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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종이나 영광스러운 자

LNCK 2024. 4. 3. 15:49

예수, 종이나 영광스러운 자!ㅣ주일설교 ㅣ2024-03-24 - YouTube

 

예수, 종이나 영광스러운 자           빌2:1~11            2024.03.24.

 

※예수님의 일생이 그러하셨지만, 특히 종려주일을 지나면서

예수님은 더욱 겸손, 섬김, 사랑, 순종.. 그 집약체인 십자가로 묵묵히 향하셨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사람들의 환호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요.

그러자 하나님은 결국, 그런 낮아지신 예수님을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귀감입니다.. *주제

 

◑여러분, 주님을 본받아  겸손과 순종의 삶을 살기를 진정 원하십니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 사건을 기억하는 날이 종려주일이죠. Palm Sunday
왜 이것을 기억해야 하는 걸까요? 

유대인들이 그 당시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했습니다. 정말로 그들이 그렇게 외쳤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칭송했을 때, 
바로 그때 예수님이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하여 나아가셨어요.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칭송을 받는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이 가장 낮은 자리, 십자가 죽음의 자리까지 순종하는 
그 순종과 겸손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억하고 예배하는 것이죠. 

겸손과 헌신, 사랑과 인내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진짜 우리가, 오늘 종려주일 질문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 순종과, 헌신, 겸손의 가치를 누리며 살고 싶어하는가? 
그것을 정말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겸손과 순종의 삶을 살기를 진정 원하십니까? 
겸손과 순종의 길이,
주님이 걸어가신 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앎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생명의 길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그렇게 다른 길을 걷고 싶은 걸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높이 드러내는 삶,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탁월함을 추구하는 삶이 
미덕인 그런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 노력으로 경주해서 인정받고, 
그리고 주어지는 삶 가운데에 성공을 누리며 살라고.. 사회가 가르칩니다. 

성도님들 중에도 어떤 분들은 이런 얘기를 하시죠. 
'내가 성실하게 노력해서 얻고 누리며 사는 건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사회에서 성도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는 거예요. 
지금 경쟁사회에서, 내가 인정받고, 노력하고, 앞서 나가고 있다면, 
그 누군가는 뒤로 밀려나, 아파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거죠. 

여러분, 그렇다면 서로가 서로를 귀히 여기고, 서로의 삶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삶의 의미를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은, 
그럼 이 세상에선 불가능한 건가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전혀 다른 삶, 겸손과 순종으로 자유를 누리며 살았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에 관하여 증언을 합니다. 

입술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정말 그것을 진정 누렸기 때문에, 그가 증거하는 거예요. 
빌2:3~4절을 보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여러분, 이와 같은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삶... 정말 가능하다고 여기십니까, 믿어지십니까? 
인류의 역사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높이고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낸 사람들을 인정해 주고 높이 평가하는 
그런 역사의 시간들이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영웅이 등장하기를 기대했어요. 
탁월한 자들이 이 사회를 다스려 주기를 바랬습니다. 

'영웅이 걷는 길'이란 뭐냐? 온갖 장애물과 역경을 극복해내고 
잠재력을 발휘해서, 탁월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이 세상을 이끄는 거죠. 
그러나 그 이면에는 무서운 것이 숨어 있었어요. 우열의 논리가 숨어 있었던 겁니다. 

그 당시에 사회적인 기초를 이루는 기준은, 서열/ 지위/ 계급이었어요. 
그리스 인들은 탁월함과 위대함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가지 놓친 것은, 
거기에는 결코 '겸손'이란 덕목이 담겨 있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삶의 겉모습에 온통 집중했습니다.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바뀌어 버리고, 
부유함이 섬김의 힘이 아니라 과소비로 바뀌고, 
온갖 외적인 것, 말하는 태도, 걷는 모습까지도 
자기 자신을 (높이, 위대하게) 드러냈는데 다 집중했습니다. 

여러분 아마 로마 시대를 묘사한 옛날 모습을 영화에서 보신 적이 있으실 거예요. 
로마에서의 복장은 지위를 상징했다고 합니다

자유인은 모자를 쓸 수 있었어요. 
성인 남자가 14살 이후부터는 '토가'라는 옷을 입을 수 있었는데
이 토가라는 옷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참 특이합니다. 

'토가라는 옷은, 매우 불편한 옷이었지만, 자신을 드러내기에는 좋은 복장이었다.' 
이런 기록이 있어요. 뭘 말합니까? 

엄청 불편한 옷이에요. 근데 자기를 내세우기에 좋으니까 입는 겁니다. 
그러고 그것에 만족했다는 거예요. 

권력자인 원로원 의원들은, 토가뿐 아니라, 자주색 띠를 띄었다고 합니다. 
근데 그 밑의 기사단들 같은 사람들은, 토가와 금가락찌는 낄 수 있었는데 
자주색 띠는 띄면 안 됐다고 합니다. 왜 그렇죠? 철저히 구분하는 거예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예수님이 등장하셨어요. 
예수님은, 이와는 전혀 다른 삶의 지향점을 바라보게 이끌어 주셨어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신자들에게 경고할 때, 이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금가락를 끼고 아름다운 옷 입은 사람들에게는 잘해주고,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을 천대해서는 안 된다.'  약2:2~3

그런데 왜 이런 얘기를 했습니까? 
정말 그 당시는,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대하는 일이 빈번했다는 거죠.

당시 사회에서, 법을 적용할 때도 
사회적 지위가 반영되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어요. 
'귀족의 법이 따로 있고, 평민의 법이 따로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로마시민은 십자가 형에 처해질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가장 수치스러운 처형이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에게는 십자가형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나는 토가를 입는 로마 시민이다' 이렇게 소개하지 않고, 
그의 편지마다 그는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 했어요

이것이 얼마나 그 당시 사회적으로는, 자살행위와도 같은 것이었는지를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십자가, 겸손한 삶, 순종의 삶... 이런 거 너무 싫어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 당시 사회 문화적인 분위기를, 정확히 반영한 그런 기록이에요. 

유대 사람들은, 아주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신21: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예수님을 통해 일어난 새로운 사람들, 흐름들

 

그런데 여러분, 그 사회 가운데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는 종, 
마치 세상 사람들이 보면 '노예와 같은, 예수라는 종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예요. 
'예수'라는 이 종의 삶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가 
우리의 정체성을 진짜 알아야 돼요. 
우리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에요. 종을 따르는 자들이에요.

여러분, 종의 삶을 살기로 한 그리스도인들이 등장하면서 
전혀 다른 삶의 이야기들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말만 그렇게 한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종으로 살아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놀라운 비밀을 가르치셨어요. 

'너희 중에 크고자 하거든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 
으뜸이 되고 싶니? 종이 먼저 되어야 해! 
인자가 온 것은 섬기려 온 거야! 더 나아가 생명을 주기 위해 온 것이다.' 

예수님은, 영웅의 길을 말하지 않고, 성도가 걸어가야 할 (종의) 길을 가르치셨어요. 
예수님이 뭘 가르치신 겁니까? 

'경쟁이 중요한 거 아니야. 
모든 존재는 본래적으로 타고난 가치를 가지고 있어.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것 챙기며 사는 삶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거야 
그런 사회에서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니? 

이제는 이웃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도록 부름 받은 사람 존재가 
바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때 진짜 기쁨이 있어!' 이렇게 예수님이 가르치신 거예요. 

막10: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마음은 분명하셨어요.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게 
진짜 삶의 기쁨을 누리는거다... 우리는 그렇게 창조가 되었다.' 그 얘기를 하세요. 

그러니 여러분, 내 뜻, 내 고집 아니라 
내 삶을 선하신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수 있다면, 
그 다음에 진짜 기쁨을 누리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께 완전히 삶을 맡긴 사람은 어떻게 살까요? 
내 삶은 주님이 책임지시니까, 이제 이웃을 섬기는게 너무 기쁨이 되는 거예요. 
내 삶은 주께 맡겼고, 이제는 주의 뜻대로 섬기는 기쁨을 만끽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시고, 
그리고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시기 바로 전날 저녁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셨어요. 그리고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기 시작하셨어요. 
바로 그때 베드로가, 정말 베드로답게 이야기를 했어요. 

'어떻게 어떻게 주님께서, 선생님께서 제 발을 씻기십니까? 제 발은 못 씻기십니다.' 
베드로 답죠.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세요. 

요13:8절에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섬기며 살아야 한다!' 이거를 정말 가르치고 싶으셨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십니다.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른 예수님의 모습을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락없이 종의 모습이에요. 

예수님은 목수로 자라나셨습니다. 육체노동을 하며 자라나신 분이에요. 
그 당시의 영웅의 삶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발을 씻겨주는 일은, 손님 접대하는 일이죠. 

또 유대교 전통에서는 종교적으로 정결 예식을 하는 것과도 연관이 됩니다. 
그 일을 다 누가 준비했을까요? 종이 준비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종이 해야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빌2:6~7절에는 이렇게 기록이 돼 있어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도 바울이 증언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시는 분이신데 
스스로 종의 모습을 택하신 이 사건!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삶에 이 일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종으로 섬기고, 사랑하고, 순종으로 나아가신 그 일이 
예수님의 삶에 끊임없이 이루어졌어요. 

한 생명을 향한 끝없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배신하고 배반할 유다의 발도 씻겨 주셨어요. 우리 모두의 말을 씻겨 주신 거죠. 

그리고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법적 지위에 있어서도 
완전히 바닥 중에 바닥인 십자가의 죽을 자, 
정말로 마지막까지 내려가신 그곳, 더 내려갈 곳이 없는 십자가에서의 죽음, 
이걸 주님께서 그거 향해 달려가셨어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어요. 오늘은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는 종려주일입니다. 

빌2: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진짜 놀랍죠. 

믿어지지 않는 것이, 이렇게 낮고, 천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십자가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스스로 입성하셨다는 거예요.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나아가셨고, 누구도 찾아올 수 없는 순종의 자리에 나아가셨어요. 
왜 그러신 겁니까? 

여러분 한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삶! 

그런 삶은, 세상적으로 말하면 '비효율적'이라고 말할 거예요. 
아마 세상은 '어떻게 한 사람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버리겠는가? 그건 낭비지..'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것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사역은 한 사람, 한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거룩한 낭비

제가 목회를 해 오는 과정 중에 한 가지 배웠던 것이 있습니다. 
리더의 가정을 세우는 과정으로 <리더십 아카데미>를 1년간 계속 운영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서는 봄학기, 가을학기 1년을 운영해야 되어서 
많은 강사님들이 필요했고, 
또 리더십으로 세워지는 가정을 섬기기 위해, 멘토 역할을 해 주실 가정들이 필요했고, 

또 이 '아카데미 리더십 과정'을 섬기는 제자훈련국 멤버들이 
시간과 재정, 헌신을 엄청나게 쏟아부어야 했던 1년 동안의 과정이에요. 

그런데 어느 해에, 중직 가정을 세워야 하는 이 과정 중에 
한 가정만이 후보로 세워졌어요. 그러니까 고민이 생겼습니다. 

'이 한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1년 내내 이 모든 자원과 에너지를 투입해서 
이거를 운영해야 되나? 내년으로 밀어서 그냥 한꺼번에 내년 후보들과 합쳐서 해야 되나?'

그러다가 교회에서 결정을 함께 하기를, '한 가정을 위해서 하자. 한 가정을 위해서!' 
그래서 봄학기 가을학기에 강사님들 다 오시고, 
멘토로 섬기는 가정들이 다 헌신하고,
자원과 에너지 다 투입하고... 그래서 1년 동안 그 과정을 운영했어요. 
진짜 '거룩한 낭비'를 한 거죠. 

그리고 이 한 가정은, 정말 굳건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의 리더로 
너무나 귀하게 세워졌어요. 왜 그랬을까요? 

주님의 마음이 부어졌으니까! 
한 사람을 향한 주님의 모든 생명을 내어주신 그 일을, 
조금이나마 경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한 가정이 너무나 귀하게 세워진 것을 봤습니다. 

▲여러분 끊임없이 '거룩한 낭비'를 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누가 가장 귀한 자일까요? 
그 당시 사회문화 가운데 권력과 지위를 가진 자들, 
그들도 주님의 눈에는 귀한 자였겠지만, 

당시 무시당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자에게, 그가 한 사람이라도, 
주님은 너무나 큰 관심을 보이셨어요. 

예수님의 삶과 사역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모습이 뭘까요? 
그 당시 사회적으로 아무 감동도 줄 수 없었던 
바로 낮은 자리에 있는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 전부를 내어준 것이, 너무나 감동적인 사건인 것이죠. 

요13:13~14절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아멘! 

예수님께서 스스로 섬김의 그 본을 보이셨어요. 
그리고 스스로 섬김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다음에 
'너희도 이처럼 하는게 옳다' 
그리고 종으로서의 삶을 십자가에서 마무리 하시고, 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짐과 섬김의 여파

▲1 따르는 사람들이 형성됨
그 이후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종의 길, 아무도 안 알아주는 길, 
그리고 세상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길이었죠. 
근데 그 길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심지어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예수의 삶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교회 공동체가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인 거죠.

주님을 높이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땅에서 살기를 원하는 이들, 살아내는 이들이 생겨난 겁니다. 

종으로 사셔서, 아무도 예수를 알아주지 않았는데 
근데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고, 예배하고, 
엄청난 역전이 벌어진 거예요. 

빌2:10~11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이죠.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거예요. 

▲2 사회의 변혁
여러분 그 당시 로마사회는,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분류해야 할지' 난감해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믿고 살아온 가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영웅과 강자를 높이고 인정하는 그런 로마 사회와 달리, 
그리스도인들이 철저하게 이웃을 섬기고, 다른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삶을 살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주류 사회에 틈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예요. 
당시에 문화가, 사회적인 분위기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도행전의 한 사건을 주목해 보기를 바라는데 
로마 식민지 빌립보에서 바울이 체포되어서, 엄청 심하게 매를 맞았던 장면입니다. 

석방된 후에야 바울이 스스로 로마 시민임을 밝혀요. 
근데 그 말을 듣고, 관리들이 엄청 두려워했습니다. 사과까지 했어요. 

자 그러면, 아마 우리라면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바울이 매 맞기 전에 로마시민이라고 말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그러면 매 안 맞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도 바울은 세상이 준 특권을 따라,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삶을 오래 전에 포기했던 사람입니다. 
오히려 믿음 안에서 형제자매된 이들이 겪게 될 고난을, 그가 기억했기 때문이에요. 

고난을 면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바울은이 곤경 가운데서도 고통스럽지만 
영광스러운 기회를 본 거예요. 
그것은 바로 스스로 자기를 낮추는 일이었어요. 


▲마치는 말

롬12:16절에는 사도바울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여러분 정말 우리 한국교회 안에, 또한 저희 교회 가운데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 예수님 걸어가신 길을 걷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를 향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이 계세요. 
그 자리는 생명까지도 순순히 내어놓는 순종의 자리였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참 미덕이고 칭찬받을 만한 지금 사회에서 
스스로 낮은 자리에서 섬긴다... 겸손과 온유와 순종으로 산다... 
근데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핵심적인 가치요, 믿음임을 놓치지 않으시기를 축복합니다. 

호주 맥쿼리 대학이라는 곳에서 연구를 한 가지를 했는데 
'예수의 삶이 그 당시에 사회에 가치 구조를 뒤바꾸어 놓았다' 
그렇게 평가를 한 거예요. 

아주 간단한 결론 같은데 뭐라고, 기록을 하냐면 
"겸손의 가치를 좋게 평가하는 현대 서구의 정서는 
유대 기독교 세계관이, 유럽에 미친 독특한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것은 종교적 결론이 아니다. 이것은 순전히 역사적인 조사 결과이다." 

이 이야기는 뭡니까? 사회가 역사적으로 변화된 것을 추적해 가다 보니까 
예수라는 자의 삶이, 그 당시뿐 아니라, 서구의 가치관 삶의 방향을 뒤집어 놨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강자, 영웅만을 바라보는 것이 귀한 줄 알았는데, 
'세상 사람들이 겸손, 섬김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삶도 이미 바꿔 놓으셨어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게 하시고, 그리고 기쁨으로 그 길을 걷게 하세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종의 삶을 사신 것 같은데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시고 가르치시는 삶을 사셨어요. 

종이지만 영광스러운 왕으로,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셨어요. 섬김으로 통치하셨어요. 

여러분, 주님은 겸손과 순종, 사랑과 섬김으로 걸을 수 있는 
'그 좁은 길, 그 길로 가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도달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그 좁은 길에서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알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은 '좁은 길'이 참 비참한 길이라고 말할 거예요. 

그러나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기 때문에, 
그 좁은 길은 가장 기쁨이 넘치는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죄의 종노릇하도록 시켜요. 
우리를 마음대로 부려 먹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벧전2:9절에도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어요. 
계20:6절에서는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할 거라'고 했어요. 

여러분 우리가 누군지를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에요. 
예수님은 종이셨지만, 또한 영광스러운 왕의 삶을 사신 분, 사랑으로 통치하신 분이에요. 
우리가 그 삶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게 진짜 기쁨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요.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으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세상을 이미 십자가에서 이기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부활의 영광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세요.

여러분, 우리가 그 낮은 자리 내려가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울 것이 없어요. 

오늘 말씀을 봐도 '모든 무릎을 예수님 앞에 꿇게 하셨어요.' 
결국 우리가 종인 것 같으나, 영광스러운 자입니다. 왕의 자녀, 왕족들입니다.

고난도 감당하지만, 그 우리에게 부어질 영광의 자리는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와 함께 동행하는, 주의 사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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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걱정이 없는 사람

가슴에 꿈을 품고 있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은 비록 실패와 낙심으로 힘들어해도 
곧 일어나 꿈을 향해 힘차게 달려갈 테니까. 

그 마음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은 비록 쓸쓸하고 외로워도 
그 마음의 사랑으로 곧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게 될 테니까. 

그 마음이 진실한 사람은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은 비록 손해를 보고 답답할 것 같아도 
그 마음의 진실로 곧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게 될 테니까. 

그 손길이 부지런한 사람은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은 비록 힘들어 보여도 
그 성실함으로 곧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하게 될 테니까. 

누구 앞에서나 겸손한 사람은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은 비록 초라하고 부족한 것 같아도 
그의 겸손이 곧 그를 높여 귀한 사람이 되게 할 테니까. 

늘 얼굴이 밝고 웃음이 많은 사람은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은 비록 가볍게 보여도 
곧 그 웃음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어 그가 행복한 세상의 중심이 될 테니까.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비록 어리석게 보여도 
그 마음의 작은 기쁨들로 곧 행복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테니까. 

항상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은 비록 아쉽고 아깝게 보여도 
양보 받은 사람들의 고마운 마음이 더 큰 양보와 존경을 불러올 테니까. 

매사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은 비록 속도 없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여도 
그의 감사하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각박한 마음을 녹여줄 테니까. 


▲'자기 사랑'에 대한 참회
주님 지금 제가 절망하는 것은
저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입니다
저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제가 받아야 할 영광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인가를 상실했지만
그로인해 누려야 할 저의 기쁨이 떠나간 것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자신을 학대하고 있지만
주님앞에서 저를 내려놓은 겸손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다는 실망감으로
무기력해져 있습니다

이제까지 달려 온 정상을 향한 길에서
갑자기 마비가 온 것은
저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자신감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꽂아놓은 깃발이 나부끼는 자기 공화국에서
저는 보좌에 앉아 그 속에서 군림하기를 원했습니다

기도를 했으나.. 저를 세우기 위함이요
봉사를 했으나.. 제가 남보다 선행을 했다는 자기만족이요
교제를 나누웠으나.. 제가 인정받고 있다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을 했으나.. 그곳에도 저의 행복이 우선시되었고
축복을 했으나.. 상대보다 저를 더 우위에 두고 싶어 했으며
이 땅이 아니면, 하늘에서조차 보상받고 싶어 했습니다

나의 주님,
그토록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께서 저의 낡은 옷을 벗기시고,
묵은 짐들을 정리할 때마다

감사하기는커녕 비통해하고, 고뇌했으며
당신을 원망했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기보다는
날마다 힘겨운 잔들이 옮겨지기를 구하였습니다

오직 십자가 없는 면류관만을
믿음의 기적으로 사모했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을 주셨고
사랑할 수 있는 감성을 주셨으나

이 모든 능력을 당신의 보좌로 가져가기 못했기에
나의 하늘은 먹구름이 끼었고
나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기를 저는 주님을 향한 순교자로 여겨졌고
세상에서 일방적으로 당한 피해자로 여겨졌습니다

지나친 열정과 강박증에 가까운 집착 후에는
자기비하, 열등감, 무력증에 시달렸으니

내가 앓고 있는 우울증과 무력감의 중병은
자기사랑으로 인한 부패된 죄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자기 환상’과 ‘자기 확신’을 불어넣으면서   
‘네 믿은 대로 될 지어야!’ 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자기와의 사랑을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왕국에 이르는 
절망의 나락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
이 세상에서 완전한 상실은 없습니다.
이는 애초에 제 자신도 주님의 것이었고
제가 가진 것은,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벗기시고, 낮추시고, 방향을 돌리심은
입히시고, 높이시고, 온전한 새 길을 주시기 위함이십니다.

우리의 완전한 행복은 나를 부인하는 그곳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주님만 바라는 그곳에만.. 온전한 자유가 있습니다
당신을 구하는 그 곳에만.. 참된 기쁨이 있고+
당신의 영광을 소원하는 그 곳에만..
주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희락이 있나이다

진정한 겸손은
내가 사라진 보좌위에
오직 주께서 왕이 되셔서
저를 다스림 속에서 존재하나이다

주님을 최고로 사랑하지 않고서
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이는 당신만이 저의 진정한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