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롬9:19~33 토기장이와 진흙

LNCK 2022. 11. 15. 12:10

토기장이와 진흙 (로마서 9:19-33)│2022.11.06 - YouTube

 

◈토기장이와 진흙           롬9:19~33      2022.11.06

지난주에 이어서 로마서 9장에 나타난 "예정신앙"에 대한 말씀입니다. 

롬8장 까지는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이 나와있습니다. 
이어서 롬9~11장까지는, 하나님의 선택, 예정에 관한 문제를 다룹니다. 

그 가운데 주제는, 바로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관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내 동족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왜 동족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쓰임 받은 민족이 되었지만 
이처럼 믿지 않는 영혼들이 많은 것인가?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이란 주제 속에서, 
바로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문제를 
가장 중요한 예를 들며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대한 정확한 설명 직후에 
이 하나님의 <선택, 주권, 예정, 이스라엘의 운명>을 다루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연결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오해를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문제를 롬1장에서 다루지 않고, 9장에서 다룬 것은 

1~8장까지의 복음의 진리로 인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깊이 알아갈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진리이기 때문이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선택 이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고 
나의 믿음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내가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은 것은, 나에게 속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에 
헌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내용 간략 복습     주1)

모든 인간은 천국에 가야 마땅한 존재가 아니라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들임에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불의함이 아니라 외로움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것이 
본문 롬9:19절 이하의 오늘 본문이 되는 겁니다. 

본문은, 지난 주 본문에 나타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됩니다. 
(어떤 자들을 택하시고 예정하시는 것이 옳으시냐는 거죠.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 살펴볼 주제입니다.)



◑본문은 세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우리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며, 우리의 주인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분의 종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도전할 수 없다는 겁니다. 

9: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답을 한단 말입니까? 
지음을 받은 것이 지은 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라고 
대들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피조물임에도.. 
어떻게 하나님 창조주께 대들 수 있습니까?' 라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엄청난 고난을 받았던 사람이 욥입니다. 
욥이 그 고난속에서 수많은 질문을 하나님께 쏟아냅니다. 

고난속에 있는 성도들이 욥기를 통해서 받는 은혜는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을, 욥이 다 대신 해주기 때문이죠. 

엄밀한 의미에서 욥기안에는 '위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친구들이 와서 위로라고 하는 말은, 사실 정죄였고, 비판이었고, 
욥을 더 가슴 아프게 하는 말들이었기 때문에... 욥기가 길어진 거예요. 

욥기의 전체 내용은 사실 간략한데 
친구들의 말을 일일이 다 기록했기 때문에 길어진 거에요. 
  
마지막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말씀 속에 위로를 기대했던..

그리고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요구했던 욥은

도리어 당황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욥에게 대답을 해주시지 않고, 도리어 질문하셨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게 대답하여 보거라.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대답해보아라.' 

그러면서 하시는 첫 질문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 있었니? 
그 크기와 길이를 잴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존재하지도 않았던 욥이, 그 미미한 존재가
지금 고난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감히 대들며 가타 부타 하거나
그 이유를 물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존재의 크기를 비교하면 게임이 안 되니까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어쩌면 욥은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욥아, 고생 많았지? 얼마나 힘들었니!' 
'내가 너를 시험대에 올려서, 이런 상실과 아픔을 겪게 해서 참 나도 마음 아프다'

뭐 이런 위로가 나올 것 같은데..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욥에게 강한 질문을 던집니다. 

놀라운 것은, 욥이 이런 하나님의 위로가 아닌, 도리어 질문을 받으면서 
회개했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그래 내가 미안하다!' 하실 것 같은데.. 아닙니다. 
욥이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욥이 하는 말이 
'내가 헤아릴 수 없는 말을 하였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라고 하면서 '제가 회개합니다' ... 그렇게 욥은 회개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피조물인 존재가,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지 못하며 
자신의 논리로 하나님 앞에 대들었던 죄악을.. 욥이 회개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토기장이와 진흙의 예를 들어, 그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막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귀하게 창조하셨고 
어떤 사람은 비천하게 창조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창조하셨고 
어떤 사람은 버림받고 심판 받도록 창조하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그 진흙을 가지고.. 귀하게 쓰는 그릇이냐/ 천하게 쓰는 그릇이냐 
'진흙에서 그릇으로 만든다'고 하셨지 
'없는 것에서 진흙을 창조하셨다'고 말씀을 하지 않으셨죠. 

그러므로 이것은 '창조'를 말씀하는 게 아니고 
창조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미 존재하는 진흙 한 덩어리와 같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떻게..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이 어떤 그릇으로 빚으시는가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있음을 말하는 거죠.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빚는 그것은 '이 토기장이의 권한이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받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지옥에 갈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이 비유는, 누구는 전국에 갈 존재로, 
누구는 지옥에 갈 존재로 창조했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며 
사랑받기에 합당한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시며 
모든 이들을 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태어난 타락한 인성을 가진 존재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있기에 

그 진흙 한 덩어리와 같은 존재를, 하나님께서 그릇으로 빚어가시는데 
그것이 긍휼의 그릇이냐/ 진노의 그릇이냐 의 문제입니다. 

이 진흙 한 덩어리는 멸망받기에 합당한 존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 존재,

그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토기장이가 그릇으로 빚지 않아도 
진흙 한 덩어리는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그릇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라고 비판할 수 없다는 거에요. 

여러분,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서 진노와 심판에 버려두셔도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모든 사람들이 다 진멸받아 마땅함에도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을 살려두심으로써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셨죠. 

모든 사람들이 진멸되었어야 하겠지만 
하나님이 노아와 그 후손을 살려두신 것은 
긍휼을 베푸신 것이지... 
'왜 노아와 그 가족만 살렸습니까?'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거죠. 

그러면 노아와 그 가족이 생존하여 번성하게 된 그 후
그 후손들이 어떻게 됐습니까?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또 반역하는 모습이 나타났을 때 
바벨탑을 하나님께서 진멸하셔도 됨에도 

하나님은 또 그 가운데 인류를 그냥 흩으심으로 
'언어를 혼잡게 하심'의 심판만 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 후손가운데, 아브람이라는 한 사람을 택하셔서 
하나님이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어가셨다는 거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에는 긍휼이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멸망받아 마땅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신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일부만 선택해서 구원하시고 
전부를 구원하시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은 합당하지 않죠.

그리고 그 그릇을, 토기장이를 보면,
그 그릇이 마음에 안 들면, 그 진흙을 망가뜨려, 다시 그릇을 빚지 않습니까. 

저는 이 '그릇'이라는 의미속에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 
진노 받아 마땅한 그릇을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는 그릇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그 넓은 마음이 포함돼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창조 때부터,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진노로 말미암아 죽고 망하는 운명으로 태어나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구원받아 천국에 갈 운명으로 태어났다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인데 
타락하여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멸망에 처할 운명이지만 

진흙 한 덩어리와 같은 존재를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
긍휼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우리를 계속 빚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크신 긍률입니까! 

▲2. 그러므로 두 번째 이유가 여기에 나오죠. 
왜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풀고, 
어떤 사람에게는 베풀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불의하시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멸망하는 책임은 인간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22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9:22 만일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시고 능력을 알리시고자 
멸망받도록 예비된 진노의 그릇에 대해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하나님은, 진노받아 마땅한 진노의 그릇에 대하서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는 거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왜 모든 인간을 구원하지 않고 
일부만을 택하셔서 구원하시는가?'에 대한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며 
다시 이런 질문으로 바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인류를 멸하시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며, 그 가운데 구원하시는가요?' 이렇게 질문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오래 참으십니까?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거에요. 
토기장이 이신 그분이, 이 진노의 그릇이 
다시 긍휼과 하나님의 은혜의 그릇으로 빚어지는 기회를 주시는 거에요.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 하나님은 긍유를 베풀기 원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약 39권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성경이 두껍나?' 

그런 생각 혹시 안 해 보셨어요? 

여러분 구약이 이렇게 두꺼운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두께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신 역사의 흔적이 바로 이 성경이에요. 

지난 오랜 역사 속에, 하나님은 참고 또 참으시고 참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누구든지 핑계치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주2)
  
하나님께서는, 멸망받아 마땅한 이들 가운데 
택하신 이들을 구원하셔서 긍휼의 그릇으로 만드시고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런 긍휼의 그릇이 되기를 원하시지만 
끝까지 완악함으로 스스로 '진노의 그릇'이 되기로 고집하는 이들이 있다는 거에요. 
그 예가 바로 입니다. 
하나님께 끝까지 반역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개의 기회를 거절하죠. 

왜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주셨습니까? 
한 가지 재앙이 일어났을 때마다, 바로에게 계속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거에요. 

그럼에도 바로는, 자기 완악함을 버리지 않고 
마지막 재앙이 주어졌을 때도,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바로와 같이 완악한 자에게도 
회개할 기회와 시간을 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지만 
끝까지 진노의 그릇이 되기로 스스로 작정하는 이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입니까? 
인간에게 있는 이 자유의지와, 그리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그러한 것이.. 

하나님이 구원받을 만한 충분한 역사와 계시와 이유와 증거를 주셨음에도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진노의 그릇'이 된다는 겁니다. 


△'전도폭발'을 시작하신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이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만든 이야기입니다. 다섯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어느 날 은행을 털기로 모의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다른 친구 한 사람은, 그걸 알고서 다섯 친구들을 말립니다. 
'제발 그런 나쁜 악한 짓을 하지 마라!' 빌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친구들은, 그 친구를 밀쳐내고 
자신들이 은행을 털기로 한, 그 악한 일을 강행하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막아도 막을수 없게 되자, 그 친구는 마지막 한 사람을 붙잡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씨름하면서, 그 친구를 가지 못하게 막았다는 거에요. 

네 명의 친구들은 계획대로 은행을 털고, 그리고 경비원들이 죽고 
그리고 그들은 잡히고,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한 사람, 은행을 터는데 가담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벌받지 않은 것은, 그가 착해서입니까? 아니죠. 
누군가 그 사람을 막았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구원받는.. 긍휼을 받는 모습이라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에 처하게 되지 않은 것,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나고, 분별력 있고, 교양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는 거죠.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막아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더 완악함에 처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예정신앙이라는 거에요. 

 

나의 선택 이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고 
나의 믿음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에 
내가 긍휼을 받는 그릇이 되었다는 겁니다. 

진흙 한 덩어리에 불과한, 멸망받아 마땅한 내가 
긍휼의 그릇으로 빚어졌다는 것,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이 고백을 하는 것이 바로 예정신앙이라는 겁니다. 

누구는 창조될 때부터 지옥갈 운명이고, 누구는 천국에 갈 운명으로 태어나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거에요. 


▲3.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내버려 두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9:23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해 
그분의 영광이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면 어찌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악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영광이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으로 나타나는 광채입니다. 그분의 빛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빛이시죠. 그분의 빛 앞에 누구도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태양빛 앞에만 서도, 우리는 큰 데미지를 받지 않습니까. 
그러나 태양빛조차도 완전한 빚이 아니에요. 

그 완전하신 빛의 광채가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 
우리에게 죄악이 있다면, 우리는 심판 받아 마땅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죄악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은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그 영광보다 더 풍성한 영광은 
긍휼을 베푸심으로 나타나는 영광이에요. 

그렇게 멸망받아 마땅한 존재에게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고, 사랑과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신 요17장의 기도를 가리켜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합니다. 그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소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을,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으로 말하며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순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모든 심판이 집행되는 사건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거에요.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동시에 그 죽음으로 인하여,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긍률과 은혜가 나타나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진노와 긍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거에요. 
이런 시각에서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세 가지의 관점으로 24절에 보면 
바울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바라봅니다. 

9:24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이 그릇으로 부르셨으니, 
곧 유대 사람 가운데서뿐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바로 이 그릇으로 부르셨다'... 
우리는 진흙 한 덩어리와 같은 존재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이 십자가를 통한 약속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긍휼의 그릇이 될 것이고 

그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노의 그릇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거에요.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불신앙은, 놀라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미 이러한 일을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 그리고 이사야서의 예언 중에 
'혈통적인 육신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일이 없다. 

이미 이삭의 후손, 야곱의 후손도 그랬지만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서, 
'혈통적인 유대인이라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참 이스라엘은 다른 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이미 말씀 하셨다는 거죠. 

25~26절을 보십시오. 
9:25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받지 못한 자를 사랑받는 자라 부를 것이다”

9:26 “그리고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그들에게 말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혈통적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죠.

물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릴 자들이 있는 거죠.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가 아니라 
약속을 믿는 자냐/ 아니냐.. 가 그 기준이라는 거에요. 

9:27 이사야도 이스라엘에 대해 부르짖기를 “비록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알 같을지라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이다.

9:28 주께서 그 말씀하신 것을 땅 위에서 온전하고 신속히 이루실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오직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그 후손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그릇, 긍휼의 그릇이 되는 자들은 남은 자들이다.' 

어떻게 '남은 자'가 됩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이 남은 자입니다. 


▲결론적으로 왜 이스라엘이 불신앙 가운데 처해 있는가?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도 아니라면 
왜 이스라엘은 지금 불신앙 가운데 처해있는가요? 

9:30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 사람이 의, 곧 믿음으로 인한 의를 얻었으나

9:31 의의 율법을 따르던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9:32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로 의를 얻는 것처럼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십자가안에서 베풀어지고, 그 영광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넘어지는 이유, 
불신앙으로 인하여 진노의 그릇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단 한 가지 이유인데,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이다... 라는 거죠.

하나님이 율법 앞에 서게 함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 불의한 존재임을 깨달으라고 주신 율법을 가지고 

도리어 자신을 의롭다 여기는 도구로 사용해버린 이 잘못, 이 부당함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약속을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 
오직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을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긴 것, 
그것이 바로 걸림돌이었다는 거죠. 

이것은 유대인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스스로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여긴다면, 
본문의 같은 기준이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 '자기 의'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걸림돌은 끊임없이 우리 앞에 놓여있어요. 

그 걸림돌이 뭡니까? 
우리 신앙생활에 자기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 의'이에요. 

자기의 어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율법주의 신앙 
그리고 자기 의를 나타내는 신앙.. 모든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진도 받아 마땅한 그릇이었어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안에서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택하여 주신 은혜를 
헛되히 만드는 걸림돌(자기 의)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


주1)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은 믿도록 결정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도록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노력이나 선택을 하지 않아도 
믿기로 되어있는 사람은 믿을 것이고 
믿지 않기로 예정된 사람은, 우리가 아무리 믿음을 가지도록 노력, 기도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없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요, 옳지 않은 판단입니다. 

이러한 시각에 빠지게 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이 임하셔서 능력을 주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에, 아무 의미가 없게 되죠. 

하나님의 예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그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 인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될 때 
더 깊은 전도와 선교의 열정을 가지게 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내가 저주를 받을 지라도 원한다'고 했고 

10:1절에도 '내 마음의 소원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참된 예정신앙은 선교적 신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 본문 롬9:1~18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보면서 
가질 수 있는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된 것인가? ..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불신앙 가운데 처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게 된 것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죠. 

대답은 '아니다!' 입니다. 왜냐면 9: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위 구절에 '이스라엘'이 두 번 나오는데,
전자의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유대인을 가리키죠. 
아브라함으로부터 혈통으로 유대인이 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스라엘' 이고,

후자의 '이스라엘', 즉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라고 할 때는 
혈통이 아닌 다른 요소로 인해 이스라엘이 된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두 가지 사례를 통해서 그것을 설명했죠. 
-이삭과 이스마엘의 예
-야곱과 에서의 예 입니다.

이 예들은, 어떤 인간적인 능력을 보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태어난 자녀인가?' 라는 기준으로 참 이스라엘을 선정했다는 거죠.

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육신의 혈통이 아닌, 약속을 따라 형성되는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이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계시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택하여 구원하시는 참 이스라엘은 
인간에게 있는 어떤 조건이나 능력이나 자질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조건, 즉 '약속을 믿는 자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적으로 에서와 야곱을 보면 
사회적인,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에서는 나름대로 그가 가진 매력이 있을 겁니다. 

영적으로 볼 때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서 장자권을 팽개쳐버리는 
그런 아둔함이 있지만, 
사냥을 좋아하고 이런 와일드한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매력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야곱은 음흉하고 교활하고 계획적이고 
자기 것을 가자기 위해서는 속이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런 인간적인 성품을 볼 때,

만약 사람들에게 선호도 투표를 한다면
어쩌면 에서에게 더 많은 표가 갈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어떤 인간적인 조건과 사람들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는, 인간적인 어떤 요소도 고려되지 않는다는 거죠. 

단 한 가지 조건만 고려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는가?' 

에서보다 야곱이 더 선하기 때문에 택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에게 보여지는 어떤 자질이 나타나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우리에게 오직 약속을 따라서 
그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에게만 
영적 이스라엘의 구성된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파기된 것이 아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은 육적인 혈통으로 되는 유대인들만 향한 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약속의 자녀들,
또 육적인 혈통밖에 있는 이방인가운데서도 
약속에 응답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말씀을 이루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논증이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바라보며 
그것은 하나님의 불의하심의 증거가 아닌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도 '결코 아니다!' 입니다. 

이 질문을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다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셔야지, 
일부 사람들만 선택하여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불의한 것 아닙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면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하시고 
모든 사람을 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셔야 하나님은 의로우시지 
왜 일부만 선택하셔서, 그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게 하셔서 믿게 하시느냐?

그런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은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천국의 가야 마땅한데 
하나님이 일부만 긍휼히 여기신다면..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이죠.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 진노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인데 

그 가운데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먼저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어찌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이 될 수 있겠느냐.. 라는 설명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 인간을 설명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이 인간 중심의 판단은 
인간 스스로 노력함으로도 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법을 만들고, 제도를 개선하면 
그리고 문화를 더 발전시키면 인간에게 나타나는 이러한 죄가 사라질 수 있느냐? 
여러분 이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보십시오. 
과학은 백년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고 
법과 제도는 더 치밀해졌지만... 그렇지만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되고 있습니까? 

인간의 죄는 더 심해지고 교활해지고, 그리고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괜찮은 존재가 아니라,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배고파서 저지르는 범죄보다, 배부른 자들이 저지르는 범죄가 더 많다는 겁니다. 
부족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가지면서 더 탐욕스럽게 되는 것 
이것이 세상에 나타나는 인간의 범죄에 끔찍함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보면서, 인간 스스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주2)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다시 오신다는 재림을 믿었던 제자들,
초대교회 주후 50~100년 사이에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질문을 던진 겁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도대체 언제 오시는 건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벌써 몇 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다시 오시지 않은 것을 보니... 예수님은 과연 다시 오시느냐?'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더딘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것이다.  벧후3:9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을 잊지 말라!'  벧후3:8

그러므로 지금 주후 2022년이 지나서 이 원리를 대입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시고 승천하신 지 얼마나 지난 거예요?
몇 년이 아니라, 이틀 조금 지난 거에요. 

하나님께는 2천 년이라는 시간을, 하나님의 이틀 처럼 참으시는 거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루만 더 참자' 그러면 3천년이 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도대체 오시는 거냐, 안 오시는 거냐? 안 오는 거 아니냐?' 
그렇게 따지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거에요. 

재림이 내일이 될 지도 모르죠. 그러므로 마틴 루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처럼 살고 
오늘 부활하신 것처럼, 그리고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