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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3장,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는 궁핍

LNCK 2023. 10. 20. 21:45

https://blog.naver.com/karamos/220619769662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는 궁핍      창43장       여러설교정리

 

앞서 창42장에서는 요셉의 형제들이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갔던 내용입니다.

그들은 죄문제의 해결없이 은혜만 얻으려 갔기에

요셉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그들이 회개하기까지 계속 심판하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42장 회개의 열매

 

본문 창43장은 형들이 점점 회개의 자리로 가는 내용입니다.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이 조금 남아 있을 때는 은혜를 사모하지 않고

‘어떻게 되겠지?’ 하고 살던 이들이

양식이 다 떨어지니 그제야 자신들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가 끝이 나야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 인생은 궁핍을 깨닫지 못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지 않습니다.

 

육신적인 궁핍도 있지만 심령의 궁핍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설교제목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는 궁핍"이라 붙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는 궁핍    창43:1~15

 

▶(1절)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이것이 바로 이들이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환경입니다.

결코 이런 환경은 우연이 아닙니다. 가족이 중병이 들었다든지, 사고를 당했다든지,

사업이 망했다든지, 이런 것들로 인해 성도는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탄식하고 불평하고 비관하라는 환경이 아니고

하나님 은혜를 사모하라는 환경인 것입니다.

 

눅15장의 탕자도, 아비의 재물이 수중에 남아 있을 때는, 아버지 집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불행은 많은 친구를 데려온다고.. 돈 떨어지니 흉년까지 닥쳐서,

탕자의 모든 상황이 한꺼번에 밑바닥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도 많고...’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정적으로나, 경제적인 문제로 고통이 심할 때

그때가 하나님을 바라 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라는

심리적 환경의 간섭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2절)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

 

애굽에서 나귀에 실어올 정도였으니 그리 오랫동안 먹을 양식은 아닙니다.

아껴 먹어도 얼마 못 가서 양식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에 내려갈 때, 두 세 사람만 갔어도 될 터인데

베냐민만 빼고 열 형제가 다 내려간 것은.. 아마 사람 숫자만큼 곡식을 팔았나 봅니다.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

보십시오! 양식이 얼마나 귀하고 비싼 때인지 ‘풍족히 사라’고 못합니다.

또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간들, 풍족히 구입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3절) 유다가 아비에게 말하여 가로되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경계하여 가로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이번에는 유다가 나섰습니다.

첫째 르우벤은 서모와 동침 사건으로 장남의 신망을 잃었고,

둘째 시므온은 애굽에 볼모로 잡혀 있고,

셋째 레위는 (시므온과 함께) 세겜성 학살의 주범으로서 가족 내 존경을 잃었고,

넷째 유다가 이제 실질적 장남 행세를 시작합니다.

 

요셉이 ‘너희 아우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말한 이유는,

물론 피붙이 동생 요셉을 보고싶기도 했겠지만,

‘형들이 자기 동생 베냐민을 어떻게 대하는지..’ 요셉은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20년 전 과거에, 형들이 자기들의 동생 요셉을 너무다 학대해서

자기가 애굽에 팔려온 것이거든요.

그 형들이 같은 동생 베냐민을 어떻게 대하는지.. 요셉은 (시험해) 보고싶었던 거죠.

 

그런데 요셉은 지금, 국사에 바빠서 가나안을 방문할 형편이 못 됩니다.

그러니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말한 것이죠.

 

그리고 빨리 베냐민을 보고 싶었기에, 아마 형들의 1차 방문 때

곡식도 많이 실어서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 형들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셉이 베냐민을 감옥에 가두었을 때,

유다가 대표로 나서서, 또 모든 형제들이

베냐민을 구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던 길을, 모두 되돌아 애굽으로 왔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형들을 시험한 것이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하나님이 형들을 시험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야곱은 12아들을

이스라엘 나라의 12지파의 족장들로 세우는 것이었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를 통한 새사람 됨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통해서, 형들을 시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행히도 형들은, 그 시험을 통과합니다.

동생 베냐민을 자기 목숨처럼 아낍니다.

과거에 동생(요셉)을 팔아버린 죄를.. 회개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형들은

당장 당면한 문제인 기근에서만 해결받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12지파의 족장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그들의 공로로 그렇게 됐다는 게 아니라,

만약 그들이 그때까지도 회개치 않고, 여전히 동생을 차버리고

자기 목숨만 지키기에 급급했다면...

 

그들을 이스라엘 나라의 12지파의 족장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 시기가 뒤로 많이 미뤄졌을 것입니다.

 

▶(4절)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5절)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요셉의 형들도, 지금 대표로 말하는 유다도

베냐민을 애굽에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그걸 싫어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너희에게 동생 (베냐민) 이 있다는 사실을 왜 얘기했느냐?’고

야단칠 정도였죠. 43:6

 

그러나 일이 이렇게 꼬여버린 것은

하나님이 요셉의 형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상황을 자꾸 그렇게 조성해 가신 것입니다.

 

▶(6절) 이스라엘이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

 

사실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일은 큰 은혜를 입는 일인데도

아직 야곱은 그 사실을 깨닫지를 못하니, 모든 일이 괴로운 줄로만 여겨진 것입니다.

 

이렇게 부담이 되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애굽에 갔다가

베냐민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요셉의 의중을 모르니까 이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모르고 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기쁨이 안되고, 도리어 부담이 되고,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의 가장 소중한 자녀 (베냐민) 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을 믿어야 합니다.  42장 모든 것이 나를 해롭게 하는가?

 

▶(7절)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얼마나 상세하게 따지듯 물어보는데 묻는 말마다 조목조목 대답하다 보니

동생 베냐민이 있다고 말하게 된 것이지

자기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요셉의 부모 사랑이 각별했음을 봅니다.

과거에 아비의 사랑을 독차지 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식을 키워보면 유난히 부모에게 잘 따르는 자식이 더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그런 요셉인고로, 가족과 아비에 대해 세세하게 물었고

나중에도 효도가 극진하여 요셉이 야곱의 법적인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8절)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유다가 아비 야곱에게 간청하는 내용은 논리가 정연합니다.

첫째는 베냐민을 보내면 모든 식구뿐 아니라 베냐민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베냐민을 보내지 않으면 양식을 못 구해서

결국은 베냐민도, 또 우리 아이들도 굶어죽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결국 다 살 수 있는 길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서 곡식을 구해오는 일이다고 간청을 했습니다.

 

▶(9절)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으리라.

 

담보한다는 말은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애굽에서 베냐민이 잡히게 되면 자신이 대신 잡히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대로 나중에 베냐민 자루에서 은잔이 나와 베냐민을 잡으려 할 때

내가 대신 잡히겠으니 베냐민은 풀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것을 통해 요셉은 유다가 진정으로 회개를 했구나! 를 알게 됩니다.

 

이전 같으면 자신이 살기위해 동생을 팔았던 자가

이젠 동생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려고 하니, 완전 달라진 (회개한) 모습을 본 것이지요.

 

그때 요셉은 자신이 요셉임을 밝히고 울면서 형들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모습이 보일 때 진정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유다의 말은 아비에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책임지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10절)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면 벌써 두번 갔다 왔으리이다.

 

(11절) 그들이 아비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찐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을 삼을찌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유다의 말을 들어보니 이치에도 맞고 예전과는 다른 신실한 모습을 보게된 야곱은

허락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보냅니다.

 

<야곱의 내려놓음>

야곱은 지금 아들 시므온까지 애굽의 총리에게 빼앗긴 실정입니다. 42장

게다가 기근은 점점 더 심해지고 손자들까지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빨리 애굽으로 가서 그 애굽의 총리인 요셉에게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아니 살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애굽 총리의 가족으로서

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못 갑니다.

아들 시므온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안 갑니다. 이유가 뭡니까?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요구하기를, 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는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 요셉을 이미 오래 전에 잃었습니다.

이제 라헬의 자손 중에 남은 아들이라고는 베냐민 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그를 끔찍이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애굽에 곡식을 사러 갔을 때도

베냐민만은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재난이 있을까 두려워서’였습니다. 42:4

 

그럼 다른 아들들은 재난을 당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처럼 야곱은 베냐민을 사랑하고 아꼈던 것입니다.

야곱의 유일한 행복의 근거가 베냐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베냐민을 내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와 네 가족이 살기 위해서는

베냐민을 내 놓아야 한다’ 이게 자신들의 목숨을 쥐고 있는 애굽 총리의 요구였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요지부동입니다. 하나님은 그 베냐민을 뺏기 위해 야곱의 삶에 기근을 더하십니다.

그래도 베냐민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자 보다 못한 유다가 아버지께 간청을 합니다.

 

(창43:8, 13-14)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 하리이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베냐민이 가지 않으면 어린아이들까지 다 죽게 된다는 유다의 말을 듣고

야곱은 비로소 베냐민을 놓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경까지 몰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서 베냐민을 포기시키시기 위해, 온 세상을 기근에 처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베냐민을 빼앗기 위해

그의 인생에 기근을 더 강하게 부으시자, 그가 결국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깁니다.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      주1)

이들이 선물을 많이 준비한 것은,

기도도 하지만, 사람이 할 도리는 다 하겠다는 말입니다.

기도와 함께 자신이 할 도리를 다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고 그냥 있어서도 안 되고,

성도라면서 기도는 안하고 열심히 노력만 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12절) 너희 손에 돈을 배나 가지고 너희 자루 아구에 도로 넣어온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차착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그러니까 돈을 세배나 가져 가라는 말입니다.

요셉이 도로 넣어준 돈과 혹 모자랄지 모르니 배를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차착’은, 착오나 실수입니다.

돈도 안주고 곡물을 가져간 도적놈이라고 착각하고 있을까봐

풍족히 돈을 가지고 가서 돈을 훔치지 않았음을 말하라는 것이지요.

 

▶(13절~14절)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 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되면 잃으리로다.

 

아무리 많은 돈과 선물을 가져가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돈도 잃고 자식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은혜 베푸시지 않는다면 도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순종하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냐민을 잃게 하시면 잃겠다는 것이지요.

이제야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는 야곱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제 나로써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워딩과 비슷합니다.

야곱의 신앙이 어느 경지까지 이르게 되었는지가 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베냐민을 꼭 다시 돌려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죽게 하신다 해도 거기에 순종하겠다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행복의 근거는 베냐민이었지만

이제 야곱의 행복의 근거가 하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냐민보다 더 소중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신다 해도 감수하겠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러한 항복의 자리까지 가는 데에 쓰인 것이 뭡니까?

기근입니다. 극심한 기근입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어린아이들까지 다 죽을 수 있는 극심한 기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으로

자신의 행복과 기쁨의 근거를 삼으려 할 때, 그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가 하나님만을 붙들고 하나님께만 행복의 근거를 두게 만드시고야 마십니다.

 

재산, 건강, 명예, 자식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앞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성도의 의존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집요하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나그네 인생길 130년에 험악하기만 한 삶을 살았던 야곱이

이제 애굽의 총리가 된 아들의 덕으로 자기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삶을 살게 되는 문턱에 도달해 있습니다.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베냐민만 놓으면

야곱은 그야말로 당시 세상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애굽 총리의 아버지로

기근과는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실은 빼앗아 가시는 것이 아니라 베냐민과 함께 최고의 복락을 누리게 해 주시기 위해

시험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의 상징입니다. 우리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존 대상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상징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안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야곱의 그 인생을 드라마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다음 줄거리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다보면

‘그거 놔, 그것만 놓으면 네가 상상할 수도 없는 복이 기다리고 있어’하고

자기도 모르게 외칠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답답해서.

 

아마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실 것 같습니다.

분명 우리가 지금 붙들고 있는 그 어떤 것을 놓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도 없는 평강과 기쁨과 안식을 경험하게 해 주실 텐데

여전히 그걸 꼭 붙들고 있는 당신의 자녀를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어요.

 

우리의 삶으로 돌아와 그 현실을 적용시켜 볼까요?

내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 자녀를 놓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을 걱정하게 하는 그 자녀가 바로 여러분의 베냐민입니다.

그 자녀를 내가 책임지려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맡겨 버리세요.

 

야곱처럼 ‘하나님이 죽이시면 죽이시는 거지요, 뭐’하고 체념해 버리세요.

무책임한 행동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내가 걱정하고 내가 조바심 낸다고 해서 그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나의 염려와 조바심에서 그 자녀를 놓아버리시고 그 자녀의 문제 말고

그 자녀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 백성 됨을 위해 기도하세요. 대부분 우리가 자녀습니다.

속을 태우는 것은 내가 기대 그 자만큼 안 되어서 속상한 거지요?

자녀는 곧 나의 존재의 확장(extension)이라 했습니다.

 

내가 자녀에게 내 소원을 투사해서 나의 만읱녀그채우려 하는 것은

여전히 나만을 사랑하는 죄인들의 속성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왜 그 자녀를, 내 욕심을 채우고 내 체면을 세우는 도구로 생각하세요.

그 자녀도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정말 걱정을 해야 할 것은

그 자녀가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 된 사람이면 어떡하나’ 이어야지,

‘왜 저 자식이 내 욕심대로 되어 지지 않나’ 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올려놓고 기도 하세요. 그게 우리의 베냐민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재산, 명예,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에 연연하는 것은 세상의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내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이 정의하고 규정하고 합의한 이 세상의 힘으로

나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상대적 행복과 우위(優位)라는 치졸한 만족을 원하기 때문 아닙니까?

그래서 그러한 것이 내게서 빠져나가면 견뎌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를 가치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어야지

이 세상의 힘과 물질이 성도의 가치의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서 좀 자유로우세요. 내가 너무나 좋아하고

 

그래서 심지어 나를 의존시키기까지 하는 그런 소중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빼앗아 가시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하겠다는

그런 야곱의 고백을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하늘의 복을 주시기 위해 거기까지 끌고 가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도득한 야곱에게

그 복을 주시기 위해서 베냐민까지 빼앗아 가시는 하나님의 처사를 보세요.

 

야곱, 즉 이스라엘,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분깃, 목적지는 여호와 하나님이어야지,

이 세상의 은금으로 만든 우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복을 방해하는 베냐민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생기도 없고, 화도 복도 주관하지 못하며, 헛것이요, 망령된 것이요,

하나님이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아, 너는 나를 구하라, 나만 바라보아라,

그래야 내가 진짜 복을 줄 수 있는 거야,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베냐민도 아니고

요셉도 아니고 시므온도 아니고 바로 나 여호와다’라고 집요한 짝사랑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야곱에게서 베냐민까지 빼앗아 버리심으로

야곱의 완전한 자기 부인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었습니다. 염려하는 여러분 자신은 이미 예수 안에서 죽었습니다.

시체가 무슨 염려를 합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 안에서 죽었습니다. 이 세상 것으로 염려하는 그 옛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살던 우리의 옛 자아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의 자기에 대한 평가나 인기나 자랑을 위해 살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마치 시체에게 치장을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니까요.

죽은 자에게 무슨 명예와 재산과 자랑과 인기가 필요합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완전히 죽은 자라는 것을 믿고

나의 모든 걱정과 염려와 처지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드려야 합니다.

 

야곱처럼 ‘죽이시려면 죽이세요. 가져가시려면 가져가세요.’하는 옛 사람과 옛 세상에 대한

체념과 포기가 반드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난 이 세상에 대하여는 이미 죽은 자니까요.

그 때 비로소 우리에게 자유가 찾아옵니다.

그 때 비로소 하늘의 평안과 안식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여러분의 베냐민을 놓으십시오!

 

▶(15절) 그 사람들이 그 예물을 취하고 갑절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의 앞에 서니라.

 

이제야 야곱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였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유다의 진실된 간청이 있었던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이처럼 어려운 일이 가정에나 사업장에 생기게 되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나" 라는 자아를 완전히 죽이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온전히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해결의 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루어진 요셉의 꿈       창43:16~23

 

본장의 내용은 두번째로 요셉에게 내려간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초청에 대접을 받습니다.

이 초대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진 은혜의 식탁인 것입니다.

 

자신을 팔았던 형들이지만 점점 회개하고 있는 모습에 초대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시험하기를 베냐민에게는 음식을 다섯배나 줍니다.

이것은 당시 풍습으로 사람을 초대하고는 가장 존귀한 자에게 다섯배의 음식을 주는데

다 먹으라고 주는게 아니라, 존귀한 자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에게 음식을 다섯배 담아 주면 형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를 살피는 것입니다.

과거처럼 변하지 않은 형들이라면 분명 힐금거리고 투덜거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별 생각없이 즐겁게 마시고 먹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요셉은 변해있는 형들을 보게 되었고 다음엔 베냐민 자루에 은잔을 몰래 넣어두고 들키게 한 다음

베냐민을 종으로 삼는다 하면 형들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를 시험해 보았습니다.

 

▶(16절) 요셉이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그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오정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약속대로 베냐민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초대하여 대접을 하는데

얼른 읽으면 모르고 지나가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요셉의 처신이 아주 훌륭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총리이니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일단 공무에 철저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라의 청지기로써 임무를 감당하고 점심시간에 가서 만나겠다는 것이지요.

 

보통사람이라면 당장 자기 마음대로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맡은 일을 충실히 잘 감당함으로 성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있는 자리에선 더욱 성도로써의 삶을 바르게 살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공과 사를 잘 구분하여 처리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직장에서는 직장의 일을, 교회에서는 교회의 일을 잘하라는 것이지요.

직장에서 컴퓨터에 앉아 교회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일한 댓가로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는 시간에 교회일이나 집안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다면 덕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 와서 직장업무도 하지 마십시요. 성도로서의 올바른 삶이 아닌 것입니다.

외국에서 양식을 사러온 사람들을 총리가 자기집에 초대한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상황입니다.

 

만약에 그 많은 형제중 한 사람이라도 그 옛날 요셉의 꿈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마음에 담아 있었으면 이 상황에서 그 꿈을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꿈이 싫어 미워했고

그런 결과 요셉을 팔아먹은 자들이니 기억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17절) 그 사람이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요셉의 청지기가 그들을 정중하게 집으로 모셨던 것입니다. 요셉은 지금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풀려고 하고 있고, 형제들은 엉뚱한 생각으로 떨고 있는 것입니다.

 

▶(18절)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일 우리 자루에 넣여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를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자신들이 총리자택에 초대되었으니 너무나 영광스러워 심히 기뻐해야 할텐데

이들은 지금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심령이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할 때는

좋은 일이 생겨도, 큰일이 생겨도,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담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내 심령이 온전치 못하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나 사랑이 오히려 부담이 되고

괴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자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들이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팔아먹은 자라서 그런지 생각하는 것이

지금 총리가 자기들을 종으로 삼으려 하는게 아닌가? 하며 두려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잠28:1). 우리는 모든 일에 순수해야 합니다.

악인이 왜 따라오는 자도 없는데 도망합니까? 자기가 한 짓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 죄의 해결을 받은 자는 사자같이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접 받으러 들어가면서 죽으러 가는 것 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특별히 곤경에 처했을 때 자기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19절) 그들이 요셉의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앞에서 그에게 고하여

 

그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해결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일단 들어가면 총리집이니 경비병들 때문에

도망쳐 나오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겠지요. 이런 좋은 집에 초청을 해 주었으니 감사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들의 생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굽신거리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20절~21절)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자기들에게 있었던 일이 자신들이 고의로 한 일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금방 알았다면 바로 가져왔을텐데 멀리 가서 객점에서 알게 되어 바로 오지 못하고

다시 양식을 사러올 때에 가져오려고 했다는 말이지요.

청지기에게 "내 주여!"라 하며 굽신거리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22절)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최선을 다해 변명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양식값은 물론이고 이번에 구할 양식값도 가져 왔다고 말했습니다.

 

▶(23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 내고.

 

지금 이 청지기가 보통이 아닙니다. 그냥 걱정하지 말라! 라고 하지 않고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 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애굽에서도 하나님에 대해 바른 신앙생활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자기집의 청지기까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총리라도 애굽인에게 신앙을 강요하기란 힘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요셉이 신앙을 강요하여 청지기가 믿은 것이 아니라

요셉의 신앙을 청지기가 본 받고 싶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라 생각됩니다.

 

성도가 거하는 곳에는 주변의 사람들도 변화받는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처한 곳에는 주변의 환경도 변화를 받게 됩니다.

 

성도라 하며 가는 곳마다 변화는 커녕 사람들이나 환경이 오히려 올무가 되고

근심꺼리가 된다면 미안하지만 성도가 아닌 것입니다.

성도란 이름을 굳이 붙힌다면 세속화된 성도라는 것입니다.

세속화되어도 성도인 것은 맞는지라

영혼구원은 이루어져 있지만, 생활의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활의 모든 환경과 조건들이 올무가 되고 근심꺼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청지기는 걱정하지 말라하면서 볼모로 잡아 두었던 시므온까지 그들에게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자꾸 자신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심령이 닫혀 있으니까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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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꿀]-여기 꿀은 벌꿀이라기 보다는 포도로 만든 꿀인데 요즘의 포도쨈 같은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주 귀한 선물이었다 합니다.

 

[향품과 몰약]-향품은 고급 화장품입니다.

몰약은 히스트스장미라는 식물의 잎사귀에서 추출한 진액인데 화장품으로도 사용하고

이 액을 물에 타 마시면 진통제나 마취제로 사용하고 방부제로도 사용되는 고급약품입니다.

시체를 미이라로 만드는 애굽에서는 몰약을 방부제로 아주 많이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도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라고 주었으나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마취상태를 만들어 십자가의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유향나무 열매]-고급과자로 사용하는 열매입니다.

[감복숭아]-아몬드 같은 것으로 이스라엘의 특산물입니다. 애굽에는 없는 것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