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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

LNCK 2024. 4. 20. 19:05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물질과 성공

 

2024-04-07 주일예배 //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 - YouTube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        눅16:9~18      2024-04-07

◑도입, 눅16장의 개요

누가복음 16장은 3파트로 되어 있습니다.  
1) 1~8절 첫 번째 비유가 나오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2) 9~18절까지 두 번째 파트... 오늘 본문이고요. '지극히 작은 것(물질)에 충성하라'
3) 19~31절까지 또 비유가 등장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본문은 두 비유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져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둘 다 '물질 사용'에 관한 비유죠.

전자는, 물질 사용을 잘 사용한 경우이고,  *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눅62강
후자는, 물질 사용을 잘못 사용한 경우입니다.  *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64강
그래서 본문 눅16:9~18절도, '물질 사용에 관한 교훈' 입니다.  눅63강

 

샌드위치에 비유하면, 본문은 패티(고기) 부분에 해당하죠. 핵심 교훈입니다.

전자의 비유와, 후자의 비유는 패티를 감싸고 있는 빵에 해당하죠.

그러니 눅16장 전체는, '물질 사용'에 관한 교훈인 것이죠.

패티에 해당하는 본문 눅16:8~18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9~13절까지는 첫 번째 비유(*불의한 청지기) 의 결론적인 가르침이고, 
14~18절까지는 두 번째 비유(*부자와 나사로)를 준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의 두 대지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9~13절은, 첫 번째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결론입니다.  

▲16: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동을 했을 때,  
주인이 해고를 시키게 되고, 그때 이 청지기는  
주인의 한없는 너그러움과 또 자비, 긍휼을 기억하고, 거기에 자기 인생을 맡기기로 결심합니다.  

  ☞눅16:1~8절 설교 보기 rfcdrfcd.tistory.com/15981568  

그 가운데서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부채를 줄여주는 일들을 하는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꾸중하는 대신에, 칭찬을 했습니다. 16:1~8

예수님은이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이 불의한 청지기가 했던 것처럼
불의의 제물로, 한없는 너그러움과 자비와 긍휼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불의의 제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우리가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최선의 길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물질의 긍정적인 사용법이죠.

설교 후에 어느 성도님이 '불의의 재물이 무슨 뜻입니까? 돈은 나쁜(불의한) 것입니까?'
그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불의한 재물'은, 돈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 돈, 재물은 중립적인 가치로 나옵니다. 

그게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되는 선한 도구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과 나를 멀어지게 만드는 아주 파괴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돈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그러니까 '불의한 재물'이란 표현은, 재물 자체가 악한 것이라고 가르치는게 아니고,
불의한 재물은 소위 '공금 유용, 횡령, 사기' 등 악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을 나타내는 표현도 아닙니다. 

그러면 '불의의 재물'은,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서 보면
돈이 가질 수 있는 위험성, 그러니까 어떤 위험성이 있냐면  
재물이 하나님과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보다도 더 의지할 대상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돈 속에 담겨져 있죠.

그래서 돈은 귀한 것이지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표현이 '불의의 제물'이란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위험한 재물'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쓰면 너무 귀하지만 
파괴직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것이 영원한 미래를 위한 준비이다...'  

 

그래서 눅16장 후반에 부정적인 하나의 사례가 나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결국 지옥에 가게 되고 
그가 아브라함한테 도움을 요청했을 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6:25 '너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다. 
이것을 기억해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부자는 결국  그 재물이 없어졌을 때, 그는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아브라함이 설명할 때,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괴로움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지만, 너는 괴로움을 받는다.' 
결국 부자가 했던 것은 무엇이죠? 

자기의 많은 재물들을 가지고, (가난한) 친구들을 사귀질 못했습니다. 
자기 자신만 즐겁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미래는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됐습니다.  주1)

16:10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여기 '지극히 작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재물입니다.

앞서, 눅16장 전체가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이며,

샌드위치의 빵과 그 속의 패티(고기)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것'은 당연히 '물질'을 뜻하죠. 

 

우리가 볼 때는 돈이 전부인 것 같지만, 
우리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재물)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할 거고, 
지극히 작은 것(재물)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 

여러분 저는 청년들을 오랫동안 섬겼기 때문에, 
청년들과 같이 성경 공부하다 보면, 막 은혜를 받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죠. 

'목사님, 제가 나중에 부자가 되면, 또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그때 정말 사람들을 잘 섬기겠습니다'

근데 여러분,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네가 가진 재물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많은 부를 가질 수도 있고, 또 높은 지위를 가질 수도 있지만 
그때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돈도 많지 않고, 지위도 평범한 지금의 때에, 
그때 지극히 작은 것(재물)에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 
나중에 큰 것에도 충성할 수 있다... 이렇게 예수님은 교훈하셨습니다.  

▲11절 말씀에는 또 다른 표현을 사용하시는데,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이 재물은 위험한 것입니다.
정말 선하게도 사용할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위험성이 정말 큰 것이죠.

'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않으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참된 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계된 것, 영원한 것, 
하나님이 맡기신 영광스러운 사명, 직분.. 이런 것들이 다 포함됩니다. 

부가의문문입니다. 맡기지 않는다는 거죠.  정말 맡길 수가 없다는 거죠. 

▲12절에도 같은 맥락으로 말씀합니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않으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여기에 '남의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내가 돈을 갖고 있고, 내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은 남의 것이야, 네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재물은 하나님이 네게 맡기신 거야' 라는 뜻이죠.

'너희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영원한 것입니다. 사명, 기업, 하나님 나라의 유산, 내 몫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영원한 것, 그 영원한 것 누가 너희한테 주겠느냐? 

여러분  성경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수고해서 모은 돈이지만, 이 돈은 '남의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결국 인간은, 모든 것을 다 놓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음과 대면하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놓고 떠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입게 될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놓고 가게 되죠. 주먹도 꽉 쥐고 가지 않고, 손을 펴고 갑니다.

그런 뜻에서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입니다. 
거기에 충성하지 않으면(잘 사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영원히 참된 것을 너희의 것으로 줄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13절에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리시죠.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3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 
결국 두 가지입니다. 

-재물이 나의 주인이고, 하나님은 재물을 위한 이용의 도구로 이용하거나,
-재물을,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재물은 헬라어로 '맘몬'입니다. 중의적인 뜻이 있는데,

   하나는 그저 부, 재산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맘몬 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거죠.

우리는 '하나님과 돈(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가 없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10~13절까지 말씀은 
'지극히 작은 것'인 재물, 이것은 '불의의 재물', 위험한 것입니다. 
이 재물은 또 '남의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히 참된 것을 허락하십니다.

눅12:3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 
이게 바로 친구를 만드는 거죠.  

그리고 물질과 관련해서 하나님께 충성하면, 
'그것은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드는 것이다. 
그 배낭은 하늘의 둔 바 다함이 없는, 즉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보물이다.  
거기에는 도둑도, 좀이 먹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작은 재물에 충성할 때 
하나님은 영원히 참된 것을 우리에게 맡기신다'라고 가르치셨죠. 

 

△여러분, 이 말씀을 통해 우리한테 주시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내가 받은 재물, 뭐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남의 것(:12)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이기 때문에, 충성은 무엇이겠습니까? 
충성은, 맡기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사용하는 겁니다. 

맡기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사용하는 이런 삶을 사는 것이 
미래를 위한 최선의 길이다... 이렇게 주님이 설교를 하셨어요.

(적용) 저도 지난 한 주간 동안,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목회자로서 '나는  재물을 바르게 잘 쓰고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목회자가 되고, 또  성도님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됐는데,
성도님들이 목회자들에게  좋은 기억들도 많지만,  
부정적인 기억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과 대화를 나눌 때, 제일 많이 언급된게 뭔가 하면, 돈 문제였습니다. 
돈과 관련된 문제 때문에, 목회자들에게 시험을 받았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단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섬길 때, 돈과 관련되는 문제로, 
성도님들께 절대로 걸림돌이 되는 길을 가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제가 교회 재정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교회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해 주시기를,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에 사무장, 또 재정을 결제하시는 분들이 다 있는데 
제가 노력하는 거는, 제가 재정을 사용하고 집행하는 방식이 
그분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목사'라는 존재가 성도님들한테는 귀한 존재이지만, 
적지 않은 성도님들이 목회자를 만나고 관계를 가질 때 
부담을 가지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뭐 심방을 간다 그러면, 한편으론 좋지만, 그때부터 고민하시는 거죠. 
'뭐 음식은 어떻게 준비해야 되고, 선물은 뭘 어떻게 준비해야 되나?' 
제가 그런 고민들을 성도님들로부터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청년들을 오랫동안 섬겼기 때문에 
청년들과 있을 때는 그런 고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청년들은, 항상 만나면, 목회자인 제가 섬기고, 또 대접을 하고, 먹이는 시간을 보내다가,
제가 어르신들을 섬기면서, 제가 대접을 받을 때...

저한테도 혼란스러웠던 순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소박한 기도 제목은 뭔가 하면,
'목사라는 제 존재가, 저를 만나는, 또 저와 함께 교제하는 성도들에게 
절대 경제적인 부담이 되지 않도록, 경제적인 짐이 되지 않는 그런 사역자가 되겠다'
이런 기도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과거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어느 교회 여전도회 회계 장부를 봤는데, 
회계장부에 무슨 내용이 주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지출 항목이 있는데, 신년 목사님 선물, 구정 목사님 선물,  
어버이날 목사님 선물, 스승의 날 목사님 선물, 교회 설립 기념일 목사님 선물, 생일 선물,  
그 항목을 보니까 여전도회에서 쓰는 재정의 거의 90%가  
거의 담임목사 및 부목사님 선물비로 다 나가더라는 거죠. 

제가  그거 보고 충격을 받아서, 제가 사실은 
우리 교회는 제가 '준 조세'를 없애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담임목사, 또는 부목사들과 관계 될 수 있는 
선물 비용들을, 우리 교회에서는 최소화 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성도님들이 사랑으로 하실 수 있지만, 
목회자와 성도들의 관계가, 이런 경제적인 부담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되지 않을 때, 
우리들이 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같은 마음으로 헌신을 할 수 있는 거죠. 

저는 목회자니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성도님들은 직장인으로서, 청지기로서 '물질, 재물' 관계로 각자 다른 적용을 하실 수 있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남의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데 사용해서, 
여러분들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투자가 되셔야 된다는 거죠.   

20년 전에 어느 성직자가 쓴 내용이지만, 의미는 있습니다.

그 분은, 성도님들이 자기를 찾아와서 '식사대접을 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할 때는, 

메뉴를 딱 2개를 정해 놓았다고 합니다. '김치찌개 아니면 된장찌개'

 

가장 큰 목적은, 대접하시는 구역장이나 선교회장님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고,

또한 가난한 성도도 성직자를 대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랍니다.

 

성직자가 비싼 음식으로만 대접을 받으면,

가난한 성도들은, 성직자와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메뉴가 '된장찌개, 김치찌개' 이렇게만 딱 정해 놓으니까,

 

시장에서 콩나물 파는 할머니도, 우편물 택배 배달하는 할아버지도

얼마든지 성직자를 식사대접 할 수 있고, 초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안 비싸니까요!

참 그대로 따라서 실천하기는 힘들지만, 그런 마음을 먹는 것 자체로.. 벌써 잘 하는 것입니다.

 

◑14~18절은, 바리새인들에게 주시는 말씀      -이하 정리 예정-

저는 14절이 너무 충격이었는데 
여러분 14절부터 대상이 바뀝니다. 

1~13절은, 1절을 보시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14절부터는, 바리새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됩니다.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근데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성경에 직접적으로 묘사한 경우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바로 위에 말씀(직전 구절)이 무엇이죠?
'누구라도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13

연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서 비웃었습니다.  :14

'비웃었다'는 것은 
'코를 찡그렸다'는 겁니다. 
즉 몸으로 하는 표현이죠. 코를 찡그리면서 '무슨 괴상한 소리 하고 있네' 했던 거죠.

제가 이 구절에 왜 충격을 받았느냐? 
만약 14절이 바리새인이 아니고, 사두개인들을 지칭한 말씀이라면,
사두개인들을 보고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했으면, 제가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 그룹으로서
가장 많은 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관리 감독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성전세를 거두고
또한 여러가지 제사와 관련된 물건을 팔고, 돈도 바뀌주면서... 당시에 상당한 부자들이었죠.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금 그릇, 은 그릇을 사용했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두개인들을 일컬어서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그러면 
뭐 놀랄 게 없습니다. '제사장들은 타락하기 마련이지...' 이렇게 생각하고 쉽게 넘어갔을 거예요.

근데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두고서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바리새인들은 누구냐? 제사장은 아니고, 평신도 지도자들인데,
이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경건'입니다. 소위 경건하기로 소문나고,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삶의 특징은 무엇이냐? 율법에 대한 헌신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대해서 전적으로 헌신되어 있고, 
삶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발버둥 쳤던 사람들, 이들은 금욕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 돈과 가장 초연하게 살 수 있는 사람, 
돈보다는 하나님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첫 번째 그룹이 바리새인들이었죠. 

근데 예수님은 이야기하는 중 '바리새인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다'
조금 더 문자적으로 표현하면 '그들은 돈의 친구들이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슷하게 서기관들도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20:47 


참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소위 내로남불이 되는 거죠.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고...' 

여러분 당시 바리새인들이, 사람들 앞에서는 얼마나 돈에 대해서 초연한 척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이야기하시는 거죠. '너희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친구가 아니라, 너희들은 돈의 친구들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고,  
그들은 돈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야 되고,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다 콧웃음 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시대 분위기는 어땠는가 하면, 
부는 무엇인가 하면, 의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복)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래서 그들은 (신학적으로도) 소위 하나님을 섬기면서
잘 섬겼다는 표시로, 부자가 되어서 그걸 증명해 보여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경멸하고, 
오히려 돈을 사방에서 긁어모아야 하는 입장이었던 거죠.  

그들은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다' 

▲1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옳은 사람이야,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자기 자신을 입증시켰던 사람들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부가 그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잖아?' 
그래서 스스로 옳다 하고, 
사람 중에 그들은 높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죠. 참 무서운 말씀이죠. 
'그러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신다' :15

사람들이 아무리 그들을 칭찬하고, 
내 자신이 나를 정당화 시켜 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나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누가 하시느냐? 하나님이 하시죠.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신다'  

마음과 달리, 마음은 제쳐놓고, 겉으로만 사람 앞에 의롭다 라고 
그렇게 스스로 주장하고, 그렇게 인정받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다' 

'미움을 받는다' 문자적으로 하면 '하나님의 코끝을 찡그리게 하는 것이다'
그냥 단순하게 표현하면 '하나님 앞에 악취다' 
향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악취가 나는 자들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우리에게 주는, 또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귀한 도전은 무엇입니까?
더러워졌던 우리 마음을 다시 한번 살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데, 우리가 마음을 살필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수많은 슬로건들, 수많은 사건 사고들,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는 수많은 것들이 있는데 

여러분 정작 우리는, 마음을 살필 수 있는 여유와 힘이 없습니다. 
근데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비로소 우리 속에, 
이 육체 속에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이 진정한 내 자아가 누군지를 나타내 보여준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돈의 친구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친구들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정말 불의한 재물까지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께 향기나는 인생이 되셔야 된다는 거죠. 

▲16~17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6절부터는 갑자기 대화의 초점이 옮겨지는데 '율법과 선지자'라는 표현이 등장을 합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뜻합니다.

그러면 결국 구약은 무엇이냐? 
'구약은 요한의 때까지다.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고 있다' 

그리로 몰려가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거는 상식적으로 기억하시면 좋은데, 구약과 신약을 설명할 때 
이런 신학적 용어를 사용합니다. "약속 과 성취" 

구약은 한마디로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자가 오실 것이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실 것이다.. 라는 약속입니다. 

바로 구약은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실 구원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럼 신약은, 그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거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지금도 확장되어져 가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17절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이냐?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어진 이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복음의 시대,
이 시대에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시대에도 율법은 유효한가? 아니면 율법은 폐지된 것인가? 

마5:17~18절에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죠.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나는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온전하게 성취하러 왔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17절 말씀을 한번 보시죠.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한 획'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입니다. 글자와 글자를 구분하는 작은 획, 작은 선 
그걸 나타내는 단어인데,  
이런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울 것이다..'    

결국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에도, 
바로 율법,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영원한 가치,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신약의 말씀뿐만 아니라, 구약의 말씀까지도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정말 말씀을 귀하게 생각하고, 그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연구하여 
여러분 그 말씀 속에 무엇이 나타나 있느냐? 
구약 속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게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어떻게 계획하셨고, 어떻게 이루어 가고 계시고, 
그분이 꿈꾸시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구약 성경 속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을 알 때,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고, 우주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속에 두 가지 양극단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 충만'이라는 이름하에서  
성경 연구, 성경을 공부하는 것을 뭔가 부차적인 것으로 가볍게 생각하는 겁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할머니를 따라서 기도원 같은 데를 많이 다녔거든요. 
거기 갔는데, 제가  헷갈렸던게 뭔가 하면 
설교 시간에는, 거기 참석자들이 거의 다 주무셨어요. 

주무시다가 설교가 끝나고 찬송가 부를 때, 박수 치면서 깨어나고,
그 후에 기도하면... 갑자기 그 장소가 떠나갈 듯한.. 그냥 불과 같은 분위기로 변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릴 때였으니까, 저는 이렇게 이해했어요.
'설교시간은 쉬는 시간이구나.. 준비시간이구나.
그리고 메인 게임은 찬송가 후에 기도시간 때 벌어지는구나...' 
저는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요즘도 그런 경향이 조금은 있습니다.
청년들 집회 때 보면, 청년들은 (기도가 아니라) 찬양할 때 난리납니다. 
완전히 뛰고 난리 나는데... 찬양 마치고 설교시간이 되면, 또 다들 잡니다. 
애들이 찬양하느라 힘이 빠져서 그러가 봐요.

여러분 많은 분들이 '내 속에 성령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다 가르치시는데 
뭐가 성경공부가 필요하냐?' 이런 생각을 아직도 가지신 분들이 계십니다. 

또 반대 극단은 무엇이죠? '아는 것만큼 성장한다'는 거죠. 
우리들의 인식과 지식에, 하나님의 역사를 가두는 정반대의 한계가 있습니다. 
*감정주의와 이성주의의 양극단

여러분,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이 우리에게 임했는데, 가장 달라진 것이 무엇이죠? 
법이 없어진게 아니라.. 그 율법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 법이 내 머릿속으로 알았다면,
이제 신약에  성령님이 오셔서, 그 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머리에 지식으로 들어갔던 말씀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즉 우리 영의 새겨지게 만드는 것! 
이게 구약과 신약의 차이죠.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주의 깊게 살피고, 연구하고 
그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을, 우리가 알아서 
거기에 우리들 자신을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되는 거죠.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셔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에도 
여전히 율법은 '천지가 없어지는 것보다  율법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유효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살피고, 묵상하고, 
내 삶에 끊임없이 적용, 순종하는 노력들을...  우리들이 감당해야 된다는 거죠.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18절은 갑자기  
이혼과 재혼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을 합니다. 

왜 이 이야기가 지금 이렇게 한 구절로 등장하는가요? 
학자들은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하죠. 

앞에 율법과 선지자, 그 가르침은, 천지가 없어져도 그 가르침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예수님께서 한 가지 예를 드시는 거죠. 
 
16: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말씀도 천지가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앞부분은 이혼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들에게 이혼을 금하셨습니다. 

뒷부분은 재혼입니다. 
버림 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입니다. 
그래서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금하셨어요.     주2)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을 충성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고,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살피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돈의 친구가 아니고, 나의 친구야!' 라는 평가를 받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 즉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귀하게 여기고,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마음에 새겨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고, 
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워진 우리들의 가정이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가를 수 없다는 걸 기억하되 

우리들의 삶에 이미 (이혼의) 아픔이 일어났다면 
하나님 앞에 오래 머물러 앉아서  
우리 모든 성도들의 삶에,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놀라운 역사들이 펼쳐져서 
하나님 앞에 향기나는 삶으로 세워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주1) 
그렇지만 제물을 잘 사용한 긍정적인 예는, 

마25:34~40절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한테 
'너희는 복 받을 자들이다. 천국을 상속받아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요? 
40절을 보면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진실로 이르는데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여러분 천국을 상속받는, 오른편 양 편에 선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가지고,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친구들을 사귀었죠. 
그 친구들이 그를 천국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문 9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이 물질을 가지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쓰지 말고, 
친구들을 사귀는데,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사용하는 것이 
우리들의 영원한 미래를 위한 최선의 삶이다... 라고 교훈을 하셨습니다. 

 

 

주2)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 예수님이 금하셨어요.

그럼 아마 성도님들 중에, 지금 뒷골 땡기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이 말씀은 정말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말씀이 가졌던 의미를 알려면, 마19:3절부터 보겠습니다.
여기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아내를 버리는 것, 이혼하는게 옳습니까?'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 
여러분 고대에는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혼은 남자만 할 수가 있었어요. 
여자분들은 기분 나쁘시겠지만, 2천년 전이니까, 옛날에는 이혼은 남자만 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자분들이 남편을 버릴 수 있었나요? 
모든 토지권, 경제권들이 다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래서 이혼은 남자만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리새인들이, '사람이' 이거는 남성 대명사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으면,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아내를 버리는 옳습니까?' 이렇게 질문했죠. 

마19:4절은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놀랍게도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을 하십니다. 

마19:4~5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 말씀은 창2:24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말씀을 그대로 예수님께서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인용하신 다음에 설명하시죠. 
마19:6~7절에 
'봐라, 창세기 말씀이 보여주는게 뭐냐?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한 몸이 되는 거니까, 둘이 아니요 한 몸이 되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반응입니다. 
마19:7 '그러면 왜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신24:1절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위 구절에서 '수치'는 문맥을 통해서 볼 때, 음행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결혼했는데 보니까 그 여인이 이미 음행한 죄를 범한게 발견이 되면, 
즉 수치되는 일이 발견이 되면 이혼증서를 써서 내보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수치'의 의미가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요리를 못하면, 남편에게 수치이고 기쁨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이혼증서를 써서 내보내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뭐 또 아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아요. 그냥 이것도 '수치'된다고 해석해서,
이혼증서를 써서 내보내는 거죠.  

성격이 안 좋아도, 그걸 수치로 여기고, 아내를 내보냈던 거죠.
신명기 24:1절 말씀을 남용하고, 오용한 것입니다. 잘못 적용한 거죠.
자기 구미에 맞게, 말씀을 이용한 것입니다.  

소위 신학자들이, 남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이혼할 수 있도록, 
칼자루를 쥐어 준 겁니다. 

8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렇게 해석을 하십니다. 분명히 신24:1절 말씀입니다. 
근데 예수님이 이렇게 해석하시죠. 

마19:8 '(왜 모세가 이런 말씀을 줬느냐?)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의 버림을 허락했지만 
(그 다음 말이 중요해요) 본래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쉬운 이혼을 정당화시켜 준 것은 신명기의 말씀인데 
예수님께서는 원래 창조 때에 가지셨던 하나님의 가정을 향한 계획, 
그것에 대해서 밝히 말씀하시면서 
'너희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은 했지만, 그것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니다.'  

마19:9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의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왜요? 부부가 하나되었는데 
'수치'에 대한 잘못된 해석 때문에 
이혼과 재혼이 쉽게 진행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겁니다. 

지금 누가복음의 말씀은 '음행의 이유'라는 것까지도 빼버렸습니다. 
그래서 눅16:18절에 보면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결국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결혼에 대한 신성함입니다. 

이런 말 자체가 이제는 고리타분한 옛시대의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냐? 
'가정은 신성한 것이고, 결혼을 통해 두 사람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음행한 이유라는 것 까지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 엄격합니다)
여러분, 아내를 버리는 것은 간음하는 것이다...  
그 이혼 자체가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쉬운 재혼도, 그것도 간음이다...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결혼은 하나님이 보실 때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가는 것이 힘들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바로 피할 수가 없다..
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셔야 돼요.  

두 번째, 이미 가정이 깨어지신 분들도 많습니다. 
그럼 우리 인생은 끝난 거냐?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거냐?

그게 아니죠. 여러분, 이런 아픔이 이미 우리들의 삶에 있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죄를 덮을 수가 있습니다.
그 아픔을 덮을 수가 있습니다. 이게 사실은 최고의 소식이죠. 

여러분, 바로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잖아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요8:11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전제된 표현이죠.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를 질 것이기 때문에 
가서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마라'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 속에, 성령의 도우심 속에, 새로운 삶의 출발은 여전히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저는 많은 분들을 대하고 했는데, 우리 주위의 가정이 깨어지고 아파할 때 
처음에 아픔도 크지만, 그 후에 잘못된 선택을 통해서 
더 아프고 힘들어지는 분들을 정말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그냥 목회자로서 부탁을 드리는 것은 
가정이 아프고 깨어졌을 때, 그때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 행동하시지 말고, 분한 것도 알고, 억울한 것도 알고, 다 알지만...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어떤 상담가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도 해결 안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느냐?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오래 앉아 계셔서 
그 주님의 빛을 통해서, 
(상대방도 악하지만) 내 속에 있는 부족함, 연약함도 다시 한번 보게 되고, 
우리의 부족함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악함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덮을 수 있다는 가능성!  

여러분 성령님이 이런 나의 삶을 새롭게 세울 수 있는 가능성!  
'할 수만 있으면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명확한 뜻이다' 라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가능하면 움직이시지 않는게 좋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왜요?
이 문제가 너무나도 깊기 때문에, 
우리들의 단순한 노력을 통해서, 한순간에 해결되지 못합니다. 

뿌리가 엄청나게 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깊이 나아가서 
오랜 시간을 머물러 있으면서, 
그분의 지혜와 사랑과 능력을 힘입을 때 
이 아픔까지도 얼마든지 해결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