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꽤 인기가 많으셨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BTS급이셨던 것 같아요.
예수님이 한번 뜨셨다 그러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루살렘은 당연했고, 요단 건너편에서도 왔고 또 이방 땅인 두로 와 시돈, 이게 거리가 제법 되잖아요. 근데 두루 와 시돈에서까지도, 많은 무리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몰려왔습니다. :8
하여간 예수님은 굉장히 인기가 많으셨습니다. 얼마나 인기가 많으셨는지, 무리가 애워싸서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작은 배를 띄워서 바다로 나아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9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막 떠미는지 '야, 여기 있으면 잘못하면 위험하겠다, 사고 나겠다' 그래서 바다에다 배를 띄우고, 무리들과 거리를 두신 거예요. 그 정도로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이것은 어떤 일시적인 인기라기보다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셨다는 거예요.
복음서에서 만나는 진짜 예수는, 맞아요, 매력적인 존재이십니다. 믿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여겨졌던 이방인들에게 조차도 예수님은 아주 매력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이방 땅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어떻게 한번 뵙기라도 하려고.. 그 분께 한 번 손이라도 대보려고 (능력을 전가 받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그에 반해 동일한 본문인데 또 다른 무리의 종교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도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셨죠. 두 부류의 종교 지도자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아주 매력적이고 이방에서까지 많이 몰려드는 막 뜨는 라이징 스타 였다면,
본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전통적인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앞서 막1:22절에 보면 '별로 권위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죠.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기관들과 달리 권위가 있더라고 했어요. 이건 은근히 그들을 디스하는 표현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종교지도자들의 말에 별로 귀 기울이지도 않고 별로 그 사람들의 말을 심각하게 듣지도 않고... '권위가 없었다'는 게 그런 뜻이지요.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자 여러분, 오늘날 현대교회의 모습은 어떨까요? 오늘날 현대교회는,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비춰질까요?
아니면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권위 없는 모습으로 비춰질까요?
현대 교회는 차치하고, 우리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매력적인 존재로 비춰지고 있을까요?
아니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별로 권위 없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그렇게 비춰질까요.?
슬프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현대 교회도 그렇고, 우리 교회도 그렇고.. 사실 후자에 더 가깝지 않습니까?
물론 매력을 느껴지는 사람이, 소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 굳이 구분하자면, 후자 (매력 없는) 쪽에 훨씬 가깝다고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 아닐까 싶습니다.
저희 교회도 그렇고, 현대 기독교도 그렇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매력적으로 비춰지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의 숫자도 줄고 있고, 전도도 잘 되지 않죠.
▲자,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가 오늘날 섬기고 있는 예수와 복음서에 기록돼 있는 이 당시 예수님은 다른 예수일까요?
분명히 성경에 예수는,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는데 오늘날 예수를 보여주고 대표하는 교회는 왜 세상 사람들이 관심이 없을까요?
혹시 오늘날의 교회는, 진짜 예수가 아니라 교리화되고, 종교화된, 시스템화 된 예수를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제가 본문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비춰지고 있는 예수는 복음서에서 살아 역사하셨던, 그 진짜 예수의 모습이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진짜 예수의 모습은 어딘가 가리워져 있고 그것이 다 교리로 만들어지고, 시스템으로 만들어져서 살아계신 진짜 예수는 어디엔가 가리워져 있고,
해야 될 일, 하지 말아야 될 일, 이걸 하면 잘하는 거고, 저걸 하면 잘 못하는 거고 하는 수많은 시스템과 교리로 종교화된 예수를,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이게 여러분 정확히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었거든요. 바리새인들도 그랬고, 서기관들도 그랬고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철저하게 '율법'이었어요.
그 율법은 뭐냐면, 시스템화되고, 종교화된 그 하나님이었지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 이것하고는 좀 거리가 있었다는 거예요.
물론 율법은 성경에서 왔습니다. 그러나 적용이 잘 못 된거죠. 율법을 오용, 남용했죠.
구약시대 때 하나님을 섬겼던 믿음의 선조들을 보면,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 율법을 따르는 이면을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뭔가가 있었어요. (율법의 본래 정신에 충실했죠.)
엘리아를 봐도, 이사야를 봐도 그렇고 다윗을 봐도 그렇고, 그 안에 하나님의 살아계신 어떤 것이 보여지고 드러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 앞에서 율법을 지키고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 앞에서 우리가 해야 될 일과, 마땅히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구별해서 믿었던 것인데
이것이 이제 400년의 그 구약과 신약 사이에 갭이 있고 나서는 그 400년 동안 한 번도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어떤 인카운터(대면)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과는 이렇게 분리된 채로, 전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은 채로 400년이 지나고 나서 보니까
종교 지도자들도, 그 상황에 익숙해졌던 거죠. 유대교에 익숙해져서, 그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어떤 생명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 그냥 율법 자체를 외적으로 지켜야 되고, 뭘 해야 되고 하는 종교, 시스템! 그것만 남게 됐던 거죠.
어쩌면 오늘날 현대교회의 모습도,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종교화되고, 시스템화된 모습 쪽에 더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염려와 근심들이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정말 매력적인 분이셨습니다. 정말 매력적인 분이셨어요.
믿는 자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아주 매력적으로 비춰졌던 분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손마른 자를 고치시고(본문), 나병환자를 치유하시고,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본문 막3:1절에 보면 손마른 자가 회당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손이라 그럴 때는 '주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함이 아니오' 이렇게 '손'이란 표현이 나올 때 보면, 능력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육체 노동 사회였거든요. 그러니까 육체의 능력으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머리가 얼마나 좋으냐, 다른 재능이 많느냐.. 이런 것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낮게 평가되던 시대였죠.
그러니까 '한쪽 손을 못 쓴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능력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거죠.
그래서 '손이 말랐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 기록돼 있는 치유의 사건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고쳤다고 기록했는데,
그중에서 자세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11건 정도의 치유 사건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치유사역
수많은 치유 역사들 중에서, 어떤 것들만 성경에 기록했을 것 같으세요? 메시지가 있는 것들만 뽑았겠죠.
당연히 마가가 기록할 때, 수많은 예수님의 사역과 행적 중에서 당연히 메시지가 있는 것들만을 뽑아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치유 사건들은, 굉장히 많은 상징적인 의미들을 담고 있어요. 예를 들어서 나병 환자는, 어떤 영적인 죄에 대한 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든지...
▲본문의 '손 마른 자'라고 하는 것은 '능력이 없는 사람'에 대한 상징이라는 거죠.
그래서 '손마른 자'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생에 절박함이 있습니다. 어떤 절박함이냐 하면 누군가가 도와줘야 되는데.. 누군가가 자기를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내 인생에서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별로 없다' 하는 사람이죠.
하루는 그가 회당에 찾아왔습니다. 본문에, '회당에 손마른 자가 있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1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손마른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절실함 가운데, 절박함 가운데, 도움을 바라며 '누군가가 내 인생을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육적인 도움이든, 영적인 도움이든, 아니면 마음의 어떤 위로든... 하여간 '누군가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 안에 '손마른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찾아오고, 교회를 바라보고 있는 '손마른 자들'이 있습니다.
이 손마른 자는,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일 수도 있고 건강을 잃은 자일 수도 있고, 가족을 잃어버린 자들 일수도 있고 자신감을 잃어버린 자일수도 있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자일 수도 있고 기쁜 마음을 잃어버려서 항상 우울한 사람일 수도 있고...
하여간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삶을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 그들 '손마른 자'들이 도움을 기대하며 교회에 나옵니다.
과연 교회는, 이 손마른 자들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가요?
▲본문 2절에 보면, 당시 이렇게 반응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절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이 사람들이 누구냐면, 뒤에 보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6 이 사람들은 '손마른 자' 앞에서 놀랍게도 이들의 관심은 뭐였냐면 '아이쿠 저 사람 어떡하지? 아이고 저 사람 손이 말랐는데 누가 도와 주지 않으면, 밥 벌어 먹고 살기도 힘들텐데...' 이렇게 마음이 돌아가는 게 아니라
회당에 손마른 사람이 있는데, 오히려 이들의 관심은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 이거에 관심이 다 가 있는 거예요. 분명히 손마른 자가 와서 절박한 눈빛과 절박한 마음으로 회당 안에 있는데.. 도움을 바라는 눈빛이잖아요.
그런데 그 마음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어요. 즉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 여기에 모든 관심이 가 있었습니다.
손마른 자를 긍휼로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교리 논쟁을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논쟁 앞에서, 이런 종교의 완악함 앞에서 예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자, 여기 보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탄식하셨대요? 그들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탄식하셨대요.
도대체 너의 마음은 뭐냐는 거예요. 도대체 너의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는 거예요.
이 손마른 자, 모든 능력을 상실한 자, 절박한 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 그 절박함 앞에서 '종교인들아, 너의 마음은 어떻게 그렇게 완악할 수 있느냐?'는 거에요.
여기서 이 '완악함'은, 원어로 포로세이 인데, '딱딱하다. 무감각하다' 이런 뜻이에요.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절박함이 있는데 어떻게 마음이 아무런 반응을 하고 있지 않냐? 어떻게 너희 마음이 그렇게 딱딱하고 무감각하냐, 전혀 움직이지 않느냐?'
그리고는 자기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딱딱하게 굳어져 있고 뭐만 보고 있는 거예요?
'예수가 교리를 지키는가/ 교리를 지키지 않는가?' 이것만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딱딱한 마음을 향해서, 예수께서 탄식하시고 노하셨다는 거예요. :5 ▲4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참된 복음이 뭐냐?'는 거예요.
'참된 복음이 뭐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냐/ 죽이는 것이냐? 어느 것이 옳으냐?'
'손마른 자의 절박함을 안다면,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그 절박함을 보고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어떻게 쓸데 없어 보이는 그 교리논쟁만 하고 있을 수 있느냐?'
이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마음, 딱딱하고 무감각한 마음을 향해서 예수께서 탄식하고 진노하셨다.. 라고 기록합니다.
▲자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2000년 전 회당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교회는 어떤가요? 이게 많이 오버랩 되더라고요.
사실 오늘날 교회라고 하는 건, 저희 모습이죠. '우린 어떤가, 나는 어떤가?' 이 모습들이 많이 오버랩됐습니다.
우리 안으로 찾아오는.. 날마다 찾아오는 손마른 자들이 있죠. 사실은 손마른 자들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고, 우리 모두 인것 같아요. 우리 안에는 다 어떤 절박함, 무능함들이 있잖아요.
회복에 대한 기대가 있고, 또 '누군가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고' 또 교회를 나오면 뭔가 육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심적으로든 뭔가 도움이 올 것 같고...
그러므로 이런 손마른 자들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습니까?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계속 작동하고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우리 마음이 움직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혹시 손마른 자를 가운데 두고도 아무 영양가 없는 교리 논쟁... 뭐 그런 얘기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께서는 손마른 자의 절박함을 보셨어요. 예수 앞에 있는 인간들의 절박함을 무시하지 않으셨어요.
그 절박함이 어떤 종류의 절박함이든지 간에 나병이든/ 귀신 들린 자든/ 손마른 자든/ 열병으로 누워 있던/ 중풍병자든 하여간 그 안에 있는 절박함 들을 무시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예수께서는 그 절박함에 눈을 계속 맞추셨어요.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손마른 자의 절박함에, 계속 예수님의 마음이 쏟아졌어요. 이거 진짜 예수, 진짜 기독교입니다.
2000년 전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진짜 모습은 교리와, 율법과.. 그걸 논하셨던 분이 아니에요.
뭐 필요하면 그런 걸 하셨지만 그분의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냐면
인간들의 고통,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고통의 문제, 망가진 인간의 마음들, 죽어버린 인간의 영혼... 그거에 계속 마음이 있으셨죠.
그래서 손마른 자들, 나병환자들, 귀신들린 자들, 마음이 상한 자들... 끊임없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이 가셨어요.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셨어요. 그것이 진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과연 교회의 마음은, 교회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요? 우리가 이 말씀 앞에 진지하게 돌아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섬기고 있는 분은 진짜 예수인가요? 아니면 교리화되고, 포장되고, 시스템화된... 그런 예수인가요?
여러분 만약에 우리에게 진짜 예수님의 그 마음이 있었다면 우리도 진짜 예수님을 섬기고 있었다면
뭐 비록 그 손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해도, 그 사람의 손 노릇이라도 대신해 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능력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을 탄식하시고, 진노하실 때 보면
무엇 때문에 진노하셨다고 나와있냐면 '능력이 없어서 진노하셨다'고 되어 있지 않아요.
'너희는 어떻게 그렇게 손 고치는 능력도 없냐? 아이고 정말 무능한 것들!' 이렇게 탄식 하셨다고 되어있지 않다는 거에요.
이 사람들의 능력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탄식 하신 것이 없었어요. 그럼 무엇에 대해 탄식하셨나요?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에 대해서 탄식하신 거예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5
능력이야, 사람의 능력은 여러분, 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우리가 예수님도 아닌데 뭐 병든 자를 다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도했는데 안 나을 수도 있고...
그런데 예수님께서 질타 하셨던 것은, 능력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야 이 무능한 것들아!' 이러고 탄식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완악함'을 탄식 하셨어요.
능력이야 없을 수도 있죠. 그렇지만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안 돼죠. 도우려는 마음이야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거죠.
본문은 '마음의 자세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손마른 자를 향해서 바리새인들과는 전혀 다르게 반응 하셨습니다.
5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예수께서는 종교와 교리를 논하시기 전에, 손마른 자의 고통을 치유하셨습니다. 손마른 자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은 예수께서 매력적이셨던 이유였어요.
10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그렇죠. 이게 예수님의 인기의 비결이셨다는 거예요. 그 사랑과 긍휼의 마음! 치료 이전에 사랑의 마음!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 온 거예요. 그렇지 않고, 예수님이 그들을 투명인간 취급하시며, 그저 병만 고쳐주셨다면,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몰려오진 않았을 거예요.
손 마른 자, 한쪽 손 없이 살아가는 이 고통 속에서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인생의 고통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파쇄하려 이땅에 오신 거예요. 그 속박을 깨뜨리려 이 땅에 찾아오신 거예요. 이게 복음의 본질이에요.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일3:8
마귀가 하는 일이 뭐예요? 인간은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지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그 일을 멸하려 오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환영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인간 가운데 있는 고통과, 인간 가운데 있는 절망과, 낙심과, 죽음의 문제를 깨뜨리시고 해결하려고 오셨는데..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는데.. 어떻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어떻게 환영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될 문제는 현대 교회의 예수가, 세상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는 이유 입니다.
현대 교회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 고통의 문제, 속박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과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고통과 속박의 문제가 있는데 예수께 나오고, 또 교회에 나와도 별로 차도가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거에요. 그게 여러분, 교회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진짜 이유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진짜 예수님의 그 마음을 만약 가지고 있다면.. 능력이야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죠!
우리가 매력이 없는 이유가 뭘까를 정말 진지하게 돌아 봐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오늘날 우리가 섬기고 있는 예수는 진짜 예수일까? 아니면 종교화 되고, 시스템화 되어 있는 예수일까요?
여러분이 섬기고 있고, 믿고 있는 예수는 진짜 예수입니까?
사람들은 여러분, 진짜 예수에게 다가가기 원합니다. 종교나 시스템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종교와 시스템에 또다시 속박 되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뭐 해라, 하지 마라..에 내가 속박 되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요? 그건 매력적이지 않아요.
사람들은 진짜 예수께 연결되고 싶어해요. 우리의 삶의 고통의 문제를 회복시키시는 분, 고치시고 치유하시는 분, 살리시는 분... 그 진짜 예수께 닿고 싶어해요.
만약에 여러분, 현대교회가 진짜 예수를 사람들에게 연결해 줄 수 있다면, 소개해 줄 수 있다면, 사람들은 오지 말라고 해도 몰려올 거예요.
너무 많이 몰려오는 사람들로 인해서 예수께서 자신은 피하셔야 할 정도로... 그렇게 몰려오지 않겠어요?
▲1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저는 이 구절이, 무슨 깊고 심오한 뜻이 있을 줄 생각하고 오래 묵상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그 이유가 의외로 단순해요.
너무 많이 오니까.. 이거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소문 좀 그만 내, 소문 좀 그만 내!' 이거 더 오면 감당이 안 되니까요.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 지러 오신 메시아 이심을 드러냄이 본래 목적인데, 병 고치는 분으로 오해될까봐.. 무리를 피하신 면도 있겠죠. 그렇지만 당장의 필요는, 사람들이 너무 몰려와서 문제가 되니까, 12절에 '소문 좀 그만 내라' 하신 것입니다.
나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회복시키시는 이 예수를 볼 수 있다면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오지 말라 그래도 몰려 올 거예요.
삶의 해답을 주지 못하는 기독교, 고통에 대해서 무기력한 기독교, 자유를 주지 못하는 기독교, 이 종교를 향해서, 세상은 말하죠. '우린 그런 거 필요 없다!'
우리가 진짜 보고 싶은 것은 인생의 해답을 주는 진짜 예수 그리스도 라고,
이게 교회를 향한 세상의 외침입니다. '우리는 껍데기 보고 싶은 거 아니라고, 우리는 인생에 진짜 해답을 주는 그 예수를 보고 싶다고..'
◑몰려드는 무리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책, 솔루션
교회의 본질은 뭘까요? 1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밀려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그 매력을 보고 예수의 그 매력에 끌려여 예수 앞으로 몰려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께서 13절부터 이런 선택을 하십니다.
그것에 대한 대응책이에요. 예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13~19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이 수많은 몰려오는 사람들, 인생의 고통의 해결과, 인생의 문제의 회복과 해결을 기대하며 '진짜 예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대답은 뭐였냐면, 그 솔루션(해결책)은 뭐였냐면 12명의 제자들 부르셔서 세우신 거였어요.
그래서 뭘 하게 하셨냐 하면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전도하며 귀신도 내쫓고 -병도 고치고 -말씀도 전파하고 즉 예수가 하셨던 일을 똑같이 하게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것 -긍휼의 마음부터 -고통을 회복시키는 능력 -진리를 전하는 사역 등 예수님의 모든 것이 제자들에게 위임 됐어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이 표현은, 예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함께 있는 거지요.
단순히 능력을 임파테이션 받으려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지요. 그냥 주신 거 받아 가지고 하면 되는데
'함께 있게 하시고'는 늘 곁에 인격적인 관계를 뜻하는 잖아요. 예수의 마음을 공유하게 하신 거지요.
▲자 여러분, 이것이 교회 본질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밀려오는 사람들 뭐 밀려 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하여간 죄 때문에 고통가운데 있는 인간, 타락한 인간,
하나님을 떠나서 손마른 자, 하나님을 떠나서는 나병 걸린 자, 하나님을 떠나서 열병으로 누워 있는 자, 마음이 무너진 자, 소망이 없는 자, 기쁨을 상실한 자,
이 하나님을 떠난 수많은 손 마른 자들이 있는데 이 손 마른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솔루션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것은,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뽑고 세우셔서 예수께서 하셨던 똑같은 일들은 위임하시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함께 나누게 하시고
또 예수님께서 당신이 누렸던 모든 능력들을 위임하셔서 임파테이션(전가) 하셔서, 똑같은 일들을 하라고 보내셨다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교회의 본질이고, 크리스천의 본질입니다. 크리스천이란, 단순히 몇 가지 교리에 동의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교리에 동의하는 것은 바리새 적으로서, 서기관 적으로 기독교를 취하고 거예요.
그게 아니죠. 크리스천의 본질은 뭐냐면 성경적인 정의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에요.
'예수와 함께 있었고..' 이 말은, 예수와 같은 마음을 공유한 사람들 :14 예수님이 느끼셨던 것처럼 비슷하게 느끼고, 예수님이 생각하셨던 것처럼 비슷하게 생각하고, 예수와 함께 있는... 그 마음을 공유하는 사람들,
또 예수께서 하셨던 일들을 똑같이 하는 사람들, 그 일은..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또 마음이 상한 자들을 회복시키고...
고통가운데 있는 인간의 절박함, 손마른 자들의 절박함을 계속 바라보며 그 손을 고칠 능력이 없으면, 대신 손노릇 이라고 해 주는...
하나님을 떠난 한 인간의 깊은 영적인 절망과 또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기 원하는... 그게 여러분 크리스천의 본질이라는 거에요. 그게 크리스천의 데피니션(정의) 이라는 거예요.
예수가 하셨던 일을 똑같이 하는 게 교회이고 예수가 하셨던 일을 똑같이 하는 게 크리스천이에요.
그래서 교회 본질은 '제자' 예요. 스승이 하는 일을 똑같이 따라하는 제자!
제자가 따로 있고, 크리스천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은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예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여기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이라고 되어 있지, 다른 조건이 없어요. 크리스천 중에 뭐 탁월한 나의 종은, 나의 선택한 카리스마 있는 목사 같은 사람... 이렇게 되어 있지 않다는 거예요.
예수께서 하신 그 일을, 제자들도 똑같이 그렇게 할 거라는 거에요.
'아니 목사님, 우리는 사람인데 하나님이신 예수가 하셨던 일을 어떻게 똑같이 합니까? 우리가 손 마른 자를 무슨 수로 고치고, 죽은 자를 무슨 수로 살립니까?'
그 비결이 있어요. '그도 할 것이며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요14:12
계속 그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세요.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16:7
예수께서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안에 성령, '예수의 영'께서 거하실 것이고,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하고, 그보다 더한 일도 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거라는 거예요. 할렐루야!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예요.
성령께서 하시니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똑같이 하실 거라는 거예요. 그거 보다 오히려 더 큰 일도 하실 거라는 거예요.
▲예수께서 본문 막3:16~18에서, 12제자를 세웠을때 새 이름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새 이름을 받은 것은, 새 사명을 받았다는 거죠.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셨듯이 고통가운데 망가져 있는, 절박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일, 이 새 사명을 주셨어요.
새 이름은.. 이것은 우리의 존재와 아이덴티티 에 대한 얘긴데, 새 이름은 결국 우리 마음에 관계된 얘깁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명과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일하도록 하셨다는 거예요. 그것이 제자인줄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뭐 다른 게 정 안 되면 '예수 따라가는 게 너무 힘들어, 나는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하고 야 정말 다리 찢어지겠어..' 그러면 정 안 되면, 마음만이라도 따라가라고요.
나는, 예수께서 가르치셨듯이 효과적으로 가르치지도 못 하겠고 나는 말도 어눌해서, 전도 해도 별 열매가 없고, 나는 기도 빨도 또 없어 가지고... 오케이 그러면 마음만이라도 따라가세요. 그게 여러분,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인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탄식 하셨던 것은, 무능력이 아니었어요. 예수께서 탄식 하셨던 것은,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었죠. :5
내가 기도해도 환우의 병이 안 나았어요. 그게 뭐 우리 능력으로 하는 건가요? 성령께서 하시는 건데... 어떻하겠어요? 그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그건 성령께서 하시는 소관이지...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래서 우리의 무능, 무능력을 탄식하시지 않아요. 대신에 '마음의 완악함'을 탄식하셨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여러분,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종교입니까, 아니면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으로 사랑하시고 긍휼히 있었던 예수님의 마음입니까?
우리가 대하고 있는 예수님은 나를 향한,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만나시는 인격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모태신앙으로 자랐어요. 대학에 들어가서, 제가 크리스천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주변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있어서 하루는 붙잡고 슬쩍 물어봤어요.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영접기도를 하면 된데요.
그 친구가 사영리를 갖고 왔어요. 그래서 1번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제가 1번부터 4번 끝까지 다 믿는다고 말했어요. 제가 모태신앙인이잖아요.
그러니까 '영접기도하자' 그래서 제가 해줬어요. 다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내가 크리스천이 된 거래요.
'내가 진짜 크리스천이 된 거야?' '진짜 된 거야!'
이게 뭐예요? 진짜 크리스천이 된 겁니까? 그게 아니라, 그저 몇 가지 교리에 동의한 것에 불과했어요. 그러니 아무 것도 안 일어나는 거죠. 회개라든지, 삶의 변화라든지.. 그게 없었죠.
그럼 제가 언제 거듭나게 됐냐면, 제 인생의 절박함 가운데서 제가 방황할 때... 환경이 절박했던 건 아닌데, 제 영혼이 절박했어요.
제가 삶의 깊은 허무 가운데, 그 인생의 절박함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제 마음 가운데 임파테이션(전가) 된 거예요.
'아, 나를 긍휼이 여기시는 분, 나를 사랑하시는 분!' 이 예수의 마음을 내가 딱 보는 순간, 그 마음을 알게 된 순간, 그 마음이 느껴진 순간... 제가 거듭나게 된 거죠.
그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보고, 느끼고, 만나는 순간.. '아~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구나, 긍휼히 여기시는구나, 은혜구나!' 그게 딱 제 마음 가운데 전달된 순간, 제 영혼의 구원이 일어났어요. 그 순간 제가 거듭나고 구원이 일어났어요.
여러분이 만난 예수는 진짜 예수 입니까? 살아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간의 고통 때문에 함께 우시는... 진짜 예수 입니까? 아니면 몇 가지 기독교 교리에 동의하신 겁니까? *지적 동의
진짜 예수는 여러분, 시스템이나 종교가 아닙니다. 진짜 예수는 인격이세요.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우리의 고통을 함께 해결하기 원하시는 분! 그분이 진짜 예수님이세요. 교리와 시스템이 아니라는 거죠.
혹시라도 이 가운데 교리와 시스템화 된 예수를 섬기고 계신 분이 있다면 오늘 '종교'를 때려치십시오. 그거 아무리 오래 붙잡고 있어 봐야 영양가 하나도 없습니다. 빨리 때려 치시는 게 유익합니다.
여러분들이 만나야 되는 예수는, 전혀 다른 예수이세요. 그분은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의 고통의 문제를 함께 고통스러워 하는 분이세요. 이 분이 우리 예수님이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