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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 4 소심함과 두려움

LNCK 2023. 8. 9. 16:03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4: 소심함과 두려움 [마가복음43] -- YouTube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 4 소심함과 두려움     막14:53~72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 1 (40)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 2 (41)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 3 (42)


◑복습              

마가복음 14~16장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14~15장은 십자가를 앞두고 벌어지는 여러가지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십자가에는 아주 독특한 영적인 특성이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건 뭐냐하면, 십자가가 다가올수록, 또는 우리가 십자가앞으로 다가갈수록 
하여간 십자가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인간 안에 있는 민낯들을 (십자가가) 그대로 다 드러낸다는 거예요. 

그렇게 드러내시는 이유는, 
십자가위해서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셨나 하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인간 안에 있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그 죄악들, 죄의 민낯들이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씩 둘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뭐 저주와, 폭력과, 배신과 이런 온갖 인간 안에 있는 죄의 추악한 것들이 
십자가앞에서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못 박으셨고, 무엇을 처리하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함이고 

또한 그것이 처리되기 전에, 그 죄가 우리 삶을 어떻게 얽매고 있었고 
그 죄가 우리를 어떻게 괴롭게 하고 있었나... 하는 것들을 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당시 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앞으로 점점 나아갈 때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 깊은 곳에 있는 죄의 민낯들을 보게 하시고, 
드러나게 하시고...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처리됐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십자가가 다가올 때 드러나는 일들에 대해서 
당황하거나 뭐 감추려고 하거나..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죄의 민낯들을 해결하셨고 
또 지금도 해결하고 계시고, 그 죄로부터 여러분들을 영원히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십자가앞에서 드러나는 것은, 이런 죄악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드러나죠. 

이 은혜는 그 죄악들을 처리하시고,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앞에서 두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하죠. 
한 종류의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예수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 편에 있었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들에게서 동일하게 죄의 모습들이 드러나는데 
죄의 종류가 약간 달랐습니다. 

첫번째 죄의 종류는 뭐냐하면, 적극적이고 악의적인 죄입니다. 
악의를 가지고, 하지 말라는 선을 넘어가서 예수를 죽이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그런 죄라면 

두 번째 종류의 죄는, 악의를 가지고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죄는 아니죠. 
그런데 연약함(의 죄) 입니다. 
정말 마음은 있고 그렇게 하고 싶긴 한데, 
몸이 그렇게 따라주지 않는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
성경은 이 두 가지(악의, 연약함)를 다 죄라고 얘기합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의 정의는 뭐냐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히브리 사람들은 '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연약함도, 하나님께서 우리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연약한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 땅을 통치하는 존재로 만드셨고, 

우리 삶이 통제가 안 돼서, 우리 삶의 통치권까지 잃어버린 
그런 무기력한 모습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을 우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통치하고 다스릴 수 있는 
그런 권위있는 존재로 만드셨어요.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기력한 존재가 되고 
죄로 말미암아 연약한 존재가 됩니다. 

그것들을 드러내시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리하신 것은 
단순히 죄뿐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도 함께 처리하셨다는 거에요.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항상 죄와 질병만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시고, 특별히 '연약한자를 도우셨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한 것들을 도우셨다'는 거에요. 마8:17

십자가앞으로 나아갈 때, 저와 여러분 안에 있는 연약함 들이 
고침 받을 줄 믿습니다. 
저와 우리 안에 있는 연약함 들을 예수께서 도우시고, 
그것을 강건케 하시고, 그래서 다시 한번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 모습대로 
살 수 있도록 회복시키시는 줄 믿습니다. 이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 막14:53~72절에도 역시 두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악의를 가지고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연약함 가운데 예수를 좇아가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 이 사람들의 모습이 동시에 등장합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안에 있는 두 종류의 문제들도 역시 해결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안에는 여러분, 한 종류의 죄만 있는 게 아니에요. 
깊게 우리 안을 들여다보고, 또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그렇지, 내 안에는 제자들에게 있었던 연약함이 있지..' 

연약함은 물론 있고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악의적인 죄도 있습니다.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반역하고, 반항하고, 악의적인 죄들이 우리 안에 동시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십자가가 필요하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이 두 종류의 죄들을 살펴보면서, 특별히 적극적이고 악의적인 죄에 대해서.. 

'그렇지 예수를 대적하는 나쁜 놈들은 그런 죄가 있지..' 만약 이렇게만 적용한다면,
그게 바로 우리들의 악의적인 죄입니다. 
그것들은 사실은 우리 안에 있는 (악의적인) 죄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1. 첫번째 등장하는 악의적인 죄의 모습은 <거짓 증언>입니다. 

막14:55~57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예수를 재판하려고 이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대제사장이 가운데 있고 공회 사람들이 모였는데 
칠 증거가 없대요. 유죄라고 판결할 만한 증거가 없는 거에요. 

근데 여러분, 칠 증거가 없으면, 무죄라고 해야지 정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제사장과 공회는, 예수를 죽이기로 이미 결정을 해놨습니다. 
재판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이미 결정을 해놓고 
거기에 맞는 증거들을 찾는 것입니다. 네, 불의한 모습이죠. 

근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이렇게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재판을 할 때는 공정하게 하라' 그랬고 
증인도 '두세 사람의 증인을 취하라'고 하셨어요. 

그 말은, 결과를 정해놓고 그 사람을 재판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그 사람을 공정하게 바라보고, 공의롭게 판단하고, 공의롭게 결과를 내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일어나는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 불의한 모습입니다. 

이미 재판 결과를 정해놨습니다. '이 사람은 사형시켜서 죽일거야' 정해놓고 
거기에 맞는 증거들을 찾아서 끼워 맞추는 거에요. 네, 불의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누구도 여기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예요. 
누구도 공의롭지 못하다는 거에요. 

물론 우리가 뭐 이렇게 예수를 죽이듯이,

똑같이 거짓 증언해서 결과를 정해놓거나 그렇게 한 적은 없는데, 

그런데 우리도 자세히 살펴보면, 살다가 거짓증언 할 때도 있다는 것이죠. 

대제사장들과 그대로 똑같이 있어요. 

거짓 증언은 뭐냐 하면, 옳고 그름에 대해서 정직하게 판단내리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옳고 그름을 거기에 끼워맞추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싶어 하는 거죠. 
대제사장과 공회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 이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어떻게 하냐 하면 십계명 중 9계명이 '거짓 증언 하지 말라'는 거죠. 

십계명이 뭐냐면, 사람이 지켜야 될 계명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십계명뿐만 아니라 한 50계명, 1천계명을 줘도 부족할 거예요. 

그렇지만 그 중에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중요한 개 열 개 뽑으신 거에요.
인간이 꼭 지켜야 될 계명들 가운데 줄이고 줄여서
'최소한 이것 만은 그래도 해야 돼. 이걸 안 하면 인간다운 삶이 안돼! 
너희가 이것마저도 안 지키면, 너희 삶이 완전히 파괴돼!' 
그래서 뽑으신 게 열 개, 십계명 이라는 거에요. 

그러니 이 '거짓증언'이라는 죄가,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건지 알겠죠?
이 죄가 굉장히 하급 죄가 아니라, 굉장히 높은 수준의, 중요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십계명의 죄들은, 다른 많은 죄들의 어떤 근원이 되는, 
아주 뿌리가 되는 죄라는 거죠. 

이것은 사실은 '살인죄, 간음죄'와 거의 같은 레벨의 죄라는 거에요. 
그리고 '거짓 증언'을 통해서, 간접 살인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면, 그 무죄한 사람을 사형시킬 수도 있는 거죠.

인간의 본성가운데는 뭐가 있냐면, 선과 악을 자기 마음대로 정하고 싶은 
본성이 있어요. 이게 사실 선악과의 죄이지요. 

이게 죄의 어떤 뿌리이고, 죄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인데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자기 마음대로 정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원래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데 
이 정해진 선과 악의 기준을 따라서 공평하게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처럼)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해놓고 
그것이 선이라고 하는 설정에.. 거짓 증언들을 끼워 맞추는 거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우리 안에 돌아가는 여러 가지 생각의 프로세스가 
다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뭐에요. 나를 중심으로, 내 생각이 옳고, 
내가 원하는 것이 옳고, 내가 결정하는 것이 옳고, 내가 의롭고,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생각이 돌아갑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사람은, 항상 우리 안에 심리학자들이 자기 방어기재가 있다 그러죠. 
자기방어 기재라고 하는 것은, 의식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심리 프로세스가 있다는 거예요. 

즉 '내가 한 것이 옳다, 내가 한 것은 잘못이 없어' 
그래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프로세스가 저절로 돌아간다는 거에요. 

이게 바로 죄의 결과, 죄의 본질이라는 거에요. 
그 기준이 뭐에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의롭고, 나는 옳고, 내 생각은 정당하고... 
그것을 내 안에서 이미 결정해놓고, 나머지는 그것에 끼워맞추는.. 거짓 증거 하는 거죠.

이것은 복음에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심리학자들도 똑같이 얘기합니다. 
인간의 심리를 쭉 들여다보면, 우리 안의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게 
자기방어기재 라는 거에요. 자기 방어, 자기 합리화 하다보면
'거짓 증언'이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증언 하지 말라'는 것을 
굉장히 죄의 높은 레벨에다 두셨어요.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오라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결정해 놓으셨으면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따라가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지 
너희 안에 결과를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끼워 맞추기 위해서 노력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근데 교회 안에서도 여러분, 이런 모습들을 너무 많이 대하게 됩니다. 
뭐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그렇고.. 항상 우리는 어떻게 해요?
내가 중심이 돼서 내가 이미 결정을 해 놨어요.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사고와 여러 가지 심리와 
여러 가지 감정과... 다 그렇게 돌아가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항상 어떤 결과가 나오냐면 '저놈이 잘못된 거야' 
'쟤가 나쁜 놈이야'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제 삼자가 보면요 
그냥 둘이 같이 뭔가 잘못했으니까 박수 소리가 난 거에요.

그런데 그래도 이 사람한테 물어보잖아요. 
그러면 절대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자기가 문제라고 믿지 않습니다. 

항상 이 사람 안에는 뭐가 돌아가냐면, '거짓 증언의 영'이 돌아가요. (작동해요)

'나는 옳고 쟤는 틀렸어' 라는 결과를 정해놓고 
그 결과에 맞는 거짓 증언들을 계속 끌어모읍니다... 
그래서 자신을 정당화시킵니다. 

이게 여러분 사람 안에 돌아가는 기본적인 죄의 프로세스 입니다. 
'거짓 증언의 영'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항상 옳고, 내가 항상 의롭고, 내가 항상 중심이고... 하는
거짓 증언의 영!

이것은, 모든 것을 공의롭고, 모든 것을 공평하게, 
객관적으로 보시고 결정하시는 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질서를 파괴하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의 삶을 거짓으로 만드는 파괴적인 죄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여러분, 십자가에서 처리돼야 돼요. 
그래서 성경은, 예수 뿐 아니라, 우리도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얘기합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어요. 근데 뭐가 죽은 거에요?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내가 죽은 거예요. 
내가 옳고, 내가 의롭고, 내가 중심이고... 하는 것이 십자가에서 처리됐다는 거에요. 

이 '거짓증언의 영'에 의해서 움직이는 내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이제는 대신 그리스도가 사시는 거에요. 그 이야기는 

내 안에, 내가 옳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옳고 
내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의로우시고 
내가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시고... 
이런 새로운 내가 다시 태어난다는 거에요. 

그래서 주 안에서 거듭난 자는, 십자가에서 새롭게 거듭난 자는 
내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었고, 내 안에는 성령께서 사심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끊임없이 내 자아를 새롭게 새롭게 바꾸시는데 
뭐냐하면 '나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살도록 바꾸시는거에요. 

끊임없이 그렇게 살도록 바꾸시는 것이 복음이고 
십자가에서 새롭게 거듭난 피조물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이 자기 중심적인 '거짓 증언의 영'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어야 돼요. 
이거는 여러분 구제할 방법이 없어요, 그냥 죽어야 돼요. 

죽을 때 비로소 거기서부터 해방된, 전혀 생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것을 본으로 보여주시잖아요. 
이 수많은 거짓 증언을 당하시면서도 그냥 잠잠히 가세요. 

예수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가 진리라고 하는 것만 끊임없이 증거합니다. 
그 증거만 제시하는 사람들이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우리가 예수가 옳으시고, 예수가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증거해요. 
변증하고 증거도 제시하고 열심히 추구하지만 
'내가 옳고 정당하다' 내가 그건 추구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어요. 
그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거든요. 그냥 잠잠있어도 돼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선 죽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죽었으니까요. 이것이 십자가에 진리입니다. 

▲2. 십자가 앞에서 (본문에서) 두번째 드러나는 적극적이고 악의적인 죄는 
'거짓 증언'에 이어지는 것인데 <정죄> 입니다. 

마14:64~65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자 여기 보면 '정죄'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거짓 증언을 가지고 '정죄'를 하는데 

정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타크리노' 인데 
뜻은 '정죄하다. 저주하다. 불리한 선고를 하다' 이런 뜻이에요. 

즉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저주하는 것입니다. 
정죄는 뭐냐 하면 '그건 네 잘못이야, 너 때문이야'하고 손가락질하는 거에요. 
네 잘못이기 때문에.. 침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죽으라고 저주하는 거에요. 
그래서 거짓증언과 마찬가지로 정죄와 저주 역시 
그 뿌리가 나 중심이에요. 

거짓 증언과 정죄가 사실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요. 
내가 옳고, 내가 중심이고, 나는 외롭고.. 그것이 이미 결정돼 있어요.
이게 '거짓 증언의 영'이죠.

이것을 스스로 설득시켜요. 이게 의지적이고 의도적으로 일어나지 않아요.
그냥 우리 안에서 죄된 본성이 그냥 오토매틱 일으키는 프로세스예요. 
항상 자기를 증명하려고 하고, 자기를 변호하려고 하고, 
그래서 거짓 증언들을 계속 모으죠. 

자 그렇게 되면 스스로 내가 옳다고 믿어요. 
스스로 나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결과는, 
타인이 잘못한 거예요.. '정죄'로 자동 이어진다는 거죠.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공회원들과 당시에 있던 종교인들이 
뭔가 문제가 생겼어요. 예수 그리스와의 사이에 뭔가 충돌이 생기고 
뭔가 불편한 일들이 생겼어요. 근데 프로세스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거짓 증언의 프로세스가 돌아갑니다. 
'나는 의롭고, 나는 잘못한 거 없고, 나는 옳고..' 

그 결과 상대(예수)에 대한 거짓 증언들을 계속 모읍니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상대(예수)를 정죄를 하게 되죠.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고, 네가 나쁜 놈이고, 너는 그래서 벌을 받아야 되고.. 너는 여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되고..'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손가락을 끊임없이 바깥으로 향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너 때문이고, 저건 그 사람 때문이고, 이건 정부 때문이고... 
그럼 자기는요? '나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저 피해자 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여러분, 십자가가 드러내는 죄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건이든지 간에, 누구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문제든지 간에 
여러분이 '피해자'라고 느끼시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잘 들으세요. 죄의 결과입니다.
남을 정죄하기 때문에, 자신을 피해자라고 느끼는 거죠.

물론 내가 피해자일 수도 있어요. 
'순수한 피해자'라는 게 있을까요? 

그런데 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는, 뭔가 나도 거기에서 
잘못하는 게 같이 합쳐서 일어난거지... 
어떻게 순수한 피해자가 있을 수 있어요?

근데 만약 여러분들이 순수한 피해자라고 느끼신다면, 죄 가운데 계신 겁니다. 
십자가를 통과하고 나면, 뭐라고 고백하게 되냐 하면 
'내가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게 바울의 고백이었죠. 

바울은, 십자가를 통과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옳고 외롭고... 
항상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정죄하면서, 예수 따르는 무리들을 죽이고, 투옥시켰어요. 
거짓 증언의 영과, 정죄함이 그대로 이어지는 거죠.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자기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죄하고 죽였어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다음에 바울이 어떻게 바뀝니까?
'내가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정말 거듭난 자들, 십자가를 통과한 자들은
모든 상황에 대해서 '결국 나 때문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까지 방치한, 나의 죄는 없나요? 
그걸 살피는 거죠.

'이건 정부가 어쩌고 저쩌고..' 
그럼 정부를 위해서 자기는 기도 했나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정죄하지만,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죄인으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정죄는, 단순히 정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주로 반드시 이어집니다. 왜냐면 자기 안에 분노가 올라오거든요. 

'저놈 때문에.. 저놈이 잘못했고..' 
그럼 저주의 마음이 올라오고, 
이 저주의 마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표현 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예수께 침을 뱉고 손으로 치고 그랬다고 나오죠. 
뭔가 액션을 취하게 된다는 거에요. 

이게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고 
저와 여러분 안에 있는 정죄하는 죄의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셔야 돼요. 그 안에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셨냐면 
14: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예수께서는 이들이 했던 정죄의 프로세스를 전혀 따라가지 않으셨어요. 
침묵하시고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으셨어요. 

(여기까지가 본문을 통해서 드러난 '예수를 잡으려고 했던 사람들'의 죄였고요.

◑두번째 부류, 예수님의 제자들을 봅시다. 
이들에게는 '연약함'의 죄가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1. 그 첫 번째로, 살펴볼 수 있는 연약함의 모습은 <소심함>이에요. 

54절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예수께서 잡혀가시니까, 한참 도망갔던 베드로가 조금 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좇아가야 되겠다.. 그래서 멀찍이 좇아갑니다. 
여기 보면 '멀찍이'라고 나오죠. 
가까이 좇아가지는 못하고, '멀찍이' 좇아가는 거예요. :54

이게 뭐에요? 자신 있게 예수와 함께 하지 못하는 소심한 모습!
소심함 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이제 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또는 마땅히 해야 될 것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용기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이 '소심함'입니다. 
마땅히 해야 될 것, 하고 싶은 것을 용기 있게 하지 못하는 것. 

자 그렇다.고 해서 안 할 수도 없어요. 그런데 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거에요? '멀찍이' 하는 거에요. 

저와 여러분들도 이런 소심함이 있지 않습니까? 
안 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담대하게 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바로 가까이서 예수옆에서 '나도 같이 잡아가라, 이놈들아!' 이런 게 아니라 
멀찍이 떨어져가지고 슬금슬금 좇아가는 이 베드로의 소심한 모습!

그래서 십자가앞에서 드러나는 베드로의 모습은 소심함 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도 이런 소심함이 있으시죠?
많은 분들이 소심함을 '타고난 성격'이라고 그냥 치부해요. 

천만에요. 여러분, 이건 타고난 성격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부분은 성격적인 면이 있겠지만, 성격이 전부가 아니에요. 

뭐냐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장하는 과정 가운데 
끊임없이 이런 연약함의 프로세스 가운데, 내 태도로 굳어진 것들이에요.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아이들이 온 집안을 다 어지럽힙니다. 
안 그런 집이 없을 거예요. 그냥 두면, 온 세간을 다 뒤집어 놓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소심하게' 태어났다면, 그렇게 할까요?
그러니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소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라면서 죄의 결과로, 연약함의 결과로 
우리 안에 굳어져버린 어떤 태도가 '소심함'인 거죠. 

정말 하나님께서 자기를  '소심하게' 만드신 거라면 *죄의 결과가 아니라
그 소심함 가운데 평강이 있어야 돼요.  *독신의 은사처럼

그냥 그렇게 있는 상태 자체가 굉장히 편안하고, 감사하고, 평강하다면
그건 하나님이 만드신 성품이 맞아요. 

그런데 자기 소심함 때문에 계속 볶이고, 부대끼고, 
자기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럼 그거는 하나님 만드신 게 아니지요.

이렇게 하면 이 사람이 뭐라 그럴것 같고 
저렇게 하면 저 사람이 뭐라 그럴것 같고...
막 그래가지고 하지도 못하고, 안 할 수도 없고...
이렇게 볶이는 것은, 소심함의 연약함입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용기 있게 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만드셨겠어요?

그럴 리가 없죠. 하나님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들, 우리가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은 
죄가 아닌 이상, 그것을 기쁘게 적극적으로 
그리고 용기 있게 하도록 그렇게 창조하셨지, 
뭐 소심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거죠. 

죄는 인간에게서 자신감을 앗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불안합니다. 
내가 하는 일, 또는 해야 될 일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요. 

'이걸 하면 어떻게 될까? 몰라, 이거 했다가 혹시 역풍을 맞아서 
곤란하게 되는 거 아닌가?' 

원래 인간은 어떻게 지음 받았냐면,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지음 받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을 따라서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도록 그렇게 지음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할 때 
불안함 없이, 확신과 용기가운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하도록.. 그렇게 지음 받았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마땅해야 될 일을 해야 될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용기가 있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소심하지 않아요. 

'안 하면 어떡하지? 하면 어떻게 되지?' 그렇게 볶이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 거듭난 사람들이 성화되어 가는 과정들을 보면 
점점 이 확신과 담대함 들이 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믿음이라 그러죠. 

그니까 영적으로 어릴 때는, 이게 잘 안 돼요. 계속 소심함이 있어요. 
점점 하나님과 깊게 가까이 갈수록, 멀찍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갈수록.. 멀찍이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소심함이죠.

가까이 갈수록, 그 안에 무엇을 해야 될지에 대한 용기가 있고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뭐냐하면 
마치 생전 처음으로 혼자 집을 나선 아이의 불안함 같은거에요. 

저는 이게 아주 어렸을 때인데도 트라우마가 좀 있었나봐요.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게 있어요. 
제가 서너 살 때의 기억인데, 그때 기억은 보통 없죠. 

근데 이 사건 하나만 트라우마처럼 박혀 있는데 
그러니까 대문을 이렇게 열어놨던 것 같아요. 

제가 워낙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집안에서 아장아장 놀다가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고 혼자서 집을 나간 거에요.

그래서 한참을 걸어갔나봐요. 그 다음에 이제 현실 파악이 된 거죠. 
패닉이 온 거예요. '여긴 어디지? 집은 어디지? 어디로 가야 되지?' 

완전히 패닉이 돼서... 그 기억이 아직도 이렇게 남아있어요. 트라우마로.
그러다가 저희 누나가 아마 찾으러 왔던것 같아요. 
집 뒤에 조그만 동산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제가 걸어갔대요... 

이게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이런 거라는 거죠.
뭘 해야 될지도 모르고, '이 길로 가도 되나?' 몰라요.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해서 가려고 하면서도, 계속 불안한 거예요. 
확신이 없으니까요. 처음으로 혼자 집을 나가본 아이의 마음처럼 되는 거죠.

십자가를 통과하고, 거듭한 성도, 하나님이 자녀가 된 성도는
사실 우리가 소심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면 뒤에서 따라오는 부모, 하나님이 계시니까요.

그냥 해야 될 일이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면, 
그게 죄가 아니라면.. 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죄가 아니라면, 하고싶은 일일 때, 또 해야 되는 일들이라면 
당당하게 하세요. 

뒤에서 따라오는 분이 계시죠. 내 뒤에서 뒷감당해주는 분이 있으신데..
소심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실수 좀 하면 어떻습니까? 실수하면 다 뒤에서 뒷감당해 주실 텐데 
좀 넘어지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다시 붙잡아 일으키실텐데 

죄짓는 일만 아니라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죠. 
그래서 이 믿음에 서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소심함에 갇혀 있지 않아요. 

그냥 내가 해야 될 일이면,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면 
그냥 그냥 하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 믿음 이에요. 

믿음이 있으면 여러분, 그래서 담대해지고 대범해집니다. 
보세요. 여러분, 저 같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 
어떻게 교회를 건축한다고 1백억짜리 프로젝트를 하겠어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근데 그냥 하잖아요. 

여러분, 주님과 가까이 있게 되면 
그 안에 소심함을 뛰어넘는, 본성을 뛰어넘는 대범함이 있어요. 
담대함이 있어요. 

기억하십시오. 소심함은 하나님을 떠나 불안해하며 자신감을 잃어버린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이 믿음이 다시 회복되어 소심함을 물리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소심함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태도입니다.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내가 예수를 좇아다니던 그 제자 베드로입니다' 이렇게 못했어요.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감추고 움츠러들고 숨었죠. 
십자가앞에서 드러나는 연약함의 모습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선악과를 처음 따먹었던 아담과 하와도 
역시 동일하게 숨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러니까 자신 있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감추고, 숨고, 움츠러들고... 이 소심함은 죄의 결과라는 거죠. 

이런 소심함이 왜 나타나게 되냐면,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생각에서 오는 거죠. 

'내 진면목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여기에 매여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게 되는 태도입니다. 
원래 사람은 어떻게 지음받았냐면 
하나님의 평가와, 하나님의 반응에 반응하도록 지음받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가?' 
그것을 계속 염려 concern 하고요.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평가하시는가 하는 것을 
계속 바라보게 만드셨어요. 

자 그런데 하나님을 상실한 인간은, 그 하나님 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칩니다. 
그 결과 인간은, 누군가의 평가와, 누군가의 반응과, 누군가의 격려와 인정이  
있어야만 작동하도록, 그렇게 되어버린 거에요. 

인간은 누군가의 인정과, 격려와, 평가.. 이게 주어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게 되어버린 거에요. 이게 자연인이 작동하는 원리에요. 

그래서 여러분, 끊임없이 여러분들이 행동하는 원인이 뭔지를 깊게 분석해보세요. 
사람들의 인정, 사람들의 평가를 받기 위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좋은 대학 가려고 애쓰세요?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그런 거죠.

또 요즘 왜 그렇게 얼굴들을 뜯어고치세요?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그런 거죠.

결국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행동들을 분석해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디펜드(의존) 돼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는 아무 상관 없어, 
나는 그냥 내 자신의 의지로 살아!' 이런 거는 여러분 소시오패스 라는 겁니다. 
정상이 아니죠. 망가진 거죠. 사회화 기능이 망가진 거잖아요. 

정상적인 사람은, 반드시 사회에서 반응하면서 작동하도록 되어 있어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반응하도록 되어있지, 
이게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냥 딱 나만의 세상에 갇혀서 
나만의 것만 쳐다보고도 살 수 있다... 그런 거는 자폐 아니면, 소시오패스죠.
 
원래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그 소스는 어디서부터 오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또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격려하시는가?' 
또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경고하시는가?' 

그거에 따라서 우리가 반응하고, 움직이고, 느끼고.. 이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을 상실해 버리고 나니까, 그 자리에다 '다른 사람'을 앉힌 거에요. 
그래서 그 다른 사람이 나를 움직이는 신이 됐고, 나를 움직이는 우상이 된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 가가, 나에게 너무 중요하게 됐고 
그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내 삶을 거기에 맞춰서 조정하게 되고 

그래서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웃었다, 울었다
천당에 갔다, 지옥에 갔다... 이렇게 된 거죠. 

그걸 가장 극적으로 볼 수 있는 거는 연예인들이잖아요. 
연예인들이 악플 때문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얼마나 그 인생에 절대적인가 하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까. 

근데 우리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거예요. 
저는요. 그 연예인들이 자살하고 그러는 것에 대해서 
'참 마음이 되게 약했나 보다' 이렇게만 생각을 했는데 

제 설교가 인터넷에 올라가잖아요. 
거기에도 댓글들이 달려요. 
근데 어떨때는 하여간 그래요... 

'뭐 이런 새끼들이 다 있어' 막 이런 거부터 시작해서 
그러니까 좋은 댓글만 달리는 게 아니거든요. 

근데 물론 뭐 감사하게도 좋은 댓글이 많기는 한데 
근데 어떤 댓글은 진짜 싸가지도 없고, 거짓 증거의 영이 작동하는 것을 봅니다. 

원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될 인간이 
하나님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사람들을 올려놓았을때 
그 타인의 평가가, 나에게 살고 죽는 일이 된 거에요. 
그래서 스스로 그 타인의 노예가 돼버렸어요. 

타인의 평가와 반응에 목을 매고 사는, 소심한 인간이 됐습니다. 
스스로 감옥을 만든 거예요. 그래서 나를 드러내지 못하는 거예요. 
두려워합니다. 

사람이 뭐라고 하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하시는 것이 중요하죠.

사람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부정적인 얘기를 하던 
그것을 훨씬 더 뛰어넘는 게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이거든요. 
그 음성을 들으면요, 사람에게서 들려지는 음성이 묻혀버리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우레와 같은, 많은 물소리 같은 여호와의 음성에 
그냥 지워져 버리고 묻혀져 버리는 거에요.
근데 이게 안 들리니까, 자꾸 사람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거죠. 

아이들 운동회 같은데 가면, 부모들이 항상 최고로 보이는 건 누구예요?
내 아이죠. 
체육대회에 가서, 다른 집 아이에게 끊임없이 눈을 뺏겼던 분 계세요?
그는 정상이 아니죠.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이라는 거죠.
끊임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기뻐할 이유들을 찾으세요. 
끊임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격려할 이유들을 찾으세요. 
마치 운동회에 참석한 부모의 마음처럼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은 타인에게서 
비난할 이유를 찾아요, 정죄할 이유를 찾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타락한 인간이니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잃어버린 인간은 
계속 다른 사람에게서 그 음성을 듣고 싶어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다른 사람은 여유가 없어요. 
그 안에 그냥 거짓 증언과 정죄가 가득할 뿐이지요. 
여러분을 축복해줄 만한 여유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자기 내면하나 챙기기도 바빠요. 
자기 내면도 불안하고, 자기 내면도 갈급하고... 
그래서 딴 사람 챙겨줄 만큼 여유가 없다고요. 

그래서 사람에게 계속 목매달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정죄와 비난의 칼만 맞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칼을 어렸을 때부터 두 번, 세 번, 다섯 번 
십년, 이십년 이렇게 계속 맞다보면.. 소심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자기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고, 드러내기를 꺼려하고,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나는 그냥 이런 존재야' 라고 말하는 것이 부담되고 
그게 뭐에요? 감옥에 갇혀버린 거죠. 

그게 여러분 소심함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소심함은, 하나님을 멀찍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에요. 
 
예수의 십자가앞에서 그 사람들의 소심함이 드러납니다. 
왜요? 해결하시려고 드러내시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고 
그 분의 격려를 듣게 되고, 우리를 향한 미소를 보게 되고 
그것을 보게 됐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잃어버린 담대함을 찾게 될 줄 믿습니다. 

▲2. 본문 가운데서, 제자들에게 드러나는 또 하나의 연약함은
<두려움>입니다. 

66~69절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나이도 어린 조그만 소녀 하나가 와 가지고서 '혹시 너도 그 사람 아니야?"
그랬더니 베드로가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면서 '아니야, 무슨 얘기하고 하는 거냐?'

사실 두려움이란, 용어만 달랐지, 아까 얘기했던 '소심함'과 비슷하죠.
예수님과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 우리 안에는 두려움이 온다.는 거에요. 

두려움의 본질은 여러분이 잘 아셔야 됩니다. 
그것은 그 두려움의 대상에서부터 오는 게 아니에요. 
상황과, 건강과, 사람에게서 두려움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그런 거예요

설령 우리가 폭풍 가운데 있어도, 전쟁 한가운데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이 내 옆에 바짝 붙어 계시면, 그러면 두렵지 않아요. 
그 안에 평강이 있어요. 

저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두려움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건강 때문에 두렵기도 하고, 
젊었을 때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었고, 
또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질까 봐 두렵기도 하고 
수많은 두려움의 순간들이 있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지나고 뒤돌아보면, 참 감사한 것은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열쇠는 항상 동일했어요. 

두려움을 극복하는 열쇠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근데 이것은 여러분, 단순히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해답이 아니라 
저한테는 실제 였어요. 
이 두려움의 많은 순간들을 뛰어 넘을 수 있었던 열쇠가 뭔가 돌아보면 
아주 실제적이고 아주 구체적으로 '그렇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어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34살 때였는데, 간이 아주 안 좋아진 적이 있었어요.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피검사를 하더니, 간 수치가 너무 높게 나온다고... 
그러면서 뭐라 그러냐면 '10년 후에 네 간은 작동을 멈출 거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제가 10년 후에 죽는다고요?'
그렇다는 거에요.

두려움 때문에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때 우리 아들이 5~6세 때였는데, 
이 조그만 아이를 두고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막 이런저런 생각들 때문에, 잠도 안 오고, 불안하고... 

일단 어떻게 합니까? 무슨 방법은 없고, 그래서 기도를 시작했어요. 
며칠을 기도 했는데, 깊게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음성이 들리는데 
'염려하지 마라.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데..' 

그때 시4편 말씀이 떠올랐어요. '내가(다윗이) 편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의 죽고 사는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주시면서 
'그렇지, 나는 간 때문에 절대 안 죽는다'

근데 정말 거짓말처럼, 이렇게 봄 햇살에 눈이 녹듯이 
두려움이 싹 사라지면서..  제가 알았어요. 

'두려움은 질병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고, 
두려움은 상황 때문에, 사람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고 
두려움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거구나' 

그래서 두려움의 정의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이게 두려움의 정의인 거예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두려움 이에요. 
정말 거짓말처럼 두려움이 싹 사라졌어요. 

그리고 지금 그때로부터 21년인가 지났는데요. 건강 검진을 해보잖아요. 
딱 간 수치만 정상으로 나와요. 참 신기해요. 
다른 수치들은 뭐 별로 안 좋아요. 혈압도 높고 뭐다. 이렇게 높은데 
이상하게도 간수치는.. 정상이에요.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곳에는 평강이 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막 힘들고 두려워하고 
'저 사람이 이렇게 반응으면 어떡하지?' 

그때도 동일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밀한 음성을 주실 때 
'내가 다스리고 있어' 또는 '그래도 나는 너를 지지하고 있어!' 
이 말씀을 주실 때, 정말 안개사라지듯이 두려움이 사라지는 거예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박사 논문 쓰면서, 논문이 꼬이니까, 제가 졸업하지 못하는 줄 알았어요. 
젊었을 때 제게 있었던 가장 큰 사건 중에 하나였어요. 
'아니 이걸 못하게 되면, 내 미래는 어떻게 바뀌는 거지?' 

큰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 두려움도 어떻게 극복하게 됐냐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그 확신!

제가 차를 몰고 오다가, 차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했을 때.. 
아직도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재평생의 그런 임재는 처음이었어요. 

그 가운데 하늘로부터 오는 평강이 뭔지를 맛보게 하시면서.. 
상황은 전혀 바뀐 게 없어요. 그렇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도 내 눈에 안 들어와요. 
오직 하나님만 딱 눈에 들어오면서 제가 깨달았죠.

'아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두려움이구나' 
'하나님을 바라보지만 멀찍이 하나님과 떨어져 있으면 그게 그냥 두려움 이구나..'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고,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면
두려움은 그냥 눈 녹듯이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왜 십자가가 은혜인가요?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하니까 그렇죠. 

죄로 말미암아 단절돼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십자가가 열어주는 것,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찍이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데 십자가가 이 모든 죄를 제거 하시고 
하나님과 가까이 갈 수 있게 하시는 거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십자가가 은혜고, 십자가가 해답입니다. 
우리 인생의 있는 모든 두려움, 뭐 내 소심함도, 연약함도 
결국 십자가가 해답이에요. 

우리로 죄를 걷어내고, 죄로 닫혔던 하늘의 문을 열고 
멀찍이 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는.. 

멀찍이 떨어져 두려워하는 우리를 하나님의 품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리고 그 품안에서 따뜻한 사랑의 음성을 듣게하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두려움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면 
길은 하나뿐입니다. 상황을 바꾸려고 하는 노력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해보십시오 안됩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 '그 사람을 내가 어떻게 바꿀 건데요?' 안 됩니다. 
상황을 바꾸려고 하는 내 노력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모든 상황을, 여러분 어떻게 컨트롤합니까?
그것도 안 돼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아이고 내가 오늘도 모르는데, 미래를 어떻게 알겠어요?

이 모든 두려움에 대한 솔루션은 하나 뿐이에요. 
하나님 앞으로 다가가는 거에요.

멀찍이 있지 않고 다가가는 거에요. 그것이 여러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사랑과 은혜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 한 구절 보고 우리 같이 예배하고 기도합시다. 

롬8:32~39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