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영생, 구원 얻은 성도의 증거 요일2:7~17 여러 설교 정리
본문을 대할 때, 대략 난감하게 됩니다.
두 세 번 읽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문맥의 흐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한 구절만 딱 떼서 해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전체 문맥의 흐름, 기승전결 같은 전개 내용은.. 파악이 쉽지 않죠.
그 이유는, 요한일서가
고대의 수사학 기법인 '부연법' 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용어 외울 필요 없음. 부연해서 계속 설명한다는 뜻인 듯)
요한이 삶과 진리와 사랑에 대해 전하고자하는 핵심개념을
순환적으로 반복해서 전하고 있기 때문이죠.
매번 보낸 각도나 강조점에 조금씩 차이를 둡니다.
◑1. 영생, 구원 얻은 사람의 증거는
<미운 사람이 없어지고 사람이 사랑스럽다> 2:7~11
요한일서를 쓴 목적을 대표적으로 한 구절만 집어 말하면 5:13절이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5:13
뒤집어 말하면, 당시에 예수님을 믿지만,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거죠.
그러면서 사도요한이 ‘영생, 구원이 있는 자는’ 그 증거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요,
-사랑이신 하나님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이 둘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과 같죠.
그래서 요한일서에는 위 2가지가 계속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1:7절에도 ‘하나님은 빛’이 나왔는데
본문 2:8절에도 ‘참 빛’이 나오죠.
이렇게 같은 주제를 반복하는 것은,
어떤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문학기법’의 하나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로 하여금 정신 차려 성경을 읽게 합니다. (흐름이 헷갈립니다)
▲7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바 말씀이거니와’
요한일서에는 다음과 같이 수신자들을 향한 다양한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아이들아’, ‘형제들아’ 등.
지금 사도요한은 나이가 90세 전후입니다. 아주 연로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아이들아’, ‘형제들아’ 등은
사랑하는 자들을 부르는 당시의 일종의 애칭입니다. *요즘은 허니, 스윗하트
7절에서, 이처럼 애정 어린 부름에 이어 그가 가장 먼저 전한 내용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요13:34)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옛 계명이란, 구약의 계명을 뜻합니다.
레위기에도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죠. 레19:18
▲8절,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새 계명은 ‘사랑’이죠.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렇게 이 단락(2:7~11절)에서 ‘형제 사랑’을 강조하는 이유는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고 있는 그들에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면, 너희는 영생 구원 받은 증거이다’라는 논지로
사도요한은 본 서신을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주제가 반복해서 나옴)
2:1~2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범치 않는다’고 했고,
2:3~6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발적으로 계명을 지킨다’고 했는데,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그 첫 번째 계명이 무엇이냐?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는 거죠.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구원을 받은 성도이고,
9절에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구원을 못 받은 증거라는 거죠.
▲9절,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는 말은 빛이신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고 산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형제 자매 중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실제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과의 사귐, 주님과의 사랑이 없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10절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거리낌으로 번역된 원어 ‘스칸달론’은 ‘덫’, ‘걸림돌’을 뜻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동사로 쓰일 때는 ‘실족하게 하다(벧전 2:8)’,
명사로 쓰일 때는 ‘올무(계 2:14)’ 등으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즉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거하기 때문에,
실족할 일이나 걸려 넘어질 장애물이 없다는 거죠.
▲11절,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미워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눈이 가리워 있는 것입니다.
눈이 왜 가리워 있습니까? 마귀가 눈을 가리운 것입니다.
고후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러므로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정신차려야 합니다.
이 말씀이 불편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다가 미워할 수는 있으나
계속 오래도록 미워하는 사람은.. 구원을 못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괜히 미워하겠습니까?
미워할 만한 이유가 있으니 미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그저 미워하는 사람이라고만 하였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왜 문제일까요?
미움, 그 자체가 영적인 뿌리가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살 정도로 잘못한 사람도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미움의 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움의 영에 사로잡히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저 사람 내 버려두면 큰 일 날텐데.” 걱정하는 사람은
미움에 사로잡힌 자신이나 걱정해야 합니다.
미워할수록 악은 더 힘을 받습니다. 악한 영의 양식이 미움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임원훈련에 오셨던 조현삼 목사님께서 교인들이 싸우기에
왜 싸우냐고 하니 “다 잘해 보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싸우지 말고 보통만 합시다!” 하고 외쳤답니다.
아직도 미운 마음을 풀리지 않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에게 말씀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미운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
화 낼만하니 화를 내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셨다면
십자가가 가능했겠습니까? 저나 여러분이 구원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속죄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미워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구원도 잃어버릴 것입니다.
▲적용/ 어느 목사님은 시37편을 묵상하다가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시편 37:1절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하시고는
10절에 가서는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악을 행하는 자가 눈 앞에서 다 사라진다는 약속은 믿어지지 않는 약속인데,
이 약속이 목사님께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어느 순간 주변을 아무리 자세히 살펴봐도 악인이 눈에 띄지 않는 것입니다.
미운 교인이 다 사라진 것입니다. 그 때가 어떤 때일까요?
실제로 교인들이 다 착해져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마음이 은혜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미움이나 비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입니다.
큰 일이 벌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자세히 살펴도
악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2. 성장하고 계십니까? 2:12~14
12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3. 영생, 구원 얻은 성도의 증거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2:15~17
▲15절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공해야 되겠다는 꿈과 소원을 가진 사람에게는
현실도피적인 생각이 아니냐, 염세주의적 생각이 아니냐,
소극적 세상관이 아니냐? 하며 불만스러울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결혼하는 신부에게 “이제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 안돼”,
신랑에게 “이제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안돼.” 하는 말은 어떻습니까?
옳은 말입니다.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탕자에게 “세상을 사랑하면 안돼.” 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노아가 가족들에게 “세상을 사랑하면 안돼.” 할 때는 어떻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롯이 아내와 딸들에게
“우리가 비록 소돔과 고모라에 살지만
이 땅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하면 안돼.” 할 때는 어떻습니까?
이단들이 횡행할 때가 될 때
“아무 집회나 모임이나 가면 안 돼!”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안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이해되고 통하고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진정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신부는
신랑 외에 그 어떤 다른 대상도 당연히 사랑하지 않게 되죠.
15b절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는가? 세상으로부터 왔는가?
분별해야 합니다.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적용/ 제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마음에 돌덩어리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설교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사랑하는 선교사님의 글 하나를 읽게 되었습니다.
조동욱 선교사님은 인도 실리구리에서 16년간 사역하고 계십니다.
이제 60세도 넘었습니다. 지난 한달간 한국을 다녀 가셨습니다.
그런데 인도로 떠나시기 전날 페이스 북에 글을 하나 올리셨습니다.
장로수련회 중에 이 글을 읽으며 저도 울고 장로님 권사님들도 다 울었습니다.
우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목은 [내가 인도로 되돌아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였습니다.
제목에서 마음이 쿵 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한 달 동안의 모국 방문을 마치고 인도 선교지로 들어가기 하루 전날
새벽기도 시간, 이젠 인도로 돌아가야지 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 갑자기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인도라 생각하니 모든 것이 아찔해진다.
인도의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먼지 쌓인 시골 길을 걷기엔
나의 건강이 너무 약한 듯하다. 에어콘이 고장난 선교 짚차를 타고
산골을 다니기엔 이제 너무 버거울 것 같다.
무면허 운전사가 몰던 차에 부딪혀 피투성이가 된 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길 바닥에 내동댕이 쳐 누워있던 그 때, 그날따라 궂은 장마비는
왜 나의 마음을 그토록 서글프게 적시었든지, 생각할수록 인도는 무서워진다.
내가 왜 그곳으로 다시 되돌아 가야 하나?
나는 한 때 낯선 인도 땅을 마치 정든 고향 길 걷듯이 아무 두렴없이 다녔다.
그런데 지금 엉뚱한 생각이 내 마음에 자리 잡는다.
‘그래 인도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엉뚱한 물음들이 쉬지 않고 솟아난다.
‘내가 반드시 인도로 되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
‘깊이도 알 수 없는 구렁텅이 같은 힌두교와 씨름하며
숲 속에 빽빽이 들어선 나무처럼 앞길을 가로 막는 인도 정부와
힌두교 열심당원들을 헤치고 힘들여 그 땅에 들어 가야 할 이유가 뭐지?’
인도 땅을 벗어나는 데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가장 먼저 가족들이 떠오른다.
‘선교사 가족이라는 명분?
난 이미 그런 명분이나 명성이란 것과 담을 쌓은 지는 오래거든..
인도에 남아 있는 아내? 염려할 것 없어.
전화 한 통이면 언제든지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지.
아이들? 그들은 선교지에서 겪을 것은 모두 다 겪고 고등학교를 마친 뒤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지 않냐?’
‘인도에 이미 뿌려 놓은 사역들은 어떡할 것이냐고?
걱정할 것 없어.
그 모든 것들은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냐?
신학대학을 설립한 것이며 그리고 학장이란 자리?
그건 언제든지 버릴 수 있어!
오히려 무거운 짐을 벗는 홀가분함이 더 할 걸.
개척해 놓은 교회들은 어떡하냐고?
이미 세워둔 목회자들이 잘 이끌어 나갈거야...’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음도 편안해 지는 것 같다. 주님께 기도했다.
아무래도 그 분의 확답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주님, 이제 인도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죠?
주님, 한 마디만 그렇다고 말해 주세요.
내가 인도에 들어 갈 이유가 없다고. 그만하면 잘 했다고 말해 주세요.’
그러나 주님은 엉뚱한 질문을 내게 던지셨다.
‘너 정말 인도로 되돌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정녕 그 땅을 떠나고 싶으냐?
그래 네 맘대로 생각하고 쉽게 떠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좋아, 네가 인도를 떠난다면 나도 인도를 떠나랴?’
나는 깜짝 놀랐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계속 속사포처럼 물으셨다.
‘네가 인도를 떠난다하여 나도 인도를 떠날 것 같으냐?’
순간 아찔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인도를 포기하지 아니하심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인도를 포기한다고?’
생각이 여기에 다다르자 나는 큰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하나님, 아닙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지 아니 한 인도,
하나님이 버리지 않은 인도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순간 또 다른 강한 성령의 음성 들려 왔다.
‘네가 자신감이나 용감함 때문에 인도를 다시 밟아서는 안된다.
네가 인도로 되돌아 갈 단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수많은 인도의 영혼들 때문이다.
오직 그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 위해서 뿐이다.’
갑자기 내 속 깊이 통곡이 터져 나왔다.
‘주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주님, 아무 조건없이 제가 인도로 들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는 땅과 그 땅의 영혼들, 그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들어가겠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그 땅을 다시 밟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처음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감격하며
황소같은 목소리로 기도하며 뜨거운 눈물로 교회 마룻바닥을 적시던
그 기도를 다시 올릴 수 있었다.
조동욱 선교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분명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도 장로님들도 수련회가 마쳐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인도로 돌아가는 선교사님의 마음같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만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세상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하여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담쌓고 살 곳도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의 사명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여러분, 미운 사람은 없어졌습니까? 세상이 선교지처럼 보입니까?
그 눈이 뜨이기를 기도합시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 외에는
미움과 세상에서 우리를 건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기 힘쓰시기 바랍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예수님 나의 왕이십니다.“ 외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우리 마음에 오셨습니다. 반드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랑의 눈이 뜨일 것입니다.
“주여,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 눈을 열어주소서!”
...............................
주1)
요일2장에 보면,
요한은 신자들에게 서신을 쓰면서
신자들의 영적 생활을 세 단계로 나누는데요,
1단계는 12절에 ‘자녀들아’
그다음은 ‘아비들아’ 그리고 ‘청년들아’ *2:13
두 번이나 그는 반복해서 세 단계로 나눕니다.
‘자녀들’ ‘청년들’ ‘아비들’
영적으로 아기들,
영적으로 청년들,
영적으로 아비들,
사도요한은 영적인 아버지들에겐, 가장 성숙한 것을 말했고,
자녀들에게는, 그저 ‘너희 죄가 용서받았고,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인줄 안다’ 그 정도로만,
청년들에겐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있음으로 튼튼하다.
너희는 사탄을 이겼다. 너희 죄가 용서받았고, 너희가 사탄을 이겼다’
그럼 무엇이 가장 높은 영적인 단계입니까?
영적인 삶의 가장 높은 레벨이 무엇입니까?
13절에, ‘너희가 아버지로서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입니다.
14절에도 또 나오죠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여러분은 가장 높은 레벨의 기독교인의 삶을 아십니까?
그것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입니다.
즉 영원하신 하나님을 (절실히)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하신지를 (절실히)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실히) 그 분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아버지, 어머니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
- 현재글요일2:7~17 영생, 구원 얻은 성도의 증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