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qRFhkSXl_g8
◈죽고사는 문제 신4:1-9 2024.1.9 신년기도회
신명기는 모세가 마지막으로 했던, 세편의 설교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첫 번째 설교는 1:1(선포한 말씀이니라)~4:43,
두 번째 설교는 4:44(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 28장,
세 번째 설교는 29:1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 34장 끝
신명기에서 모세가 설교했던 시점은, 40년 광야생활이 다 끝나고,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입니다.
그래서 이제 요단 동쪽 전쟁이 끝나고, 이제 요단 서쪽 전쟁을 막 치러야 되는 그 직전에,
모세는 백성들을 다 모아 놓고, 다음 시즌을 위해서 쉬프트업 shift up 해야 되는
일에 대한 권면을 하는 설교입니다. 모세의 마지막 설교이기도 하고요.
오늘 본문 신명기 4장은 이제 첫 번째 설교의 마무리입니다.
4:44절부터 5장으로 넘어가면서 두 번째 설교가 시작되고요.
첫 번째 설교는, 모세가 과거에 있었던 일들, 광야 40년의 과거를 회상하지요.
그래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너희가 왜 실패했는지를 다시 돌아보고
이번 두 번째 기회는 '실패하지 말아라' 하는 권면입니다.
오늘 본문 4:1절부터는, 신명기의 첫 번째 설교의 결말 부분입니다.
결말 부분에서 모세가 정말 피를 쏟는 권면을 백성들에게 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읽어보시면 "생명"에 관계된 것을 3번이나 반복합니다.
'너희가 살 것이요' 4:1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4:4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4:9
그러니까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산전수전 다 겪었던 모세가, 마지막으로 백성들을 떠나면서,
그러면서 무슨 말을 했겠어요?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을 했겠죠.
이제 조금의 시간만 지나고 나면, 모세는 못 갑니다. 더 이상 못 가고
이 백성들이 나를 떠나서, 강을 건너가서, 요단 서편 전쟁을 치러야 되는데
모세가 얼마나 걱정이 됐을까요?
마치 물가에 어린애들 내놓는 것처럼 참 걱정되지 않았겠어요?
지금까지 모세만 바라보고 따라왔던 사람들인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제 혼자 서야 되는데,
아마 모세의 마음 가운데 굉장히 많은 생각이 돌아갔을 것이고
그래서 모세의 첫 번째 설교의 마무리는, 모세가 피를 토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가 죽어도 이건 지켜야 돼! 너희가 죽더라도 이건 해야 돼!"
그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생존하는 날 동안에 (이렇게 하면) 너희가 살리라' *아래에 나옴
'너희가 숨이 붙어 있다면, 너희가 살아 있기만 하다면 이걸 해야 돼, 죽어도 이거 해야 돼'
이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모세가 그런 거 세 가지를 권면하면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그러니까 죽어도 너희가 지켜야 될 것, 죽어도 반드시 지켜야 될 것,
너희가 딴 거는 전부 다 놓치고 그럴지라도,
이건 절대로 놓치면 안 돼, 이건 놓치면 너희는 죽는 거야, 생사가 걸린 문제야!'
이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신4:1~43
이걸 글로써, 신명기에 기록해 놨으니까,
우리는 모세의 토로하는 심정을 잘 느낄 수 없지만,
아마 그때 직접 거기서 모세가 설교하는 걸 들었다면, 모세는 정말 피를 쏟았을 거예요.
'너희가 이거는 반드시 해야 돼, 너희가 이거 안 하면 죽어!
너희가 이거 안 하면 망하는 거야!' 그러면서 모세가 크게 세 가지를 당부하는데,
이 세 가지는 다 뭐냐면 죽고 사는 문제라는 거에요.
이건 그냥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라
이건 죽고 사는 문제야!
이렇게 권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뭐라고요?
요단 동편하고, 요단 서편이 다르다는 거예요.
요단 동편의 전쟁은, 그냥 실패하면
'아이쿠 실패했네, 다음에 다시 보완해서 잘해야지..' 뭐 이렇게 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면,
요단 서편 전쟁은, 그럴 수 있는 성격의 전쟁이 아니었어요.
이건 그냥 지면, 민족이 없어지고 마는, 멸절되는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생사를 건 전쟁이에요.
그래서 요단 동편 전쟁처럼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요단 서편 전쟁을 치르게 되면, 반드시 이겨야 되는 전쟁인데,
반드시 이기기 위해서는 뭘 해야 되는 거냐?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되는 거죠.
그래서 '너희가 이 전쟁에서 지면, 끝장 나는 전쟁이고,
민족이고 뭐고 전부 다 죽고 없어지고 끝나는 거야.
그래서 너희가 호흡이 붙어 있는 한 반드시 이거는 지켜야 돼!'
모세의 설교를 아마 저희가 직접 들었다면, 정말 모세는 이 세 가지를 피를 토하며
설교했을 거예요...
그 죽고 사는 문제 3 가지를 오늘 살펴보면서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저희에게도 똑같이 죽고 사는 문제일 겁니다.
왜냐하면 혈과 육의 전쟁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영적인 전쟁에 대한 얘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는 알고 있었어요. 요단서편 전쟁은 혈과 육으로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정탐꾼들이 뭐라 그랬습니까? 처음에 '이 사람들은이 아낙자손이고, 거인들이고,
성벽도 높고 도저히 못 이깁니다' 그랬던 전쟁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게, 혈과 육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닌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이 싸워주셔야만 이길 수 있는 전쟁인데,
그래서 거기에 대한 세 가지를 권면한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겠습니까? Yes.
이 세 가지를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이 생명의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1. 첫 번째로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지키라>는 거예요.
신4: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1
돌려 얘기하면, '이거 안 지키면 너희는 다 죽는다!' 이 얘기잖아요.
이게 여러분 히브리어를 이제 한국말로 번역하고 글로 쓰고 하다 보니까
원래 구어체의 어감이 많이 희석되어 버렸죠.
이 설교를 구어체로 우리가 직접 들었다면 "너희가 이거 안 하면, 올 킬! 다 죽는 거야!"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죠.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지켜야 되는데, :2
이거 안 하면 너희는 다 끝장나는 거야'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서편 전쟁을 앞두고 행해야 될 시프트업(고단 기어 변속)을 위한
모세의 첫 번째 권면은 뭐였냐면 말씀이에요.
<말씀의 깊이를 더해야 된다>는 거예요.
올해 저희 교회 표어가 쉬프트업 이고 *shift up (고단으로 변속)
또한 Go Deeper 인데, *더 깊이 들어가라
말씀에 깊게 들어가야 돼요.
말씀에 깊이를 더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 생사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절대적인 계명이라는 거예요.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죽고 사는 문제인 것입니다.
네 그래요. 여러분, 말씀을 지켜 사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 전체에 흥망을 결정하는 문제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는데,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범주에서 벗어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다 죽는 거지요.
이 전쟁은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인데,
하나님이 싸우시는 범주 바깥으로 도망가 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당연히 멸망하는 거죠.
하나님이 싸우시는 범주 안에 머물러야 돼요. 그래야만 삽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얼마나 비중있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그것을 죽고 사는 문제라고 얘기합니다.
자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살펴보죠.
▲1. 성경은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산다고 얘기합니다.
4:1절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말씀을 지키면 너희가 살 것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1차적으로 영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영이 살아야, 그다음에 마음도 살고, 육도 살고, 삶이 사는 거예요.
영이 죽으면, 그 사람은 숨을 쉬고 있을지 모르지만 죽은 거거든요.
일차적으로 영에 대한 말씀이지만, 사실은 우리 인생 전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찌 되었던 말씀은 일차적으로 영을 살려요. 말씀은 영의 양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신8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8:3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영이 말씀을 먹지 않으면, 우리 영이 죽는다는 거예요.
자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그럼 뭔가?
그것은 단순히 말씀을 듣고 읽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먹는다는 건 말씀을 준행한다는 거예요.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는 거예요.
내가 말씀에 순종할 때, 그 말씀이 내게 영의 양식이 됩니다. 그래서 내 영이 살아나요.
생명이 솟아나고, 평강과, 기쁨과, 생기와, 소망과, 열정이 내안에서 솟아납니다.
이게 생명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영이 살아야, 우리 마음도 살고, 우리 인생도 살아나게 됩니다.
그런데 반대로 말씀을 무시하고 어기면, 영이 죽어요.
영이 죽으면 어떻게 되냐면? 불안, 두려움, 죄책감, 염려, 짜증, 원망, 낙심, 절망,
그런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점령합니다.
이런 영혼이 정상적인 삶을 살리가 없고요. 이런 영혼이 행복할 일은 더더군다나 없습니다.
영의 생사는, 우리 인생의 충만과 황폐를 결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영이 살아야, 내 인생에 생명이 돌아오는 거고요.
내 영이 죽으면, 숨을 쉬고 있지만, 죽은 인생하고 다를 바가 없다는 거예요.
그 인생은 황폐하고, 그 인생은 짜증나고, 우울하고, 어둡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지키는 것은, 우리 인생의 생과 사를 가릅니다.
▲2. 말씀은 우리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 그 기업을 얻게합니다.
4:1절 다시 한번 읽읍시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말씀을 준행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업을 얻게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시려는 기업이 있어요.
데스티니라고 부르는데, 또는 (분)복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하여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있어요. 그게 복입니다.
복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복은 물론 좋은 것이죠.
그런데 내가 규정하고 정의하는 복이 따로 있고,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선물을 주시는 게 복이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복은 뭐냐면, 하나님이 주시는 걸 복이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나름대로 복에 대한 정의들이 있죠.
그래서 오복도 있고... 오복에 대한 정의도 사람마다 달라요.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내가 규정한) 복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것'을 복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걸 복이라고 부르는 거에요.
하나님은 물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죠.
우리 삶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세요.
자 반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복)을 누리지 못하는 걸, 저주라고 부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걸 받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을 저주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복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라는 것은,
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는 가이드라인이라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복에 이를 수 있는지...
복을 창조하신 분께서, 우리가 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말씀과 규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당연히 누리는 거죠.
그리고 그 복이 뭐예요?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업, 복, 하나님이 주시는 것, 이게 다 같은 말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지킬 때, 복을 누리게 되고
말씀을 지킬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들을 받아서 누리게 됩니다.
'말씀'은,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신 분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 그 복을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설명서예요.
그러므로 말씀을 따라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지는 4:6절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말씀을 지키는 것은, 이 땅을 사는 지혜고, 꼭 필요한 지식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삶을 창조하신 분이 우리에게 주신 설명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진 자는, 지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요.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지도가 없는 사람이에요. 누가 더 유리하겠어요?
자 우리가 보물섬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렇죠. 복을 찾아가는게, 보물찾기와 같잖아요.
보물을 찾아가는데, 한 사람은 지도를 갖고 있어요.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지도를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러면 누가 보물을 차지할 것 같으세요?
당연히 지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죠.
그래서 성경은 뭐라는 거예요? 말씀이 지혜고 지식이라는 거예요.
말씀 순종이 이 땅을 살아가는 지혜고, 이 땅을 살아가는 지식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로 바보같고 어리석은 사람은 뭐냐면
지도를 갖고 있는데, 지도대로 안 가는 사람이에요. 제 맘대로 가요.
'이쪽으로 가면 보물(복)이 있을 거야, 저쪽으로 가면 더 좋은게 있을 거야'
이거는 진짜 바보지요.
아니 기껏 지도를 손에 쥐어줬는데, 그걸 왜 안 보는 거예요?
기껏 지도를 줬더니, 왜 그대로 안 가냐고요?
그래서 여러분, 말씀을 따라가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가장 큰 지혜고, 가장 큰 지식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신명기 전체에 흐르는 가장 큰 주제 중에 하나인데,
뭐냐면 '말씀을 지키라'는 건데,다. 너희를 위해서라는 거예요.
신명기 어디를 찾아봐도 '나, 하나님을 위하여 말씀을 지키라' 이런 말씀은 없어요.
'하나님을 위하여 너희가 그의 말씀과 계명과 규례를 지켜라' 이런 말은 한 번도 안 나와요.
다 뭐라고 나오냐면 '너희를 위하여 지켜라, 순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 그리하면 너희가 생존하리라'
아 너희를 위해서 하라는 거죠...
아니 하나님이, 여러분이 그 말씀 지키는 거하고, 안 지키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그 말씀을 지키든지 말든지, 하나님이 무슨 상관이 있냐고요?
그러니까 이게 여러분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다는 거예요.
지도(성경말씀)를 주신 거예요.
'이 지도대로 따라 가!, 이 지도대로만 따라가면 거기 복이 있어!
그럼 그 복을 다 차지하고 누려!'
아 그런데 바보같이 지도를 가지고도, 그대로 따라가지 않은다 말이에요.
이게 제일 큰 바보 같은 일 아니겠습니까.
지도가 없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어요. 지도가 없으니까 분명히 방황할 겁니다.
그런데 지도를 가진 사람이, 지도 대로 가지 않는다는 것은, 동탄할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모세가 피를 토하는 거예요.
'너희는 제발 그 말씀을 준행해! 제발 그대로만 따라가! 말씀 그대로만 지켜!
그러면 그 기업을 차지하게 될 거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말씀을 지키는 것은 100%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그런 겁니다.
▲3.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
4:2절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빼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고 그대로 지키라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어떤 유혹이 있냐면, 지키기는 지키는데, 선택적으로 지키고 싶은 유혹이 있어요.
이게 아마 여러분 전부에게 있을 거예요.
내 마음에 드는 말씀만 기억하고 지키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은 무시하는 것!
그래서 여러분이 큐티 말씀 묵상하실 때도,
편의주의적으로 형광펜 칠해져 있는 그 구절만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젊었을 때 제가 보던 성경책들을 가끔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럼 재밌어요.
거기 형광펜으로 칠한 구절들이 있거든요.
△근데 한 번은 제가 대학생 때 읽었던 성경책을, 이렇게 다시 볼 기회가 있었어요.
이렇게 보는데, 형광펜들이 열심히 거기 칠해져 있더라고요.
근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내용들만,
다 형광펜으로 줄쳐 놨더라고요.
그리고 진짜 중요한 말씀에는, 하나도 형광펜이 안 쳐져 있더라고요.
물론 뭐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게 없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다 똑같이 중요 한데,
이제 대학생 때로부터 한 3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말씀을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진 거겠지요.
'아 이게 진짜 중요한 구절인데...' 지금은 보이는데,
그 당시 대학생 때는 제가 못 알아봤던 거죠.
하여간 공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그거잖아요.
시험에 안 나오는 것만 줄 치면서 공부하죠. 그것도 정확하게.
제가 과거에 성경을 그러고 읽고 있었던 거예요.
이렇게 해서는, 말씀을 지키는 것에 깊이가 더해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한 두 구절만 뽑아서, 그것만 밑줄 긋고, 그것만 암송하고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말씀의 무게는 다 똑같다는 거예요.
한두 구절 위에 여러분의 신앙을 세우면 아주 위험합니다.
성경 전체 위에 여러분의 신앙이 세워져야지,
특정 한 두 구절 위에 여러분 신앙이 세워지는 건 참 위험해요.
마귀의 전략이 뭐라고요? Half Truth입니다.
완전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섞인 진리를 보여 주는 거예요. 전체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를 어렵게 하는 뒤틀린 기독교들이 있죠.
인본주의, 기복신앙, 번영신학, 자유주의, 기독교 페미니즘 등,
뭔가 좀 뒤틀려진 것들이 있거든요.
이 뒤틀린 기독교들을 보면, 성경에 없는 얘기를 하는게 아니에요.
나름 다 성경에 있는 얘기들을 하는데, 전체를 보는게 아니지요.
어떤 한 두 구절만 보는 거지요.
그러면 이렇게 이상한 뒤틀려진 모습들이 나오게 돼요.
저는 여러분들의 삶이,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온전한 성경 위에 세워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려면 일차적으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성경을 많이 읽어야 되겠죠.
성경을 이렇게 뽑아서 한두 구절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일차적으로 전체를 많이 읽으셔야 돼요.
2024년에는 성경을 정말 많이 읽으시는 한 해가 되시기를 도전하고 축복합니다.
크리스천이 말이에요. 평생 살아가면서 성경 일독을 한 번도 안 했다?
그거 부끄러워 하셔야 됩니다. 통탄 하셔야 됩니다. 복을 다 차버리고 있는 거예요.
아니, 성경 일독도 안 하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이제까지 해 왔던 거죠?
그냥 교회에 나와서, 목사님이 설교로 해주시는 말씀만 듣고 있었던 거죠.
물론 목사님이 최선을 다해서 설교를 하지만,
아니 설교 시간에 성경 말씀 전체를 어떻게 다 전하겠습니까?
그 중에 한두 구절만 뽑아서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이 말씀을 가감 없이 순종하려면 4:2
여러분이 직접 성경을 읽으셔야 돼요. 여러분이 읽으셔야 돼요.
아직 성경일독을 한 번도 안 하신 분이 있다면 회개하시고,
올해는 적어도 1독, 2독, 3독하는 해가 되시기를 도전합니다.
아니 성경은 안 읽고 어떻게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됩니까?
말씀을 지키라고 했는데, 그게 뭔지도 몰라요.
아니 그래서 어떻게 우리가 복을 누릴 수 있겠어요?
말씀을 지키라고 했는데, 그 말씀이 뭔지도 모르니까요.
여러분 이거는 뭐 그냥 저주받은 인생인 거예요. 저주받은 인생,
저주가 뭐라 그랬죠? '복을 못 누리는 것'
이건 복을 누릴 가능성이 애시당초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말씀을 일단 많이 읽으십시오.
적어도 여러분이 금년에 1독, 2독, 3독,
어느 장로님이 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자기 나이만큼은 통독을 해야 된다고 하셨어요.
나이가 50이면 신구약을 50번은 읽었어야 되고,
나이가 30이면 30번을 읽었어야 되고,
그런데 성경을 한 번을 안 읽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합니까?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말씀을 많이 읽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요단 동편의 때에 사용해야 될 시프트업은 말씀의 깊이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요단 서편 전쟁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의 깊이를 더한다고 하는 건 뭐냐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달라지는 거예요.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달라지는 건데, 그 열쇠는 뭐냐면
말씀을 준행하고, 말씀을 지키는 것이... 말씀의 깊이를 더하는 거예요.
성경을 단순히 읽고 많이 아는 것이, 깊이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냥 깊이를 더하기 위한 당연한 준비 과정인 거고요,
말씀의 깊이를 더한다고 하는 것은 뭐냐면, 그 말씀을 순종하는 거예요.
우리는 순종을 통해서, 그 말씀에 이해가 깊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아세요? 말씀은 철저하게 그 말씀을 순종해 보려고 한 사람만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깊게 이해하게 돼요. 이거는 왕도가 없어요.
그러니까 말씀은,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 막 그걸 고민하는 시간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렇게 해서 말씀의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오직 그 말씀을 순종할 때, 체험적으로 그 말씀의 깊이를 깨닫게 되는 거죠.
(*운전이나 수영도 마찬가지죠. 아무리 이론을 가르쳐도, 실전이 안 되면, 모르는 겁니다.)
그 말씀으로 끙끙 씨름을 하면서, '아 이 말씀이 이런 뜻이었구나'
그러면서 말씀에 깊이가 더해지는 거예요. 말씀을 비로소 '알게' 되는 거예요. 주1)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안다'라는 것을 자꾸 '지식적인 앎'으로 생각을 해요.
머리로 아는 거, 정보를 아는 거.. 이런 걸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성경 자체가 얘기하는 '안다'는 것과는 많이 다른 거예요.
성경 자체가 얘기하는 '안다'는 것은, 성경을 경험해 봐서 아는 거예요.
시편에 '맛보아 알지어다'라는 말씀도 있는데,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음식이 있다고 할 때, 아무리 설명해도 이론으로는 알 수가 없죠.
그걸 맛을 봐야,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비로소 그 맛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죠.
그것을 경험해 보는게 뭐예요? 순종하는 거죠. 그 말씀 그대로 하라는 거예요.
가감하지 말고 준행하라는 거예요. 이해가 안 돼도, 한번 순종해 보라는 거예요.
실천해보면 이해가 된다는 거예요.
성경 말씀은, 그렇게 이해될 때가 참 많아요.
이게 무슨 말씀인지 전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될 때라도
'에라 모르겠다. 한번 그대로 해 보자... 아 이런 말씀이었구나!'
이렇게 되는 경우가 참 많아요. 아니 대부분이 그렇게 이해되는 거예요. 대부분 말씀이!
△어떤 분들은 그러세요. '아 말씀 묵상하는게 어렵다...'
이 방법대로 한번 해 보세요. 제가 비결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날 규티 말씀은 이렇게 읽으시고요. 그 중에 순종해야 될 것들만 뽑아 보세요.
그리고 하루 종일 그거 순종 한번 해보세요.
그러면 저녁에 해 떨어질 때쯤 '아 그런 말씀이었구나!' 이게 나올 겁니다.
물론 하루만에 안 되는 것도 있어요.
어떤 건 며칠씩, 어떤 건 막 몇 달씩, 어떤 건 해를 넘기면서 고민해야 되는 구절도 있는데,
하여간 일단 그 말씀에 순종해 보세요.
다 머리 굴려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고 그러지 말고, (무식하게) 순종해 보세요.
뭐 다 머리로, 상식으로 이해가 안 돼도 괜찮아요.
그냥 하지 말라 그랬으면 안 하고, 하라 그랬으면 하고... 그대로 한번 해 보세요.
그 말씀 그대로 순종해 보세요.
그러면 저녁이 되기 전에 '아~' 하고 깨닫는 소리가 나올 겁니다.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구나!' 이제 거기부터 시작을 해서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더 깊게 이해될 겁니다.
기억하세요. 여러분, 말씀은 순종하려고 할 때, 이해가 깊어지는 거예요.
'깊이를 더하라 Go Deeper '고 하는 말씀은 그러므로
더 학자적으로 막 연구하라는 의미 이전에,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거예요.
가감 없이 순종하라는 거예요.
말씀에서 하라 그랬으면, 하고 하지 말라 그랬으면 안 하고,
한번 독하게 마음먹고 한번 순종해 보세요.
그러면 말씀을 다 순종할 수 없는 나를, 물론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깊이가 달라질 거예요. 분명히 말씀에 대한 깊이가 달라져요.
△제 삶에도 보면, 말씀에 대한 깊이가 확 달라졌던 순간이 있었거든요.
30대 초반이었던 것 같은데, 말씀에 대한 깊이가 확 달라졌던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가 제가 말씀에 눈을 뜨게 되었던 때라고도 할 수 있죠.
그때 제 좌우명이 뭐였냐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씀대로 산다'
어쩌면 율법주의적일 수도 있었는데, 하여간 '말씀 그대로 순종한다!'
근데 해보니까 안 되더라고요.
안 되는데...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귀한 교훈이었고요.
(*완벽주의자가 되지는 않지만, 성숙하고 장성한 믿음이 되는 것은 사실이에요.
성경은 완벽주의를 요구하지 않고, 성숙한, 장성한, 온전한, 성장해가는 믿음을 요구하죠.)
그러니까 그 다음에 뭐가 찾아오냐 하면, 은혜가 뭔지가 찾아오더라고요.
'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게 이런 뜻이구나'
'은혜가 없으면 나는 안 되는 사람이구나' 이게 그냥 막 깊은 데서부터 올라와요.
이거 안 해본 사람은요. 절대로 이거 모릅니다.
'그냥 성경이 죄인이라고 하니까 죄인인가 보다...' 이러죠.
자기가 진짜 죄인이라고 하는 걸, 뼛속부터 고백하게 안 돼요. 해본 사람만 알아요.
해본 사람만 '아~ 내가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이구나'
그러면서 '은혜'라는 말씀(신학)에 깊이가 확 더해지게 되죠. 그런 식이에요.
그래서 이걸 해보셔야 돼요.
여러분, '내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말씀은 한 마디도 어기지 않겠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시도해 보셔야 돼요.
말씀은 단순히 참고서가 아닙니다.
말씀은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준행하라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먼저는 영이 살고, 이어서 육이) 사는 길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그것이 약속하신 땅, 그 기업을 얻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을 지켜야 되는 이유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저와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하나님을 위해서' 말씀을 지키라는 명령은 없어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거룩하라는 말씀은 있어요.
그런데 말씀을 지키는 것 자체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런 거지,
그 말씀을 지키는게,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게 아니라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이, 나의 유익을 위해서 말씀을 지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야 복을 누리는 거예요.
그래서 2024년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다 누리는 귀한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모세의 두 번째 권면은 뭐냐면, 여호와께 붙어 있으라는 거예요.
그래야 산다는 거예요. '다 생존하였느니라' :4
4:3~4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멸망시키셨으되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3절의 '바알브올 사건'이란, 발람의 꾀에 넘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인들하고 행음하게 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염병을 보내셔서 24,000명이 죽임을 당한 사건입니다.
민25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근데 뭐라 그러시냐면
'염병이 창궐하는 가운데도 여호와께 붙어 있던 사람은 다 살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염병이 창궐하면, 아무나 다 걸리는 거 아니에요?
전염병이 도는데 말이에요. 뭐 어떤 사람은 걸리고, 어떤 사람은 안 걸리고 그러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모세가 뭐라 그러냐면 '여호와께 붙어 있었던 사람은 다 생존했다'는 거예요. :4
이 말씀을 여러분이 믿음으로 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뭐냐면, 여호와께 붙어 있는 거예요.
▲1. 요단 서편에서도, 이스라엘이 사는 길은 뭐냐면, 여호와께 붙어 있는 거예요.
어떻게 붙어있느냐면 <기도>로 붙어있습니다.
여호와께 붙어 있으십시오. 연약해도 붙어 있고요. 실수해도 붙어 있고,
넘어져도 붙어 있고, 죄를 지어도 붙어 있고, 하여간 붙어 있으세요.
'넘어져도 십자가 앞으로 넘어지라'는 말이 있잖아요.
'여호와를 떠나지 마십시오' 그러면 삽니다. 그러면 생존해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을 떠나고 멀어집니다.
욕심에 이끌려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기도 하고, 세상에 정신이 팔려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죄에 빠져서 멀어지기도 하고, 실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기도 합니다.
또 뭐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의 팔려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저 게을러서 하나님을 멀리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헌신이나 순종이 부담돼서 하나님을 일부러 피하기도 합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유가 어떻든지간에 상황이 어떻든지간에, 실수를 했어도, 죄를 지었어도
하여간 여호와께 붙어 있으라는 거에요. 그래야 생존합니다. 아멘!
예를 들어서 죄를 짓거나 실수를 하면,
그럼 이제 하나님 앞에 나가기가 껄끄럽습니다. 왜냐면 죄책감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벼룩도 낯짝이 있지...' 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게 되면, 이제 기도의 자리에 나가기도 껄끄럽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싶고, 이런 거죠.
'뭐 이런 내가 주님 앞에 나가서 될까?'
뭐 자기가 위선자 같이 느껴지고 그렇거든요.
죄를 짓고 그다음에 바로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해 보십시오.
정말 위선자 같은 생각이 막 들죠.
'넌 도대체 뭐냐 응?' 내 안에서 막 양심의 소리가 울리는 것 같은데,
이게 양심의 소리가 아니라, 마귀의 소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못 나가게 하려는 마귀의 공작이죠.
하여간 여러분, 죄를 짓던 실수를 하던 뭘 하든지간에
우리가 해야 될 자세는, 안면에 (철판을) 까는 거예요.
그냥 안면에 (철판을) 까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거예요.
*상황은 다르지만, 예레미야는 쇠기둥, 놋성벽으로 (철판깔고) 예언했습니다. 렘1:18
이거를 믿음이라 그러는 거예요. 아멘!
여러분 나올만 해서 나가는 거면, 그게 무슨 은혜예요?
나올 수 없는 존재인데 나오도록 해주셨으니까 은혜인 거죠.
그러니까 어디서부터이 착각이 생기냐 하면,
말씀을 지키려고 안 해봤기 때문에 착각이 생겨요.
말씀을 지키려고 진짜 목숨 걸고 시도해 본 사람은, 자기 능력으론 안 된다는 거 알아요.
'난 안 되는구나. 정말 안 되는구나. 나는 그냥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
이걸 알거든요.
그래서 이 은혜를 알게 된 사람은, 죄를 짓는다고 해서 당황하지 않죠.
'뭐 내가 뼛속까지 죄인인데...' 하면서 그냥 철면피가 됩니다.
그냥 철면피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거에요.
'하나님 오늘 또 넘어졌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예, 어제도 넘어졌지만 오늘도 또 넘어졌습니다.'
뭐 상관없어요. 하여간 그렇게 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지금 '여호와께 붙어있으면 살고, 여호와를 떠나지 말라 :4'는 주제를 살피는 중)
△사람들이 착각하는게 뭐냐면,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 이제 안 나가고 싶거든요.
멀리하고... 죄를 이렇게 하여간 해결하고 나가고 싶어요.
이게 얼마나 큰 착각이냐면, 내가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얘기거든요. 자기가 죄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교만이에요. 교만 죄는 언제만 해결될 수 있냐면
하나님께 나가야만 해결될 수 있는 거예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도, 내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나에겐 없어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나가야 용서를 받지,
하나님께 안 나가고 혼자 해결하겠다... 그러면 죄를 용서해 줄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용서를 받을 거에요?
그리고 성령께서 나를 도와주셔야, 그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건데,
하나님 앞에 안 나가면 도대체 무슨 능력으로 죄를 극복할 거며...
이게 말도 안 되는 얘기거든요. 말도 안 되는 얘긴데,
이게 다 '자기 의 self- righteousness' 에서 나온 거고,
사람이 얼마나 죄인인지 몰라서 나오는 착각입니다. 교만이에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고전적인 예화가 있죠. 초등학생 애가 집안에서 사고를 쳤어요.
아빠가 '그거 절대 만지면 안 돼' 했던, 아빠가 가장 아끼는 도자기를 깼단 말이죠.
그러면 이제 아이는 패닉이 돼 가지고, 아빠를 피하고 도망가잖아요.
그렇게 해서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이 문제를 진짜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면
그냥 아빠한테 뛰어가서 안겨야 돼요. 이렇게 해야지 해결이 되는 거죠.
그걸 계속 피해가지고 해결이 안 되고요.
그냥 가장 불쌍한 얼굴을 하고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아빠 품을 파고드는거죠.
그러면 그냥 끝나는 건데...
근데 이거를 계속 도망다니면요, 뭐 10년이 지나도 해결이 안 됩니다.
(*용서의 확신을, 성령이 내 마음에 주실 때까지,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해야 된다는 뜻)
그러니까 이게 '붙어 있으라'는 거예요. :4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어요.
그러니까 죄를 지어도, 그냥 하나님 안에 붙어 있어야 돼요.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나아가야 되고, 실수를 해도 하나님께 나아가야 되고
하여간 계속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산다는 거예요.
하여간 우리는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살고, 떨어지는 순간 죽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죽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가 끊임없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끊임없이 정죄하는 거예요...
주님으로부터 떨어지고 멀어지라는 거죠.
물론 하나님께서 그 죄를 그냥 슬그머니 넘어가진 않으실 수 있어요.
그 죄를 회개하길 원하세요. 그래서 징계 discipline 하시죠.
죄의 결과 consequence of the sin 를 주실 때도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을 용서 못 하셔서 그러는게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러시는 거죠.
계속 거기에 빠져 있으면 복을 못 누리니까,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징계도 하시고, 매도 대시고, 야단치고 하시는 거죠.
용서는 이미 다 하셨어요. 그래서 회개할 때는 반드시 용서를 받게 되어 있어요.
문제는, 주님은 용서하셔도, 내 마음에 '사죄의 확신'이 안 생길 때죠.
그때는 그 확신이 생길 때까지 계속 회개하는 겁니다. 몇 달이라도...
△자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게 여호와께 붙어있는 걸까요?"
4:7절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가까이 있게 된다는 거죠.
하나님은 아주 친절하게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십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 붙어 있다고 하는 건 뭐냐면
기도의 자리를 사수한다는 뜻이에요. 기도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게 여호와께 붙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 더 아주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기도의 자리를 놓지 않는 사람은, 다 생존할 거라는 거예요.
기도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사람!
여러분 우리가 뭐 죄를 짓거나 실수하거나 하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게 뭔지 아십니까?
기도의 자리를 떠나게 돼요. 이거는 예외 없어요.
이것은 영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석하고 똑같아요. 기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지만,
죄를 지으면, 마치 자석처럼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밀어내요.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해야 될게 뭐냐면, 의지를 발휘해야 되는 거예요.
의지를 발휘해서 그 상황 가운데서도, 기도의 자리를 의지적으로 지키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호와께 붙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의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자기 의지를 발휘해서, 그래도 기도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거예요. 아멘!
2024년 한 해 동안은 여러분 기도의 자리를 정말 생명처럼 지키십시오.
결단하고 기도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기도의 자리를 마련하세요. 기도실에 나오셔도 좋고, 아니면 집에다 마련하시든지
하여간 기도의 자리를 마련하세요.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지 마세요.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그 자리를 지키세요. 할렐루야!
그것이 여호와께 붙어 있는 겁니다. 아주 구체적인 거예요.
내가 정한 기도의 자리를 정말 생명처럼 지키는 것,
그랬을 때 우리 영적인 생명이 지켜진다는 거예요.
이건 영적인 과학입니다.
이건 영적인 과학이라서, 속일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고 하여간 없어요.
기도의 자리를 피하는 순간, 하나님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여기 그렇게 나와 있잖아요. '기도할 때마다 우리를 가까이 하신다.'
기도하지 않으면 멀어진다.는 거예요.
이건 속일 수도 없고, 이건 정말 과학입니다.
▲2. 여호와께 붙어 있는 두 번째 비결은 <예배>예요.
4:10~11절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예배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대면하는 거죠.
여호와께 붙어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께 붙어 있는 방법은 예배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배의 자리를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 선조들이 말이에요. 정말 미련하리만치 주일 성수를 생명처럼 지켰던 것은
율법적인 열심만은 아닙니다.
(조선 선교 초기에) 주일 성수를 너무 율법적으로 하니까
이제 후대에 와서는 '너무 율법적이지 않으냐, 주일 성수가 신앙의 전부는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이제 그 반론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뭐 그 반론의 이유는 이해가 됩니다.
신자들이 주일 성수는 생명처럼 하는데, 그런데 신자들이 주중에 말씀대로는 안 사니까...
그러니까 '그게 뭐냐? 도대체 신앙생활이 주일성수, 술 담배 안 하는 것,
그런 율법주의적인게 신앙생활이냐?' 하면서 반박하죠.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예수를 닮아가는 것인데
교인들이 주일 성수는 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주중에 그게 안 되니까,
주일 성수가 자꾸 공격을 받아왔던 거죠.
그런데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50년 전에, 주일성수를 생명처럼 지키려고 했던 것은
사실은 여호와께 붙어 있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거였죠.
여호와께 붙어 있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거예요.
그 때 당시 믿음의 선배들이 살아보니까 안 거예요.
그때 당시는 뭐 오늘하고는 또 다르지 않습니까?
개인 예배라는 개념도 별로 없었고, 좋은 신앙 서적도 별로 없었고,
유튜브는 물론 없었고... 그러니까 일주일 내내 예배 말고는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받을 경로가 없었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주일성수를 안 하면, 영이 죽어가는 것을 안 거예요.
'아, 예배를 빼먹으면 영이 죽는구나'
그래서 발버둥을 친 거예요. '어떻게든지 예배는 지키자!'
막 발버둥을 친 것이 이제 주일성수 신앙이 된 겁니다.
저는 오늘날 저희가 율법주의적인 주일 성수는 아닐지라도,
예배에 대한 발버둥이 있어야 된다고 믿어요.
그래야 여호와께 붙어 있게 되는 거예요. 예배에 대한 발버둥이 있어야 돼요.
'내가 예배의 자리는 어떻게든지 지킨다'
직장 근무시간 때문에, 예배가 끝날 무렵에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예배를 귀하게 여기는 발버둥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또 '설교만 들으면' 예배를 지켰다고 생각을 하는 거는 아니죠.
여러분, 예배의 본질은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정말 어쩔 수 없이 내가 예배에 늦었고
막 헤드 슬라이딩 하면서 예배 끝나기 직전에 들어오더라도
'거기에 얼마나 큰 임재가 있을까?' 생각해 보세요.
그 하나님을 대면하고자 하는 갈망 위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임재를 부어주실까요?
이게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여호와께 붙어 있는 거죠.
그저 편안하게만 신앙생활하려고 하고,
오늘은 늦었으니까 유튜브,
오늘은 추우니까 유튜브,
오늘은 아이가 자니까 유튜브,
유튜브가 하나님이십니까?
아 물론 병상이라든지,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으로 유튜브 예배드리는 거는, 하나님도 엄청 축복하실 거예요.
그 주일성수와, 예배의 자리를 안 놓치겠다고 발버둥쳤던 우리 믿음의 선조들,
그분들께 하나님은, 정말 임재해주시고 만나주시는 축복을 주셨다고 봐요.
당시에 정말 무식했고, 별로 가진 것도 없었고...
그래도 하나님께 예배를 지키겠다고 해서, 막 새벽같이 나오고,
주일날은 막 무슨 세상 일을 하면 정말 큰일 나는 것처럼 살고...
그 마음을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 받으셨을까요... 그래서 한국을 축복하신 거 아니에요.
저는 여호와께 붙어 있는 것은, 예배를 지키려는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그 마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실 때, 내 영이 살 거예요.
▲3. 세 번째로 여호와께 붙어 있는 것은, 당연히 <공동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은
그 몸에 붙어 있는 거지요. 몸에 붙어 있으십시오.
실망스러워도 붙어 있고, 마음이 상해도 붙어 있고, 하여간 악착같이 붙어 있으십시오.
그러면 죽지 않고 살 거예요. 몸에서 떨어지면, 미안하지만 늑대밥이 되는 겁니다.
여호와께 붙어 있는 한 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세 번째로 죽고 사는 문제는 <마음을 지키라>는 거예요.
4: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생존하는 날 동안에'
'숨이 붙어 있는 한' 이란 뜻이죠.
모세의 피튀기는 말투가 느껴지셔야 돼요.
생존하는 날 동안에 조심하라는 거예요. '이건 반드시 지켜야 돼!' 그게 뭐예요?
마음을 지키라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기억하라는 거에요.
마음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는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까지 조심하라는 것은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자꾸 우리 마음을 다른 데로 팔리게 하는 거예요.
다른 것에 우리 마음이 팔려가게 하는 거예요.
'아이폰 15가 나왔대요'
그런 말을 들으면, 거기로 마음이 팔려가고...
계속 마음이 팔려가는 거... 이걸 모세가 안 거예요.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여호와 앞에 항상 그 마음을 지키라는 거에요.
항상 여호와를 너희 마음 가운데 두라는 거예요.
여러분, 기억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한번 들여다 보세요.
먹든지 마시는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는데,
뭐 직장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이 일에 팔려 가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일을 하는 동안에도, 그 배후엔 뭐가 있어야 돼요?
이걸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
이 일을 통해서 기뻐하실 하나님의 기쁨,
하여간 계속 마음을 그렇게 길들여가야 돼요.
이게 돼요, 된다고요. 훈련이 안 됐기 때문에 그렇지,
마음을 훈련시키면 돼요.
무엇을 하든지간에 100% 그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100% 하나님을 생각하며 일을 할 수 있어요. 100%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이걸 여러분 계속 훈련하세요.
마음에 계속 훈련하셔서, 무엇을 하든지 내 마음에 하나님이 떠나지 않도록,
사람을 만날 때도, 먹을 때도, 잘 때도, 옷을 입을
때도 하여간 무엇을 할 때도 하나님이 떠나시지 않도록
그렇게 내 마음을 계속 지켜 가라는 거예요. 이거는 훈련이고, 그렇게 길들여야 돼요.
우리 마음은 야생마처럼 죄에 길들어져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이게 처음에 안 됩니다.
처음엔 당연히 힘들게 느껴지고, 어떨 때는 '아 이건 안 되는 거야'
이렇게 포기하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된단 말이에요.
하루 종일 여호와 하나님을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면서도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요. 이걸 여러분 계속 훈련하세요.
그랬을 때 그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
주1)
히브리적으로 '안다'라는 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야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인포메이션'을 아는 것은, 그걸 '안다' 라고 하지 않아요.
그건 헬라적인 아는 것이고, 히브리적으로 아는 것은 다 '체험적인' 거예요.
경험해 봐서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을 체험해 보고, 경험해 봐야... 말씀을 알게 된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태어난 이후로 계속 헬라 문화권에서 자라나서
우리 사회의 모든 교육문화 시스템이 다 헬라적인 가치관 위에 세워진 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