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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7장, 거룩한 빼앗김 *김성수 목사 창세기 99강 중에서
※본문 창47장에서, 요셉이 7년 흉년 때 곡식을 나눠주는 대가로
애굽 사람들의 돈과 가축과 토지를 다 거두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것에 대해서
해석이 여러 갈래로 나뉩니다.
1) 요셉이 총리가 된 후에 교만해져서 독재, 전제정치를 했다는 해석 ☞요셉의 가장 큰 시험, 성공
2) 요셉이 그들의 돈, 가축, 토지, 시민권을 다 빼앗은 것은, 더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함이었고,
가만 놔두면 다 굶어 죽을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개발 독재’를 했다는 거죠. ☞고센 교회에 주신 특별 은혜
3) 아래 설교문은 ‘상징적’으로 해석합니다.
총리 요셉이 그들의 돈, 가축, 토지를 다 접수하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요셉(그리스도 왕 예표)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중심의 절대왕정제제 라는 것이죠.
백성들을 착취하기 위한 절대왕정이 아니라, 그들을 잘 다스리기 위한 절대왕정인 것입니다.
위 세가지 해석 중에 어느 해석이 맞을지는, 오늘 당장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겠습니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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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진다
리차드 기어라는 신예 배우를 세계적인 탑 스타로 만들어 준 영화가
‘사관과 신사(an officer and a gentleman)’라는 영화입니다.
지금부터 27년 전쯤에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개봉이 되어
수많은 청춘 남녀들의 가슴을 울렸던 잭(richard gere)과 폴라(debra winger)라는 인물의 사랑이야기입니다.
그 영화에는 두 쌍의 젊은 연인이 등장합니다.
잭과 시드는 해군 항공 사관학교 생도들이고
폴라와 리넷은 제지 공장 여공들입니다.
제지 공장 여공들은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노동에서 탈출을 하기 위해
사관학교 생도들에게 계획적으로 접근을 합니다.
그건 그 마을 제지 공장 여공들의 전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접근을 하여 결혼에 성공하면
그 지긋지긋한 가난한 마을과 고단한 제지공장을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데브라 윙거가 열연한 폴라라는 여자는 진심으로 잭(richard gere)을 사랑하게 되고,
리넷이라는 여자는 다른 여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드 라는 남자의 신분과 소유와 미래를 사랑합니다.
폴라에게는 잭이라는 사람 자체가 사랑의 대상이었지만
리넷의 사랑은, 시드의 장교 직분과 그의 보장된 미래였던 것입니다.
리넷이라는 여자는 행여 그 남자(시드)를 놓칠까봐, 시드에게 임신을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래야 결혼을 해 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시드가
사관학교 졸업을 2주 남겨놓고 사관학교를 자퇴해 버립니다.
사랑하는 리넷과 함께 자신이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시드는 학교를 자퇴하고, 반지를 사서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리넷에게 가서 청혼을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뛸 듯이 기뻐하던 리넷이
사관학교를 자퇴했다는 시드의 말을 듣자 갑자기 차갑게 돌변하여 그 청혼을 거절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임신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시드라는 남자는 아무런 매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그의 사관생도라는 신분과 보장된 미래만을 보고 시드를 유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드는 자퇴로 인해, 사관생도라는 매력이 상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관생도가 아닌 시드는 더 이상 그녀의 로망이 될 수 없었습니다.
시드는 너무나 큰 충격에 빠지고 결국 그는 그 일로 자살을 합니다.
사관학교 졸업식 날이었습니다. 멋진 장교복을 입은 한 남자가
제지 공장의 문을 활짝 열고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준 폴라를 번쩍 안아들고
어두컴컴한 제지 공장에서 찬란한 햇빛이 비치는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이 영화는, 상대방에게서 얻어내고자 하는 떡고물에 관심을 가진 가짜 사랑은
그 상대방을 모독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반면,
배경이나 조건이나 신분이나 소유 등에 매이지 않는 진실한 사랑은
진정한 연합을 가져온다는 것을 묵직한 메시지로 던져준 아주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특히 그 마지막 장면은 가슴을 떨리게 할 정도로 압권입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그 영화를 본 후 그 영화에 빠져, 몇 번 더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매번 그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떠 올리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힘이나 신분, 그 분이 가진 풍요를 얻어내기 위해
거짓 사랑을 고백하는 그런 자들을 제지공장 같은 어두움에 그냥 놔두시고
진심으로 예수를 사랑한 그 분의 신부들을 번쩍 안아서
하늘로 옮겨 가실 예수님의 모습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리넷같은 사랑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비록 해 줄 수 있는 것이 하나 없고 내세 울 것도 하나 없는 집안사람이지만
그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사랑한 폴라 같은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침묵 정도가 아니라
아주 무력한 존재처럼 우리의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실 때도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가진 힘과 풍요와 능력과 신분과 조건 등을 노리고
거짓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자들을 가려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리넷과 같은 이들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갑니다.
그러나 폴라와 같이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는 참 하나님의 사람들은
끝까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앙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세 분 다 자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께 여쭤볼게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소개하실 때 보통 누구의 하나님이라 하십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시지요?
그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성도의 삶의 특징을 종합하여 보여주고 있는 인물들이라서
그렇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바로 우리 교회 자신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대표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공통적으로 겪은 일이 뭡니까?
그걸 알면 우리 교회가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 셋이 공통적으로 겪은 일이 무엇이지요?
셋 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잃음이 잃음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찾아짐으로 막을 내렸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삭의 가슴에 칼을 꽂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르치실 것을 모두 가르치신 후
이삭을 고스란히 돌려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음에서 다시 찾았다고 기록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빼앗아 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잃음이 결국 완전한 찾음으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이삭은 어땠습니까? 이삭은 야곱이라는 아들에게 속아 그를 축복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을 수 십 년간 잃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다시 아버지 이삭에게로 돌려 주셨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을 20년간이나 죽은 아들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심지어 요셉의 동생 베냐민까지 빼앗기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둘을 모두 빼앗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시퍼렇게 살아서, 아니 살다 뿐입니까?
애굽의 주가 되어서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왜 우리의 언약의 조상들이 모두 아들을 잃는 경험을 해야 한 것일까요?
아들은 바로 ‘나’라는 존재의 확장입니다. 아들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더 나아가 아들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으로 행복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착하고 있는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다 포함하는 그런 유비입니다.
‘나’라는 우상을 만족스럽게 행복하게 만들고자 내가 천착하고 있는 모든 것,
그것이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조상들의 아들을 죽이시는 사건으로
‘나’라는 우상과 그 우상을 섬기는 데에 필요한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 모든 가치들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을 잃는 사건이 아니라, 다른 말로 ‘나’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아니라
더 멋진 ‘나’, 새로운 ‘나’의 완성에로의 필연적 과정이며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풍요를 얻는 필연적 통과의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잃었던 아들들을
더 멋지게 변화시켜 돌려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아들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이 될 우리 성도의 실존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이나 고난 등을 빼앗김이나 잃음이나 실패로
정의하시지 마시고, ‘나’의 아들을 빼앗으심으로 더 좋은 것을 주고야 마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배려의 손길로 받아들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 없어’라는
리넷 식의 신앙은 신앙도 아닌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모독하는 것이며 멸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면 그가 사랑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이었으며,
하나님의 재산이었으며, 하나님의 능력 뿐이었던 것이니까요.
▲라헬이 라마에서 아들을 잃고 통곡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 아들들을 돌려보낼 것이다’(렘31:15)하신 것을 기억하세요?
라헬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요셉의 아들이 에브라임, 즉 북 이스라엘의 대표지파이고
베냐민이 남 유대의 대표이므로 그 라헬의 아들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라헬이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의 어미로 불린다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과 베냐민, 즉 이스라엘을 잠시 빼앗아 버리십니다.
요셉과 베냐민의 빼앗김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로 다시 한 번 나타납니다.
그렇게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빼앗아 망하게 하시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 기근과 흉년에 내 던지기도 하시는 일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반복하고 반복하여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매번 다시 돌려보내 주십니다.
‘돌려보내실 걸 왜 빼앗아 가십니까?’하고 질문을 하실 분들이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아들들을 빼앗으시고,
라헬의 아들들이라 일컬어지던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보내시며,
교회인 두 증인을 바벨론 성 길가에서 죽여 버리신 것은
그들을 골탕 먹이시려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의뢰하며,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자들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그들을 자기부인 시키시는 방법으로 잠시 사용하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잃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아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통해,
다른 말로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 말고도 힘으로 작용했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함으로 인해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빼앗기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그렇게 모든 것을 상실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예수께서 통곡하고 있는 라헬에게 오셔서 내가 너에게 영원히 잃어버릴 수 없는
‘진짜 아들’ 즉 ‘영원한 생명’을 돌려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오늘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우리의 아들, 즉 우리의 힘을 빼앗아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빼앗김은 가장 좋은 것으로 바꿔 주시기 위한 거룩한 빼앗김인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오늘 본문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올바른 선(先) 이해가 없이 오늘 본문을 보면
그야말로 황당 그 자체입니다.
◑본문 해석
요셉이 매점매석을 하여 가나안과 애굽의 모든 돈을 다 끌어 모아 바로에게 바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돈이 떨어져 이제 더 이상 곡식과 맞바꿀 아무런 재화가 없는 이들의 땅도
다 빼앗아 버립니다. 그게 언약의 후손이 할 일입니까?
요셉이 그렇게 가나안과 애굽의 모든 돈과 땅을 다 끌어 모아 애굽왕 바로에게 바쳤다는
그 사실은 헤로도투스나 스트라보(Strabo)와 같은 역사가들의 증언을 통해
역사적 사실로 확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의 도덕관이나 윤리관, 그리고 사회관으로 볼 때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이 7년간 풍년이 들고
나중에 7년간 흉년이 들 것을 명확하게 계시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기만 준비를 했다가
나중에 흉년이 들자 가나안과 애굽의 모든 돈과 땅을 다 빼앗아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정말 민중을 위하고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위정자는 백성들을 계몽하여
흉년에 대한 대비를 시켰어야지요?
그런데 요셉이라는 사람은 총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오로지 자기 위의 왕의 유익만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얻은 고급 정보로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를 하는
오늘날의 정신 나간 관리들과 똑같은 행태 아닌가요?
매점매석으로 자유 농들을 일시에 전부 소작농으로 전락을 시켜버린 악덕기업가의 원조같이 보이지 않으세요?
요셉은 지금 힉소스 왕조라는 이방 왕조가
애굽의 모든 돈과 땅을 다 차지하는 데에 일등공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뭘 상징하는 걸까요? 이 세상 권세잡은 자가 다스리는 이곳에 한 왕이 오셨는데,
그 왕을 진짜 왕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이가 열심히 일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겁니다.
요셉이 바로 예수의 모형이며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한 왕에게 완전히 복속이 되어 순종을 하는 전제 군주제의 애굽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것입니다. ????
여러분, 성경을 보실 때 자신의 가치관이나 도덕관,
그리고 오늘날의 시대정신 등을 전제하고 보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인간과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 책이지 도덕책이나
윤리 책이 아닙니다. 그렇게 성경을 보니까 구약의 하나님은 무식하고 폭력적인 하나님이라느니,
유다는 며느리와 근친상간을 한 나쁜 인간이라느니,
요셉은 애굽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고 애굽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한 더러운 인간이라는
등의 지탄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요셉이 제사장 딸과 결혼한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성경의 독자인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인간의 죄와 구원을 친절하게 설명을 하실 뿐입니다.
그 설명을 위해 역사까지도 동원되어
창세전의 작정과 예정과 계획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건화 되어 설명이 되고 그 객관적이며 실제적인 역사가
우리에게 계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은 당신의 백성들의 아들을 빼앗아 버리는 예수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아담 안에서 타락을 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너무나 많은 것들로 자신들의 안위와 행복과 만족을 채우려 애를 써왔습니다.
인간들은 성(城), 돈, 명예, 인기 등등 제한되고 유한한 이 세상의 자원들을 가지고
자신들이 원하는 구원에 도달하려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로는 절대로 인간이 참 행복과 만족에 도달할 수 없음을
역사와 경험과 교육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르치십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자신들을 보호하려 하고,
행복에 도달하려 하는 시도를 할 때 그 길을 막아서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 것들을 빼앗아 가시기도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의 소유나 힘이나 명예나 자랑이나
인기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고,
오직 유일한 절대 상위권 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고 의뢰하는 삶만이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행복과 만족이 있는 삶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에 가끔 빼앗김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을 빼앗기기도 하고, 자식들을 빼앗기기도 하고, 재산을 빼앗기기도 하고,
명예를 빼앗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것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비워 내시고 그 빈 공간에 예수를 채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진정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삶이 우리에게서 격발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빼앗김의 사건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분을 저주하고 떠나는 것이 시드를 모독하고 죽게 만든 리넷 식의 사랑입니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이 잭이 폴라를 번쩍 안아 제지공장에서 탈출 시키는 것처럼
절대 그들을 번쩍 안아 들어 올리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힘과 도움이 탐났을 뿐이니까요.
성경은 그들을 돌 짝 밭이라고도 부르고 가시 떨기 밭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가나안과 애굽의 모든 백성들이 요셉에게 와서,
먹여만 주시면 땅도 다 내 놓고 노예가 되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하자
요셉이 그들의 땅을 몰수한 후 곡식을 주고 종자와 식량으로 쓰라고 하지요?
그 때 그 백성들이 씨를 뿌리는 것으로 그 흉년 사건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한 왕에게 종속이 되고, 항복이 되자 흉년이 끝나고
새로운 파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소출의 5분의 1만 왕에게 바치고 5분의 4는 자신들이 갖게 되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고대 농지법이 만들어 집니다.
요셉에 의해 새 세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고대의 역사서들을 보면 그 때 요셉에 의해 만들어진 그러한 고대 농지법이
상당히 오랜 시간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제 다시는 농민들이 굶을 일이 없어진 것입니다.
자유농 들이 나라와 왕과의 관계 속으로 복속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소출이 줄어든 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소작농이 아닌 자유농 때에도
그만한 세금은 냈었으니까요.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진면목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백성들의 꿈이 펼쳐지고
백성들의 의견이 다수결에 의해 수용이 되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 모든 걸 빼앗긴 피조물들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에 이끌려 그 분이 주시는 하늘의 생명력으로 배불리는
그런 나라인 것입니다.
자기의 꿈과 야망을 이루는 그런 삶이 아닌
자신이 속한 나라의 법에 따라 그 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 나라의 뜻을 성취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교회의 개혁을 꿈꾸는 많은 단체들이나 개인들이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이 뭡니까?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자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이데올로기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민주주의가 가장 인간다운 이념입니까?
민주주의는 ‘내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가 바탕이 되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건 제 말이 아니라 홉스라는 사회학자의 말입니다.
국가가 자신의 사유재산을 반드시 지켜줘야 한다는
핵심 계약 내용이 전제가 되어 지지 않는 민주주의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창47:25) 그들이 가로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입에서 이 고백을 들으시기 위해
그 백성들의 삶에 기근을 허락하시기도 하시고, 흉년을 허락하시기도 하시며
결국에는 그들이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는,
모두 빼앗긴 자로,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자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아를 꼭 붙들고 있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전부 부인해 내셔야 합니다. 그게 거룩한 빼앗김입니다.
돈이 많아도 그게 자신의 자랑과 교만이 되지 않는 사람, 하나님께 빼앗긴 사람입니다.
자식이 훌륭한 직업을 갖게 되고 모든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을 보고도
우쭐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의 올바른 신앙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 좋은 직업을 빼앗아서라도 참된 신앙인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이,
하나님께 빼앗긴 것입니다.
건강한 육신 때문에 때때로 골프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예배를 빼먹는 사람이
‘하나님 이 건강 쳐서라도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인으로 서게 해 주세요’
할 수 있는 사람, 그는 건강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건강을 빼앗겨 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해 내고야 마십니다. 거룩하게 빼앗기세요. 포기하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전제 군주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그 ‘나라’ 바실레이아 kingdom 는
민주주의에 의해 민의가 반영이 되는 공화국이 아니라
한 왕에 의해 독재적으로 끌려가는 왕국이란 말입니다.
그 나라 백성들은 그 왕 앞에서 모든 것을 빼앗겨야 합니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 자는 그 왕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