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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순종합네다> P11

LNCK 2023. 5. 9. 19:53

◈도서 <내래 죽어도 순종합네다> P11 (마지막 회)     <지난 글 보기>

◑더하는 소식

본 장은 최광 선교사 탈북자 선교 실화 제2권<내래 죽어도 가겠습네다>의 
6장 "남겨진 권능 선생 과 용섭 선생"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1권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2권 <내래 죽어도 가겠습네다>      <*지난 글 보기>
3권 <내래 죽어도 순종하겠습네다> 

▲권능 선생이 한국에 오다. 

권능 선생과 이용섭 선생은,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공안에 체포되어 
중국 장춘시 철북 감옥에 갇혔다. 

그 안에서도 두 선생은, 모든 수감자와 간수들로부터 인정 받을 정도로 
모든 일을 성실하게 도맡아 했다. 

중국 감옥은 이런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고 점수를 준다. 
이 점수에 따라 감형 날짜가 정해지는 것이다. 

감옥 안에 수감된 중국인들에게는 형기를 줄이는 이 제도가 도움이 되겠지만, 
형기가 마치자마자 바로 그 날로 북송되는 두 선생에게는 
형기가 줄어드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았다. 

이용섭 선생은 중국 내몽고 공안국에서 체포되었다. 
그곳 법원에서는, 이용섭 선생을 재판할 마땅한 증거 자료가 없었다. 

그가 한국으로 조직해서 보낸 사람(탈북민)들은, 다 한국으로 무사히 들어갔거나 
아니면 북한으로 끌려간 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몽고 법원에서는, 이용섭 선생의 재판을 포기하고 
그를 그냥 북송시키려고 (연변) 도문변방구류소로 이관했다. 

그러나 그 곳 도문변방구류소에서, 용섭 선생을 북송시키려고 
그의 자료를 조사하면 할수록 
그들은 용섭 선생에게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용섭 선생이 중국의 법은 어겼지만 
자신의 민족을 위해 옳은 일(탈북자 한국행 사역)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를 이대로 북한에 보낸다면, 처형당할 것이 분명했다. 
도문변방구류소는 이용섭 선생이 연변 법원에서 재판을 받도록 도움을 주었다. 
중국에서 재판을 받고 오랫동안 형을 살다 보면 
북한의 사정도 변하리라 기대한 것이다. 

마침 연변 법원에는, 김권능 선생이 재판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고 
권능 선생이 조직해서 한국으로 보내려고 했던 사람들 중에는 
이용섭 선생이 주선한 사람들도 있기에 
증인이 갖추어진 상태였다.

검사가 두 선생이 갇힌 감옥에 와서 말했다. 
'법원에 가서 재판을 받을 때, 절대로 부정하지 마라. 
모든 증거를 다 옳다고만 해라. 
지금은 너희를 죽이려고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재판하는 것이다. 
너희는 정말 죽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다.' 

검사의 말이 옳았다. 
두 선생이 재판 중에 증거를 부인 하게 되면 
형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북송되어 버린다. 

할 수 있는 한 중국에서 더 많은 형량을 받아야만 했다. 
권능 선생은 12년형을 받았고  *북한 탈북민을 한국에 보낸 죄
용섭 선생은 4년형을 판결 받았다. 

형을 적게 받은 용섭 선생이 많이 불리했다. 
두 선생은 감옥에서 일을 잘해서, 형량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늘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성실히 맡은 일을 했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두 선생이 예수 믿고 옳은 일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온 것을 다 알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인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두 선생은 오히려 더 성실하게 일을 했고 
반갑지 않은 감형 점수는 쌓여만 갔다. 

감옥 안에서도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국제난민기구에 정식 난민신청을 해서 청원서를 올리기도 했고 
2004년 만들어진 미국의 '북한인권법'에 기대를 걸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은, 그런 국제법을 형식적으로만 운영하고 있었고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온 세상이 난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떠들어댔지만 
정작 보호받아야 하는 두 선생에게는 
중국도, 한국도, 미국도.. 어떤 나라도 관심이 없었다. 

모든 노력이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어느 날 이용섭 선생이 권능 선생에게 부탁했다. 
'북송되면 그날 바로 죽을 수 있게 독약 좀 얻어 줘!' 

권능 선생이 반대했다. 
'우리가 왜 그렇게 비겁하게 죽어야 합니까? 
의로운 피가 적당히 흘려져야 한다면 흘립시다. 
그래서 북한 정권의 죄악을 더 채웁시다. 
그들 손에 죽으면 안 됩니까?' 

용섭 선생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각오도 되어 있고! 
그런데 나 때문에 고통당할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 너무 힘들어!' 

용섭 선생의 그 말에, 권능 선생은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지만 
어떻게라도 위로하고 싶어서 말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데려가시라고 
기도 할 테니, 근심하지 말고 함께 죽든지 살든지 합시다!' 

▲2005년 9월 28일, 아직 9개월의 형기가 남아있었지만 
중국 공안은 용섭 선생을 비밀리에 북송시켰다. 

권능 선생이 보는 앞에서, 손과 발을 쇠사슬로 묶어 끌고 나갔다. 
용섭 선생을 살리려, 권능 선생이 아는 사람들에게 급히 연락 하려고 했지만 
그날 감옥은, 전화를 사용하지 못 하게 했다. 

누구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용섭 선생이 북송되지 않고, 제3국이나 남한으로 추방되게 하려고 
시도했던 수많은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북한 보위부는 이용섭 선생을 특별히 엄중하게 취급했다. 
탈북자들을 취급하는 온성군 보위부에서 조사하지 않고 
곧바로 청진 보위부로 호송하였고 

그 곳에서 다시 보위부 비밀 구류장에 넣고 1년 동안 심문하다가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 

이용섭 선생은 이전에 서안해서 체포되었다가 도문감옥에서 풀려 났을 때 
제일 먼저 한국으로 올 수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다른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일을 하다가 
결국 본인은 순교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이용섭 선생이 북송된 후부터, 권능 선생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월드컵이 진행되고, 올림픽이 진행되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바깥세상을 보여 주었다. 

'정말 하나님이 있긴 있는가?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 끌려가야 하는가? 
우리는 이렇게 무서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세상은 어떻게 한 점 슬픔도, 설움도 없는 것처럼 
즐겁고 명랑하게 돌아갈 수 있는가?' 

(월드컵 같은) 오락을 위해서는 온 세상이 열광하고 하나가 되는데 
도대체 누가 의를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서 
고민하고 있단 말인가?' 

권능 선생의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그를 단단히 지탱해주던 힘이 사라져갔다. 
'세상에 의 라는 것은 없어! 악에는 악으로 맞서야 해! 
내가 만약 이제 살아난다면, 더 이상 이런 선하고 옳은 방법을 따라 살지 않을 거야!' 

권능 선생의 마음은, 예수 믿기 이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때부터는 사랑이라는 힘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상을 향한 미움, 분노, 증오가 
고통을 극복하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되었다. 

중국인들은 형량이 차면, 머리를 기르고 
집에서 보내준 옷을 단정하게 입고 
자유롭고 당당하게 교도소 정문을 향해 걸어서 나간다. 

그러나 탈북자들에게 이 감옥에 끝은, 또 다른 지옥(북송)의 시작이다. 

1999년 4월 7일 1기생 북한 선교사들이 파송의 노래를 부르면서 
연변으로 파송되어 갈 때 
권능 선생도 순교를 결의했고, 또 각오했다. 

그 각오대로 여러 명의 북한 선교사가 순교의 길을 갔고 
권능 선생도 늘 그들을 뒤따라가는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왔다. 

이 때문에 추위와 배고픔의 감옥도 
그에겐 피하고 싶은 고통이 아니라 
당연히 만나야 하는 일 중에 하나였다. 

체포되었을 때도 태연했고, 올 것이 왔다는듯 평온했다. 

12년형을 받고 감옥에 들어올 때도, 지금(이용섭 북송 때)처럼 마음이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권능 선생도 중국인들처럼 단정한 옷을 입고, 머리를 기르고 
감옥 저쪽 끝에서부터 당당히 걸어서, 정문을 향해 걸어나가는 꿈을 꾸고 싶었다.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이 밀려왔다. 
감옥 안에는 마음속 깊은 신앙적 고통을 나누고 
회의감과 슬픔을 하소연할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 권능 선생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중국의 중죄인들과, 
신앙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탈북자들 뿐이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주셨다. 
어느 날 문득 한 통의 편지가 권능 선생에게 왔다. 

발신은 그의 고모로 되어 있었다. 
'누구지? 나는 고모가 없는데?' 

2002년 경, 권능 선생이 탈북자들을 구출하다가 체포되어 
중국 감옥에 갇힌 소식이 인터넷 뉴스와 미국 한인들 사회에 잠시 퍼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 미국에서 장로님 한 분도 이 소식을 접했다. 
'이런 사람이 중국 감옥에 있구나' 
장로님의 마음에는 권능 선생에게 가 봐야 한다는 간절함이 생겼다. 

그리고 훗날 이 분이 중국선교를 시작했다. 
그가 개척한 중국인 교회는 놀라운 속도로 부흥되었고 성장했다. 

장로님은 그 교회 전도사님에게, 권능 선생을 부탁했다. 
'이런 사람이 지금 감옥에 있으니, 꼭 가서 연결해 달라'고 말이다. 

계속되는 장로님의 간절한 부탁에 
그 연세 든 여전도사는 권능 선생에 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확하게 어느 감옥에 있는지도 몰라서
무작정 중국 안전부에 찾아가서 문의했다. 

그러자 안전부 간부가 나와서 대뜸 호통을 쳤다. 
'넌 누군데 이 사람을 찾아?' 

혼이 빠질 것 같이 무서워, 전도사는 자신이 그의 고모라고 말해 버렸다. 
그때부터 그분은 권능 선생의 고모가 되었다. 

그 전도사는, 다시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권능 선생을 찾아, 권능 선생이 있는 감옥 위치를 알아내 
편지를 보내 주신 것이다. 

이후로 그 분은, 권능 선생에게 자주 면회를 오셨고 
필요한 물건과 돈도 넣어 주셨다. 

사랑에 목말랐던 권능 선생도, 그분을 전도사가 아니라 
'고모'라고 부르면서 지냈다. 
정말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였다. 

권능 선생은 그때부터 고모와 편지로 대화했다. 
마음 속에 모든 슬픔과 응어리들을 편지에 적어서 보냈다. 

신기하게도 편지는, 권능 선생이 가장 힘겨운 시간이면 찾아왔고, 
그가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문제들에 관한 해답을 
성경 말씀과 함께 풀어주었다. 

어떤 때는 외로운 그를 위로라도 하듯이, 생일 전날에 편지가 왔다. 
고모가 보내는 편지로, 권능 선생은 자신을 다시 보았다. 
무서운 증오와 미움을 품고 살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1년 이상 서로 편지로 대화하면서, 
권능 선생의 증오로, 한으로 굳어진 마음이 다시 풀리기 시작했다. 

여태껏 권능 선생을 지탱하던 또 다른 힘이었던 
증오와, 미움까지도 다 내려놓자 
권능 선생의 마음은 텅 빈 항아리처럼 공허해 졌다. 

이제는 살아야 하는 아무런 희망도, 의미도 없었다. 
마치 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해져 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텅빈 그의 마음에 
고요히 새로운 것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세상에 아무리 불의가 판을 쳐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이렇게 가야만 해! 
그러다가 죽어야 한다면, 또 그렇게 죽는 거야! 

우리가 비록 죽고 사라진다 해도 
하나님은 이 일들을 통해, 당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나가실 거야!' 

큰 산이 느릿느릿 마지못해 걸어가듯이 
감옥에서의 10년은 더디게 흘러갔다. 

형기가 차 오면서, 권능 선생은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최광 목사)는 권능 선생이 장춘 감옥에서 북한으로 호송되는 과정에서 
구출해 내기로 마음 먹었다. 

권능 선생의 동생이 이 일을 위해서 중국으로 들어갔다. *탈북민, 먼저 한국에 왔음
나는 그에게 선교회 돈과 개인 사비를 보태, 수 천 만원을 만들어 주었다. (동생도 자기 집을 정리하고, 돈을 몇 천 만원을 만들어 가지고 갔다고 한다)

권능 선생의 동생은 중국 안전부 출신 영관급 장교를 만나 
도움을 받기로 약속했다. 

일이 성사 되려면, 석방되는 날짜를 
안에 있는 권능 선생과, 밖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정확하게 맞추어야만 했다. 

권능 선생은 10년 동안 일을 하면서 모아온 점수로 
7개월 감형을 신청하고 석방 날짜를 맞추었다. 

깨끗한 옷도 준비하고, 그동안 사귀어 왔던 사람들과도 인사하고 석방을 준비했다. 
하지만 벼락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감형이 4개월밖에 허락이 되지 않은 것이다. 
밖에서는 권능 선생이 알려준 날짜에 맞추어 모든 일을 준비했기에 
다 수포로 돌아갔다. 

권능 선생은 당장 죽고 싶을 정도로 좌절했고 절망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 나를 데려가시려면 그냥 데려 가시지 
왜 또 3개월을 남겨두고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그런데 밖에서 동생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형, 우리 사기 당했어! 
구해 주겠다는 사람은 사기꾼이야. 
돈만 몽땅 날렸어!'   (이런 인간적 방법은 안 되고, 나중에 결국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결 됨)

권능 선생은 식은 땀이 났다. 천만다행이었다. 
계획했던 날에 석방했다면, 그대로 북한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남은 3개월 동안, 처음부터 다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나 돈은 사기로 전부 날렸고, 
돈을 다시 마련 한다고 해도, 이제 도움 받을 만한 사람도 없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석방될 날은 점점 다가왔지만, 한국에 올 가능성은 흐릿해져 갔다. 

권능 선생은, 정말 희미한 희망 하나에 매달려 보기로 했다. 
10년 전 권능 선생을 체포한 공안들이 있었다. 

그들 전부가 권능 선생을 체포한 것을 나중에 후회했고 
그들 중 한 (조선족) 공안은, 권능 선생을 감옥으로 호송하면서 말했다. 

'우리 조선족들도 김정일 때문에 창피를 많이 당한다. 
너희들 정말 훌륭한 일을 했다. 
혹시라도 네가 만약 감옥에 10년 정도 있다가 나오고, 
그때까지도 내가 여기서 승급이 되어 머물러 있다면 
너를 살려줄 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 공안은 지나가는 동정심으로 말했을 것이다. 
또 진심으로 말했다고 해도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말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권능 선생이 감옥에서 10년 있게될 줄도 몰랐고 
설사 알았다고 해도, 공안이 한 자리에서 10년 동안 있을 수도 없었다. 

권능 선생은 그 사람을 찾아 보기로 마음먹고 동생에게 부탁했다. 
이름도 정확히 몰라 틀린 이름을 알려 주면서 
변방 공안에 가서 찾아 보라고 했다.  *변방 : 국경

동생은 변방 공안들을 돌아다니다가, 놀랍게도 그 공안을 찾게 되었다. 
정말 분명한 하나님의 개입이었고 도우심이었다.

10년 전 권능 선생을 체포했던 공안들은 
그 사람을 빼고는 전부 다 흩어졌다. 

한 사람은 아편 부서로 발령 받아 갔고 
또 한 사람은 연길공안 책임자로 승진 되어 갔고 
다른 한 사람은 퇴직해서 떠났다. 

그런데 그 공안만은, 마치 권능 선생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던 사람처럼 
딱 그 자리에서 승진하면서 남아 있었다. 

동생은 용기를 내어 그 공안에게 권능 선생을 부탁했지만 
공안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래도 자꾸 부탁을 하니, 그는 조금씩 방법을 알아 보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한 부서에서 일하면서 승진 했기에 
자기 부서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환하게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 

세밀하게 여기저기 알아보고 따져보더니 자신 없이 말했다. 
'한번 해 보자. 그러나 너무 믿지는 마라' 

다시 3개월이 지나고, 석방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간 후의 일을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권능 선생은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봤고, 
이제 남은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권능 선생이 마음 속으로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모호한 약속을 한 그 공안 뿐이었다. 

형 만기 날짜는 2011년 12월 20일이었다. 
그런데 12월 18일, 권능 선생이 감옥안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일에 
일이 일어났다. 

선생이 가라앉은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간수들이 급하게 그를 찾았다. 
여느 때와는 달리 그를 '처벌 방'으로 데리고 갔더니 
손과 발에 쇠고랑 들을 채우기 시작했다. 

발에는 무거운 족쇄를 채우고, 손에도 수갑을 채우고 
꼬불거리는 큰 구렁이처럼 굵고 무거운 철사로 이어놓았다. 

걸을 때마다 철덩어리들이 철거덕거리며 무거운 소리를 냈다. 
손과 발의 피부에 닿은 철덩어리들은 차갑게 얼어있었다. 

곧바로 칼같은 냉기가 온몸 구석구석 으로 파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12월 겨울 날씨에 이런 쇠고랑을 조금만 오래 차고 있으면 
그 냉기로 인해 관절들이 다 상해 버린다. 

간수들은 권능 선생을 특별하게 취급하고 있었다. 
권능 선생을 구출하려는 여러 활동이 그동안 자주 있어 왔고
지금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밖에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공안(경찰)들은 호송 도중 사고가 생기지 않게 하려고 
간수들도 모르게 비밀리에 호송을 준비했다. 

보통 탈북자 호송은 저녁에 이루어졌다. 
장춘에서 도문으로 가는 기차가 저녁에 있기 때문이다. 

저녁에 기차에 태워, 다음날 아침 도문(연변)에 도착하면 
그날 아침에 곧바로 북한으로 넘겨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권능 선생도 그렇게 짐작하고, 20일 저녁에 호송될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일이 예상과는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9일 새벽 4시에 호송 팀 공안들이 들이닥쳤다. 
'아직 하루가 남았는데, 왜 나를 호송합니까?' 권능 선생이 항의 했다.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공안들이 대꾸하면서, 권능 선생을 끌고 나갔다. 
호송도 기차가 아니라 자동차였다. 
공안 호송팀은, 이미 출발 전에, 변방 구류소에
탈북자 한 사람을 호소한다고 연락을 취했고 

변방 구류소도 관례에 따라 
북한에 (권능 선생의) 북송 사실을 통보해 놓았다. *북한에 데리고 갈 준비하라고

차는 도문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감옥 안에는 권능 선생과 친분이 있었던 간수가 있었다. 
한국에서 건너간 동생이, 형의 석방 때 있을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그 공안에게 돈을 조금 맡겨둔 것이 있었다. 

그 간수가 이 돈 문제로 권능 선생을 찾다가 
권능 선생이 없어진 것을 알고, 호송하는 차로 (무전) 연락을 해 봤다. 

권능 선생은 그 간수에게 부탁했다. 
'지금 내가 호송되고 있다는 것을 제 동생에게 알려 주세요'

'안 돼, 그런 거는 (극비사항이라서 전달) 못 해!' 
간수도 권능 선생의 호송이 얼마나 심각하고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기에 
그 부탁을 거절했다. 들어줄 만한 부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우연히, 권능 선생의 동생이 
그 간수에게 전화를 했다. 

동생에게 전화 걸려 오자, 그 간수는 실수로 이렇게 말해 버렸다. 
'벌써 거기로 도착했어? 출발 했구나!' 

공안의 말투로 동생은 눈치를 챘다. 
동생은 즉시 인맥이 닿아 있던 변방대 간부에게 전화를 넣어, 형이 출발했다고 알렸다. 

변방대 공안은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미 북한에까지 북송 통보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건너와서 데려가라고)

시간이 없었다. 조금만 늦으면 북한으로 넘어갈 것 같았다. 
북한으로 넘어가면, 꺼내기가 아주 어렵게 된다.


변방대 공안 간부는, 그들에게 권능 선생의 북송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권능 선생을 태운 차가 들이닥쳤다. 마침 오전 11시 반이었다. 

변방 공안들이 정중하게 말했다. 
'지금은 이곳 책임자가 없으니, 장춘에서 오신 분들은, 가서 식사들 하고 오세요. 
그때는 책임자가 올 테니, 그때 정식으로 접수하겠습니다.' 

차는 다시 돌아 도문 시내로 나왔다. 
간수들이 말했다. 
'야, 너도 밥 먹으러 가자' 

무겁고 흉측하게 생긴 족쇄를 질질 끌면서 
식당에 들어가서 밥 먹기 싫어서 권능 선생이 말했다. 
'나는 됐으니 당신들끼리 가서 식사하세요.' 
'안 돼, 이건 규정이야. 같이 가서 먹어야 해!' 

권능 선생은 난감했다. 
하지만 이제 어차피 북한에 넘겨지면 죽을 판에 
수갑과 족쇄가 창피할 것도 없다는 생각에, 따라 나가려했다. 

그때 다시 전화가 왔다. '북송 책임자들이 왔으니 오세요!' 
간수들이 기뻐했다. '마침 잘됐다. 얘를 넘겨버리고 우리 편하게 밥 먹자!' 

차가 다시 변방대로 들어오자 
그곳 간부들이 나와 권능 선생을 심문하듯 따지기 시작했다. 
'너 집이 어디야?' 
'난 한국 사람이다! 서류를 가지고 있다.' 

권능 선생은 동생이 통일부에서 받아 온 서류를 보여 주었다. 
그 서류를 보고, 변방대 간부는 간수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정체가 모호한 사람을 받을 수 없다.'  (*한국인 서류를 갖고 있으니까. 이중국적자가 된 상황)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동안, 동생이 다가와 
권능 선생에게 먹을 것을 건네주었고 
그것을 간수들이 보았다. 

간수들은 눈이 커지더니 권능 선생에게 호통을 쳤다. 
'이게 뭐야, 네 동생이 네가 연변에 온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이거 분명히 우리 내부에 뭔가가 있다'

자기들은 최대한 은밀하게 일을 진행했는데 
현장에 와 보니 이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화가 난 간수(감옥 공안)들이 엉덩이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떠들어대면서 
상부에 보고 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변방 공안이 문제냐, 우리 장춘 감옥이 문제냐?'  *정보가 새니까

뭔가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장춘 감옥에서는 명령까지 내려왔다. 

'우리가 반드시 해결할 테니 너희들은 무조건 지키고 있어라. 
과업을 꼭 수행하고 오라!' 

장춘 감옥소장은 부임되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풋내기 감옥소장이라 의욕이 넘치는지, 자꾸만 문제를 확대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보고가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성장(도지사) 에게로 올라갔다가, 북경 중앙 정부까지 올라갔다. 

변방대 건물 앞에서 감옥 팀과 변방대 팀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그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북한에서 터져 나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죽었다!"   *절묘한 타이밍에 죽었고, 이게 북송을 기가 막히게 막음

갑자기 온 사방에 "비상! 비상!"이 걸리기 시작했다. 

북한의 변방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급변 사태를 준비하기 위해 
간부들이 천지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회의가 소집되었고 
변방대 군인들은 중무장을 했다. (*사실 당시에 중국 군대가 북한 접경 지역에 집결했다. 탈북민들의 유입을 막으려 했는지, 아니면 북한으로 진입해서 정권을 접수하려고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도 내륙의 감옥에서 온 사람(권능 선생)에게 관심 없었다. 
권능 선생도, 장춘 간수들도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장춘 간수들은 어디 가서 말해 볼 데도 없어졌다. 
뛰어서 지나가던 변방대 공안 간부가 그들에게 짧게 명령했다. 
'여기는 이제부터 특별지구다. 너희는 빨리 여기서 나가라!' 

호송팀 간수들은 도문 호텔에 방을 두 개 얻어서 머물기 시작했다. 
다음 날까지 기다려도 어떻게 하라는 지시가 없었다. 

그러다 겨우 장춘 감옥소장이 대책을 세워서 
연변 주 공안국 출입국 관리처로, 권능 선생을 팽개치듯 넘겨버리고 가버렸다. 

권능 선생은 출입국관리소에서 다시 연길 구류장으로 보내졌다. 
10년 전에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10년 전에 여기서 감옥생활 시작)

거기 나이가 많은 사람이 권능 선생을 심문했다. 
몇 마디 말을 지켜보더니, 권능 선생의 북한 (중국말) 억양을 금방 알아 보았다. 

'이 새끼 북한 새끼네' 
그때부터 연길공안국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가 깊어지자, 심문하던 공안이 태도가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조금 이상한 심문을 했다. 

권능 선생이 조금이라도 불리한 말을 해버리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잠깐 밖으로 나가라 하고는 
다시 구체적으로 물어서 
권능 선생이 유리한 쪽으로 자꾸만 조서를 만들어갔다. 

나중에는 한국에 있는 권능 선생 아버지의 DNA까지 체취해 와서
권능 선생과 대조해 보기로 했다. 

3개월이 지나자 조사도 끝나고 
권능 선생은 할 일 없이 감방에서 지내기만 했다. 

어느 날 간수가 그를 밖으로 데려고 나갔다. 
'이제 북한으로 가는구나' 

권능 선생이 간수에게 물었다. 
'나 어디 갑니까?' 
'어디 가긴? 북한으로 가지!' 

'이제는 더 이상 안 되는구나' 

조사실로 들어갔더니 나이 많은 조사관이 말했다. 
'너 이제부터는 한국 사람을 만나지 말고, 북한 사람도 만나지 말고 
어디 움직일 때는, 우리 통제를 받아야 한다. 알았지?' 

'나가!'
'뭐지?' 

이해할 수 없어 멍청히 서 있는 권능 선생을 
조사관은 밖으로 내보냈다. 

밖에서는 친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10년! 그 무섭고 요란한 감옥생활이 이렇게 싱겁게 끝나게 될 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꿈인가?'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꿈만 같은 기분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나이 많은 조사관은 권능 선생의 서류를 세밀하게 조사하다가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이 사람을 북한으로 내보내면 안 되겠구나' 
결국 그 조사관은, 권능 선생을 살리려고 정말 많은 일을 했다. 

그 조사관은 참 정직한 사람이었다. 
훗날 사례를 하려고 찾아갔더니, 그는 돈을 받지 않았다. 
중국 관료사회에서는 만나기 힘든 분이었다. 

권능 선생 부모님(먼저 한국에 입국해 있었음)은, 그동안 아들을 살려 달라고 
중국 주재 한국 영사관에 가서 열심히 사정했다. 

하지만 영사관이 권능 선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권능 선생이 석방되었다고 하자, 그들도 놀랐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미안했는지 영사관은, 곧바로 권능 선생의 여권을 만들어 보내주었다. 
탈북자 역사에 있지 않았던 사건이 또 일어났다. 

권능 선생이 한국으로 오던 날, 권능 선생을 체포했던 공항이 
연길국제공항 까지 바래다 주면서 말했다. 
'그때 너를 잡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많은 기적과 우연이, 정밀한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면서 
북한으로 호송되어 가던 권능 선생이 한국으로 날아왔다. 

권능 선생이 한국에 와서 뒤돌아보니 
모든 기적이, 권능 선생을 체포했던 사람들의 손에서 진행되어 있었다. 

소리 없는 음성이 조용히 권능 선생의 마음에 와닿았다. 
'모든 것은 다 내가 했다. 
감옥 안에서 네가 나를 원망했고 
하나님이 있는지, 진리가 있는지에 대해 절망했지만 
그 모든 것도 다 내가 했다. 
너를 감옥에 넣은 것도 나이고, 꺼낸 것도 나다!'

김권능 목사 간증 P1 (tistory.com)

김권능 목사 간증 P2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