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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2:6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

LNCK 2022. 12. 14. 21:17

◈요일2:6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                        여러 설교 정리

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한일서의 개요>
1:1~4  - 서론 ‘하나님과의 사귐’
1:5~3:10 – 1대지 ‘하나님은 빛이시다’    
3:11~5:17 – 2대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5:18~21 - 결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을 앎(사귐)’

위 개요에서 보듯이 요한일서는 서론과 결론이 거의 일치합니다.

그 서론과 결론의 중간에 
1대지와 2대지가 존재합니다. 


◑서론 / 요한일서는 로마서와 대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 2:3~4절에 ‘믿으라’고 하지 않고, ‘계명을 지키라’ 말씀하기 때문이죠.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이렇게 요한일서는 ‘행위구원’을 강조하는 것처럼 얼핏 그렇게 보입니다. 오해죠.

▲왜 우리는 로마서는 로마서대로, 요한일서는 요한일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요?

왜 우리는 ‘로마서 라는 안경’을 끼고,
나머지 65권 모든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고, 
그 ‘로마서 – 이신칭의’의 틀에 억지로 끼워맞추려고 하는 걸까요?

일단, 로마서가 ‘믿음’을 강조하는 반면, 
요한일서는 ‘하나님과의 사귐과 계명을 지킬 것’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를 추정컨대, 배경이 다른 것입니다.
로마서는 이방인 세계의 신자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로마 교회에는, 유대인 신자들도 있었겠지만, 
헬라인 신자들, 로마인 신자들, 그 외 이방인 신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은 배경을 갖고 있었죠.
뭐 제우스를 믿었든지, 자기 민족 전통의 신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인 새신자들이 가득한 로마교회에 편지할 때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같은 믿음을 강조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는, 로마서보다 약 40년 뒤에 쓰여졌습니다. *AD55, 95년
그러니 교회 다닌 연조가 제법 오래 된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니
‘믿으라’는 권면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믿은 이후에 ‘신앙의 성숙’이 필요했던 거죠.

참고로, 로마서도 1~4장은 ‘믿음’을 강조하는 반면
로마서 5~8장은 ‘성화’를 강조합니다. 
로마서 전체가 ‘믿음’만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를 읽을 때, 다른 66권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자꾸 ‘이신칭의’ 틀로만 요즘 말로 ‘프레임 씌우기’ 하지 말고,
그냥 요한일서가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지, 귀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을 정육면체라고 가정한다면, ‘로마서-이신칭의’ 하나의 관점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그 관점이 틀린 게 아니고 맞지만, 
그 외 다양한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거죠.

△K. P. Yohannan은 본문을 통해 ‘예수 스타일’의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약성경의 '예수 스타일의 삶'을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방향성이 지금 속히 회복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스타일>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냥 단순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본 받는 삶입니다.

왜냐면 요일2: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한 마디로,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 스타일로 살아라는 것이죠.

예수님을 단순하게 따르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성경에 예수님이 사신 그대로, 나도 살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만 이 땅에 오셨다면, 
공생애 3년을 사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을 살지 마시고, 3개월만 사시고, 
십자가에 빨리 죽으실 수록,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공생애를 3년 사신 것은, 
내 삶을 본 받으라.. 입니다.

본문 요일2:6을 보십시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
단순하게 예수 따르기 / K. P. Yohannan 에서 가져옴


▲요일2:6절은, 잭 푸닌 목사의 단골 설교본문이기도 합니다. 
잭 푸닌의 설교에는 종종 요일2:6절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본받아 살 것’을 강조하고, 독촉하기까지 합니다.
  
"제 Zac Poonen 가 거듭나고 세례 받은 후에도
저는 용기를 잃었고 패배했고 눌렸으며
어두운 분위기에서 지냈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정상인줄 알았습니다.

왜냐면 제 주위의 신자들을 보니까
다 그렇게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에 제가 성경을 한 구절 읽게 되었습니다.

요일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예수님)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리빙바이블에는 
‘누가 자기는 크리스천이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살게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도전입니다.
당시 제게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살아라’고
도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보니까
성경은 진리잖아요.

제가 성경에서 예수님의 삶을 보니
그 분은 결코 삶이 불안정하셨던 적이 없으셨어요.

예수님은 결코 기분이 우울하시거나 눌리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시더라도 낙심하신 적이 없으셨어요.

그 분은 우리들보다 더 큰 문제들을 직면하셨잖아요.

제가 보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안에서
절대적으로 안정을 누리셨습니다.

제 생각인데 마지막 만찬때였어요.
예수님은 알고 계셨죠.

몇 분 후에는 겟세마네 동산에 가실 것이고
잠시 후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도망갈 상황이었죠.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남은 11 제자에게 말씀하시길

요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이 거기서 가지신 안정감이 보이십니까?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려도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하시길 ‘나는 혼자 있지 않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모습의 삶을
저와 여러분이 그대로 본받아 살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에서 가져옴

 

▲그런데 잭푸닌의 이런 신학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자는 체질적으로 ‘결코 예수님을 본받아 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어디 견줄 것을 견주어야지,
어떻게 ‘오호라 곤고한 사람’에게 
‘완전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살라는 것이냐? ..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거죠.
(아마 현재 기존교인들 가운데 95%는 이런 반박 의견에 동의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반박, 또는 변증은

1) 본문 요일2:6절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성경이 명백히 명하고 있는데, 잭푸닌은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것이죠. 

앞서 인용한 K. P. 요하난도 ‘단순하게 예수님을 따르라’고 설교했죠.
요일2:6절이 그렇게 말하면, 그냥 그대로 순종하라는 것이죠.

2) 본문 요일2:6절과 비슷한 구절이 마5:48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많은 사람들은, 위 구절 앞에 좌절하고 맙니다.
‘사람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 있어?’
그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럼 예수님이 틀린 말씀을 하신 건가요? 그건 아니죠.

여기서 ‘온전하라’는 말은 ‘완벽하라 perfect’는 뜻이 아니고
‘성숙하라 mature’는 뜻입니다. 헬라어 텔레이오스가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성숙할 수 있잖아요.'완전하라’의 의미 (tistory.com)

여기서 뿐만 아니라, 성경 곳곳에는 ‘신앙이 장성할 것, 성숙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에도 나오죠.

2:5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텔레이오, 성숙

거듭남은 갓난아이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죠.
spiritual baby에서 앞으로 점점 성숙하고, 장성해지는 것은 당연하죠!

그런데 만약 누가 ‘로마서-이신칭의’ 신학에만 꽁꽁 묶여 있다면
로마서 1~4장만 알고 있고, 나머지 성경은 찢어서 버린 꼴이 되는 거죠.

이신칭의로 거듭난 신자가,

그 후로 계속 spiritual baby로 남아있겠다는 겁니까? *이신칭의만 붙들 때

오히려 성숙=성화=온전의 과정으로 가는 것이 더 자연스럽죠. *롬5~8장 

3) 이 점에 대해서 ‘영의 구원-몸의 구원’ 관점으로 설교하기도 합니다.
영과 육의 관계 P2 (tistory.com)

교회에서 ‘영의 구원(칭의)’만 강조하는데, ‘몸의 구원(성화)’도 있다는 거죠.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빌2:12


◑믿음은 곧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을 믿으라’를 강조했다면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래서 계명을 지키라’를 강조하죠.  4:20, 21, 5:2, 3절 등

둘을 따로, 혹은 상반된 구절로 볼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요.

본문 요일2:6 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가능하고, 오히려 기쁨이죠.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즘 커플티, 커플모자, 커플링.. 왜 서로 똑같이 되려고 합니까?
사랑하니까 서로 닮고 싶어지죠. 그리고 실제로도 서로 닮아갑니다.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이 구절도 얼핏보면 ‘믿음’을 강조하는 로마서와 대치되는 것 같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 계명들을 지키고...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뭘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걸어가신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요일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여러분, 아마 당시에 구약에 능통했던 바리새인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보다 구약을 더 잘 가르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구약성경을 그들보다는 많이 공부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가르치는 말씀을 그들은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설교만 잘 하는 설교자에 대해서 
그리 깊은 인상을 받지는 마십시오.

그분이 진정 예수님의 제자인지, 삶으로 설교하는지.. 
깊이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칫 잘못하면 바리새인을 따라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자신도, 설교만 잘 하고, 성경만 잘 가르치는 데 
너무 목표를 두지 마십시오.

그것보다는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로 살겠다는데.. 더 강조점을 두시고
자기 인생을 그 방향으로 항해해 나가시면 
나중에 결코 실패가 없을 것입니다.”
율법사가 아니라 제자가 되라 (tistory.com)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