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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5:6~13 구원의 확신

LNCK 2022. 12. 24. 22:02

구원의 확신 (요일 5:6-13) - YouTube

◈구원의 확신          요일5:6~13

요한일서 가 기록된 목적 중 한 가지는, 
우리에게 확신을 가져다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내가 진정 구원 받았는지를 깨닫고 
확신가운데 거하게' 하기 위하는 것입니다. 

요일5:13절이 바로 그 중요한 목적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말)

그러나 이 서신을 읽는 분들은,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불신자들이 아니었어요.
이미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영혼들이었다는 거죠. 

오늘날에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그 구원얻는 믿음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그 확신 가운데 거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겁니다. 


◑구원 받은 것과, 구원의 확신 하는 것은 별개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라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죠.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참된 믿음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도 구원받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 자신도 유아세례를 받고 어려서부터 교회 안에서, 믿음 안에서 자랐지만 
고등학교 때 누군가 저에게 그 구원의 확신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확신이 없었어요. 순간 제 자신이 충격을 받았죠.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저에게 확신을 질문했을 때는, 대답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확신이 없었던거죠. 그래서 너무 불안했습니다. 

그때가 고2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점심시간에 기도실에 갔습니다. *미션스쿨
학교 기도실에 가서, 점심을 먹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구원의 확신을 달라고.. 예수님을 좀 확실히 보게 해 달라고... 

그 당시에 제가 한 끼를 안 먹는다는 것은 굉장한 거였어요. 
그때는 아침 먹고 나면, 1, 2교시 끝나도 배고파서, 도시락을 먼저 먹던 때였죠.

당연하지만, 제가 한 끼 먹지 않고 열심히 기도 했는데도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배만 고팠을 뿐이에요. 

당시 저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고, 믿음 생활 하고 예배 드리고 있었죠. 
그러나 확신은 없었던 것은 분명 해요. 

그 확신을 한 2년 후에, 제가 대학생 때, 
성령의 세례와 함께 큰 확신이 제게 임했어요.

믿음과 확신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존 라일 이라는 청교도 목회자는 믿음과 확신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이 뿌리라고 한다면, 확신은 꽃과 같다.'

뿌리 없는 꽃은 있을 수 없지요. 
그러나 꽃이 없는 뿌리는 있을 수 있습니다. 

1) 믿음은, 군중을 비집고 들어가 살그머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과
같다고 한다면, 

확신은, 자신을 돌로 치려하는 사람들 앞에서 
'보라,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고백했던 
스데반과 같습니다. 

2) 믿음은 십자가 상에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생각해 달라'고 
간청했던 십자가 상의 강도와 같다면, 

확신은, 그 온 몸이 다 헐어서 먼지더미 위에 앉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도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신다'고
고백했던 욥과 같은 것입니다. 

3) 믿음은,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할 때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부르짖었던 
베드로와 같다면, 

확신은, 훗날 그 베드로가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라고 
외쳤던 베드로와 같습니다.  행4:12

4) 믿음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라고 간청했던 
떨리는 음성과 같다면, 

확신이란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라고 담대히 외치는
음성과 같은 것이죠. 

5) 믿음이란, 다메섹에 유다 집에서 눈이 먼채 홀로 외롭게.. 
그리고 충격과 슬픔에 잠겨 기도하던 사울과 같다면, 

확신은, 연로한 죄수의 몸으로 자신의 무덤을 생각하며.. 
그러나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라고 
고백했던 바울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과, 구원의 확신 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확신하고, 그 그 가운데 거하고, 
그 확신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약속"은, 강한 "확신"의 믿음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극히 연약한 믿음에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주 작은 불꽃도 진짜 불이죠. 
한 방울의 물도, 저 바다에 있는 물과 같은 물인 것입니다. 

가장 작은 믿음도, 가장 큰 믿음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얻게 하는 진짜 믿음입니다. *진정 회심한 경우

굵직한 가지만 아니라, 작은 싹도 
뿌리로부터 수액을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가지에 열매가 없어도, 뿌리에는 생명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신이 없으면 못 받는다' ...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아브라함의 예

성경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이 처음 나오는 곳이
창15:6절 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죠. 

창15:5~6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구절이 첫번째로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죠.

하나님은 노아를 의롭게 보셨다는 구절도 있지만, 
노아가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은 아니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구절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는 이 시점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확신있는 믿음?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별을 보여 주셨냐면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이렇게 건의 했죠. 

창12장에서 부름받은 아브라함이, 한 10여년 지났을까요?
창15장 시점에, 아직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무런 징조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자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한가 보구나' 그래서 두 사람은 아이디어를 낸 거예요. 

그래서 '다메섹에서 데려온 엘리에셀 이란 종을 양자로 삼겠습니다.' 
양자도 그 당시 문화에 자식이니까요. 
'하나님, 양자로 들이는 방법을 통해서 자손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건의를 한 거예요. 

그것은 불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이 원하시는 않는 아이디어가 나온 거죠. 

그때 하나님께서 밖으로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주십니다. 

'네가 저 별들을 보느냐? 네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그 순간, 별을 보니까 믿음이 생긴 거예요. 

이 당시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보고 믿는 믿음, 
시청각이 필요했던 믿음이에요. 연약한 믿음입니다. 
뭔가를 봐야 믿을 수 있는... 

약속만으로 믿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뭔가를 보여주시고 
징조를 보여 주면 믿음이 생기는 그런 상태의 믿음! 
그것은 연약한 믿음이요. 

그 이후에도 보면, 창16장 17절에 계속 이어서 
아브라함과 사래가 불신앙의 모습을 계속 보여주죠. 

가장 밑바닥에 있는 믿음의 첫 단계, 
아직 확신도 없고, 그런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 거예요.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러다가 창22장에 가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믿음이 나오죠. 
그건 확신에서 나오는 믿음이에요. 그 사이에 믿음이 성숙한 거죠.

아무런 보여주신 것도 없고, 징조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그 말씀 자체를 믿고, 순종하는 믿음, 확신하는 믿음이었죠.

창22장에서의 '아브라함의 (성숙한, 자녀를 바친) 믿음의 단계'에서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면, 
우리 모두는 믿음에서 탈락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창15장의 아브라함의 믿음의 (미성숙한) 상태에서 
의롭게 여기신 것은 뭡니까? 

우리의 가장 연약한 믿음, 밑바닥의 믿음, 믿음의 출발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기셨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 믿음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진실성에 달린 것이다.. 라고 볼 수 있죠. 


▲구원의 확신이 결핍 되었다 .. 그렇지만 그것이 불신은 아니죠. 
영적으로 아직 무기력하고, 의심, 불안, 두려움에 있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죠. 

영생을 믿지만, 확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관련글☞ 요일5:1~13 믿음과 구원의 확신 P1 (tistory.com)

이에 대해 스테판 차녹 이란 청교도가 이런 문장을 썼습니다. 
'믿음은 마음에 새겨졌으나. 먼지로 가득 뒤덮여 
읽을 수 없는 편지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먼지 때문에 그 편지 내용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우리의 마음의 하나님께서 새겨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편지가 먼지로 가득해서 읽지 못 하는 거에요. 
요일3:2절의 해석상 중대한 오해 (중요)

 

◑구원의 확신은 갖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왕의 편지내용이 유언장이었다면,
그리고 왕의 후계자가 되는 유언장이었다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자기에게 주어진 특권과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 증서의 효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즉 확신없이 구원받을 수 있지만 
확신을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이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을 불필요하게 여기거나 
또한 구원의 확신을 부인하는 것 또한 큰 잘못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우리 자신의 공로로,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성도님들 가운데도 이런 '구원의 확신'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거부하거나, 
때로는 위험하게 여겨서 피하는 분들 있고 
구원의 확신을 교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어느 정도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렇게 불안하고 의심하며 사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것은, 그 확신의 근거를, 자기 삶에서 찾는 거예요. 
'내가 구원 받을 만한 그런 선한 삶을 살기 때문에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의 근거가 자기에게 있는 것이죠.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확신의 근거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확신'은 교만이 아니라, 도리어 겸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나의 의와 나의 행위로 의롭게 함을 
받은 것이 아니기에, 나의 현재 삶의 모습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겸손입니다. 
*지적 동의를 뜻하지 않고, 회개와 삶의 변화의 증거가 동반된 믿음을 뜻함.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마치 이런 것과 같죠.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어!'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자기가 심장 박동을 느끼며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확신할 수 없다면.. 어떻게 말이 되겠습니까.

이와 같이 구원 받은 성도는, 요한일서에서 계속 주장했듯이
-그 속에 하나님의 씨가 심겨져 있고
-하나님과 사귐의 관계에 있으며
-빛(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사랑가운데 거하는 증거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아주 어린 자녀들은, 갓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의 얼굴을 보고도, 부모인지 나쁜 사람인지 잘 모르잖아요. 

갓난아이들은 아버지가 사업차 멀리 떨어져 있다가
몇 개월 만에 집에 돌아오면, 낯선 사람인 줄 알고 막 울잖아요. 
'왜 나를 몰라 보니? 내가 네 아버지야!' 라고 말해도 확신을 못 하는 거예요. 
낯설기 때문이죠.

생명을 얻었지만, 그 영원한 생명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을 자주 만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가 낯선 거예요. 
낯선 분처럼 여겨져서 불안한 거예요. '저 분이 과연 우리 아버지인지..?' 

이런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훗날 예수님을 다시 만날 그 때에 
'어 내가 들었던 얘기가 다 진짜네!' 천국 가서 그렇게 놀랄 사람이 있고...
(*이런 사람은 새예루살렘 성에 못 들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자기가 평소에 사모하고 그리던 예수님, 친밀하게 교제하던 예수님을
이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되어, 서로 반갑고 기뻐할 성도가 있을 거에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우리 신앙을 체계화 시킨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거기 대요리문답 81번째 내용에 이렇게 나옵니다. 
구원의 확신의 문제를 다루는 문답 인데요. 

"모든 진실한 신자는, 자신이 현재 은혜의 상태에 있고, 
장차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항상 확신하는가?

은혜와 구원의 확신은 신앙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진실한 신자도 확신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을 뿐 아니라 
확신을 얻은 후에도 혼란과 죄와 유혹과 실족으로 인해 
그 강도가 약해지거나 아예 중단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이 항상 함께 하시며 도우시기 때문에 
결코 완전한 절망에는 이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를 몇 가지 말씀 했죠. 

구원얻는 믿음과, 구원을 확신하는 믿음은 다를 수 있고,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때로는 확신을 얻은 성도라 할지라도 
자신의 유혹과 죄와 실족함으로, 혼란으로 인해
그 강도가 약해질 수도 있고, 때로는 상실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구원얻은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기에
완전한 절망에 이르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차이를 잘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완전히 totally 확신을 잃어버릴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finally 구원의 확신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확신이 나에게 결여됐다고 그래서 '하나님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 5대교리 라는 핵심교리가 있죠. 
5대 교리를 튤립 Tulip 이라는 약자로 부르기도 합니다. 

1 .인간의 전적과 무능력 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인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적이며 특별한 속죄  Limited and particular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이 '구원의 확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 이란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흔들리고, 넘어지고.. 때로는 진짜 믿는 사람인가? 스스로 의심하고 
그런 생각이 스스로 들 정도로 넘어지지만 

그러나 거듭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아서, 죽는 날까지 자기 믿음을 지킨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그 성도의 믿음이 견고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능력이 크시고, 견고, 완전하시기 때문에,
한 번 구원하셨다가.. 그게 함량이 불충분하여, 구원 못하시고.. 가 아니란 거죠.

우리의 믿음 강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크신 능력 때문에 이게 가능한 것입니다.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때로는 내게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고, 확신이 상실된 것 같은 상황이 있어도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아무도 내 손에서 그를 빼앗을 수 없다'
이런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견딜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구원얻는 믿음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으로 나아하기를 사모하며, 노력하며, 추구해야할 줄로 믿습니다.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증언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신 그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자기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하나님의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이 확신은 자기 느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경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은, 내가 믿는 그 믿음에 증거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믿음을 순진해서 속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좋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해도 쉽게 넘어가는 것이라 생각하죠.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증거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증거를 살피고, 그것이 진실된 것인가를 확인하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내가 얼마나 강하게 믿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그 믿음의 증거가 얼마나 확실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죠. 

본문에 보면, 우리 구원의 확신이 
하나님이 증거(말씀)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5:9 우리가 사람의 증언도 받아들이는데 더 큰 하나님의 증거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해 이미 증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

6절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일을 증거하셨는데 

그 예수님은 물과 피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물>은 정결함을 의미하는 거죠. 
예수님은 죄인된 사람들과 동일하게 취급받으시려고, 물세례를 받으셨죠.
그분의 공생애의 시작은 물세례 였습니다. 

의로우신신 그 분이, 죄가 없어진 그분이 
죄인과 같이 되신 것으로 출발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는 것으로 공생애가 마무리 되셨어요. 
그분의 이 땅에서의 죽으심,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어요. 

구약부터 신약까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신 것이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증언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사도행전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바는
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확신하게 하시는 일을 
성령님이 하시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증거를 우리가 믿을 때 
우리 안에 증거가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 순서가 중요해요. 
내 안에 증거가 있을 때, 하나님의 증거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를 내가 믿을 때, 우리 안에 증거가 임하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증거를 찾기 시작하면, 그것은 보험과 같은 거에요. 
내가 많은 것을 행했기에, 내가 하나님께 드렸기에 
내가 의로은 삶을 살았기에, 내가 확신을 얻었다는 것은.. 보험과 같죠.

보험을 드는 이유는, 자기 미래를 준비하면서 
내가 얼마나 많이 집어 넣느냐에 따라서, 나중에 많은 것이 돌아오죠. 

구원의 확신은 보험이 아니에요. 

어떤 분들은, 불교에도 보험 들어 놓고, 기독교에도 보험 들어 놓고... 
혹시 모르니까 보험을 많이 들어놓으려 하는데요,

구원의 확신은 인슈런스(보험) 가 아니라, 어슈어런스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우리가 받아들일 때 
내 안에 성령께서 인치심으로 도장을 찍어주심으로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겁니다.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인'은 도장이죠.
도장을 마음에 찍어 주신다는 거예요. 확실하다는 뜻이죠.

이 성령의 내적 증거, 성령님이 도장 찍어주시는 데,
도장을 찍으려면, 문서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백지 문서에 도장을 찍는 법은 없어요.

성령님의 도장은, 어떨 때 찍어요? 
하나님의 증거가 기록된 것을 받아들이고 믿을 때 
성령님이 내 마음에 도장 찍어 주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내 안에 어떤 감정의 변화를 추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님께서 도장을 꽉 찍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렇게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어떤 유혹도 이길 수 있는... 

사망이나 생명이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해서 끊을 수 없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확신!

궁핍이나 풍요나.. 나는 어떤 형편에도 처할 수 있으니 
내가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확신, 빌4:13 
그럼 확신이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확신은 새의 날개 와 같다.. 그랬습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그러나 새장에 오래 갇혀 있는 새는 날지 못 한다고 하죠.
새장 문을 열어줘도 못 난다고 그래요. 왜요?
자기에게 날개가 있다는 걸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믿음의 날개는 뭐에요? 확신이죠.
확신이 있을 때, 믿음의 날개를 경험할 수 있는 거죠. 


믿음은 걷게 하는 것이라면, 확신은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확신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추구하고 
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대학 1학년 때 성령 인치심을 받고 확신을 경험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렇게 점심 안 먹고 기도했던 응답이 2년 후에 온 거예요. 
하나님꼐서 잊어버리신 게 아니에요. 
때로는 그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구하고 찾는자에게, 

성령의 인치심(구원의 확신)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확신을 추구해야 됩니다.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5:11 그래도 우리는 여러분 각자가 소망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열심을 나타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5:12 여러분은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상속받은 사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러한 노력이 확신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이 임하는 통로와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확신이 임하는 수단은 게을리한채, 확신이 내게 없다고 불평할 수 없죠.
열심을 품고, 게으르지 않고, 하나님의 증거를 확인하고 
기도가운데 나아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간신히 구원받는 성도가 아니라 
확신있게 구원을 누리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