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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32장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LNCK 2022. 10. 11.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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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민32장              2017.08.13.출처

 

 

민수기 32장 5절에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 그리고 족장들에게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해 달라는 엉뚱한 요구를 합니다.

 

이는 확실히 귀를 의심케 하는 말입니다.

왜냐면 이 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던 이유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려는 것이었는데,

모압 평야에서 가나안 땅을 코앞에 두고 건너가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이가 없고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본문 민32장에는 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이런 말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수기 21장에 보면 요단강 동편까지 왔습니다.

요단 동편 땅에는 두 개의 강력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아모리(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대한 승리를 주셔서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요단강 동편의 땅들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령한 땅이 되었습니다.

헤스본, 바산, 길르앗 등 비옥한 토지들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영어로는 이 땅을 ‘Trans-Jordan’이라고 하고,

개역 한글 역에는 ‘요단 동편’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동편의 땅들을 모두 점령하고 모압 평지에 정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여러 달을 머무르게 되는데, 여기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거짓 선지자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 했던 사건,

미디안 여인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미혹하여 바알을 숭배하도록 한 사건,

그래서 염병으로 24,000명이 죽게 된 곳도 모압 평지입니다.

제2차 인구조사를 실시한 곳도 이 곳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은 후에 여호수아 3장에 보면

드디어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요단 강을 건너가게 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민수기 32장에서 이스라엘 12지파 백성들은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발로 밟는 역사적인 순간에 대한

기대감과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흥분되는 마음과 기대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것입니다.

40년 동안 바라만 봤던 땅이고, 아브라함 때부터 주시리라 약속하신 땅인데

이제 그 땅을 눈앞에 두고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너가지 않겠습니다. 여기가 좋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4~5절에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가축에 적당한 곳이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요단 동편 땅은 가축을 기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고,

가축들이 먹기 좋은 꼴이 많고, 비옥한 땅이니

우리는 이 땅을 차지하고 요단강을 건너가 참전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어떤 사람입니까? 르우벤은 야곱의 장남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장자권의 축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요셉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그는 서모와 통간했기 때문에 그 복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 잘못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가짐이 삐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반역하는 일에 앞장서고 항상 삐딱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레위 지파) 고라의 반역 사건에 다단, 아비람, 온이라는 인물이 가담했는데,

이들이 모두 르우벤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르우벤 지파 사람들은 대부분 반골기질이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반골기절을 갖고 살아선 안 됩니다.

그러면 르우벤 지파 사람들이 갓 지파 사람들과 어떻게 친분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곳은 광야에서 진행하던 지파별 편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항상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모세에게 말하기 전에 이미 서로 의논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요단 동편의 땅을 달라고 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모세는 두 가지 내용으로 두 지파를 책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 두 지파의 요구를 들은 모세의 두 가지 책망(6~15절)

 

▲6절에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

 

모세는 너희 형제들은 모두 전쟁에 나가 싸우는데

너희는 가만히 앉아서 가축 우리도 짓고 도시도 건설하고

처자식과 함께 살 궁리만 하고 있느냐며 책망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목숨을 걸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하려 하는데,

너희는 너희의 가축과 가족들만 생각하느냐며 꾸짖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타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전도를 할 수 없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면 이타적인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전도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문제는 다른 지파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 이익만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하나님을 섬기고 또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살기로 언약한 백성들입니다.

언약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따로 떨어져 독립하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분리되어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요단 동편에서

전쟁도 하지 않고 편안히 살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언약 공동체이며, 한 몸입니다. 절대 이기적인 마음을 품어선 안 됩니다.

 

고전12:13절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신약성경에 ‘성령침례’에 관한 구절이 총 일곱 번 나오는데,

본문을 제외한 6개 구절들은 모두 현상에 대한 묘사이고,

이 구절만 교리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성령세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밖에 있던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넣어주셔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시는

구원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체는 각각 자신의 사명을 잘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몸이 건강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입은 잘 먹어야 하고, 이는 잘 씹어야 하고, 위장은 잘 소화해야 하고,

소장은 양분을 잘 흡수해야 하고, 대장은 배출을 잘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 몸이 건강해 집니다. 그런데 대장이 자기 사명을 잘 수행하지 않고,

위장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몸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건강의 적신호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의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고,

이 지체가 각각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해야 몸이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지체는 자신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남이 해야 할 사명을 탐낸다든지,

자신의 수행해야 할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모세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에게 이기적인 태도라고 책망했습니다.

 

▲두 번째 책망은 다른 지파 사람들을 낙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7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이스라엘에 12개 지파가 있는데, 르우벤과 갓을 합하면 전체의 1/6이 됩니다.

이렇게 많은 인구가 전쟁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하면

나머지 지파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이 가득하게 됩니다.

 

나머지 지파 사람들도 르우벤 지파 사람들이나 갓 지파 사람들처럼

여기에 눌러 앉아 살겠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모세가 너희 조상들도 38년 전에도

지금 너희와 비슷한 태도를 보였었다면서 야단을 칩니다.

 

당시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두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냈는데,

열 두 명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케 하여 모세를 죽이려 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제1세대 백성들은

그 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을 향해서도

온 백성을 낙심케 하지 말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14~15절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또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너희의 말 때문에 나머지 5/6도 다 버리시고 죽게 되면,

우리가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함을 경험해야 하느냐?

너희가 그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라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두 지파 사람들에게 이기적인 요구를 가지고

다른 백성을 낙심케 하고 멸망케 하느냐고 야단을 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성도들끼리 서로 낙심케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서로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히3:12~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10:24~25절에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민수기 32:1절에 나타난 근본적인 문제

 

1절에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요단 동편의 땅을 보니 가축들이 먹을 꼴이 많고,

가축들을 키우기 적합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가지고 요단 강을 건너가면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일텐데,

이들은 육안으로 요단 동편의 비옥한 땅만 보았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눈에 보기에 좋은 것만 따라가다가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는

이들의 경우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창3:6절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와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육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고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는 바람에 인류에 사망이 오게 되었다고

로마서는 밝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인류에 사망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원죄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렇듯 대부분 사람들은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따라가게 되어 있죠.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따라가려 하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보고 따라갔다가 망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롯입니다. 창13:10절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서로 싸우기 시작하자

땅을 나눠갖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삼촌으로 손 윗 사람이었지만

조카인 롯에게 땅을 선택할 권한을 먼저 주었습니다.

 

그러자 롯은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보고 소돔과 고모라 땅을 택했습니다.

삼촌인 아브라함에게 먼저 선택하시라고 했어야 마땅한 일이었지만,

그는 눈으로 보기에 좋은 땅 먼저 선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롯의 가정에 비극이 되었습니다.

아내도 잃고 두 딸로 말미암아 모압과 암몸이라는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매우 부끄러운 결말입니다.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따라갔다가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민32:1절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눈을 들어 요단 동편 땅을 바라보니, 가축들을 기르기에 좋고

가족들이 머물기에 좋은 땅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성도는 육신의 눈을 넘어서서 영적인 눈으로 믿음의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만 가지고 살면 얼마나 볼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눈을 가지고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인줄 믿습니다.

 

고후4: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따라가는 사람은 그 인생이 근시안적이고 단편적이며

일시적이고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지만,

 

영원한 것을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가는 삶을 사는 성도는

하늘의 영원한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살지 말아야 할 줄 믿습니다.

 

골3:1~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위엣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세상이 주는 것만 바라보고

땅의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권력, 명예, 재물 등 세상의 만족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18장에 보면 이러한 것들을 ‘바벨론’이라고 했습니다.

상업, 예술, 문화 등을 ‘큰 음녀’라고 했습니다.

 

음녀는 이러한 세속적인 것들을 성도를 미혹하는 것입니다.

달콤한 포도주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음녀가 주는 포도주를 마시고

“이 세상이 좋다! 여기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인생의 겨울이 오면 다 늙어 죽게 되고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의 문제는 바로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만

따라가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음녀의 포도주에 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 잠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일은 어려운 일도 잠깐이요, 좋은 일도 지나가는 일들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다 지나가는 일들인 것입니다.

성도가 살아갈 영원한 세상은 위엣 것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모세의 책망을 받아들인 후 새로운 제안을 통해

모세에게 인정받은 르우벤과 갓 지파

 

민32장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렇게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자손들이

모세의 책망을 듣고 성질을 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책망을 들으면 성질을 내고

서로 원수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녀들이라도 야단을 치면 부모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걸핏하면 말을 안 하거나 집을 나가버리기 일쑤다 보니

요즘은 훈계나 책망도 마음대로 하지 못 하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르우벤과 갓 지파는 모세의 책망을 듣고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바꿔 모세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수정된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38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출애굽 1세대 백성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책망을 받아들일 줄 몰랐지만, 38년이 지난 후, 이들은 생각을 바꾸고

고집스럽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고의 유연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6~19절에 “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가로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유아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 거민의 연고로

우리 유아들로 그 견고한 성읍에 거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 행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얻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편 곧 동편에서 산업을 얻었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편에서는 기업을 얻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는 이 요단 동편의 땅이 좋고 여기에 살고자 하는 마음이 변함없지만,

전쟁에 나갈 남자들은 다른 지파 백성들과 함께 요단을 건너 전쟁에 동참하되

최전방에서 싸움에 임하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모두 다 정복하기 전까지는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이후 더 많은 땅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놀라운 사고의 유연성입니다. 모세도 이들의 제안을 듣고 거역할 이유가 없었는지

기쁘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성도는 너무 고집스럽지 말아야 합니다.

고집은 심각한 질병입니다. 건강에 매우 좋지 않습니다.

사고에 유연성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너희 말대로 행하라고 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 죄가 정녕히 너희를 찾아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를 부르고 이스라엘의 두령들을 부른 후에

이들의 약속을 재확인하고 요단 동편 땅을 두 지파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에 붙은 한 지파가 있었는데,

바로 요셉의 아들 므낫세 반 지파였습니다.

이들은 남이 차려놓은 밥상 위에 숟가락을 하나 딱 올려놓는 모양새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에 딱 붙어서 요단 동편 땅을 함께 차지하였습니다.

 

33절에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요셉의 아들 므낫세 반 지파에게

헤스본인의 왕 시혼의 국토와 바산 왕 옥의 국토를 주되

곧 그 나라와 그 경내 성읍들과 그 성읍들의 사면 땅을 그들에게 주매”

 

상당히 얌체스러운 모습이지만 모세는 므낫세 반 지파의 태도에 대해

지적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랬는가 하면 39~40절에 요단 동편의 땅을 차지하는 일에 있어서

므낫세 지파의 공헌이 지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므낫세의 아들 마길이 요단 동편의 거점 도시인 길르앗을 차지하는 일에

많은 공헌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공로를 인정해 준 거죠.

 

우리나라도 사람이 무슨 일을 하면 그 일한 것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 줄줄 알아야 하는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리어 공로를 깎아내리기에 바쁩니다.

 

모세는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의 땅을 차지하는 일에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습니다. 공로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요단 동편의 땅에 성읍을 건축하기 시작했는데

우상 숭배하던 도시의 이름을 모조리 뜯어 고쳤습니다.

 

38절에 “느보와 바알므온들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고쳤고

또 십마를 건축하고 건축한 성읍들에 새 이름을 주었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처자식들과 가축들을 거하게 한 후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 앞에서 했던 모든 약속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최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했고,

가나안 정복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요단 동편의 땅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의 기업을 더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수아 22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전쟁을 마친 이들에게

“너희들은 이제 모든 약속을 지켰으니 돌아가도 좋다”고 했죠.

 

이들은 모든 약속을 지키고 요단 동편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은 언약의 백성으로부터 분리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세의 책망을 듣고 자기 생각을 고집스럽게 주장하지 않고

새로운 제안을 내놓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가나안 땅 요단 서편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려고 했지만,

요단 동편의 땅까지 가나안 땅이 되었습니다.

길르앗, 요단 동편의 땅이 은혜로운 땅이 된 것입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죄를 지으려 했던 것이

도리어 유익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 동편은, 이스라엘의 분쟁지역이요, 화약고가 됩니다.

이후 사사기 시대부터 이 지역은, 끊임없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이방이 침략을

최일선에서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에 의해 북왕국이 망할 때도

이 지역부터 가장 먼저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요단 동편에 정착하도록 허락해 주셨지만,

그 지역이 풀이 비옥한 목초지(트렌스 요르단)였지만, 일장일단이 있었던 거죠)

 

△하나님은 본디 의인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한 의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들이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라는 책망을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큰 복을 받게 됩니다.

 

죄인이 책망을 듣고 돌이키는 것은 정말로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라고 고집하고 사고의 유연성을 갖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만 살려고 하면 복을 받을 수도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책망을 달게 듣고 받아들여 죄를 회개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고의 유연성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만 따라가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갖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두 소녀가 바닷가에 가서 함께 다정하게 조개를 줍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눈앞에 큰 조개가 나타났습니다.

두 소녀는 거의 동시에 손을 내밀어 조개를 손으로 잡았습니다.

서로 간에 양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고집 센 소녀가 조개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조개를 빼앗긴 소녀의 마음은 언짢았습니다.

 

그때부터 두 소녀의 마음이 갈라졌습니다. 두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조개를 주웠습니다.

 

잠시 뒤에 조개를 빼앗겼던 소녀의 눈이 갑자기 커졌습니다.

그의 눈앞에 진주조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얼른 진주조개를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언짢았던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져 내렸습니다.

 

그는 자기 친구에게 가서 다시금 다정스럽게 이야기하면서

함께 조개를 주워나갔습니다.

바로 눈앞에 아까보다도 더 큰 조개가 눈에 뜨였습니다.

 

가슴에 진주를 품고 있는 소녀는, 눈앞에 있는 큰 조개를 전혀 탐내지 않고

자기 친구에게 양보해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가슴에는 더 크고 더 좋은 진주조개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천국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잠시 잠깐 있다가 사라질 세상의 부귀, 명예, 권세 등에 집착하지 마십시다.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천국을 마음에 품고서 영원을 바라보며

기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을 알라 이 단락 출처

 

민32:23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예화)여섯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혹독한 추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얼마 되지 않은 나무를 가져다 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있었어요.

 

날씨는 혹독하게 춥고 피워놓은 불은 점점 꺼져가고 있었으며,

이제 여섯 사람의 손에는 각각 자작나무 장작 한 개씩이 남아있었죠.

 

그 중의 첫 번째 백인이 가만히 보니까

자기 일행 중에 흑인이 한 명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내가 왜 흑인을 위해서 내 자작나무 장작을

불에 던질 것인가?’ 생각하며 자작나무를 그냥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목사였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자기 교회 성도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 목사도

‘내가 왜 내 성도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 나무를 먼저 던질 것인가?’

생각하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둘러보니 일행 모두가 부자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인데 왜 부자들을 위해서 내 나무를 내어줄 것인가’

생각하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흑인인데 나머지를 보니까 전부 백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나무를 던지지 않습니다.

‘내가 왜 백인들을 위해 내 나무를 줄 것인가?’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다섯 번째 사람은 부자였는데 가만히 돌아보니까

모두 게으른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내가 왜 게으른 사람들을 위해 내 나무를 줄 것인가?’하며

역시 나무를 감추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사람은 장사꾼인데

‘내가 왜 이득 없이 내 나무를 던질 것인가?’ 생각하여

장작 나무를 던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불은 꺼져버리고 여섯 명 모두가 얼어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들이 죽은 이유는 손에 가지고 있는 나무를 꺼져가는

모닥불에 던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서로에게 악한 짓을 저질러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장작을 던지는 해야 할 일을 안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얼어 죽은 여섯 사람처럼 지금 모세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무슨 악한 일을 행해서 책망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까봐, 그 잘못을 꾸짖고 있는 상황입니다.

 

모세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만약 너희 말대로 하지 아니하면

너희 죄가 정녕 너희 죄를 찾아낼 줄을 알라고 말했습니다. :23

 

두 지파 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같이 동참하기로 약속하고서

요단 동편 땅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받았는데,

그 약속을 만약 어기면,

‘너희 죄가 정녕 너희 죄를 찾아낼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에게 무슨 악한 일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Commission(임무)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Omission(누락)의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거룩한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 전쟁에서 빠지고 편안히 쉬겠다고 하는

르우벤과 갓 지파의 죄악의 개연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우로 끝났죠)

 

오늘날 우리도 르우벤과 갓 지파처럼, 우리가 마땅히 자기 몫을

수행하지 않는 죄를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본문에서 모세가 지적하는 죄의 개연성은 무엇일까요?

(*개연성 : 그럴 가능성이 있음)

 

1) 첫째는 안주하는 나태의 죄입니다.

자기들에게 가축이 있고 땅이 있으니 그 곳에 눌러 앉아 살고

요단강을 건너지 않겠다는 르우벤과 갓 지파의 태도는 게으름입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가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이제는 평안히 먹고 쉬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3월 26~31일까지 다녀온 필리핀 선교 여행에서

우리 팀은 참 바쁘게 뛰었습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선교지를 돌아보고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떤 목사님들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선교여행 와서 그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뛰면 피곤합니다.

선교여행은 와서 선교지 한두 군데 둘러보고 좀 쉬다 가는 겁니다.”

 

물론 아침부터 선교지 돌아보고 영어로 설교를 준비하여

집회를 인도하려면 긴장도 되고 힘이 많이 듭니다.

그 목사님의 말씀대로 그저 여유 있게 일정을 진행하고 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저는 바쁘고 힘들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안 하려면 선교여행을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휴가를 다녀오는 게 더 낫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게으르면 안 됩니다.

 

2) 모세가 지적하는 두 번째 죄는 이기심입니다.

르우벤과 갓 지파는 매우 이기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전쟁터에 나가서 싸워도, 나는 편안하게 후방에서 먹고 쉬고

내 아내와 처자식들과 안전하게 거하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형제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형제를 죽이는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데

그들을 방관하고 나의 유익만 챙긴다면, 형제를 죽이는 자와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때때로 보면 부유한 부모님을 둔 자녀들이

자신의 소유를 이기적으로 챙기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나눔을 모릅니다.

그러나 자꾸 그런 행동을 하면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이기적인 사람 취급을

받게 되어 외톨이가 될 것입니다.

 

사람은 나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인정을 받고 동료 사이에서

공생력을 갖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도 이기적인 사람들은 미움을 받기 마련입니다.

 

영적인 이기심은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이제 구원받았고 천국 갈 사람이 되었으니

남들이 지옥가든 천국가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런 죄가 우리를 찾아낼 것이라고 모세는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는 빚을 갚지 않는 죄입니다.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민32:5

 

은혜를 얻었으면 은혜를 갚아야 마땅한데

르우벤과 갓 지파는 도리어 은혜를 입었으니

그 땅을 산업으로 주시고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게 해달라는

염치없는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요단을 건너가 같이 싸웠습니다)

 

이는 그 땅을 빼앗기 위해 함께 수고한 나머지 지파에게

빚진 바와 다름없는 행동을 하고도 빚은 갚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죠.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받게 되었습니까?

오늘날의 한국은 20년 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사회에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가 복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사회가 복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란 하나님께서 그 사회를 축복해 주시는 통로요, 기관입니다.

구약성경의 요나가 죄를 지었을 때, 요나가 타고 있던 배가 풍랑을 만났지만

요나 한 사람이 생각을 바로 하게 되었을 때,

풍랑도 사라지고 배가 제대로 항해할 수 있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하나님께서 복 주신 부유하고

평안한 사회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50년 전에는 필리핀만큼 어려운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와서 목숨 걸고 복음 전하고, 설교자들이 설교하며,

주일학교 교사들이 말씀을 가르치고 눈물로 기도하니

교회가 복을 받고, 이 사회도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아프리카의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빚진 자의 심정을 갖지 않은 사람은

어머니의 돌봄 없이 혼자 컸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빚을 지고도 갚지 않으려고 하는 죄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할 죄입니다.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목숨을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제 빚을 갚을 때가 된 줄로 믿습니다.

 

4) 네 번째는 형제를 낙심케 하는 (개연성의) 죄입니다.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말합니다.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6-7

 

르우벤 자손과 갓 지파가 그 땅에 눌러 앉아 편안히 살면

이는 축복이 아니라 다른 열 지파를 낙심케 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을 낙심케 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에게라도 격려하고 용기를 줘야 합니다.

나는 작은 사람인데 뭘 할 수 있겠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원자는 물질을 구성하는 아주 작은 요소에 불과하지만

이 작은 원자 하나가 다른 원자를 때리는 반동으로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일으키는 것이 바로 원자폭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영향을 주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의 대상은 누구인가?

“너희가 만일 그 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23

 

이 죄의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범죄입니다.

 

모세는 만일 르우벤과 갓 지파가 모세의 권면에 따르지 않으면

그들의 죄가 여호와를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위대한 왕 다윗도 한때 밧세바와 간음하기 위해

그 남편 우리야를 전쟁에 내보내어 간접 살인을 하는 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책망할 때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4)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었기 때문에 군인 하나 죽인다 한들,

다른 사람의 아내 하나 빼앗았다 한들

어쩌면 사람 사이에서는 큰 흉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명백히 죄라는 사실을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사람에게만 향한 것이라면, 우리끼리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응이 따릅니다. 죄는 감출 수 없습니다.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는 말씀처럼

죄는 반드시 죄인을 드러내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찾아낸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1) 첫째로 양심의 가책이 온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르우벤과 갓 지파가 요단 동편을 차지하고

나중에 나머지 열 지파가 가나안 땅을 다 차지하게 됐을 때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이 다른 지파 사람들을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아마도 ‘우리가 좀 이기적이었구나. 우리가 좀 게으른 사람들이었구나.

우리는 형제들과 고통분담을 같이 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며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파가 르우벤과 갓입니다.

 

르우벤 지파는 장자의 명분도 가졌고, 가축과 땅도 많았기 때문에

싸울 전력이 있었지만 이들이 싸움을 회피하고 고통을 분담하지 않고자 했을 때

전쟁 능력이 상실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9지파 반과 함께 싸웠습니다)

 

결국 사울의 통치시기에 모압이 르우벤과 갓 지파의 땅을 전부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르우벤과 갓은 그 땅이 없어져 버렸어요. 다윗 때 회복됐으나,

그 뒤로도 계속 수리아, 아람, 앗수르 등과 국경 분쟁이 끊이지 않았죠.

 

또한 열두 지파 가운데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공헌이 없는 지파도

르우벤과 갓 지파입니다. 사사기 5장 16절을 보면

사사 드보라가 르우벤에 대해 이같이 말합니다.

 

네가 양의 무리 가운데 앉아서 목자의 저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찜이뇨

온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침공에 대항해서 전쟁을 하고 있는데

르우벤 지파는 목축하면서 목자가 피리 부는 소리나 감상하고 있고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르우벤과 갓은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은혜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지옥 갈 죄를 탕감 받았고, 영생과 부활의 축복과 소망을 받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헌금도, 기도도, 봉사도, 구제도, 전도도 하지 않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치 않은 르우벤과 갓 지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서로에게 빚을 갚아야 할 뿐만 아니라

외국에 선교하는 일에도 빚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많은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 교회들을 세워줌으로써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던 만큼

우리도 이제 선교사들을 보내어 외국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줘야 합니다.

 

우리 그렇게 행할 때에 더욱 영적인 복을 누리게 되고

우리 사회가 더욱 복을 받아 선교한국으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모세가 지적한대로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내리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바울처럼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기적인 태도, 우리만을 위하는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빚을 갚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