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교인의 ‘그리스도 안’ 노이로제 - YouTube
◈참 교인의 ‘그리스도 안’ 노이로제 엡1:1~14
에베소서의 첫머리는 우리가 잘 아는 단어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6절까지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7~12절까지는 그리스도와의 관계,
13~14절에서는 성령님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표현이 ‘그리스도 안’입니다.
제목을 “참 교인의 ‘그리스도 안’ 노이로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노이로제는 불안감이나 강박감으로 인해 생겨난 신경증입니다.
참 교인은 ‘그리스도 안’을 잊어버릴 때 불안해하고,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처럼 언제나 그리스도 안을 찾습니다.
참 교인이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 안을 강박적으로 붙잡는 자들입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튀르키예 남쪽의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육상교통과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써 약 25만의 인구가 살았다고 합니다.
로마 제국은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을 아시아라고 불렀고
에베소는 아시아의 행정수도였습니다.
우리는 아시아 대륙과의 구분을 위해서 이 지역을 소아시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에베소 교회 외에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교회가 더 있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주변의 일곱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에 이어서 에베소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들 서신서의 공통적 핵심은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란,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자체였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생활화’라는 큰 주제 안에서, 각 서신서의 특징이 나누어집니다.
<로마서>는 한 교인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상태에 대해 묘사해줍니다.
왜 십자가 생활화를 해야 되고,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십자가 생활화에서 얻어지는 결과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린도전후서>는 이렇게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생활화해나가는 교인과
교회의 실존 상태를 보여주었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교인들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십자가를 놓치고 세상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때
어느 정도까지 타락할 수 있고,
어느 정도까지 존재의 의미가 사라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아는 자들이 타락할 때
교회는 무늬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십자가 생활화가 세상의 막강한 영향력을 차단하고
정곡을 찌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의식으로 중단 없이 바라볼 때
세상의 영향력은 차단됩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이야말로
세상의 영향력에 대항하고 정곡을 찌를 수 있는 방법임을 가르쳐줍니다.
▲이제부터 살펴보게 될 에베소서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교인과
그 교인들의 모임인 교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에베소서에는 고린도전후서나 갈라디아서에서처럼
지역 교회가 당하는 문제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언급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교인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그런 교인들 전체가 포함돼있는 교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먼저 교인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교인이란 삼위 하나님과 (자기자신 포함) 사위일체를 이루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의 첫머리에서
한 교인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어나고, 3~6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일어나고, 7~12
성령님과의 관계가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3~14
이러한 내용이 평범한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언뜻 보기에는 쉽지만 자세히 살펴볼수록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모든 구절을 짚어갈 수는 없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관계,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 성령님에 대한 관계의 핵심을
파악할 수는 있습니다.
그 핵심을 관통하는 표현이 바로 ‘그리스도 안’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마치 노이로제에 걸린 것처럼 ‘그리스도 안’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을 빼놓으면 무섭고 불안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사람 같습니다.
◑로마서로부터 시작해서 사도 바울의 서신서 전체를 종합해보면
‘그리스도 안’이라는 표현이 164회 나옵니다.
그중에서 특히 에베소서에만 36번 나오고, 오늘 본문에서 7번이나 나옵니다.
의미가 같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그 안에서’라는 표현까지 다 합치면
본문에 총14절 중에 9번이나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은 핵심적 개념입니다.
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 안'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4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여기서도 다시 '그리스도 안'이 강조됩니다.
이후의 말씀에서도 이러한 강조는 계속됩니다.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도 의미적으로는
'그리스도 안'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일한 의미의 표현까지 포함한다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많이 '그리스도 안'을 강조하는지는 셀 수도 없을 것입니다.
▲다시 3절로 돌아가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란 영적인 복입니다.
우리의 육체를 통해 땅에서 받아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닙니다.
이는 곧 우리의 영인 마음이 복으로써 누릴 수 있는 대상은
육체로 만나는 이 세상에는 없음을 의미합니다.
신령한 복은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세상 바깥에서 누리는 복입니다.
복이라는 말을 쉽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되면 좋겠다, 저걸 가지면 좋겠다.’고 바랄 수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복에는, 신령한 복이 있고, 그렇지 않은 복이 있습니다.
신령한 복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하는
바람직한 내용들이라면,
신령하지 않은 복이란 육체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령하지 않은 복은 물리적인 복이고 육체를 따르는 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령한 복인 구원과 영생을 누리지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육적인 복을 구걸하는 멸망과 저주를 받게 됩니다.
신령한 복인 구원과 영생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누리는 복입니다.
그리스도 밖으로 나가면 신령한 복으로써 구원과 영생은 없습니다.
육체적인 복을 구걸하는 멸망과 저주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지라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 수 없다면
그것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신령한 복을 받았다면
가정이나 직장을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원과 영생을 살게 됩니다.
반면 그리스도 바깥으로 나가서 신령한 복이 임하지 않으면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복을 구걸하면서 멸망과 저주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로 만나는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이 작용하고 있다면
세상의 복을 구하는 상태입니다.
세상의 복이란 흔히 말하는 오복(五福)만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모든 삶의 장소에서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바라는 모든 일들이
다 복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복을 구하는 것은
멸망과 저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이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리스도 바깥으로 튕겨 나온 상태입니다.
믿음이란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라틴어로 크레도(credo)라고 하는데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이 크레도의 어원을 살펴보면 나의 심장을 꺼내서 다른 대상에게 준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곧 내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 드려서
주님 안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을 드려야 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이시고,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이시며,
지금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속된 말로 팔자가 바뀝니다.
세상에 대해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바랄 수 없는 팔자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을 믿고자 한다면 이것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는 죽을 때까지 이 세상에 대해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소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럴 때마다
‘내가 그리스도 바깥으로 나와 있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런 바람은 생길 수 없다.’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스도와의 관계, 성령님과의 관계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복을 주십니다.
▲4절을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지구의 어떤 것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수십 억 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보자면 나는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뒤에 숨어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체제와도 같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음에 연합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 전까지는
어떤 방식으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신학을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여러 개 받은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면 실제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기독론이든 성령론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쓰여진 것이라면
아무리 신학적 대가로 불리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만 실제로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온갖 사상과 철학을 다 동원할지라도
나의 인격의 핵심이자 영인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실제로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말씀을 나누며, 하나님을 직면한다는 말씀을 반복해왔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한다는 것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으로써 십자가 보혈로 씻깁니다.
이는 곧 우리 마음에 세상 것이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상태입니다. :4
배우자, 자식, 부모, 형제자매, 내가 하는 일, 심지어 나의 몸까지도
내 마음에 담겨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에 그 어떤 것도 들어있지 않아야만
하나님을 직면하는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를 이렇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법이 지켜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준비해놓으신 신령한 법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들이 되도록 창세 전에 예정하셨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사는 모습을 보시고 맘에 들어서 아들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 전에 이미 아들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정하시고 아들로 삼기 위하여 때가 되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8~9절을 보면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내용을 '그리스도 안'에서 깨닫게 해주십니다.
▲한편 7절을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속량은 곧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대가를 치르고 해방시킴입니다.
이는 곧 우리 마음이 육적이고 물리적인 복을 추구하는 상태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누구나 ‘돈을 잘 벌었으면 좋겠다, 건강하면 좋겠다,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삽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상태야말로
저주의 상태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이루어주시는 속량은
바로 세상의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육체에 달라붙어서 이 세상을 향하여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끊임없이 세상을 향하는 것이 노예 상태이자 저주와 멸망의 상태입니다.
본래 사람은 세상을 향한 바람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러한 바람이 나타나게 된 이유는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마귀의 말이 여전히 우리의 인격 속에서
뼈와 살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말에 취해서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노예 상태로부터 속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13절을 보면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로부터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을 치는 것은 주인이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하여 도장을 찍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거룩하고 흠 없는 아들로 삼으시기를 창세 전에 계획하셨고,
그 일을 실제로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리스도로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세상에 대한 마음의 바람이 차단되어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고 신령한 복을 바라게 됩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때
성령을 보내주셔서 인치심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쉽게 말해 보증을 해주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아들이 된다는 말이 허황되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내가 믿는 이유,
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고,
아들 됨의 기쁨을 누림은 모두 성령의 인치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인치심’이란 거래의 계약금 혹은 담보나 보증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영생을 살 사람들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영생을 보증하시는 계약금이 되어주십니다.
죽은 다음에 살게 될 영생에 대해 성령이라는 계약금을 받음으로써
이 땅에서도 영생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은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주어지는
영생에 대한 보증이십니다.
이 역시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영생의 담보이자 보증이신
성령님이 오셔서 나를 대신하여 이 땅을 살아가십니다.
이것이 참 교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스도와의 관계, 성령님과의 관계는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머물러 있는 동안에만 성립하고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10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는 일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나의 마음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질서가 잡히고
균형이 맞춰지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이러한 참 교인들이 살면서 교회를 이루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에베소서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이라는 단어가
신경증적으로 우리에게서 기억되게 해주시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시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에베소서의 진행과 함께 우리가 복 중의 복인 신령한 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사람들로 변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를 아시나요?
(Maximiliano Kolbe 1894~1941 폴란드인)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서슬퍼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출한 수감자 때문에 10명이 무작위 차출되어
아사감방(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감방)에 끌려가던 중
콜베 신부는,
10명의 수인 중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한 명의 수인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었던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콜베 성인 때문에 극적으로 살아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과 은총의 주인공인 그의 이름은 ‘가죠프니체크’였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신
콜베 성인의 시복식에 참석하게 되게 됩니다.
가죠프니체크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결하신 콜베 신부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의 죽음으로 덤의 생애를 살게 되었는데,
신부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엡1:7)
어떤 고귀한 사람이 나를 위하여 대신 죽음을 택하였다면,
우리는 남은 생애를, 그분 때문에 거저 얻어진 삶을 얼마나 더 잘 살아야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음을 택하셨는데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얼마나 더 잘 살아야 하겠습니까.
실로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앞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드려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이지만,
미력하나마 우리의 전부인 사랑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분께서, 전부를 다하여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