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된 삶에 취해서 죽어간 사데 교회 계3:1~5 2023.12.13
◑서론 ‘안정된 삶의 여건이 갖춰진 사데’
사데 도시는 에게해 연안을 중심으로 한 무역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헤르무스 강과 투모로스 산 사이에 있는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계곡은, 군사적인 면에서 사데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데의 서쪽은 에게 해,
남쪽으로만 열려 있을 뿐,
그 외 다른 방향으로 전부 계곡이 만드는 천연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요.
그래서 군사적으로, 남쪽만 막으면 얼마든지 도시를 방어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고,
그리고 이 계곡을 따라서 무역로가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무역의 중심지로서 활발한 상업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게다가 양털 가공업이 발전하고 염색업이 발전하고,
그리고 사금 채취가 아주 성황을 이루었던 그런 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군사적인 면에서 굉장히 안정적일 수 있고,
상공업과 무역이 발전해서
세상적으로 안정적인 삶의 조건을 갖추기에 최상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사데 교회의 문제점을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면
그 키워드는 "세상적인 안정"입니다.
군사적으로 난공불락의 요새가 이루어져 있는 가운데,
경제적으로 부요하고 안정적인 상태,
요즘 모든 나라 정치인과 국민들의 꿈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을 공생애 때 따라다니던 제자들의 꿈이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꿈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 안정적이고, 경제적으로 풍요한 상태!
그런 상황이 주는 특혜를 사데교회가 받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데교회의 특징은, 일곱 교회 중에서,
이단의 위협이라든지, 외부적인 탄압과 박해가 가장 적었던 곳이라는 겁니다.
근데 외부적인 아무런 위협이 없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세상적인 안정이
신앙과 영성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되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영적으로 큰 위험 요소가 되는지를,
사데 교회가 여실히 보여줍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사데교회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주님은 사데교회를 향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라고 말씀하세요.
'살았다'는 것은, 몸이 살았기 때문에 살아있기도 하고,
그리고 또 어쨌든 '교회'라는 이름이 붙을만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기에,
이론상으로 영생을 얻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름으로는(명목상으로는) '살았다' 라는 말을 하십니다.
그러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거예요.
실상은, 사랑이신 하나님과 어떤 식으로도 연결이 되어 있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에베소 교회나, 버가모 교회나, 두아디라 교회를 보더라도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기는 받아도 "죽었다"라는 말은 듣지 않았어요.
근데 본문의 사데 교회는 "죽었다"고 얘기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주님이 그렇게 얘기를 하시는지 한번 살펴봅니다.
이 세상적인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잖아요.
-군사적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라든지
-양털 가공업이 잘 된다든지
-사금 채취가 성황을 이룬다든지
-이런 것들에 의해서 들어오는 수입,
그런데 세상의 안정적인 조건들은, 문제가 뭐냐면
내가 그 안정적인 조건을 좋아하고, 마음이 가서 닿게 되면
내 마음 안으로 그런 안정적인 조건들이 스며들게 되고,
그래서 솜이불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흠뻑 젖어 버리게 되고,
이 세상에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데교회는 결국은 교회를 살지 못한 거예요.
‘교회를 살지 못한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
교회란 ‘세상에서 부름받은, 불러내진 자들’이란 뜻이죠.
그런데 세상에 취해서, 세상에 흠뻑 젖어서 살다보니
자연히 성도의 정체성대로 살지 못하죠.
즉 ‘교회를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불러내진 자’로서 살지 못하는 거죠.
한 마디로, 마음이 땅을 떠나 하늘로 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죠.
☞ rfcdrfcd.tistory.com/15981372, 승천하라 rfcdrfcd.tistory.com/15981357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의 모두가 이유를 달리하고 있지만,
공통점은 결국은 교회를 못 사는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데
교회를 못 사는 이유가 각기 다른 거예요.
교회를 산다 (세상에서 불러내 진 자로 산다)는 말은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종교의 조직의 회원이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예배당을 다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다니되, 더 중요한 것은 교회를 살아야 합니다.
또 세례 예식을 통해서 세례교인이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정체성대로) 산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이 개념이 분명해야 되는 거예요.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죠.
에크는 '무엇 무엇으로부터 밖으로'
칼레오는 '부른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에클레시아라는 말뜻은 ‘밖으로 나오라고 부른다’라는 의미죠.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교회에요.
그러면 교회를 산다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밖으로 나오라는 부르심이, 바로 기쁨의 소리인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라는 얘기는
나보고 ‘밖으로 나오라’는 부름을 내가 받았는데,
그게 굉장히 기쁨의 소리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늘로부터의 부르심인데
세상으로부터 나오라고 부르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기쁨의 소리라는 겁니다.
지금 당장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의 일은
돈 많이 벌고 로또 당첨되는 게 아니고,
아들과 딸이 서울대 하버드대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내 몸이 아프다가 건강이 회복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기가 막힌 남자와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게 있어서 가장 기쁜 소식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로부터 나를 향하여
세상으로부터 마음이 빠져나와 하늘로 오라고 부르시고 계시는' 이 사실이
가장 큰 기쁨의 사건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생활 현장에서 교회를 산다’ 라는 것은
에클레시아를 산다는 것인데,
즉 세상 밖으로 나와 하늘로 오라는 부름의 응답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생활 현장 어디든지, 가정이든, 직장이든, 시장이든, 관공서든 어디든지
'내가 교회를 산다'는 것은
‘세상 밖으로 나오라’는 부름에 응답하며 산다는 것을 뜻한다는 거예요.
즉, 이 세상에 함몰되어 살지 말고,
주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받는
‘하나님 나라의 국민으로서 살아가라’는 뜻이지요.
에클레시아(교회)란 그 자체가,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산다라는 말을 자꾸
'교회에 출석한다, 교인으로서 교회 조직에 충성 봉사한다'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진정한 본래 오리지널한 의미를 붙잡고 교회를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교회 출석이 그것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거죠.
▲‘에클레시아를 산다’
지금 세상에 있는 내 마음이, 세상에서 이런저런 일들에 사로잡혀 있고
에베소 교회처럼 교회 조직에 대한 관심으로 사로잡혀 있던지...
조회 조직에 대해 사로잡힌 얘기를 자꾸 하는 이유는
그게 하늘로 못 가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늘로 오라는 부름을 응답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그렇게 하늘에서 부르는 사람들을
일부 교회가 눈에 보이는 조직에 과도한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하늘로 못 가게 만드니까 문제라는 거예요.
그러니 교회 조직에 열심히 충성하는데,
실제 삶에서 교회를 살지 못하는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거죠.
교회는 빠지지 않고 다니는데, 정작 교회를 살지 못하는 일이 얼마든지 생기는 거죠.
그리고 7교회 중에 책망을 받은 5교회가
결국은 교회를 살지 못하는, 다양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근데 본문의 사데교회는 어떤 이유를 갖고 있었던 겁니까?
성도의 마음이 ‘이 안정된 세상’에 너무 함몰되어 있었던 거죠.
안정된 조건, 안정된 세상은 좋은 건데,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니까’ ..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가 되어버린 거죠.
▲그런데 서머나교회처럼
환란과 궁핍이 따르는 삶, 이런 고난이 따르면,
성도가 마음을 땅과 세상에 붙이기가 불편해집니다. 껄끄러워져요.
마치 신발 속에 모래가 들어가 있을 때,
걸으면 얼마나 불편합니까? 껄끄럽습니다.
그런 것처럼 마음이 땅에 붙어서 땅에 있는 것들로 만족하려고 할 때마다
서머나교회는,
일이 안 되고, 괴로운 일이 발생하고,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교회가(성도가) 땅에 마음을 붙일 수 없게 되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근데 사데교회 같은 경우는,
땅과 세상에, 교회가 마음을 붙이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게 돼 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이 전면적으로 세상을 흡수하고 세상이 마음에 스며들게 되고
솜이불이 물에 젖듯이 온전히 젖어 버리듯이
세상에 취해 버린 거예요.
세상에 취하자 어떤 일이 생겼냐하면
아예 ‘하나님, 예수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 자체가 사라져 버리기 시작합니다.
마치 '잘 살아보세'라는 모토 아래
'나도 예수 열심히 믿으면 잘 살 수 있어'라는 희망을 가지고 믿을 때
과거에는 예배당이 바글바글 하다가
먹고 사는 일이 걱정이 없게 되면서, 전부 예배당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1천2백만 명까지 올라갔던 한국의 개신교 숫자가
지금 몇백 만 명도 채 안 돼요.
그럼 떨어져 나간 수백만 명이 어떤 사람들이냐
바로 사데교회 사람들처럼,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라는 거죠.
지금 교회에 안 빠지고 다니고 있어도,
‘세상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죠.
진정한 교회를 살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그 상태를 유지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전부 다 큰일 날거라는 거예요.
촛대를 옮긴다거나
주님이 무슨 그들과 날선 검을 가지고 싸우신다거나
심지어 이름을 지워버리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겁니다.
예배당을 나가는 사람도 ‘세상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먹고 살 만하고, 살기가 좀 편해지니까
어쨌든 11위에 경제 대국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한 가지 폐단이
어떻게 잘 살게 될수록, 편하면 편해 질수록
‘세상을 빠져나가는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더욱 빠져드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세상이 성도의 마음에 스며들어와 버렸습니다.
세상에 취해버리고 세상이 잠겨 버립니다.
세상에 잠겨 버렸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라는 이름 자체를 부를 이유가
마음에 없게 돼 버린 거예요. 이게 죽은 상태라는 겁니다.
다들 마치 천국에 안 갈 사람들처럼,
천국을 까마득하게 잊은 채
이 세상에 함몰되어, 이 세상 삶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더 편안해지기 위해서!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3:2
‘남은 바 죽게 된 게’ 뭡니까?
그러니까 완전히 죽었다고는 보지 않는 거예요.
지금 세상에 취해 있는 상태를 벗어나서
'세상에서 빠져나와서 교회를 살라' 라는 이런 책망의 말을 들을 때
‘저 말이 맞기는 맞는데..’ 라는
일말의 신앙양심이 지금 남아 있는 거예요.
거의 불씨가 다 꺼져버렸지만(다 죽어버렸지만), 아직 조금은 남아있다는 거죠.
거의 다 죽어서 호흡이 가물가물하지만, 가끔 씩은 숨을 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깨우라는 겁니다.
이 신앙양심의 마지막 남은 끄트머리를 붙잡고 일깨우라는 거예요.
정신이 혼미한 상태의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든지 해서 뭔가를 확 들이대면
정신 바짝 깨지지 않습니까?
왜냐면 세상에 취해 있으니까.
▲‘이기는 자에게는 흰 옷을 준다’라는 말씀을 했어요.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2:5
그런 사데교회 중에서도
일부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교회를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교인이 누구예요. 에클레시아가 누구예요?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와서, 하늘로 올라오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가 교인입니다.
‘이긴다’는 것은 이 세상의 중력을 이기는 겁니다.
세상이 내 마음을 끌어당겨요.
더군다나 사데교회처럼 세상에 안정된 조건들이 있어요.
내 몸이 건강해요.
그래서 이 상태로라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도 특별한 문제가 없어요.
이런 건강한 상태라면 100세도 살겠어요.
그럼 내 건강한 상태의 마음이 가 닿으면
마음의 그 건강이 내 영혼에 쫙 스며들어옵니다.
그럼 내 마음이 '내가 건강하다'는 상태에 취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내 의식에서 사라집니다.
건강에 취해 버려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걸 ‘이겨야’ 된다는 거죠.
우리 남편이 매달 천만 원씩을 벌어 와요.
그리고 남편의 능력이 회사에서 너무 굳건하게 인정이 되고 있기 때문에
남편이 짤릴 일이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남편의 능력이나 재정적인 안정된 상황에 마음이 가 닿습니다.
그러면 그 재정적인 안정된 상황이 내 마음에 싹 스며들어와요.
그러면 그 재정과 관련돼서는 더 이상 하나님과 예수님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되버립니다.
물질에 취해버리는 거예요.
이 상태가 ‘죽는’ 거예요.
그래서 이 상태를 이기려면 어떻게 돼야 됩니까?
교회를 사는 것인데,
그렇게 세상이 스며들어와 있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는 싸움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죽은 다음에, 승천해서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몸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마음과 영혼은 천국을 살아가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산상수훈의 삶을 사는 것이지요.
이것을 ‘이긴다’ 그랬어요.
이긴다는 것은 싸운다는 거에요.
그냥 저절로 되는게 아닙니다. 싸워야 해요.
왜냐하면 내 속에 육체 친화적이고, 세상 친화적인 속성인 너무너무 강하기 때문에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기는 자에게 흰옷을 준다는 것은
이렇게 세상이 스며들지 않은 마음 상태를 가져요.
그러면 하늘로 올라가잖아요.
그럼 흰 옷이 뭐냐
그렇게 세상에 스며들어서 세상이 얼룩지지 않은 보혈로 씻겨진 마음,
예수님 안에 들어간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이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빛이 나를 통해 발산이 됩니다.
그 하나님 안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로부터 밖으로 하나님의 빛이 발산되는
이 상태가 흰옷인 거예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아니한다..' 3:5b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됐다는 것은
하늘에서 생명책에 그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기록된 이름 중에서
마치 누구를 지울까를 살펴보시는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의 말씀인 것입니다.
지울 가능성도 있다는 거죠.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한다’고 할 때,
누구를 지우는 겁니까?
하나님의 예수님과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부르게 되고
천국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면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생명책에 기록이 된 그 상태에서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는 생명책을 보시며 출석을 부르십니다.
출석 체크를 하십니다. 부르시는 거예요.
세상에서 빠져나와서, 하나님 나라를 살라고요!
근데 안 빠져나와요.
사데교인들처럼,
세상이 너무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으니까
세상 친화적인 기쁨과 만족을 더욱 더 추구하느라고, 천국에, 하나님의 나라에 안 올라와요.
사데 교회처럼 세상에 안정된 조건이 이루어지자
그 안정된 조건의 마음이가 닿아서 세상이 스며들어 세상에 취해 있느라고
올라오지 않아요.
결과적으로 기다리다 기다리시다가.. 출석 체크를 하며 이름을 부르시다가
하늘로 올라오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지우시겠다는 겁니다.
마치는 말
성도는 교회를 살며, 에클레시아를 사는 겁니다.
세상 밖으로 나오라고, 천국에 올라오라고(하나님 나라를 살아라고)
부르시는 부름에 응답하여
예수님이 우리의 구체적인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음성이에요. 그래서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세상을 빠져 나오라는 부르심인 거예요.
부활과 승천의 사건은 하늘로 올라오라는 부르심인 거예요.
교회를 사는 건 에클레시아를 사는 것이고 밖으로 나오라는 부름을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인한다. 예수님께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시인하는 조건은 내가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걸 사회적으로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니는 것으로 시인하는게 아니예요.
진짜 예수님을 시인한다.면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시인하고
부활하신 예수님 시인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시인해야 되는 거예요.
그 예수님을 시인하는 방식은 그 예수님과 연합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부르심의 응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을 예수님이 시인 하시겠다는 얘기는
진짜 천국 패밀리에 귀속시킨다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불안하고 잘 안되고 문제가 있는 중에
그래도 어떤 면은 꽤 안정적이다.. 라고 하는 삶의 측면이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마음은 세상으로 얼룩져 있고, 더러워져 있고, 찌들어 있을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발산되는 빛에 의하여
흰옷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취해 있는 상태, 그걸 잡아내야 돼요.
당연시 여겨지고 있는 것에 취해 있을 거예요.
너무 안정적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에
있다.는 것도 의식을 못하고
내가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전혀 의식을 못하는 그런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너무 안정적이라서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이미 내가 그것에 취해 있고, 스며들어 있는 것을 잡아내 일깨워서 잡아내서
그렇게 그것의 취해 있는 나를 십자가에 죽이며
세상 밖으로 나오라는 부르심의 응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좋은 일이 벌어져도
이 세상을 빠져나오라는 부르심의 응답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복음, 십자가의 죽음, 세상에 대한 죽음, 세상을 빠져 나감 등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최고는, 세상에서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로 가는 것이 바로 기쁨의 소리요.
하늘로부터 나를 부르시는 음성이며
이 부르심의 응답하여 마음이 세상을 빠져 하늘로 나가는 것이
바로 '교회를 사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어지는 모든 생활 현장에서 세상에 취하지 말고
'교회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