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19장 절별 해석 및 주석
1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여기서 '기뻐하다'(하페츠)란 말의 기본 개념은 '마음이 기울다'란 의미로서, 요나단의 마음은 이미 다윗에게로 향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요나단의 자기 부인과 자기 희생의 정신은 후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말한 침례 요한의 예수께 대한 사랑과 희생의 정신과 유사하다.
2 그가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은밀한 곳' 문자적으로는 '그 은밀한 곳'. 결국 여기의 '그'라는 정관사는 다윗도 이 장소를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3 내가 나가서 네가 있는 들에서 내 아버지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아버지와 말하다가 무엇을 보면 네게 알려 주리라 하고
'네가 있는 들' 이곳은 2절의 '은밀한 곳'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아마 이곳은 사울이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산책을 즐기던 궁정(宮廷) 근처의 들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나단이 다윗을 이곳에 숨어있게 한 까닭은, 요나단은 다윗에 대한 부친의 살해 음모에 관해 어떤 정보를 입수했을 경우, 신속히 그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다윗이 거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토록 하려는 목적에 다른 것이었다.
4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여기서 요나단은 다윗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기에 앞서 다윗을 죽이는 일의 부당성을 부친 사울 왕에게 간곡히 설파한다. 다윗을 위한 요나단의 변호는 다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1) 지금까지 다윗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스라엘과 사울 왕을 위해 충성, 헌신한 사실 (2) 그러므로 만일 다윗을 죽일 경우 그것은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경우가 되고, 또한 그것은 여호와께 큰 범죄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밝히는 요나단의 변호는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왕께 행한 일은...선함이니이다'
여기의 '왕께 행한 일'은 원문상 복수라는 점에서, 다윗이 왕을 위해 지금까지 충성되이 실행했던 모든 선한 일들을 가리킨다.
'그가...블레셋 사람을 죽였고...왕이...기뻐하셨거늘' 여기서 '블레셋 사람'은 단수로 사용되어 '그 블레셋 사람'이란 뜻인데 곧 '골리앗'을 가리킨다(17:10, 42). 그러므로 여기서 요나단은 이스라엘이 그 블레셋 거인의 위협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다윗이 생명을 걸고 이스라엘과 왕의 명예 회복을 위해 단신으로 싸웠고, 결국 승리했을때 사울 왕이 사심없이 기뻐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때만해도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해 어떤 시기나 질투심 없이 그를 사랑했었다. 요나단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함으로써 사울 왕의 양심의 심금을 울리고자 한 것이다. 한편 사울 왕이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한 때는 여인들의 노래(18:7) 사건 이후부터였다.
'무고히...무죄한 피를 흘려'
'무죄한 피'를 흘리는 일은 모세 율법에서 철저하게 금지되고 있다(신 19:10, 21:8, 27:25). 그러나 후일 바로 이같은 범죄를 저질렀던 므낫세 왕은 하나님의 특별한 진노의 대상이 되었었다(왕하 21:16, 24:4).
6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본절은 다윗을 위한 요나단의 간곡한 설득이 실효를 거뒀음을 말하고 있다. 즉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어 정직하게 진실을 호소한 요나단의 간곡한 변호는 사울 왕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맹세하되...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혹자의 주장처러 여기 사울 왕의 이 맹세는 요나단을 일시 속이기 위한 거짓 맹세로 볼 수는 없다. 왜냐면 적어도 악신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는(9절) 사울 왕이 다윗을 곁에 두고도 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단의 간곡한 변호에 사울 왕이 감동을 받아, 일시동안 사울과 다윗간에 화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울 왕의 이 맹세는 오래지 않아 또 변하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린 사울 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맹세를 하는 등 변덕과 광기의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7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고 요나단이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전과 같이 있었더라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 이 말은 다윗이 예전처럼 천부장으로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타는 궁중 악사로서 계속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음을 가리킨다.
8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죽이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크게 도륙하매' 엘라 골짜기 전투(17:1-54)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에는 국지전(局地戰)이 빈번히 발생했다(18:30). 다윗은 그때마다 숙적 블레셋을 당당히 격퇴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천부장으로서의(18:3) 본분을 충실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감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성공과 형통은 또다시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따라서 사울 왕은 자신의 맹세(6절)를 스스로 깨뜨리고 다시금 다윗을 죽이기 위해 광분하였다.
9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의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여인들의 창화(唱和) 사건(18:7) 이후 시도된 사울의 다윗 살해 기도는 18:11,17,21, 19:1 등에 이어 또다시 재현되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첫번의 경우(18:10, 11)와 비슷한 상황 가운데서 발생하였는데, 즉 악신(惡神)의 영향으로 사울 자신이 직접 창으로 다윗을 살해하고자 시도한 경우이다. 이처럼 사울이 또다시 악신의 영향을 받은 주된 이유는 다윗의 형통과 성공이었다(8절). 즉 자신은 하나님께 버림당했다는 심한 콤플렉스, 다윗이 자신의 왕좌를 노리고 있다는 강박 관념, 백성들의 마음이 온통 다윗에게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피해의식 등등이 시기와 질투심으로 불타 올라 걷잡을 수 없는 광기적 형태로 분출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에 대해 하나님께서 악신이 활동하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사울은 악신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10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여기 사울의 이같은 행동은 18:11에서와는 달리 실제 창을 던지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18:11에서의 사울의 행동은 창을 쥐고 두어번 휘두른 경우이지만, 여기서는 다윗을 겨냥하고 창을 날린 것이다.
11 사울이 전령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아침에...죽이게 하려 한지라' 사울이 다윗을 그 밤에 죽이지 아니하고 다음 날 아침에 죽이려 한 까닭은, 아마도 섣부른 야간 행동은 오히려 다윗의 야음(夜陰) 도주를 도와 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죽임을 당하리라' 다윗에 대하여 사울이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미갈은 (1) 사울의 사자들이 집 주위에 매복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든지 (2) 오빠 요나단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입수했든지 (3) 궁전에 들어갔다가 사울과 다윗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거나 혹은 어떤 정보를 입수했다든지 함으로써 사울의 음모를 알아챘을 것이다. 특히 두번째의 추측은 이전의 경우(19:2, 3)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 추측이다.
12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매 그가 피하여 도망하니라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사울의 사자들이 문을 지키고 있어기 때문에, 미갈은 창문으로 다윗을 도피시키고 있다. 이처럼 생명을 노리는 자들의 손을 피해 창문으로 도피한 유사한 경우가 여호수아 당시의 여리고 정탐군(수 2:15), 초대 교회 당시의 사도 바울(행 9:25, 고후 11:33) 등의 경우에서도 나타난다. 한편, 이때 다윗이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토로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원을 간구한 내용이 시편 59편이다. 즉 시 59편에서 다윗을 '환난날에 피난처'(시 59:16)되신 하나님께 자신의 애매한 고난을 탄원하며(시 59:3, 4) 구원을 호소하였던 것이다(시 59:1, 2, 4-13).
다윗의 도피 생활-1
다윗은 처음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의 음모를 듣고, 창문을 통해 도망쳐, '라마'의 사무엘에게로 피신했다. 이어 다시 '기브아'로 돌아와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과 뜨거운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놉'으로 도피했다. 놉에서 다윗은 그곳 제사장으로부터 음식과 무기를 제공받고 계속 도망쳐 다니다가 결국 블레셋 땅의 '가드'로 도망쳤다. 그런데 다윗이 블레셋 족속드로부터 의심을 당하자, 그는 급히 그곳을 빠져나와 '아둘람' 근처의 동굴로 피신했다. 그리고 다윗은 그곳에서 많은 동지들을 규합했다.
13 미갈이 우상을 가져다가 침상에 누이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우상을...침상에 뉘고' 여기서 '우상'은 곧 '드라빔'(테라핌)을 가리키는데, 단어 형태는 복수지만 단수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드라빔'(teraphim)은 '편안히 살다'란 뜻의 '타라프'에서 파생된 말로, 구복(求福)과 점술(占術), 그리고 신탁(神託) 행위와 관련된(겔 21:21, 슥 10:2) 가정 수호신이다(삿18:17, 24). 즉 아람과 갈대 족속들로부터 도입된 이 우상은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가정에 행운을 가져다 주는 가정의 수호신으로 널리 인정되었다. 그리고 이 우상은 인간의 형상을 닮은 반신상으로서 보통 나무나 은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크기는 약대 인장 밑에 숨길 정도의 작은 크기로부터(창 31:34) 사람의 키와 맞먹을 정도의 큰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최근 발견된 누지(Nuzi) 서판에 의하면, 어떤 가정내에서 이것을 소유한 자는 그 가정 전체에 대한 지배권 및 그 가정의 재산을 가장 많이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한 것으로 인정되었다(창 31:19, 30-35). 바로 이같은 점에서, 라헬이 그랬듯이(창 31:19) 미갈도 이 우상을 자신의 아버지 사울에게서 훔쳤을 가능성이 있다(Klein). 한편 이것은 한 가정을 단위로 해서 모셔졌던 우상이라는 점에서 그 크기는 전반적으로 다른 우상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았다. 그러나 여기서 '침상에 뉘고'라는 말은 미갈이 소유하고 있던 이 '드라빔'이 사울의 신하들로 하여금 다윗이 누워있는 줄로 믿게할만큼 큰 규모의 드라빔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아무튼 이 드라빔은 많은 종교 지도자 및 선지자들의 우상 척결 정책에도 불구하고 족장 시대로부터 포로 시대전까지 이스라엘 사회내에 면면히 존재하고 있었다(창 31:19, 삿17:5, 18:14, 삼상 19:13, 겔 21:21, 호 3:4, 슥 10:2).
'의복으로...덮었더니' 여기서 '의복'은 헐겁게 입는 통상복을 가리킨다. 이 통상복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흔히 이불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14 사울이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매 미갈이 이르되 그가 병들었느니라
'그가 병들었느니라' 우상으로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만든 미갈은 아침이 되어 사울의 군사들이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치자 이처럼 둘러댐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멀리 도망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게해 준다.
15 사울이 또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를 침상째 내게로 들고 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사울이...다윗을 보라 하며' 이것은 사울이 보낸 최초의 군사들이 미갈의 계략에 완전히 넘어간 채, 사울에게 돌아가서 다윗이 병들어 누웠다고 보고했었음을 암시해준다. 한편 여기의 '보라'는 다윗이 병들어 있는지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는 명령이다.
'침상 채...가져 오라...죽이리라'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반드시 다윗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뜻으로, 폭군 사울의 잔인성이 드러나고 있는 구절이다.
16 전령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는 우상이 있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17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리라
미갈은 다윗을 보호하기 위해 '그가 병들었느니라'(14절)고 첫번째의 거짓말을 한 이후, 사울의 확인 명령으로(15절) 그 사실이 거짓으로 발각되자(16절) 이제 여기서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에게는 다만 방조죄(放調罪) 밖에 없다고 두번째로 거짓말을 한다.
'어찌하여...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이 말은 곧 다윗의 협박에 의해 마지 못해 그의 도피를 방조하고, 또한 거짓말(14절)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미갈의 자기 변호이다.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다윗이...라마로 가서' 여기서 '라마'는 다윗의 출발지인 '기브아'(10:26)에서 북쪽으로 약 3.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이자 그의 활동 중심지였다(1:1, 7:17).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다윗이 이처럼 사무엘에게로 도망간 이유는 (1) 우선 사울의 살해 음모로부터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며 (2) 앞으로 자신이 취해야 될 처신에 대해 선지자의 자문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때 다윗은 사울이 적어도 사무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존중하여, 거기까지 자신을 죽이러 사람을 보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한편 이처럼 다윗이 자신의 도피처로 사무엘의 고향 라마를 쉽사리 택한 것은 이전부터 사무엘과 다윗 사이에 개인적인 교제가 이루어져 왔음을 시사한다.
'사울이...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아마도 이것은 (1) 이스라엘 왕인 사울이 정신적으로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으며 (2) 그 결과 다윗 자신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때 사무엘은 사울에 관한 다윗의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바 된 상태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3:13, 14, 15:26, 35).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사무엘보다 다윗을 앞서 언급하는 본 어구는 다윗이 이미 역사의 주역이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여기서'나욧'은 '거처', '거주지', '초원지대' 등의 의미를 가지는 아카디아어 '나움'에서 온 단어로서, 마치 오늘날의 기숙사와 같은 숙소 시설을 가리킨다. 이같은 추정은 이 단어가 항상 특정 지명과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로써 보다 분명해 진다. 즉 '나욧'은 사무엘이 자신의 주변에 모여드는 제자들을 수용키 위해 세운 기숙 시설을 가리키는 특수한 명칭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나욧'은 단순한 기숙 시설 이상의 '교육의 집' 또는 '선지 학교'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리고 '나욧'이 '초원 지대'를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사실은 이 교육을 위한 기숙사가 목자들이 거주하는 초원 지대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삼하 7:9, 렘 33:12). 아울러 '나욧'이 복수로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여러 동(棟)으로 구성된 교육용 숙소 시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혹이...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처 미갈의 도움으로 기부아 집을 도망쳐 나온 이후, 아마도 사울은 군사들에게 그의 도피처를 탐색하라고 명령했을 것이며, 어쩌면 많은 현상금까지 내걸었는 지도 모른다. 아무튼 다윗의 도피처는 발견되었고, 그 사실은 즉각 사울에게 보고되었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 여기서 '선지자 무리'는 당대의 대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영적 지도를 받기 위하여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훈련을 받던 젊은 생도들이었다(10:5). 그리고 '예언하는 것'(니브임)은 '예언하다'(나바)의 단순 수동형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의 신령한 상태 즉 성령에 감화 감동되어 (1)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10:5) (2) 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에 담아주신 신령한 계시를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 선지자 무리는 이때 자의식을 상실한 채 무아지경 곧 황홀경(ecstasy)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이때 이들은 분명한 자의식(自意識)을 소유한 채 경건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 이것은 사무엘이 그때 그 선지자 무리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왕상 4, 7, 왕하 2:5). 그리고 '나욧'에서 그 선지자들의 무리를 직접 지도.감독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상황은 확실히 본서 10장의 상황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즉 그때는 사무엘이 그 선지자 무리를 일일이 지도하지 않았으나, 여기서는 사무엘이 그들을 직접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의 변화는 당시 사무엘이 선지자직을 제외한 모든 일에서 해방되어, 그들을 지도하는데 전념할 수 있게 된 때문일 것이다.
'볼 때에...사자들에게 임하매' 이같은 현상은 '볼 때에'라는 말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때 사울의 사자들은 선지자 무리가 엮어낸 독특한 분위기를 '본' 후, 즉 접한 후 그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볼 때에'(야르, 원형은 '라아')가 3인칭 단수로 표기된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아마 본 저자가 사울의 사자들 전체를 하나로 취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본 저자는 이같이 표기함으로써 사울의 사자들 모두가 마치 한 사람처럼 선지자들이 예언하던 독특한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갔음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임하매...예언을 한지라' 다윗을 잡으러 간 사울의 사자들은 사무엘과 선지자 무리의 신련한 예언의 노래에 휩쓸려 들어가고, 또한 그때 위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강권적으로 임하므로, 그들 역시 자제할 수 없는 예언의 상태에 사로잡힌 것이다.
사울의 사자들은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묵시적(黙示的) 황홀경 상태에 들어가 자신들도 모르는 중에 영감 깊은 신령한 노래를 하였다고볼 수 있다(Fay, Smith). 결국 라마 나욧의 다윗은 더이상 피할 곳도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볼 수 있다.
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본절은 사울이 보낸 세 그룹의 사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신'에 의해 사로잡히는 바람에 다윗을 체포하려 했던 사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말해준다. 그러자 마침내 사울이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22절).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세구에 있는 큰 우물' 여기서 '세구'는 '전망대'란 의미이다. 이곳은 기브아와 라마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라마 북쪽 4.8km. 한편 '큰 우물'은 문자적으로 '그 큰 우물'이란 뜻인데, 여기에 정관사로 '그'가 붙어 있다는 사실은 이 우물이 그 근처에서는 매우 유명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혹자는 이것을 '저수지'나 '물탱크'로 이해하기도 한다.
'라마 나욧' '라마의 선지 학교'란 뜻이다. 18절 주석 참조.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하나님의 신이...임하시니...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예언을 하였으며' 사울의 체험은 그가 보낸 세 그룹의 사자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20, 21절). 즉 여기의 '이르기까지'는 사울이 자신이 보낸 사자들과는 달리 선지자 무리의 신령한 분위기를 접하기도 전에 이미 '세구'로부터 예언을 시작하여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계속 예언 행위를 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결국 사울은 자신의 사자들과는 달리 보다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로, 그리고 보다 지속적으로 황홀경의 상태 속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당시 성령의 역사는 보다 강퍅한 사울의 심령 상태를 완전히 주장하시어, 그로 하여금 다윗을 체포하겠다는 의지를 스스로 포기 하게끔 만든 것이다. 즉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사울 왕의 강퍅한 심령을 녹이고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그가 또' '그는 심지어'란 뜻으로, 이는 사울에게 임한 기이한 현상으로 말미암은 저자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 옷을 벗고' 옷을 벗는다는 것은 성경 용례상 수치스러운 행동 중의 대표적 경우로 취급된다(창 3:7, 10, 11, 삼하 10:4, 5, 미 1:11). 그러므로 사울이 이같은 행동을 한 까닭은 (1) 근본적으로는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낼 정도로 성령의 역사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며 (2) 또한 실제적으로는 사울이 황홀경의 영적 심리 상태로 발생하는 체열(體熱)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울이 벗은 것은 겉옷(베게드) 뿐이었지 속옷은 아니었다(사20:2-4, 미 1:8).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칠십인역은, 사무엘이 사울과 길갈에서 헤어진 후 죽을 때까지 사울을 만나지 아니했다는 본서의 언급(15:35)과 조화시키기 위해 여기 '사무엘 앞에서'를 '그들 앞에서'로 고쳤다. 그러나 여기의 '사무엘 앞에서'는 15:35의 언급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여기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은 사울이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사무엘을 거저 보았을 뿐, 15:35절의 언급처럼 상호 교제를 나눈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여기서 '종일 종야'는 그때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누웠더라'(나팔)는 '엎드러지다'란 의미로서, 결국 이것은 대단히 오래도록 지속된 예언 상태로 인해 그때 사울이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빠진 상태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한편, 그러나 사울이 이같은 영적 상태에 계속적으로 빠져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아마 한동안 하나님의 신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황홀경의 상태에서 손짓 발짓을 섞어 노래를 하는 등의 행위를 한 후, 그로 인한 피곤감으로 깊은 잠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이 말은 본래 어떤 사람이 본래의 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할 때 적용되는 말이다. 10:11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