을,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여정으로 비유합니다.
예전에 지성소는 휘장으로 막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그 속에 먼저 들어가 자신을 제물로 드렸고,
이로써 이 휘장 가운데로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당당하게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서 가신 거죠.
4) 그리고 본문 13:13절 (아래에서 설명)
▲여기서 ‘앞서 가셨다’라는 말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1) 앞서 가셔서 ‘구원의 길’을 개척하셨다.. 라는 뜻도 되고요.
휘장을 찢으시고, 가운데로 지나가셔서 하나님 보좌 앞으로 우리가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하셨죠. 10:19~20
골고다 길에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2) 앞서 가셔서 우리 삶에 모범 model 을 보여주셨다는 뜻입니다.
구원 받은 자의 삶의 모범을, 예수님이 친히 먼저 보여주셨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은,
‘나를 본받으라’ 하신 것이며, ‘나의 삶과 인격과 성품을 본받으라, 내가 앞서 모범을 보였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1)을 많이 강조해 왔고
2)는 상당히 소홀히 해 왔습니다.
2)는 ‘아예 따르기 불가능하다’ 라는 완벽주의적 관점을 가진 분들이 대세였습니다. *주로 장로교의 구원론
그런데 2)를 강조하는 분은, 대표적으로 잭 푸닌(인도의 설교자)입니다. *맨 아래 '추천설교' 보세요
물론 그 외에도 많습니다.
이들의 논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러만 오셨다면,
공생에 3년 반이 필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단번에 1주일 만에 죽으실 수도 있었고,
더 짧게는 목요일 밤에 잡히시고, 금요일 낮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주일에 부활하시고
이렇게 사나흘만 걸려도 1)의 목적을 달성하기엔 충분했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이 3년반이나 공생애를 사시고,
제자들을 뽑아서 제자양육시키시고 하신 것은
‘(구원 받은 자의) 삶의 본’을 몸소 보여주기 위해서.. 라고 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삶의 목표를
1)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으로 죽으신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2)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뒤따르는.. 그의 인격과 성품과 십자가까지 본받는 삶을 강조합니다.
1)만 믿는 사람들은, 1)만 강조할 것이고
2)까지 믿는 사람들은, 2)까지 강조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2)까지 설교하며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히2:10, 6:20, 12:2절의 의미가 ‘예수를 본받으라’는 의미이고
히브리서 끝장인 본문 13:13절에서도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즉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자’고 선포하면서,
히브리서를 대단원의 마무리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어째서인지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만 강조하지 1)
그의 삶을 뒤따라가자는 부분은 점점 도태되고 있습니다. 미혹이며 온전한 구원론이 아닙니다. 2)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가 되시는데 히12:2
오늘날 신자들은 ‘믿음의 주’로만 믿습니다.
‘온전케 하시는 이’, 즉 성숙하게 하시는 분, 장성하게 하시는 분, 마치게 하시는 분으로서는
강조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구원론, 성화론이 취약한 것입니다. 불충분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뒤따라가자’는 논지는, 히브리서 기자 외에도
사도 베드로도 똑같이 강조했습니다. 사도요한도, 사도바울도 똑같이 강조했습니다. 성경의 강조입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 발자국을 따른다, 그 걸어가신 길을 뒤따른다’는 뜻인데,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을 뜻합니다.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어찌 즐거운 일 아닌가’ 라는 찬송을 많이 불렀는데,
바로 이 구절에서 나온 찬송입니다. 상당히 성경적인 찬송이었죠.
사도요한의 강조를 보겠습니다.
요일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 단순하게 예수 따르기
사도바울의 강조를 보겠습니다.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 사도바울,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등 신약성경의 모든 기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예수님을 본받는' 믿음의 도리를 제쳐두고,
왜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두루 보아야 합니다.
▲똑같은 내용을, 히브리서 기자는 본 서신의 말미에 이렇게 전달합니다.
히13: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영문’은.. 구약적 의미로는 ‘진 camp’을 의미합니다. 12지파가 광야에서 쳤던 ‘진’.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성문 밖, 예루살렘 밖은 신앙의 영역 밖으로 인식됩니다.
이방인들의 세계나, 정결하지 못한 이들의 자리로 인식된다는 의미이죠.
문둥병이 들면 성문 밖으로 나가 있었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면 바로 <세상>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영문 밖으로 가자는 권면은 결국 세상으로 나가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구약 유대교의 5대 자랑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에만 그치지 말고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속으로 나아가자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 뜻의 일환으로, 그 예를 15~16절에서는 이렇게 찬송과, 선행과 구제를 들고 있습니다.
찬송과 선행과 구제를 특별히 ‘제사’라고 표현했는데,
‘제사’라는 이 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의 제사에 빗대어 표현한 11~12절의 연장선입니다.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의 제사)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그럼 이렇게 영문 밖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신 분들의 예는, 누가 있을까요?
물론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 같은 순교자들이 계십니다. 그 외에도 많이 계시죠.
그런데 살아서 '순교의 삶'을 사셨던 분 중에는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장로님이 대표적이십니다.
이 두 분이 존경을 받는 것은, 무슨 사역의 큰 업적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큰 업적도 이루셨죠)
사역의 큰 업적을 이루신 분들은 많은데, 그렇다고 다 존경을 받는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분들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들의 사랑,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어린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떠 주는 것과 같은 사랑의 실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더 테레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더 테레사와 같은 사역 규모적 업적을 남긴 사람은 세상에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사랑의 정신, 긍휼의 실천, 인간애,
'나는 하루에 한 사람밖에 섬기지 못합니다' 하면서도, 그 한 사람에게 보여주었던 예수님의 사랑...
이런 그의 진심이 그를 마더 테레사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요즘 '진심'이란 말이 유행입니다만
우리 나라의 대기업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탁월한 경영능력으로 인하여 한 쪽으로는 존경을 받지만,
또 다른 한쪽으로는 'OOO 물러가라!'는 구호의 주인공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진심의 부족' 때문이라고 봅니다.
거대 기업의 지도자로서 직원 개개인에게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랑, 관심, 배려의 진심,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사회적 소외계층에 보일 수 있는 따뜻한 인간미, 도움의 손길의 진심!
이런 것은 거의 없고, 물론 기업 차원에서 무슨 기부금도 내고, 무슨 선행도 베풀고 하겠지만,
있어도 형식적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상시적으로 매일같이 흘러나오는 '따뜻함, 배려, 도움, 사랑..의 진심'
이런 것이 상당히 부족하기 때문에... 한 편으로는 존경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티들이 생기는 거죠.
기업인들은, 기업의 경영실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것이.. 사람들 눈에 뜨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따뜻함, 배려, 도움, 사랑..의 진심'등으로,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유한양행처럼요!
앞서 언급한 한경직 목사님, 장기려 장로님 두 분은,
그런 '따뜻함, 배려, 도움, 사랑..의 진심'이 있으셨습니다. 물론 겸손도 있으셨지요.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로부터 길이길이 존경을 받는 것이지,
그저 업적, 규모, 성취... 와 같은 외적인 면만으로는,
후대에 존경을 받지도 못할 것이며,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예수님이 앞서 가신 길'도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