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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질병에서의 자유

LNCK 2023. 4. 24. 15:36

2021.10.3 - 지속 가능한 성공의 조건 : '나'라는 질병에서의 자유 - YouTube

*위 설교 47:25초까지 아래에 녹취

'나'라는 질병에서의 자유        히12:27~28            ▣<자아> 관련글 모음 
 
제가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 라는 신앙서적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책에서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쓰여져 있었는데요. 

그 책을 읽는 동안, 성령께서 수술 칼처럼 
제 심령을 찔러 들어오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 수술 칼들이, 저의 그 얄팍한 <자기 의>를 찢어 버리자 
그 너머에 정말 놀라운 실상이 드러났습니다. 

제가 너무 '자기 중심적'인 겁니다. 
친구를 사귀고, 사람을 가까이하는 그 목적과 동기가 
'내 자아를 위해 소비하기 위한 것'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표면적으로 착하고 정이 깊은 사람으로 칭찬받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착하고 정이 깊은 그 얄팍한 '자기 의' 너머에는 
제 자아를 높이고, 제 자아를 건설하기 위한 시도와 계획, 계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변 사람들을, 저를 위해 소비하고(이용하고)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 거대한 '자기 중심성'이 비추어질 때, 제가 도망갈 곳이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때 어거스틴의 글이 생각났습니다. 
"인간의 원죄는 바로 자기 중심성 그 자체이다" 

인간의 원죄는 부도덕이 아닙니다. 불법이 아닙니다. 
도덕적 행위와 의로운 행동까지 
'자기중심성'에 봉사하도록 도구와 시키고 있는 그 몸통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중심 삼은 그 실존 안에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 따위는 존재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을 진정 목적으로 섬김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과 성령의 빛 앞에 
찢어져 드러난 나는 
지난 세월 철저히 나를 섬기며 살아온 괴물이었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빛 앞에서 '자기 의'가 찢어지자, 저는 너무 아팠습니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빛이, 
그 엑스레이가 투과해 들어올 때 
제 안에 괴물이 비추어지고, 탄로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 속에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 자비는 그냥 '날 좀 봐 주세요' 라는 가벼운 자비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나를 수술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내 안에 드러난 이 암덩이들을 박박 긁어내 주시고, 
남김없이 긁어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제 안에 꿈틀대는 괴물을 도려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지 못할 자다' 고전15:9

이 말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밈이나, 짤 정도로 
남겨져 있는 자신의 흑역사를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교회를 핍박하였다'는 말 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스데반을 살인 교사했던.. 주모자였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그 현장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스데반은, 초대교회 가운데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던 
7 집사 중의 한 명 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회심하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스데반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교회 안에 있었고 
만났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들에게 손실과, 자신이 그들에게 입힌 그 고통과 
그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옳은 일이라 믿었던 자신의 그 맹인됨이 
참담한 심정으로 고백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그쳤을 때, 자신의 본질을 무엇인지.. 
통렬히 고백하는.. 찢어진 자기 의에서 나오는 신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자기가 죄인 됨의 통렬한 고백을 토해 낸 자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은혜가 그칠 때,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자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본성, 그 괴물 같은 자아를 도려내 주시는 하나님의 수술 칼을 
'자비'로 생각하며 간구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도려내진 자리에, 새로운 본성을 부어 역사하시는 은혜를 
나의 양식으로 생각하며 갈망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의 본질을 아는, 그 앎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자신의 괴물같은 자아가 드러나는 그 현장이, 
자신을 사도로 살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난 현장이었다.. 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천국 가게 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사도 바울의 괴물같은 본성에 찾아와서 
그 괴물 같은 본성을 꺾고 
그 위에 

사랑하며, 자유하며, 새로운 방향으로 
바울을 사도로서 살아가게 만드는 
바로 그 내적으로 일하는 은혜였던 것입니다.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을 태워 유럽으로 향하던 배 속에는 
이후에 서부유럽의 온 역사가 담겨 있었다" 

사도 바울은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영향력있는 삶의 중심에, 이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자신의 괴물됨을 만난 이들만 구할 수 있는..
말씀과 성령의 빛 앞에 자신의 본질을 만난 이들만 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는 이 땅에서 영향력을 미치며 살기 원합니다. 
이 땅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집념이나 노력이 전혀 아닙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리의 재능이나 지능도 전혀 아닙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만나는 곳은, 자신에 대한 신뢰가 철저히 붕괴되는 곳입니다. 나의 자아가 깨어지고 낮아지는 곳입니다. 

우리는 내적, 외적으로 자유낙하와 같은 인생의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삶이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저의 체험은 '내적 추락' 이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외적 추락'도 존재합니다. 

우리의 힘과 지혜와 땀흘림이 
더 이상 우리의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흘린 땀의 양과, 내 지혜와, 내 힘이
내 삶을 더 이상 다스릴 수 없게,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어서
내 삶이 제멋대로 굴러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끝도 없이 추락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마치 한없이 떨어지는 주가를 보면서 
이게 바닥이 오니까 
'내가 이 주식에 내 인생을 걸었는데.. 내 전세금을 걸었는데..
그런데 이게 바닥이 어디일까?' 하는데도 계속 떨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아에 모든 것을 걸고 살고 있으나, 
그 자아가 추락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 삶이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추락할 때,
자아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영안에서 자유낙하는, 파멸입니다. 
불신 세상에서 그 자유낙하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 자유낙하는.. 은혜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신앙안에서 그 자유낙하의 바닥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는 지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절대 호재를 만날 때 
밑바닥을 알 수 없던 끝없는 추락은 
마침내 역전과 반등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내적 추락 이후에, 외적 추락을 경험하는 기간이 시작됐습니다. 
모두가 올라가는 것 같은데.. 저만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점점 제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땀(노력)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삶을 움켜쥐려던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끝날 거라 생각했던 삶에 
이상한 방식으로 은혜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은혜에 대한 신뢰와 의탁이 자라가기 시작합니다. 
또 그럴수록 그분의 은혜가, 그분의 역사가.. 내 마음 속에 번져 나갑니다. 

'목사님, 목회 영역, 사역의 영역에서는 그렇게 은혜가 절대적일 수 있지만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섬기는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까?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섬기는
부모가 될 수 있습니까?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이 뜻하신 바대로 행하는 
교사가 과연 될 수 있을까요?

목사도, 사업가도, 부모도 모두 
은혜가 없으면... 자신만을 섬기는 괴물이 될 뿐입니다. 

사역을 소비하며 (자신을 위해 이용하며) 
심지어는 자식을 소비하며 
배우자를 소비하며 
내가 속한 조직을 소비하며 
결국은 나만을 섬기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현장에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그 삶은 
진정한 성취의 시작은...  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모두 '자아'라는 질병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눅16:19~20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이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위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은혜 없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은혜 없이 자신의 힘으로 이룬 그 성취의 끝은.. 지옥이었습니다. 
그게 정거장은 '부자' 이었으나, 그의 종착역은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자유낙하를 경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끊임 없는 자유낙하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낙하 속에 은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그를 천국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그의 정거장은 '가난'이었으나, 그의 종착역은 '천국'이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성공하고 우리 힘으로 부유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된 것이 아니면, 그건 결국 초기화 될 수 밖에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불행하게도 이 이야기의 부자는, 그 초기화를 너무 늦게 경험했습니다.
죽어서, 돌이킬 수 없을만큼 늦게.. '초기화 (리셋)'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저는 그 초기화를 이 땅에서 경험했습니다. 
그 초기화가 이루어지니.. 내가 (육신적으로) 일한 것은 다 사라집니다. 
은혜가 일한 것만 남습니다. 

(한 번만 아니라) 숱한 초기화를 통과하니 
이제 제 온몸이 학습을 했습니다. 

은혜가 일하게 하는 것만, 은혜가 일한 것만 남고 
그것 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운 것입니다. 

히12:27~28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 a kingdom which cannot be shaken/moved/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바울은 사울 시절에, 자신의 육으로, 자신의 열심으로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열심으로 한 모든 것이 
완전히 초기화(리셋)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적, 외적 자유낙하 끝에 은혜를 만났습니다.
바울이 그 은혜와 함께한 일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와 함께 한) 일은 
그의 영원까지 함께해서 
심판대 앞에서 그를 변호하며 
그의 상급을 요구하는 강력한 변호인이 되어
그의 영원까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인생에 있었던 자유낙하에 대해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그 자유낙하를 통해, 결코 초기화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히12:28)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왕국은 ever increasing kingdom 이라고요.
'흔들리지 않고 상승하는 왕국'이라는 겁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사9:7
Of the increase of his government and peace there shall be no end...

지속적인 상승 가능성을 가진 나라, 
상승의 지속성을 가진 것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나라)이라는 것입니다. 

내게 날개가 달려있더라도 그것은, '추락하는 날개'입니다.  
지속적으로 상승할 수 없는 나에게는, 올라간 합계만큼 떨어질 겁니다. 
그 낙하를 몇 번 하고 나면, 다시는 날개를 갖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픕니다. 

더 이상 씨름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왕국은 Ever Increasing Kingdom 입니다. *계속 상승하는 왕국

그 왕국의 힘은 우리의 열정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혜가 아닙니다. 
우리 의지가 아닙니다. 그 왕국의 힘은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이끌고 가는 왕국!

히브리서 1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은혜를 만날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기적적 변화가 있습니다. 
그 기적적 변화의 이름이 뭡니까?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것입니다. 

히12: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는 많은 기적을 말합니다. 
눈 먼 자가 눈을 뜨는 기적을 말합니다. 
몸이 떨리거나 몸이 뜨거워지는 기적을 말합니다. 
그것은 은혜 라기보다는 은사 체험입니다. 

은사는 은혜와 다릅니다. 
은혜는 이겁니다. 우리의 본성에 역전이 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게 본래 기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섬기는 게 본성적으로 기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 어디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섬길 사람입니다.
근데 우리의 마음 속에, 자아를 섬기는데 중독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게 기쁜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진짜 은혜 입니다. 
그게 진짜 기적인 겁니다. 

눈먼 자가 눈 뜨면 뭐합니까? 
그 거대한 능력을 통해 자아의 첨탑이 쌓아진다면 
그것은 또다른 재앙을 위해서 올려지는 바벨탑이 아니겠습니까. 

'만물이 그로부터 말미암고,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분으로부터 시작돼서, 그분에게 돌아가는 그 킹덤 싸이클! 

그 은혜의 싸이클이 아닌 모든 것은.. 결국 초기화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에게서 시작돼서, 그분에게 돌아가는 이 싸이클! 

인생의 싸이클이 둘로 구분되는데..
-은혜의 싸이클링 속에 있는 일들은 ever increasing 
즉 지속 가능한 성장과 성공을 경험하게 됩니다. 

-반대로 자신의 날개를 달고, 자신의 힘으로 상승하는 일들은
모두 초기화 되고 맙니다. 왜냐면 만물이 주에게서 나와서, 주께로 돌아가니까요!

여러분, 대세를 따르는 않는 시도는 자만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패션 디자이너가 있다고 해도
유행과 대세를 잊지 않고,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뽐낸다면
그 디자인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전자 기술도, 소비 동향과 소비자의 need와 트렌드를 읽지 않은 채로 
그 기술을 뽐내기만 한다면.. 그 전자제품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고
어떤 뛰어난 것도 대세에 편승해야 날아오를 수 있는 겁니다. 

근데 진짜 대세는 여러분 이겁니다. 
'만물이 그로부터 말미암고,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감이라' 

은혜가 대세입니다. 
사도 바울이 탔던 대세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돌고 있습니다. 

그가 은혜와 함께 했던 일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하고 있고, 
영원까지 지속되고 에버 인크리싱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아 운동'에서 벗어나, '은혜 운동'으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식의 세상 성공에서 놓임 받아
에버 인크리싱 킹덤, 즉 끝없이 상승하는 그 왕국에 일부분이 되셔야 합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지속되고 상승하는 은혜의 운동에 
우리가 편승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왕국을 받았으니 뭐라고요? '은혜를 받자' 하고 말합니다. 히12:28
'은혜를 받자' 라는 말은, 수동적으로 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은혜를 소유하다. 붙잡다' 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내가 살던 동네에서 버스 정거장에서 21 번 버스를 타면 
제가 가고 싶은데 다 갔습니다. 

그 21번 버스가 멀찍이 나타나면, 달려가서 제가 그 버스를 타기만 하면
제가 원하는 목적지에 다 가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은혜의 사이클에 여러분이 달려가서, 자신의 몸을 올려 놓아야 합니다.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은혜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은혜를 놓치지 않으셔야 합니다. 
은혜에 여러분의 인생을 기초하셔야 합니다. 

'허탄한 자아' 라는 주식 종목에, 인생을 몰빵 했던 흑역사를 이제 그쳐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 라는 종목에, 내 인생을 올인해야 합니다. 

은혜가 지탱하지 않는 일을, 지탱해낼 자아의 힘은 없습니다. 
은혜가 끌어올리지 않은 일을, 끌어 올릴 수 있는 자아의 모략은 없습니다. 

은혜가 시작하고, 은혜가 끌어올리는 일에 내가 합류해야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은혜가 일하고, 은혜가 완성하고, 은혜가 지탱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은혜의 역사에 참여한 기쁨과 분깃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삶입니다. 
이게 우리의 직장이어야 합니다. 
이게 우리의 가정 생활이어야 합니다. 
이게 우리의 진로이어야 합니다. 은혜와 함께 가야 합니다. 

전에 제가 가까이 하고 아주 사랑하던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참 사랑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하던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교회 건물을 아주 크게 지었습니다. 
거기까진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 꿈에 그 분이 나타났습니다...  주1)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로 인해 유지되고 
나를 위해 이루어지는 삶은, 영적 대세(은혜)를 거스릅니다.

나로부터 시작되고, 나로 인해 지탱되고 
나를 위해 이루어지는 물길은.. 역류를 형성합니다. 
여러분 이 과부하를 견뎌낼 사람은 지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성공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습니다. (날개가 있어도 추락합니다)

높이 올라 갔나요? 
추락의 높이도 더 클 것입니다.
더 큰 고통과 파괴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과부하 인생으로, 우리는 어딘가 고장나고 망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근육도 많이 쓰면, 끊어지듯 
영성의 근육이 터지듯
멘탈이 부서지듯 
육체가 고장나듯 
그 성공 안에, 사람은 부서져 내립니다. 

이제 자아를 위해, 자아로 인해, 자아로부터 살아가는 삶에서 
돌아서서 나와야 합니다. 그 삶에서 건져져야 합니다. 

한 두 번의 자유낙하는 그 싸이클에서 벗어나는데 
아주 작은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는 자리로 
우리를 데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어야만 합니다.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그 실체를 배워야만 합니다. 
그 은혜를 따라 살고, 그 은혜를 따라 직장 다니고 가정 꾸려가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그게 바로 진동치 않는 나라의 일부로 사는 방식입니다.

그 은혜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뭔지 더 살펴보겠습니다. 
자아를 섬기는 삶에서, 예수님과 그 나라를 섬기게 하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고후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은혜를 받으면, 우리로 새로운 삶의 목표를 갖게 합니다. 
이건 명령이 아닙니다. 힘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이라고 번역되는 게 더 좋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이 우리에게 강력한 드라이브로 임합니다. 
그 드라이브는, 이전의 드라이브를 역전시킵니다. 

뭡니까? 이전의 '자신을 사랑하는 드라이브'를   *드라이브 : 몰고 감
역전시키는 새로운 드라이브를 얻는 겁니다. 그게 '강권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앞으로는, 나로 하여금, 다시는 내 자아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을 품게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만족이 되게끔 만든다는 겁니다. 

<트라우마 치유> 이론을 공부해보면 굉장히 놀라운 진실을 발견합니다. 
성장단계에서 자신에게 고통을 준 어떤 경험이 있을 때,
그때 아이들의 뇌와 신경조직은, 그 사건을 통해 얼어붙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건에 스톱, 멈춰지고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트라우마에 정지stuck된 그들의 신경조직은 
굉장히 강력한 알고리즘이 되어 그들의 만남에 명령을 내리는데 
어떻게 명령을 내리는가 하면, 

동일한 트라우마를 준 사람, 그 사람과 비슷한 사람 
다시 말해 동일한 트라우마를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끌리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아버지가 상실감과 방치를 주는 아버지 였다면,
상실감과 방치를 줄 만한 남자에게 끌리는 겁니다. 

어머니가 학대적 언어를 사용했다면 
학대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여인에게 끌리는 겁니다. 

트라우마로 인해, 그 시점에 얼어붙은 내면의 아이가
그 문제를 마저 풀기 위해,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게 된다는 겁니다. 

뇌에 착오가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 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건설적이고 건강한 사람보다는 
파괴적인 관계에 도리어 더 많이 매력을 느끼는 강력한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너 왜 그 사람 좋아해?' 
'내가 좋아하는데 이유가 없지!'

'너 왜 그런 사람한테 자꾸 끌리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뇨, 이유가 있어요. 아셔야 돼요.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이 파괴적이고 역기능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것은
트라우마에 얽힌 대중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평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이런 이들에 이끌리는 뇌신경 조직을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들의 명령을, 무의식적으로 듣고, 파괴적인 곳에 꽂히기 보다는 
그렇게 명령을 내리는 알고리즘 자체를 
다시 프로그래밍 할 수 있도록 (자아가 죽고 새로 태어나야 하죠)
역산(전산 용어)의 길을 걸어 가야 합니다. 

이걸 치유와 회복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삶을 투자할 가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애정과 관심을 빼앗아갈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구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오도된 신경조직이 
새로워지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생을 세이브(저축, 보호)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거보다 더 절망적으로 우리가 금사빠 되는 대상이 있습니다. 
*금사빠 : 금새 사랑에 빠짐

이 대상은 늘 오만하고요. 
이 대상은 매우 공허하고, 
이 대상은 스스로 하늘과 땅 사이에 천상천하 유아독존 인줄 알며
이 대상은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소비하는 괴물 같은 블랙홀 입니다. 

이 대상은 바로 에고 Ego 입니다. 즉 내 자아죠. 나 자신입니다.
자아에 대한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아는 타락, 부패했습니다. 
그리고 쓰러질 유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아에게 금사빠가 돼서, 우리의 사랑과 섬김을 몰빵하는 것은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곧 터집니다)

이것은 상장폐지될 주식에, 내 전 재산을 거는 것보다 더한 일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우리의 본성은
이 쓰러지는 허탄한 에고(자아)에 금사빠 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도남 차도녀 퇴폐적인 사람들에게 *차가운 도시의 남자, 여자
이끌리는 여러분의 아들 딸을 본다면, 여러분 어떻하겠습니까? 

'하나님, 저 충동으로부터 우리 아이를 건져 주십시오! 
저 충동이 치료 되게 해 주십시오.'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 충동이, 패륜적인 사람들을 향하는 저 충동이 
저 아이의 인생을 먹어삼키지 않도록 
주님 저 충동을 고쳐 주십시오!' 

저 공허하고, 저 타락하고,  저 오만불손한 자아에 
금사빠 되어, 그것을 사랑하고 섬기고 높이는 일에
자동적으로 이끌려가는 저들의 본성에 치유가 필요한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문제는 우리가 그 자아에 빠지는 탐닉을 그칠 힘이 
우리속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아 보다 더 높은 분, 그 보다 더 신실하고 더 아름다운 분을 앙모하며 
그분에게 우리를 위탁할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겁니다. 

저는 자아를 섬기는 삶의 허망함과 파괴적임을 경험하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절망적인 것은 
신학교 안에도 그 자아를 쌓아 올리는 피라미드가 건설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거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그 피라미드를 쌓는 그 대열에, 저도 줄을 서서 
다시 자아의 피라미드를 신학교 안에서 
'사역'이란 이름으로, '복음'이란 이름으로
세워가고 있음을 발견할 때였습니다. 

차라리 노골적이고 일차원적인 세상에서의 자아 숭배가 분별하기 더 쉽습니다. 
신앙안에서 자아숭배는 더 교묘하고, 더 치명적이며, 더 조작적 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이렇게 통탄한 겁니다. 
"내 영혼아, 그만 좀 헛되거라!"

주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그 십자가의 역사는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는 은혜를 가져왔습니다. 

그 십자가의 역사는, 우리를 질병에서 건지고, 저주에서 건지는 은혜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건지시는 모든 은혜보다 
가장 먼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은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625 때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기 전에
먼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인천을 장악했듯이

주님의 은혜가 내 삶의 전 영역을 장악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장악해야 될 영역은 (보통 '교두보'라는 말을 쓰죠)
그건 바로 '자아 숭배'라는 영역입니다. 

그 은혜는 반드시 먼저 예수를 향한 사랑의 힘으로 
우리의 자아 숭배의 피라미드에 쳐들어 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라미드를 부셔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세상 떠날 때 찬송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찬양을 부를 수 있게 만드는 그 외침을, 우리 안에  회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 안에 올 때 
어그러진 금사빠의 본능이 
사랑 할 이를 사랑하고, 예배 할 이를 예배하도록 
역전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일이 치유되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그냥 절망입니다. 
절망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질병이 치유되기를 
우리는 그러니 구해야합니다. 그 은혜를 갈구해야 합니다. 

찬양을 할 때도, 설교를 할 때도 
그 찬양으로, 그 설교로
자기 자아의 피라미드를 올리고 있는 우리의 자동적 영혼의 질병을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구함으로 치료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은혜를 내 자아의 중심에 부어 주십시오. 
내 자아의 피라미드에 당신의 은혜를 초청합니다... 

.......................................

주1) 그런데 제 꿈에 그 분이 나타났습니다. 
꿈 속에 그 거대한 예배당 안에, 까만 피라미드가 높이 지어져 올려 있는 겁니다. 

너무 이상하죠? 예배당 안에 피라미드 라니요.
그래서 '피라미드가 왜 여기서 있지?' 하며 꼭대기를 올려 봤더니 
그 피라미드의 정점에 그 분이 서 있는 겁니다.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암에 걸리셨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황망해 졌습니다. 


개인적 꿈만으로 그분의 삶과 사역을 평가할 수 없고 
그분의 사역이나 삶을 점수 매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제 삶에 던져지는 하나님의 경고인 건 분명했습니다. 

'OO아, 네 자아로 부터 시작되고, 네 자아로 집행되고 
네 자아를 위해 하는 일은 정말로 위험하다. 
너는 그걸 지탱할 힘이 없다. 
너는 그걸 계속해서 끌어올릴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무게는 너를 파괴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