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1)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은 믿도록 결정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도록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노력이나 선택을 하지 않아도 믿기로 되어있는 사람은 믿을 것이고 믿지 않기로 예정된 사람은, 우리가 아무리 믿음을 가지도록 노력, 기도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없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요, 옳지 않은 판단입니다.
이러한 시각에 빠지게 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이 임하셔서 능력을 주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에, 아무 의미가 없게 되죠.
하나님의 예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그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 인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될 때 더 깊은 전도와 선교의 열정을 가지게 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내가 저주를 받을 지라도 원한다'고 했고
10:1절에도 '내 마음의 소원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참된 예정신앙은 선교적 신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 본문 롬9:1~18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보면서 가질 수 있는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된 것인가? ..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불신앙 가운데 처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게 된 것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죠.
대답은 '아니다!' 입니다. 왜냐면 9: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위 구절에 '이스라엘'이 두 번 나오는데, 전자의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유대인을 가리키죠. 아브라함으로부터 혈통으로 유대인이 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스라엘' 이고,
후자의 '이스라엘', 즉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라고 할 때는 혈통이 아닌 다른 요소로 인해 이스라엘이 된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두 가지 사례를 통해서 그것을 설명했죠. -이삭과 이스마엘의 예 -야곱과 에서의 예 입니다.
이 예들은, 어떤 인간적인 능력을 보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태어난 자녀인가?' 라는 기준으로 참 이스라엘을 선정했다는 거죠.
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육신의 혈통이 아닌, 약속을 따라 형성되는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이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계시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택하여 구원하시는 참 이스라엘은 인간에게 있는 어떤 조건이나 능력이나 자질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조건, 즉 '약속을 믿는 자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적으로 에서와 야곱을 보면 사회적인,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에서는 나름대로 그가 가진 매력이 있을 겁니다.
영적으로 볼 때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서 장자권을 팽개쳐버리는 그런 아둔함이 있지만, 사냥을 좋아하고 이런 와일드한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매력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야곱은 음흉하고 교활하고 계획적이고 자기 것을 가자기 위해서는 속이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런 인간적인 성품을 볼 때,
만약 사람들에게 선호도 투표를 한다면 어쩌면 에서에게 더 많은 표가 갈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어떤 인간적인 조건과 사람들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는, 인간적인 어떤 요소도 고려되지 않는다는 거죠.
단 한 가지 조건만 고려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는가?'
에서보다 야곱이 더 선하기 때문에 택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에게 보여지는 어떤 자질이 나타나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우리에게 오직 약속을 따라서 그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들에게만 영적 이스라엘의 구성된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파기된 것이 아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은 육적인 혈통으로 되는 유대인들만 향한 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약속의 자녀들, 또 육적인 혈통밖에 있는 이방인가운데서도 약속에 응답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말씀을 이루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논증이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바라보며 그것은 하나님의 불의하심의 증거가 아닌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도 '결코 아니다!' 입니다.
이 질문을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다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셔야지, 일부 사람들만 선택하여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불의한 것 아닙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면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하시고 모든 사람을 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셔야 하나님은 의로우시지 왜 일부만 선택하셔서, 그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게 하셔서 믿게 하시느냐?
그런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은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천국의 가야 마땅한데 하나님이 일부만 긍휼히 여기신다면..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이죠.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 진노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인데
그 가운데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먼저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어찌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이 될 수 있겠느냐.. 라는 설명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 인간을 설명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이 인간 중심의 판단은 인간 스스로 노력함으로도 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법을 만들고, 제도를 개선하면 그리고 문화를 더 발전시키면 인간에게 나타나는 이러한 죄가 사라질 수 있느냐? 여러분 이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보십시오. 과학은 백년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고 법과 제도는 더 치밀해졌지만... 그렇지만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되고 있습니까?
인간의 죄는 더 심해지고 교활해지고, 그리고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괜찮은 존재가 아니라,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배고파서 저지르는 범죄보다, 배부른 자들이 저지르는 범죄가 더 많다는 겁니다. 부족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가지면서 더 탐욕스럽게 되는 것 이것이 세상에 나타나는 인간의 범죄에 끔찍함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보면서, 인간 스스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주2)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다시 오신다는 재림을 믿었던 제자들, 초대교회 주후 50~100년 사이에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질문을 던진 겁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도대체 언제 오시는 건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벌써 몇 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다시 오시지 않은 것을 보니... 예수님은 과연 다시 오시느냐?'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더딘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것이다. 벧후3:9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을 잊지 말라!' 벧후3:8
그러므로 지금 주후 2022년이 지나서 이 원리를 대입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시고 승천하신 지 얼마나 지난 거예요? 몇 년이 아니라, 이틀 조금 지난 거에요.
하나님께는 2천 년이라는 시간을, 하나님의 이틀 처럼 참으시는 거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루만 더 참자' 그러면 3천년이 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도대체 오시는 거냐, 안 오시는 거냐? 안 오는 거 아니냐?' 그렇게 따지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거에요.
재림이 내일이 될 지도 모르죠. 그러므로 마틴 루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처럼 살고 오늘 부활하신 것처럼, 그리고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