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는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입니다. 성경구절도 그렇고, 영어 단어도 그렇고, 사람 이름도 그렇고 갑자기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치매에 걸린 분들을 찾아 심방을 다녀보면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분들이 허다합니다.
이렇듯 사람의 기억력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육적인 삶에도 반드시 필요하고, 영적인 삶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엔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명령이 아주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희 교회 카페 이름도 ‘T&R’(Think and Remember)이지 않습니까?
베드로후서 3장의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명령을 따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고,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 또 어떤 명령을 내리셨는지를 생각하고 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하는 일은 성도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40년 간 광야 생활하며 이동한 노정을 전부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총 42개의 지명이 등장합니다.
모세는 그것을 잊지 않고 다 기록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모세가 기록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민수기 33:2절에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 대로 그 노정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42개 지명을 포함, 광야의 전 노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입니다.
출12:37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 출발 지점이 라암셋 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22:1절에 도달한 곳이 바로 모압 평지였습니다.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모든 노정을 민수기 33장에 다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나 민수기에서 언급된 사건에 따른 지명은 총 17개 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머지 25개 지명은 딱히 어떤 사건이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지명만 기록해 둔 것입니다.
이처럼 민수기 33장에 기록된 광야 노정은 성경에 언급된 사건이 있었던 지명뿐만 아니라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지명까지 전부 기록해 놓은 가장 완벽하고 포괄적인 광야 노정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33장에 기록된 40년 동안의 광야 노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3~15절은 라암셋에서 시내광야까지의 여정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총 3개월간의 이동경로입니다. 12개의 지명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광야에 도착해서 약 10개월 동안 이 곳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인 3~15절에는 각 지명에서 일어난 간단한 사건들이 언급되죠.
2) 16~36절까지입니다. 시내광야에서 가나안 땅까지는 열하루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거리를 38년 동안 방황했습니다.
가나안 땅 지경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 12명의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고, 거기에 흔들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불평하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들의 불신앙은 40년 광야 방황이라는 형벌을 초래하게 되었고, 그 기간이 끝날 때쯤 이들은 다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 두 번째 부분은, 시내산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를 거쳐 뺑뺑 돌다가 다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는 전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자리걸음 38년)
쉽게 말하면 이 기간의 여정은 하나님께 벌을 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총 21개의 지명이 언급되고 있고,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가데스 바네아를 두 번 갔었는데 민33장의 광야 노정에는 가데스 바네아가 1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거죠.
두 번째 갔을 때는 기록되어 있는데 처음 갔을 때는 가데스바네아라는 지명이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름을 바꿔서 기록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18절에 “하세롯에서 발행하여 릿마에 진 쳤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 ‘릿마’가 바로 가데스 바네아입니다.
이스라엘은 똑같은 지명을 반복해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벌 받은 곳의 이름을 ‘릿마’라고 쓰고, 두 번째는 ‘가데스’라고 정확하게 기록해 둔 것입니다.
3) 37~49절, 가데스 바네아에서부터 모압 평지에 이르는 마지막 여정입니다. 여기에 9개 지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가지 사건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한 지 40년이 되던 해 5월에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가 123세였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40년 광야 생활에서 첫 번째 부분이 1년, 두 번째 부분이 38년, 그리고 마지막 부분이 1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제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그동안 지나온 모든 지명들을 돌아보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과 무엇을 기대하고 계신지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목적으로 모세를 향해 광야 노정을 기록하라고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살아온 영적인 삶의 노정을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셨고, 또 내가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았는지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난 잘못들이 있었음에도 우리를 죽이지 않으시고 살려주셨으니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민수기 33장의 광야 노정의 기록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무궁무진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도와주십니다. 물론 아무나 도와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능력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도우십니다.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살아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싫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능력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 배경이 되어 주시죠.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비교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자기 능력으로 조금만 잘 되는 것 같아 보여도 잠시 잠깐이지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영원에 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란 도대체 어떤 능력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민33:3절에 “그들이 정월 십오일에 라암셋에서 발행하였으니 곧 유월절 다음날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암셋은 애굽의 주요도시였고, 바로는 애굽의 왕입니다.
지금은 이집트가 후진국가 이지만, 당시 애굽은 세계 최강대국이었습니다. 바로는 신의 아들로 숭배를 받았고, 그의 권력을 하늘을 찌르듯 높았습니다.
라암셋은 바로 그 애굽 왕 바로가 통치하는 도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기하급수적 인구증가로 2백만이 넘는 대민족이 되었으나 바로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바로의 손에서 해방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열 번째 재앙은 짐승의 첫 새끼와 애굽 사람들의 첫째 아들을 죽이시는 재앙이었는데, 바로는 이 장자 죽음의 재앙으로 말미암아 백기를 들고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아들들의 장례를 치르기에 여념이 없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달 15일에 라암셋을 빠져나와 출애굽을 시작했죠.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200만 명이 넘는 대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족쇄에서 해방될 수 있었겠습니까?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구원하시는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해방시켜 놓으시고 그냥 떠나가 버리셨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계속해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민33:8절에 “하히롯 앞에서 발행하여 바다 가운데로 지나 광야에 이르고 에담 광야로 삼 일 길쯤 들어가서 마라에 진 쳤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데 육지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비하히롯 앞 바알스본 맞은 편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곳은 홍해 바닷가입니다. 홍해는 호수가 아니라 깊은 바다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바다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로는 신이 나서 이스라엘을 다시 사로잡기 위해 그들을 쫓아갑니다.
이 때다 싶었던 바로는 애굽의 온 군대와 철병거 600승을 대동한 채 바다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로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홍해를 단박에 가르시고 200만 명이 넘는 많은 백성들로 홍해바다를 맨땅처럼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바로와 그의 군대는 홍해를 건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쫓아가다가 그 곳에 모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능력은 보호하시는 능력이었습니다.
▲3. 그리고 광야 생활을 하는데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물도, 고기도, 먹을 것도 없는 광야 생활이 짜증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마라에서 마신 물은 쓴 물이었으나 나무 하나를 던져 단 물로 바뀌게 되었고,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로 인도하셔서 물을 공급해 주셨으며, 르비딤에 비록 물이 없었으나 모세를 향해 반석을 치라 명하셔서 쏟아져 나오는 생수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또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울부짖으니 만나를 주셨고, 기브롯 핫다아와라는 곳에서는 고기가 없어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메추라기 떼를 보내주셔서 고기를 실컫 먹게 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능력은 공급해 주시는 능력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보호도 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보다 이 능력이 이스라엘의 현실적인 삶 속에 그대로 역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나타나는 능력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 예배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고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방언이나 예언, 병 고침 등만 능력인줄 압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만 능력인 것이 아닙니다. 정말 위대한 능력은 구원의 능력, 보호의 능력, 공급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 때문입니다.
33세에 십자가에 비참히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미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이것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치지 않았지만 지극히 이성적으로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맨땅처럼 건너간 것을 세례로 비유했죠. 고린도전서 10장 1~4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해 건넌 것을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은 것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바로를 굴복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도 역사함으로 우리로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죄와 사망과 마귀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내팽개치지 않고 보호하는 분이십니다. 벧전1:5절에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20세기에 세대주의 종말론이라는 잘못된 신학사상으로 말미암아 성도들 가운데 ‘환란 도피주의’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환란을 피해 휴거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교리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7년 대 환란을 피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들이 환란 속에 고통 받는 것을 구경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복수주의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상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려움과 환란이 있어도 하나님의 능력이 이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는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세대주의 종말론에 빠진 수많은 목사님들은 잘못된 교리로 성도들을 오도했습니다. 환란이 없는 것이 아니라, 환란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를 보호하신다는 것이 성경적 진리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얼마나 큰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나라를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예언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그림책, 카드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얼마나 허황된 주장들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도 모두 허사일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위태로운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위태로움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성도를 보호해 주신다고 증거합니다.
질병이나 전쟁, 불의한 사고나 위험과 같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우리가 범죄함으로 마귀들에게 문을 열지 않는 한 악한 것들은 성도를 위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구원의 능력, 보호의 능력, 그리고 우리 삶에 필요한 부분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풍성히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성도들을 향해 구원의 능력도 베푸시고, 보호의 능력으로 지키시고, 공급의 능력으로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는데, 도대체 이 능력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사업이 잘 안 되고 굶주리고 이제 끝났다고 생각되어도
결코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이 성도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다시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지금도 역사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골1장 29절에도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속에서 역사하시고 우리 속에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는 이것이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사실이고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두려움 없이 인생을 전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원동력입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성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인간으로서 지을 수 있는 죄는 거의 다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광야 노정을 다시 생각하고 기억하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들에게 좋은 분이시고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분이시라는 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엇이 그리 좋느냐고 험담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좋은 것들을 경험할 수 없죠.
하나님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선하신 분이시고 내게 복을 주는 분이시라고 고백하는 거죠.
내게 불행이 찾아온 것은 내 잘못으로 인함이고,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풍족하게 하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좋은 것들을 많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와서 “아빠 엄마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좋은 말 하는 습관을 길러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는 동안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범죄한 백성들이었습니까? 불평과 불만 일색이었습니다.
지도자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 했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으며,
반역하고, 우상숭배하고, 음행에 빠지는 등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하나님이라면 이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습니까?
이런 백성들을 계속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진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백성들의 끝없는 죄악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약속한 대로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십니다.
때론 죄에 대해 징벌하실 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애가3:22~23절에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지나간 자기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그 때 죽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적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범죄한 일들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노정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내게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좋은 분이시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좋은 분이시라는 사실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항상 나쁜 말만 하고 비판하는 일에 핏대를 세우면
그 사람의 삶 속에 항상 나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좋은 것을 공급해 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을 하고 또 하나님의 선하심 날마다 맛보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광야 노정은 성도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재확인시켜 줍니다
광야 노정 중 42개 지점은 모두 지나가는 정류장과 같습니다.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어떤 환란을 겪었을지라도
이것이 모두 일시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모두 지나가는 땅에 불과한 거죠.
정거장에 멈춰 서서 정거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가야할 궁극적인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으로 여행을 갔는데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었습니다.
상대는 야쿠자입니다. 싸우겠습니까? 도망가겠습니까?
여행 와서 야쿠자와 싸워 좋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본문에 기록된 42개의 지명과 같습니다.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목적지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은 그저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때와 일반입니다. 정거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쓰고 좌절하고 낙심할 필요가 없죠.
모두 지나가는 일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야 할 목적지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그곳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짧고 속히 지나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 상상할 수도 없는
영광 가운데로 들어가게 됩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에는 고난이 있어도 장차 얻게 될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커도 얻게 될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고린도후서 4장 16~17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경한 것들입니다. 가볍고 일시적인 것들인 거죠.
우리가 살아가며 받을 환란은 가벼운 것이지만,
성경은 우리가 장차 얻게 될 영광이 무거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중한 것,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나는 이후에 큰 영광을 누릴 사람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우리를 위해
영원한 축복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가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늘 승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의미 있는 여행을 하려면
‘초보’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말로만 듣던 ‘성지순례’를 가게 되었습니다. 철없던 시절이라서 그랬던지 엄청 신났습니다.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오는 곳을 수도 없이 다녔습니다. ‘죽기 전에 한번은 가봐야 할 텐데’ 생각했던 성지도 들렀습니다. 천사와도 같은 순례자들과 함께 꿈결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긴 여정이었기에 출발하기 전에 나름대로 계획도 세웠습니다. 어디 도착하면,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누구에게 전화해서 만나야지, 어디 가면 달팽이 요리가 맛있다던데 꼭 맛봐야지, 백과사전을 펼쳐놓고 경유지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도 수집했습니다.
그런 나름대로의 준비가 있어서 그랬던지, 성지순례는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날마다 흥미진진했습니다. 낯선 세계와 문화에 대한 개인적인 상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 ‘이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뭔가 결여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회상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의 향기를 맡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지순례의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기도는 뒷전이고, 어떻게 즐길까,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돌아다닐까만 생각했던 제 모습이 떠올라 엄청 창피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어찌 보면 일종의 순례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가는 여행입니다.
천국을 향해가는 여행길인 우리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들 모두 소중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계획인 ‘기도’에 있어서 소홀하지는 않은지요? 그래야 그 ‘여행’(순례)가 더 의미 있고 풍성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