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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3:2절의 해석상 중대한 오해 (중요)

LNCK 2022. 12. 19. 20:13

◈요일3:2절의 해석상 중대한 오해 (중요)        요일3:2~3           편집장 글

 

*관련글 : 요일2:6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 (tistory.com)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요일3:2절의 해석 상 중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2

이 구절에 의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우리 성도들이 다 예수님처럼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에,

애써 성화의 몸부림을 치지 않아도 된다.. 라고 은연 중에 그렇게 믿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고,

성화는.. 몸부림 친다고 또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완벽해 질 수 없으며,

오호라 우리는 곤고한 사람이며...

율법을 한 가지만 범해도, 모든 율법을 다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식적으로) 믿으며 살다가

성화는.. 몸부림 쳐도 안 되는 것이니, 할 수 없이 포기하고

 

나중에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기다리면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2

이 말씀에 의거해서

그때 비로소 성도의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 이렇게 오해합니다.

 

그래서 ‘믿음’만 강조하고, ‘성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는 믿으니까 구원받는 줄 알고, 철석같이 믿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요일3:2절에 대한 중대한 해석적 오해입니다.

 

◑그럼 요일3:2절의 올바른 해석은 무엇입니까?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이 구절은,

우리의 육체가, 부활체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성품이, 예수님처럼 온전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근거를 한 가지씩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바로 이어지는 구절인 3절을 보십시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3:3

 

만약에 2절을, 재림 때 ‘자동 성화’로 이해한다면,

3절에 ‘자기를 깨끗하게 할’, 즉 성화를 이룰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재림 때까지 어떻게 하든지 버티고 기다리기만 하면

자동 성화에 이를 터인데,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3:3

라고 성화를 강조해서 말씀한 것은,

성도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성화의 분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2절이 '자동 성화'를 가르치는 구절이라면

이어지는 3절에서 '성화를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러나 3절에서 '성화를 강조'한 것을 볼 때,

2절은 '재림 때 자동 성화'를 가르치는 구절이 아니다.. 라는 거죠.

 

▲2. 이게 성경 전체 맥락과도 맞습니다.

예수님 재림 때, 성도가 자동적으로 예수님처럼 성화될 것을 믿으면,

신약성경에서 성화를 강조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성화 sanctification 를 강조하는 구절은

아마 수 십 ~ 많게는 수 백 구절에 이를 것입니다.

성경에 거의 매 장마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든 성경의 계명들을 일절 다 무시하고,

요일3;2절을, 자의적으로 엉뚱하게 해석해서

‘믿으면 구원받는다. 그걸로 끝!’ 해서는 큰 일 납니다.

 

▲3. 본문 요일3:2절과 비슷한 구절이 이렇게 나옵니다.

 

빌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재림 때 예수님은, 우리 <몸>을 변화시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키십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체와 같이 영생하는 <몸>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여기에 <우리 영혼, 우리 마음, 우리 인격>을 변화시키신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요일3:2절과, 빌3:21절이 같은 교훈을 주는 것이라면,

요일3:2절은, <몸의 변화, 몸의 부활>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 영의 변화, 성품의 변화가 아니라는 뜻이죠.

 

▲4. 예수님의 재림 때,

우리 <몸>만 예수님처럼 변화되고, 변화산상에서 처럼요.

우리 <혼, 우리 인격>은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면

 

재림 때, 만약 우리 <혼, 우리 인격>까지 예수님처럼 싹 다 변화되어버리면

내 아이덴티티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가 그냥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죠.

 

만약 그렇게 예수님처럼, 내 성품까지 자동 변화되어버린다면

만세 전에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런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지옥에서도 부활해서 영원히 삽니다.  요5:29

(천국이나 지옥에서) 부활한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 인격, 내 성품은.. 내 영혼의 지문과 같습니다. 나의 아이덴티티 이죠.

그런데 재림 때, 내 성품이 예수님처럼 변화되어버리면..

내가 증발해 없어져 버리는 거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영감설에도 ‘유기적 영감설’이 성경적이라 하죠.

성령이 성경 저자들을 영감(감동)하셔서, 성경을 쓰게 하셨지만

그들의 기질, 성품.. 이것들을 다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게 완전 사라진 게 아닙니다. 천국에서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성화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아예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서도 계속 싸우고, 거짓증거하면... 거기가 천국이 아니게 되죠.

그래서 그런 사람은, 아예 천국에 못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믿는데, 그 십자가 공로를 진실로 믿는데,

이 땅에서 성화를 이루지 못하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개신교회는 설교자가 ‘구원의 확신을 믿습니까?’ 하면

회중들 모두는 다 ‘아멘!’ 합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설교자가 ‘구원을 확신하십니까?’ 하면

회중들 대부분은 침묵한답니다. 개신교와 정반대죠.

 

한마디로 말하면, 각자 반쪽 진리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성경에 ‘정혼’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나타나 있습니다.

‘약혼’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칭의, 즉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정혼(약혼)’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아직 혼인잔치가 정식으로 치러지지는 않았습니다.

성도의 혼인잔치는, 신랑이 오시는 재림의 날에 치러집니다. 마22장, 25장

 

그러니 오늘날 성도의 상태는

<정혼을 했으나, 완전히 신부가 되지는 않은 상태>인 거죠.

그리고 약혼한 신부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 한 가지 정절, 성화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설교자의 ‘여러분은 구원 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멘! 네, 내 구원을 확실히 믿습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그건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마치 자기가 재림 때 있을 ‘진짜 결혼식’을 마치고 끝낸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지금은 ‘정혼(약혼)’ 상태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확실히 되었다고 뻐기면 안 됩니다.

까딱 잘못하면, 파혼될 수도 있으니까요!  성화가 안 되면 파혼됩니다.

 

신부가 정절을 잘 지키면, 파혼이 안 되고 결혼이 성사되겠지만

신부가 정절을 안 지키면, 파혼이 되고 신부는 버림받을 것입니다.

 

개신교인들은 ‘정혼한 상태’를 마치 ‘결혼한 상태’로 오해해선 안 되죠.

너무 구원의 확신을 100%가지면 안 됩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반대로 가톨릭 교인들은 ‘구원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에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은

‘자신이 정혼한 상태라는 것마저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확신이 아주 쉽게 흔들릴 수 있는 거죠.

 

그러므로 올바른 개념은,

성도는 이신칭의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지되,

그것이 ‘정혼’의 상태이지,

‘완전한 혼인’이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신칭의 이후에는 '성화 구원'을 이루어가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복음이요, 성경이 전체적으로 가르치는 구원론입니다.

 

요3:16, 5:24절 등은 '칭의구원'만 강조한 거죠.

매 번 전체 구원론(칭의+성화+영화)을 다 강조할 순 없죠.

  

성경에,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성도가

믿음을 가졌던, 회개를 확실히 했건, 무엇을 했던지 간에

‘완전한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증거하는 구절은, 단 한 구절도 없죠.

아직 재림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는 많죠. 요즘은 지역교회가 목회자를 청빙할 때도

3년 정도 유예기간을 둡니다. 그래서 3년을 지켜보면서

큰 흠결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할 경우에, 정식 담임목사가 됩니다.

 

그러면 그 전에 3년 동안은 ‘담임목사’는 아닌가요?

담임목사가 맞죠.

그러나 아직 정혼한 관계이지, 완전히 결혼한 관계는 아니라는 거죠.

 

이런 예를 드는 이유는 “성화의 필요성”을 마땅히 강조하기 위해서죠.

요일3:2절을 근거로 해서,

성도가 재림 때, 예수님처럼 자동 변화될 것이기 때문에

 

‘성화는 필요 없고, 그냥 이신칭의로 구원받겠다’ 하는 것은

정혼은 했으나, 제멋대로 사는 신부와 같은 거죠.

 

성도는 신부가 맞습니다. 신부가 아닌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가 맞죠.

그러나 아직 완전히 결혼한 게 아니니까,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고요,

정말 정결하신 신랑의 아내가 될만한 자격을 갖춰야되는 거죠.

 

마치 에스더가 페르시아 궁전에 왕의 아내 그룹으로 들어간 후에

자기 몸을 깨끗하게 단장하듯이,

그리스도와 정혼한 신부는, 그런 정결케 하는 기간이 필요한데

그게 바로 ‘성도의 성화’입니다.

 

▲2. 그래서 요즘은 ‘칭의구원’ 과 ‘성화구원’ 이렇게 나눠서 봅니다.

과거에는 ‘칭의구원’ 한쪽 면으로만 구원론을 설명했습니다만,

 

이제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칭의구원’을 받은 후에는 그 즉시로 ‘성화구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성화구원’의 증거가 나타나야,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거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빌2:12

성화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편지의 수신자들인 빌립보 교인들은, 이미 ‘칭의구원’은 받았거든요.

그렇지만 재림 때까지 성화구원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빌2:12에서 ‘이루라’의 헬라어 뜻은 build up 이라고 합니다.

‘빌드 업’이란 조금씩 조금씩, 차츰 차츰, little by little 되어짐을 뜻하죠.

 

즉 성화는.. 하루 아침에 확 되는 게 아니고,

조금씩 빌드 업 되는 것입니다.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요즘 헬쓰장에서 모두들 ‘몸짱 만들기’가 유행입니다.

청년들이 하루에 2~3시간씩 막 운동하는 것을 봅니다.

왜냐면 근육이라는 게,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거든요.

몇 달~몇 년을 꾸준히 계속해야, 차츰 ‘빌드 업(이루어지는)’ 것이거든요.

 

이제까지 개신교의 구원론은 ‘칭의구원’에만 초점이 맟춰져 왔습니다.

그리고 ‘성화구원’은 마치 그게 ‘행위구원’인 것처럼 무시해 왔죠.

 

그러나 이제 신학이 정립되면서

온전한 구원은 ‘칭의구원’ + ‘성화구원’임을 강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영화구원’은 천국에 가서 이룰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관련 없죠.


그래서 롬1~4장은 칭의구원을,

이어서 롬5~8장은 성화구원을 설명하고 있음을

우리는 유의깊게 성경을 봐야 하겠습니다. '칭의구원'만 아닙니다.

 

칭의구원이 마치 구원론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알고 가르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요일3:2절을 오해해서,

성도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자동 성화되는 것처럼 기대하는 것도

그 해석을 자의적으로 틀리게 한 것입니다.

 

성화구원(성화의 과정)이 필요없다면

성경이 애써 힘들게 성화를 강조할 필요가 없는데,

성경에는 훨씬 많은 분량이,

칭의구원보다, 사실 성화구원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3. 혹자는 ‘영의 구원’과 ‘몸의 구원’을 분리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신칭의를 믿음으로 신앙고백을 통해 구원 받는 것은

영의 구원’을 받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몸의 구원’은 아직 받지 않았다고 봅니다.

 

‘몸의 구원’..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병들기 쉬운 몸을 가지고 있죠.

그 ‘몸의 구원’이 온전히 일어나는 때는.. 재림의 때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 몸이 영광의 형체와 같이 변화되는’

요일3:2절이 성취될 것입니다. 그 구절은 ‘몸의 구원’을 뜻하죠.

 

그래서 ‘영의 구원’과 ‘몸의 구원’으로 나눠서 설명하는 것도

‘이신칭의’ 와 ‘성화구원’ 개념과 같은 구조입니다.

 

‘영의 구원’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즉시로 받지만

‘몸의 구원’은 그 이후로 죽을 때까지 이루어가야 한다는 거죠.

  ☞더 자세한 내용은 영과 육의 관계 P2 (tistory.com) 을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