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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6장,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

LNCK 2022. 11. 4. 11:25

미6장,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               2008-10-12 출처, 여러 설교 정리

 

 

▲성경에 '변론하자'가 나올 때는, 뭔가 중요한 말을 하실 때입니다.

 

6:1~2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controversy

 

호4:1, 12:2절에도 같은 단어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논쟁'으로 번역했죠.

하나님이 '어디 한 번 따져보자, 시시비비를 가려보자'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미6:1절은 '들을지어다'로 시작하는, 미가서의 3번째 설교입니다.  *미6~7장

뭔가 하나님의 가슴 답답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죠.

말귀를 못 알아들어 속 터진다는 뜻입니다. 그 내용이 3절부터 계속 이어지죠.

    

▲3~5절의 요지는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들 너희에게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느냐?

내가 너희들을 위해 행한 것이라고는 다 의로운 일들뿐이 아니냐?’라는 쟁변으로서,

이스라엘이 현재의 망국병에 빠지게 된 것은

순전히 그들 자신 속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책망이었습니다.

 

3~5절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그런 하나님의 질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6~7절입니다.

 

6~7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이 두 절들에서 비록 미가 선지자가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어떻게 할까”라고

1인칭으로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미가 선지자 자신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의 한 사람이 된 것처럼

“감정이입을 시킨 상태”에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고 있는 사실을

자신의 입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례로, 가끔 부모님을 찾아뵈러 갈 때면 ‘무슨 선물을 준비해 가야 하지?’

라는 걱정부터 시작하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들이 무슨 선물이 아쉬워서 자식을 기다리는 줄로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자기 부모를 아주 쩨쩨한 사람으로 격하시키는 행위가 됩니다.

 

실제로 부모가 자식을 향하여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 자식이 당신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해 주는 아들딸이 되어 주는 것,

뭐니 뭐니 해도 이것이 제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물이 문제가 아니라 ‘바른 자식’이 되는 것이

부모에게는 가장 중요하고도 또한 기쁜 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아올 때에

바로 이런 점에 있어서 크게 오해하고 있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용서 받고 자기 조국이

다시 회복되기 위해서는 그저 좋은 제물만 갖다 바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란 율법에서 가장 귀한 제물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서

‘질적으로 최상의 예물’을 가리킵니다.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이란 과장법적 표현인데

바로 ‘양적으로 최대의 제물’을 뜻합니다.

 

“내 맏아들을 드릴까”라는 말은,

당시 장자를 인신제물로 우상에게 바치던 이방민족의 악습에 물든 자들이

‘나도 이처럼 내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자식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까?’라고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을

지금 미가 선지자가 비꼬아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그런 약간의 제물로써 돌릴 수 있는 것처럼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지 않느냐?”라고 따끔하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8

 

이것은 곧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들이냐?

내가 너희들의 제물이 아쉬워서 그것 받으려고 회개하라고 한 줄 아느냐?

내가 정말로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이전부터 너희들에게

여러 차례 분명히 말해 주지 않았느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구하신

‘선한 것’이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조국이 안팎으로 당하고 있는 위기상황 속에서도 바로

이런 성도, 이런 청년 크리스천들이 더욱 필요합니다.

 

이제 청년 부흥회 마지막 날 밤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자의 모습,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고 이 조국을 하나님 앞에서 회복시킬 수 있는

‘바른 신자’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자는 우선 ‘(사회)정의’를 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미가서 3장에서 ‘사회 정의’를 미가가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미3장, 대낮인데 캄캄한 세상 https://rfcdrfcd.tistory.com/15980414

 

8절에서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그 첫째를 두고 “오직 정의를 행하며”라고 했습니다.

 

이 ‘정의’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본받아서

이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사회 정의’를 가리킵니다. *미쉬파트

 

다시 말하자면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며

‘옳은 것을 실천하고 그른 것을 반대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그런 공의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미가 7:3b절에 보면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군장”이란 바로 관리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처럼 이스라엘의 공직자들과 재판관들은 다 뇌물을 받아서 축재하고 있었으며,

“대인” 즉 권력자들은 “서로 연락을 취하는” 즉 저희들끼리 짜고 공모하면서

“악한 사리사욕”을 취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정치 지도자들부터가 다 부정부패만을 일삼으니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공의, 즉 사회정의 라는 것을 눈 씻고도 찾아볼 길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10~13절에도 공의를 굽게한 이스라엘이, 이렇게 소개되고 있죠.

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거짓되도다
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병들게 하였으며 네 죄로 말미암아 너를 황폐하게 하였나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각 사람이 ‘공의를 행하는’ 것부터 실천할 줄 모르면

그런 이스라엘은 회복될 길이 없다고 경책하셨던 것입니다.

 

△법정에서 언제나 정의가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의가 아니라 능력있는 검사 혹은 변호사가 승리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정의는 녹색이다"(The color of justice is green)이라는 말이 떠돕니다.

*달러 지폐가 녹색

 

"정의의 색깔은 희다"라는 말도 어느 정도 진실입니다.

미국에서 법이 백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때가 간혹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정에 선다 해도 안심하지 못합니다.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나라에서는, 증인을 죽이거나 자살시켜 버리는 일을 통해서

‘증거 인멸’을 꾀하기도 합니다. 이런 가운데 버젓이 예배드리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용납이 안 된다는 거죠.

 

영화 <대부>에 보면, 자기는 성당에서 조카의 ‘대부’로서

조카 아기의 세례식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리면서

그 시간에는 부하들을 시켜서, 다른 마피아 조직의 두목들을

권총으로 하나씩 살해하지요.

우리가 그러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가증하다는 거죠.

 

카메룬이나 탄자니아 등지에 가면, 거기서 대대적인 아프리카 노예 수출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항구에 가면 예쁜 흰색 칠을 한 예배당이 있다고 합니다.

 

그 예배당 곁에서는, 노예 매매가 이루어지고, 그 지하에서는 노예가 감금

되어 있는데, 그 사업에 관계하던 신자들은 주일날 또 정장을 차려입고,

흰색 예배당에서 고상하게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노예 매매가 성행하던 시절에는, 아무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지요!

 

누구를 비난하자는 게 아니라,

혹시 오늘날 나에게는, 그렇게 사회정의를 무시하는 행위는 없는지

그러면서 아무 거리낌없이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은 없는지..

한 번 자신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추천설교 미:6~8  윤리적 신앙 고백

 

 

◑2. 하나님께서 기독신자에게 바라시는 것은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8절에 보면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

또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자’라는 말은, 할머니처럼 ‘인자하다’는 뜻도 아니고

‘사람의 아들’ 이란 뜻도 아닙니다.

 

히브리어의 헷세드를 ‘인자’로 번역했는데, ‘언약적인 사랑, 즉 변지않는 사랑’

영어성경에 loving-kindness, mercy, steadfast-love 등으로 번역하는데,

‘사랑했다가 밉상이면 안 했다가’ 하는 인간적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한 사람을 사랑하면, 정말 변함 없이, 꾸준히, 끝까지 사랑함을 뜻합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복음성가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도다’

‘.. 주의 <인자>는 영원하니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도다’

그 찬송에서 그냥 ‘인자하신 할머니’를 연상하는 것은, 5%만 이해하는 거죠.

거기서 ‘헤세드의 사랑, 즉 변함없는 언약적인 주님의 사랑’을 연상해야죠.

 

본문 6:8절의 (어떤 분은 이 구절을, 미가서 전체의 요절로 꼽기도 합니다)

‘인자’가 구약성경에서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보통 이 히브리어 ‘헤세드’가, 신약에서는 ‘아가페’ 헬라어로 번역되었죠.

 

그런데 우리말에 인자로 번역한 것은 ‘어질 인, 사랑할 자 仁慈’로 번역한 거죠.

한글 성경에 때에 따라서는 ‘인애’로 번역한 적도 있는데, 다 헤세드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이 점에 있어서도 말할 수 없이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남을 등쳐먹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것입니다.

 

미가2:8절에 보면 “근래에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원수처럼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라는 말은

그처럼 같은 이스라엘 동족들 중에, 전쟁을 피하여 도망가면 (패잔병이나 난민)

마을 사람들이 무슨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겉옷을 탈취했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무자비하고 냉혈하기 짝이 없는 사회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고,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그처럼 불쌍한 동족에게도

전혀 인애와 자비를 발휘할 줄 모르면서

도대체 무슨 낯으로 내 앞에 나아올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책망하셨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베풀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하게 되어 있는 법이죠. 마22:37~41

 

바로 ‘헤세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웃에게도 헤세드의 사랑을 베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나와 직접적인 혈연이나 지인이나 이해관계로 맺어지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마땅히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인애와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불쌍한 자기 동족 피난민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대신, 오히려 그들의 겉옷까지 빼앗는 못된 짓을 저질렀지만, 2:8

오늘날 우리 역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저 북한동포에 대하여 인자를 발휘할 줄 모르는 사람이

바로 그런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우리와 피를 나눈 진짜 동족이며 동시에 저 공산독재자의 압제로 인하여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북한 인민들 중에 다수가 그 폭정과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서

중국 국경을 넘는 ‘국제적 피난민’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탈북자들을 돕기는 고사하고

‘통일이 되면 우리가 저 많은 빈민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나?’하는 걱정만 하면서

‘그래서 통일이 되면 안 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대한민국 안에 어처구니없게도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나중에 통일이 되어, 그런 북한 동포들을 자기 눈으로 목도하게 되면,

적어도 일말의 양심이 있는 사람, 그리고 더욱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고 하면,

그런 환난 받는 내 동포들이 공산 독재의 압제 하에 지내는 동안

내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생각할 때, 얼굴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책망하실 말씀이

지금 북한동포를 모른 체하고 있는 신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 같습니까?

 

 

◑3.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구하시는 가장 귀중한 모습은

바로 곧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라고 일깨워 주시면서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주시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8절 끝에 가서는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씀을 최고로 강조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나왔던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라’는 말씀만 두고 보면

마치 ‘사회정의 구현’과 ‘인류 박애주의’가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요점이며 기독교 정신의 핵심인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실제로 자유주의자들의 설교는 바로 그렇게 끝나고 맙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세 번째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점들, 나라에 공의가 사라지고

백성들 사이에 사랑이 식어 버리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제물만 가지고

습관적으로 제사에 참석하는 것이 전부였지

 

진정 ‘겸손히 하나님께 함께 행하는’ 자세는 전무했었으며,

바로 이것이 선민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을

그처럼 철저하게 망하게 만들고 있던 핵심 요인이었던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라는 말을 들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겸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그저 ‘기독신자는 겸손해야 한다.’라고

바로 이 ‘겸손’에서 끝나 버리는 설교집들이 흔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때의 ‘겸손’은 그저

‘사람 앞에서의 겸손’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신자가 사람 앞에서도 당연히 겸손해야 하지만

적어도 이 본문이 말씀하는 겸손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인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겸손이라고 하면 곧 ‘사람의 온유하고 착한 성품’만을 생각합니다.

 

즉 교양이 있고 덕이 있는 사람이 그 자신 속에서 발휘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라고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겸손은 오늘 본문에서 명백히 강조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우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또한 ‘그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믿는 것으로서 한 마디로 줄이자면

‘절대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을 철두철미하게 믿는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스스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겸양을 발휘해서 생기는 겸손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하나님 앞에 세워 놓고 보니

그 하나님이 너무나도 높고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위대하시니까,

그것을 깨닫게 되면 제 아무리 이전에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던 인생이라도

절로 그 분 앞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바짝 엎드리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

- 바로 이것이 진정한 겸손이라는 말입니다.

 

즉 진짜 겸손은 바로 ‘하나님을 얼마나 두려워할 줄 아는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만 꼼짝 못하고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하든지 기쁘시게 하려고 하시다보니까,

사람 앞에서는 마치 겸손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에게 굽실굽실하지 않고

사람 형편을 생각해 주지 않는 것 같고

사람에게 온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겸손>관련글 모음 (tistory.com)

 

 

▲정리하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갈까?’라고,

그저 형식적으로만 예배에 참석하는 ‘출석교인’(church goer)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내가 진짜로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이것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God worshipper)가 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오직 (사회)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존경보다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인터넷에 교회에 관련된 글의 댓글을 보면 대부분 욕설입니다.

교회와 목사를 옹호하는 글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신앙이 없으며,

부당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원인이 될 수 있지만,

우리도 스스로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내면의 덕을 이루었고,

성도들이 힘이 있었을 때에 약한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베풀었으며,

우리 성도들의 인격에 얼마나 많은 친절이 있었고,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볼 때 불신자도 신자도 정권을 잡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침례교는)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기독교 국가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국교는 없습니다. 신앙은 각자 자유로 믿는 것입니다.

공연히 기독교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아 남을 학대하고, 착취하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처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 성도들과 교회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미가서 6장 8절을

제대로 순종치 아니함으로 스스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가 미가서 6장 8절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덕을 쌓을 때,

세상에 선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화려한 외면보다는

공의로 행하고, 친절을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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