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에서는 인간사의 어두운 면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기만 아는 탐욕스런 부자가 등장합니다. 몰래 주인의 돈을 허비하는 불의한 청지기가 나오고 자기의 특권을 남용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청지기도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언급되고, 동생의 귀환을 기뻐하지 않는 형 이야기도 나옵니다. 왕의 초청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에 따른 왕의 진노와 심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인간 세계에는 항상 갈등과 위기가 있고 몰락과 심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비유만큼 인간의 완악함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비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상식적인 욕망과 폭력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인자한 주인이신 하나님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주인은 이 포도원에 온갖 정성을 다 들였습니다. 귀한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짐승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산울타리를 둘렀습니다.
포도즙을 잘 짤 수 있도록 포도주 틀을 만들었습니다. 도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망대도 세웠습니다. 모든 것을 갖춘 후에 주인은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먼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문제는 때가 되어 포도 수확철에 발생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을 세로 내어주었기에 그에 대한 대가로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종을 보냈습니다.
첫 번째 종을 보냈는데 이들 악한 농부들은 그 종을 심히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농부들이 자기 종(*선지자에 비유)인 줄 모르고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도마복음’이라는 책에는 종이 주인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주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마 그들이 너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두 번째 종을 보냅니다. 농부들은 두 번째 종에 대해서는 첫 번째 종보다 더 심하게 취급합니다. 머리를 때리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공공연히 주인을 무시하고 대적하는 태도입니다.
고대 로마 사회는 명예와 수치의 문화였습니다. 한 사람의 명예가 손상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을 택하는 문화입니다.
농부들의 이런 행위는 주인의 권리와 명예를 무시하는 행위로 보복을 받아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주인의 감정에 대한 표현이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화가 나지만 참고 있다고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 알 뿐입니다.
세 번째 종은 급기야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어서 주인은 다른 많은 종들을 보냈는데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이면 주인은 참지 못하고 분노를 폭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성경은, 주인의 마음에 대한 아무런 감정 표현이 없습니다.
아마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이나 제자들이 더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 세상에 그런 배은망덕한 놈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놈들을 가만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인의 태도는 여전히 의외입니다. 주인은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6절입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그런데 그 악한 농부들은 그 아들마저 죽이고 맙니다.
▲우리가 이 비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주인의 태도입니다. 우리 같으면 한 번 종을 보냈을 때, 듣지 않으면 바로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군대를 보내거나 그들을 당국에 고발해서 포도원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세 번 네 번 참으며 계속해서 종들을 보냅니다. 급기야 자기 아들을 보내기까지 합니다.
이 주인은 농부들의 악함을 모르는 무지하고 순진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주인은 바로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속이고 거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고 신뢰하는 사랑입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하며 그들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마치 그 사랑은 바보 같은 사랑 같습니다. 주인은 그 사랑 때문에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이는 계속 속이는 패륜아를 아들로 둔 어머니의 비극과도 같은 사랑입니다.
부모는 알면서도 속아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 사랑 때문입니다.
토마스 만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패배자이며, 항시 처참한 고난을 겪는 자이다.”
하나님은 패배했습니다. 하나님은 배반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배반당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패배하여 쓰러진 곳입니다. 사랑하는 그의 아들이 죽임을 당한 곳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십자가가 우리를 살립니다. 이 무능함이, 이 미련함이, 이 끝없는 신뢰가 우리 영혼을 살아나게 만듭니다. 아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것은, 미련할 정도로 믿어주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인내하며 참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화를 내시며 손을 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관계는 끝나고, 우리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어집니다.
인간관계가 그렇습니다. 끝까지 참아야지 분노를 폭발하거나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순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시는 모습은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로 정정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계신 데도 불구하고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묵묵히 이 제안을 따릅니다. 자기 몫을 받은 둘째는 먼 나라로 떠나 그곳에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맙니다.
돼지보다 못한 처지가 된 둘째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탕자가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반갑게 맞습니다. 그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상거’는 서로 떨어진 거리를 말합니다. 아버지는 거리가 먼 데도 어떻게 아들을 알아보았을까요? 그것은 아버지가 계속해서 아들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둘째가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습관적으로 동구밖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압니다. 먼 발치에 있지만 ‘아 우리 아들이구나’ 하고 달려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집의 아이가 유괴를 당하거나 자녀들이 집을 나갔을 때 공통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항상 대문을 조금씩 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파트니까 어렵지만, 옛날에는 대부분 단독주택이었습니다.
문을 조금 열어놓아 아이가 집에 들어오기 부담스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밤중에라도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주인은 악한 농부들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대한 신뢰의 표시로 종들을 보내고 급기야 아들까지 보낸 것이었습니다.
▲경고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시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고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비유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눅13:6-9)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과수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열매 맺는 시기가 되었는데 열매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삼년을 계속했는데도 여전히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눅13:8)
그러자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이렇게 간청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눅13:9-10) 삼 년째 소출이 없지만 한 번 더 참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한 해를 더 참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악한 농부들을 향한 주인의 인내도 한계가 있습니다. 마지막 아들까지 보내면서 그들에게 합당한 소출을 기대했지만 그 아들마저 죽여버리자 주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합니다.
오늘 읽은 9절 말씀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두 번 경고하실 때 듣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정 기다리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 그 경고의 사인을 보내십니다. 그 진로를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작은 건강의 이상이나 물질로 우리를 경고할 때가 있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의 여러 분란으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실 때가 있습니다.
옛날 예언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사람의 말을 통하여 경고하실 때가 있습니다. 한 번 두 번 맞으면 재빨리 깨닫고 돌아와야 하는데 끝까지 버티다 결국 완전히 무너지고 나서야 하나님을 찾는 것이 미련한 우리들입니다.
금년(2007)에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하나님께서 여러 번 경고를 하셨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통해서 경고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한국교회가 어느 정도 세상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셨습니다.
1년 내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의 글들이 인터넷을 달구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한국교회의 지나친 선교 과열에 대한 반감만은 아니었습니다. 도덕성을 상실하고 물질주의 우상에 빠진 한국교회를 향한 냉소적인 태도가 그 밑바탕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님이 경고하였던 대로 맛 잃은 소금이 되어버려서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무슨 대형 사건이 터지면 그곳에는 반드시 믿는 사람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세습 문제는 이제 상식이 되어서 세습하지 않는 교회가 이상할 정도입니다.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세습도 일부 있을 겁니다.) 잘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교회마다 재정비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교회의 거룩함이나 하나됨은 사라지고 자기 이해와 욕심을 좇아 교회 분열을 밥 먹듯이 일삼습니다.
이들 이 이런 악을 행하는데도 하나님은 잠잠히 계십니다. 하나님이 참고 계시니까 마치 자기들이 옳다는 듯이 힘을 더하여 악을 행합니다. 교회를 더럽히고 악을 행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안전한 가운데 있는 이유는 다만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참고 계시는 하나님의 인내 때문입니다.
정당한 열매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그의 종들을 모욕하고 때릴지라도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그러나 결국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 한국교회를 때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전쟁으로 힘들게 하실 때도 있고, IMF와 같은 소리 없는 경제 전쟁으로도 우리를 괴롭게 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 저는 교회 이전 문제 때문에 여러 곳을 돌아다닙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첫째로 교회가 정말 많다는 것입니다.
이 수만 개가 넘는 교회 위에 또 다른 교회를 하나 더 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의욕상실이 될 정도입니다.
둘째는 지역 곳곳마다 아름다운 건물을 가진 중대형 교회들이 정말 많이 세워 졌다는 것입니다. 대도시에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그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교회들이 곳곳에 그리도 많습니까?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한국교회가 정말 부요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한국사회의 아픔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저 북한 땅은 기아 선상에 있고, 또 세계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 땅에 너무 많은 재물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IMF 사태를 맞은 지 이제 10년을 맞고 있지만 우리는 과거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참으시지만 그 인내의 시간은 무한정이 아닙니다. 속히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과생명 교회라는 멋있는 포도원을 만들어주셨습니다. 포도원을 만드신 이유는 열매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거름, 말씀의 거름, 사람의 거름, 비전의 거름 등 여러 가지로 거름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어야 합니다. 한 번 참고 두 번 참고 세 번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합당한 열매들을 맺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필요없다며 찍어 내어버리라고 최후의 통첩을 보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방향으로 우리를 경고하시는데 그에 합당한 소출을 내어놓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촛대를 옮기고 말 것입니다.
▲악한 농부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부류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악한 농부들입니다.
그들은 그 땅의 주인이 아니라 주인으로부터 땅을 임대받아 세를 내고 관리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마치 그들은 자신들이 그 땅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아마 포도나무 어린 묘목을 오랫동안 관리하다 보니까, 보통 팔레스타인에서는 포도수확하기까지 5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마냥 착각한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주인이 종을 보내자 때리고 모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이 자기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자 그들의 본심을 노골적으로 표출합니다. 7절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상속자인 주인의 아들만 죽이면 그 땅이 자기 땅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실제 갈릴리 땅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갈릴리 땅의 소유주는 대부분 부재지주입니다. 주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땅만 사놓고 소작을 부렸던 것입니다.
가난했던 갈릴리는 농민 폭동이 자주 일어났던 곳입니다. 주인을 살해하고 땅을 차지했던 일들도 가끔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이런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비유를 들으면서 “이런 악한 사람들!” 하고 분개할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이 비난을 받아 마땅한 농부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하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5장입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사5:1-2)
이스라엘은 포도원입니다. 하나님은 기름 진 산에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거하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망대도 세우고 술틀도 팠습니다. 그리고는 좋은 포도가 열리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하나님이 기대하던 것과는 달리 시고 맛없는 들포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포도원과 같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한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포도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밭을 일구어 돌을 다 제거하고, 산울을 둘러 짐승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아름답고 안전한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예수라는 좋은 나무에 접붙임 받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이제는 좋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심긴 포도나무요 동시에 농부된 우리들의 임무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자기 본분을 잊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인인 채 행세하고 주인의 것을 자기 것으로 돌리려 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악한 농부로 책망 받고 있는 것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막11:27)입니다.
12절에서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라는 말씀에서 자기는 곧 유대 지도층들을 말합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과 그의 백성들을 말하고 농부는 그들을 다스리는 지도층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마치 자신의 소유인 것마냥 취급했습니다. 결국 종으로 파견된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고 마지막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고 죽여서 포도원 바깥에 던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가진 재물, 달란트, 지위, 환경, 운명, 이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입니다. ☞임대인생 rfcdrfcd.tistory.com/15976245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소출을 남겨야 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그 소유도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자연과 환경들이 있지만 이것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자기 것이라 생각하니 함부로 낭비하고 자기 멋대로 이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것을 우리 것이라 주장하면 결국은 예수를 죽이게 되고 맙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중에 유명한 “대심문관”이라는 장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땅에 예수님이 다시 내려오셨습니다. 이단을 판결해서 화형대로 보내던 대심문관은 그가 예수님인 줄 알아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경배하기는커녕 당신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없는 존재라 하며 예수님을 화형시킬 것을 판결합니다.
예수님이신 줄 알면서도 죽이기로 결정한 이유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돌로 떡덩이를 만드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는 대중들에게 먹기 힘든 천상의 빵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은 “우리들을 노예로 삼되 우리들에게 빵을 주시는 편이 낫습니다” 고 외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믿고 있고 자기들 또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데 성경의 원래 정신을 가르치는 예수님은 더 이상 불필요하고, 더 위험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도 악한 농부들처럼 예수님을 죽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내 필요와 내 이상에 맞추기 위하여 오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이 축복과 영혼의 평안을 원한다는 이유로, 자기 희생과 나눔은 싫어 한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본래 메시지를 감추어버린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교회 안에서 죽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성공과 부흥에만 관심이 있지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그의 아들을 우리 안에서 죽이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악한 농부가 따로 없습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단지 성탄절 앞에 있는 의례적인 절기로 대림절을 보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죽어 있다면, 다시 살리는 대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자기 욕망과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온전히 임하셔서 우리를 다스려주옵소서 하며 기도하는 대림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준비하는 대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
▲그러나 주인께 신실한 농부들은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위 본문에는, 악한 농부들만 나오는데, 그 중에 신실한 농부도 일부 있을 것입니다.
막11:1절 이후 예수님은 마지막 최후의 일주일을 보내고 계십니다. 마태복음과 대조해서 보면, 비슷한 시기에 마24~25장에 종말을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위 본문의 병행구절이 마21:33~46, 눅20:9~19에 나옵니다만, 이 시기에 예수님은, ‘세상 종말’에 되어질 일들을 아울러 가르치셨으므로 본문은, ‘세상 종말이 가까워 올 때 되어질 현상’으로 봐도 되죠.
‘종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두려움이 아닐까 합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속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종말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때가 되면, 본문의 악한 농부들처럼 하나님께 반역할 것이고,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질 때가 곧 올 것을 예고하시며, 이에 앞서 당신 이름으로 가장한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전쟁과 반란이 일어날 것이고,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기며 하늘에서 무서운 일들과 표징이 일어날 것이고 박해가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 뒤에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눅21:18~19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시지만, 이는 최종 심판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잘 살펴보면 예수님은 종말과 심판에 관한 무서운 일을 말씀하신다기보다, 그러한 일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을 따르는 신앙의 길을 굳건히 걸어갈 것을 당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종말과 심판은 두려움이 아닌 희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신앙으로 끝까지 견디어 내면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한편 복음이 전하는 환난과 시련은 심판 때에 일어날 일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에는 전쟁과 반란, 지진과 기근, 전염병, 박해 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때로 우리의 용기와 자신감을 앗아가고 좌절과 절망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말을 희망으로 기다리는 신앙은 갖가지 환난에서 주님이 오실 날이 머지않았음을 깨닫도록 합니다.
그분께서 곧 오시어 지금 우리가 겪는 시련과 환난을 없애 주고 영원한 행복과 안식을 주시리라는 희망을 선사하며, 지금 여기서 시련에 맞서 의연하게 살아갈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분께서 곧 오십니다. 아니, 그분께서 이미 문 앞에 당도해 계십니다.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잔칫상에 자리하고자 하십니다. 우리 삶을 기쁨의 잔치로 초대하고자 하십니다. 이제 그분의 초대에 응해야 할 때입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잔칫집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이제 마음을 다잡고 그분의 초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드립시다. 우리 삶이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나라로 변모하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