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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LNCK 2024. 4. 2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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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0 15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 YouTube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행24:1~23       사도행전84강 

오늘 본문은 바울의 3차 변호입니다. 
1차 변호는 유대인 무리 앞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행22:1~21
2차 변호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진행되었습니다.   23:1~6

오늘 본문 3차 변호는,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3차 변호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24: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먼저 3차 변호가 열린 시간적 배경이 있습니다. 본문 행24:1절에 '닷새 후'라고 시작됩니다. 
앞에서 바울은 천부장의 도움으로 가이사랴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로마 총독 벨릭스가 거주하는 곳입니다. 
(*당시 유대지역 로마부대의 본부가 가이사랴에 위치) 
가이사랴로 온 지 바울이 5일째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5일째 되는 날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 가이사랴로 내려온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대동해서 데려온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더둘로라는 변호사(법조인)였습니다. 

그러니까 법정의 그림이 대강 그려지시죠? 
로마 총독 벨릭스가 재판장으로 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기를 변호해야 했습니다. 

◑더둘로의 고소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대동했을까요? 

가이사랴는 로마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또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죠.
그래서 모든 재판이 로마법에 따라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유대법 뿐만이 아니라 
로마법에 정통한 전문 변호사를 선임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더둘로 라는 변호사였습니다. 

이 더둘로는 굉장히 유능한 변호사(법조인)였습니다. 
'당대의 최고의 입'이라고 정평이 나 있었던 사람입니다. 
승소율이 굉장히 높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떻게 고소를 해야 할지, 또 어떤 말을 하면 재판에서 이기는지' 
거기에 대한 전문가였습니다. 
주석에 보면, '그는 영악한 법률가였다' 이렇게 평가합니다. 

24: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바울을 고소하기 전에 먼저 재판관을 붕 띄웁니다. 
더둘로는 재판을 맡은 총독을 향해, 찬양하는 말부터 쏟아내고 있습니다. 
고발장을 먼저 읽지 않고, 총독을 찬양합니다. 그가 재판장이니까요. 

▲그는 총독을 찬양하는데 세 가지를 말합니다. 
-당신 때문에 우리가 태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당신의 통치로 여러 가지 사회가 개선, 발전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께 크게 감사합니다. 
아부와 아첨의 농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게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벨릭스는 최악의 총독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총독들 중에 가장 나쁜 평가를 받은 총독이 벨릭스였습니다. 
원래 벨릭스는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노예로 잡혀와서 로마의 총독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굉장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죠. 그만큼 얼마나 권력욕이 많았겠습니까? 
그 자리에 가기까지, 해서는 안 될 일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벨릭스에 대해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잔인하고 음탕하며 노예의 정신을 가지고 왕의 정치권을 행사한 자였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로마 황제 네로가 벨릭스를 면담할 때 
벨릭스를 보고 '너는 참으로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람이다' 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네로 황제 하면, 아주 잔인하고 폭력적인 황제 아닙니까? 
그 네로가 혀를 내두른 사람이 벨릭스였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못되고 악랄한 총독이었는지 짐작이 가시죠? 

벨릭스는 특별히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탄압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벨릭스는 아주 극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더둘로의 찬양은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총독 때문에 하나도 태평하지 않았습니다. 
태평은 고사하고 폭정이 난무했습니다. 

또 총독의 선정으로 여러 가지 사회가 개선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회가 퇴보를 했습니다. 
온갖 뇌물수수와 부도덕한 일로 사회가 오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벨릭스 총독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총독을 극혐하는 마음으로 똘똘 뭉쳤습니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더둘로는, 아무렇지 않게 아부로 시작합니다. 
그래야 재판을 맡은 총독의 환심을 사니까요. 

그리고서 더둘로는 이제 하나씩 고소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에 대한 고발장을 시작합니다. 
그 고소의 내용이 본문 5~6절에 나오는데요. 정리하면 세 가지 고소입니다. 

▲1. 첫 번째는 정치적인 죄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로마의 평화를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어디를 정복하든지, 그 나라의 종교, 문화, 예술, 관습을 다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반란을 일으키면, 철저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절대로 '로마의 평화'를 파괴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더들로가 바울을 고소하는 첫 번째 내용,
'바울은 전염병 같은 사람이다' 라고 묘사합니다. :5 
바울이 가는 곳마다 소요가 일어난다는 얘기입니다. 

이거는 아주 강력한 임팩트가 있는 고소였습니다. 
왜냐하면 반란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가장 싫어하는 죄가 반란죄였습니다. 반란죄는 무조건 사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러니 바울을 죽여야 한다는 고발입니다. 

▲2. 두 번째는 종교적인 죄목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가는 곳마다 소요를 일으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이 전하는 나사렛 종교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을 '나사렛 종교'가 아니라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고발합니다. :5 

왜 이단이냐면, 이 당시 유대교는 로마가 법적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정식적인 종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당시에 정식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사실 기독교와 유대교가 확실히 구분되었다는.. 그런 인식이 없었을 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유대교와는 다른 불법적이고 사이비 종교로 고발을 하는 겁니다. 
문제가 있는 심각한 종교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가는 곳마다,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로마의 평화를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바울은 나사렛 예수라는 이단을 전하기 때문이고, 
그 중에 리더, 우두머리가 바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놈만 죽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죄목도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는 것입니다. :6

유대교는 말씀드린 대로 로마가 공인한 정식 종교예요. 
그 유대교의 핵심 장소, 핵심 건물이 성전입니다. 
성전을 더럽히면, 로마 시민일지라도 사형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바울을 가만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제목으로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1차적으로는 정치적인 범죄 혐의,
2차적으로는 종교적인 범죄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 고소의 끝은 하나입니다. 바울은 죽어 마땅한 자라는 것입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바울은 사형을 당해야 할 범죄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소에서 결정적으로 빠진 게 있습니다. 
이 고소에서 빠진 결정적인 게 뭘까요? 바로 물증이 없습니다. 
이 고소를 입증할 물증이나 증인을 하나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둘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8 

그러니까 물증은 없고, 증인도 없고, 총독님이 심문하면 아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심문을 통해 밝혀내 달라는 얘기입니다. 

'용두사미'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시작은 굉장히 거창했는데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처럼, 
물증이나 증인 하나 없는 허점투성이의 고소였습니다. 

그러자 총독이 이번에는 바울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 바울을 대하는 총독의 태도가 굉장히 거만합니다.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했다'고 말합니다.  :10

바울에게 말도 안 하고, 손짓도 안 하고, 머리로 까딱하며 신호를 준 거죠.
말해보라는 거죠. 지금 굉장히 바울을 얕잡아 보는 행위입니다. 

◑이제 바울이 자기를 변호합니다. 

바울의 변호가 24:10~21절까지 나옵니다. 
굉장히 많은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둘로의 고소보다 몇 배 정도 더 길게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간단합니다. 더둘로의 고소에 하나씩 반박하는 내용입니다. 

더둘러가 3가지로 바울을 고소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대해 하나씩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변호합니다. 

▲1. 첫 번째 고소는 '정치적인 죄목'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평화를 파괴한다'는 고발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요. 시간으로 변호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11
'내가 예루살렘에 온 지 12일밖에 안 됐다'고 말합니다. 

'12일밖에 안 됐다'는 건, 
소요를 일으키기에는, 반란죄를 짓기에는 너무 시간이 짧다는 겁니다. 

12일 중에 바울은, 7일 동안 성전에 있었습니다. 
7일 동안 바울은 결례의식을 치렀었죠. 

그러면 12에서 7을 빼면 5일이 남습니다. 
5일이면 반란을 꾸밀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뭔가 데모를 하고, 반란을 일으키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시간이 필요하죠. 또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처럼 문자를 보내고 카톡을 보내는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만일 제가 반란을 꾸민다면, 사람을 모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누군가에게 알려야 합니다. 
'몇 날 며칠 정권을 전복하는 데모를 할 겁니다.' 
그러면 그 첩보를 들은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추종자를 모아야 하는데, 그 당시에는 5일 갖고는 턱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반박을 하는 겁니다. 
'자꾸 내가 소요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정치적인 소요를 일으킬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 얘기가 '12일'이라는 표현입니다. 

▲2. 바울은, 이단이라는 고발을 당했습니다. 
이 고발에 대해 바울은 '내가 오히려 정통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두 번째 변호가 14~1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14 '나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고 말합니다. 

여기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은 구약성경입니다. 
'나도 유대인들과 같이 조상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조상의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궁극적인 메시아가 있다. 
그분이 바로 내가 믿는 예수라는 분이다. 그러니 내가 오히려 정통이다.' 이렇게 변호합니다. 

또 유대인들과 같이 '나도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 구약 성경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이 가리키는 메시아가 바로 내가 믿는 예수님이시다. 
내가 진짜 구약성경이 말하는 메시아를 믿고 있다. 
그러니 내가 오히려 구약성경을 바르게 믿는.. 내가 정통이다.' 이렇게 자기 신앙을 변호합니다. 

▲3. 세 번째 고발은 '성전 모독죄'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바울은 변호합니다. 

24:17~18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정)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무슨 얘기죠? 내가 성전을 모독했다고 고소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나는 외국에 있다가 예루살렘에 들어온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바로 들어와서 찾아간 곳이 성전이다. 
나는 성전을 찾아간 사람이다. 
제물을 준비해서, 성전에 가서 정결 예식까지 드렸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게 어떻게 성전을 모독하는 사람이냐? 
나는 성전을 존중하는 사람이지, 성전을 모독하는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둘로의 세 번째 고소도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결정적인 한방을 날립니다. 그 한방이 18절부터 나오는데요. 
바로 증거를 대라는 겁니다. 증거가 없다는 거죠

:18~20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바울을 성전모독죄로 비방한 사람은,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시내에서 이방인 드로비모와 같이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억측을 부렸었죠. 
'바울이 그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이것은 추측이고, 억측이었죠.

21: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억측)함이러라'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 헛소문이 돌아서 '바울이 성전을 모독했다'는 고소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고발한 그들이, 정작 지금 재판정에는 증인으로 참석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19
증인으로 재판정에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고소는 잘못된 고소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세 가지 고소의 내용을 하나씩 반박을 했습니다. 
결론은 '나는 아무런 혐의가 없다. 나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건 벨릭스의 판결입니다. 

 

그런데 사실 벨릭스도 알았습니다. 
바울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을요. 

왜냐하면 천부장 루시아가 앞서 편지를 보냈었죠. 
그 편지에서 '바울은 이미 죄가 없다, 무죄'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23:29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뿐만 아니라 본문 22절을 한번 보십시오. 
'벨릭스는 바울이 말하는 이 도, 즉 기독교를 자세히 알았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의 아내가 유대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24
그의 아내를 통해서 기독교에 대해 익히 들었을 겁니다. 
기독교가 로마 정부를 위협하는 이상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을, 벨릭스는 알았습니다. 

 

그런데 벨릭스는 판결을 바로 내리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무죄 선언을 내리지 않습니다. 판결을 미룹니다. 
언제까지 미루느냐?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올 때까지 판결을 미룹니다. :22

그런데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은, 구실에 불과합니다. 
여기에는 정치적으로 숨은 동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놓아주면 누가 싫어하느냐? 유대인 지도층들이 싫어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소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풀어주지 않고, 가이사랴의 헤롯 궁 안에 머물게 했습니다.  23:35
그것도 2년 동안 바울을 궁 안에 붙들어 두었습니다. 

대신에 궁 안에서 바울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23
여러분 자유를 주었다는 건 무슨 얘기죠.? 바울의 무죄를 확신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나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바울의 3차 변호를 살펴봤습니다. 

◑적용

이 바울의 변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적용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적용은, '기독교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자기가 믿는 신앙인 기독교를 변호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14~15절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바울은 자신이, 고소자들인 유대인과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유대인이었으니까요. 똑같이 조상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똑같이 율법과 선지자들이 기록한 것, 구약성경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14 
똑같이 유대인과 같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15 

그런데 유대교와 한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어떤 걸까요? 
14절에 보면, 어떤 표현이 유대교와 다른 표현일까요? 

바로 오늘 설교 제목처럼 '이단이라는 를 따라' 입니다.  

여기서 '도'는, 정확히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길', 호도스
이게 기독교와 유대교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똑같이 구약 성경을 믿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믿죠. 똑같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를 따라 믿습니다. 예수 안에서 믿습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반대로 유대교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구약 성경도 믿습니다. 부활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그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건 구원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가 없이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없이는, 성경을 제대로 믿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없이는 부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없이는 하나님도, 성경도, 부활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죄를 지었고, 그 죄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죠? 
예수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우리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가?' 묻지 않습니다. 
늘 성경은 우리에게 '당신은 예수를 믿는가?' 묻습니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어야,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그게 진짜 하나님을 믿는 믿음, 구원 받는 믿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도 예수를 믿어야 들어갑니다. 
여러분 천국은 죄가 없는 곳입니다. 거룩한 곳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입니다.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우리는 다 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다 죄인으로 살다가 죽습니다. 
죄를 가지고서는 누구도 거룩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입니까?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통해서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깨끗이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에 대한 믿음,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거룩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요. 처음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덤 앞에 설 때도... 우리는 그분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예수를 믿어야 성경을 믿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과 선지자들, 이 구약성경 모두가 다 하나같이 누구를 가르치죠? 
예수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구약도 십자가로 해석하라 rfcdrfcd.tistory.com/11032498
    구약에 능통한 사람들을 책망함 rfcdrfcd.tistory.com/15980251

 

모든 성경이 예수를 증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계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성경을 진짜 믿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부활도 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우리의 부활이 가능합니다. 

예수님 그분이 우리의 부활이요,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없이는 기독교가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복음)를 믿어야 진짜 기독교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그렇다면 예수를 진짜로 믿으십니까? 
예수를 믿어야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예수를 (개인적, 인격적으로) 믿어야 내가 성경을 믿는 겁니다. 
예수를 믿어야 내가 부활을 진짜 믿는 겁니다. 
예수를 믿어야 내가 진짜 천국을 믿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십니까? 

여러분,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기독교의 메시지는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러 이 땅에 오셨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분의 공로를 믿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메시지,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지옥에서, 여러분과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깨닫습니까? 

그게 기독교가 말하는,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메시지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예수님 때문에 맞이할 수 있는 미래의 부활과 영원한 천국을 
날마다 그분 안에서 바라보고, 확신하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아멘!' 으로 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짜 기독교인, 진짜 그리스도인, 
진짜 구원받은 참 성도일 것입니다. 
이 복되고 참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두 번째 적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무죄를 완벽히 변호했습니다. 

그리고 재판관이었던 벨릭스 총독도, 바울의 무죄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재판의 결과가 무엇이죠? 바울은 무죄 선언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풀려나는 대신에, 헤롯 궁안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것도 2년 동안, 그 안에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이런 결과를 보면, 탄식이 나옵니다. 
'하나님 아쉽습니다. 바울이 무죄인데... 풀려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더 큰 뜻을 언제나 갖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을 헤롯 궁에 붙들어 매는 게 더 좋았다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바울이 풀려서 밖에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바울은 또다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왜냐면 바울을 죽이기까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그 결사대 40명이 아직도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23:12~13

바울은 즉시 풀려나서 밖으로 나갔으면...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울을 안전하게, 로마궁 안에 가두어두십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안전하게 사실 보호하신 겁니다. 
그리고 궁 안에서 바울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궁 안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했을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바울을 2년 동안 붙들어 두었습니다. 
그것이 바울에게는 더 나은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 인생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느 한 곳에 붙들어 두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자리에 계속 머물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이 조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길이다'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실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생각과 길보다, 더 높고 선하고 완전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멈추라고 할 때는,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으실 때는 그대로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구름기둥이 떠오르지 않고 한 곳에 머무르면,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낮아지라 할 때는, 낮아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있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는데 생각났던 교회사의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르틴 루터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로마 천주교로부터 극심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출두한 후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납치가 되었습니다. 
괴한한테 납치당한 건 아니었고요. 루터를 보호하는 쪽(프리드리히 선제후)에서 루터를 납치한 겁니다. 

루터가 돌아다니면 생명의 위협이 있으니까 
루터를 보호하려고 납치한 겁니다. 

납치된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10개월 동안 루터는 꼼짝달싹 못하고 성 안에서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1521년

기록에 의하면, 이때 루터는 극심한 우울증까지 겪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힘든 시기를 보냈던 거죠. 
지금 손발이 다 묶인 상태 아닙니까? 본문의 바울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랍게도 종교개혁을 위한 발판이 다 마련이 되었습니다. 
이때 바르트부르크 성에 갇혀서 한 게 뭐냐면, 최초로 독일어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첫 독일어 성경이, 여기서 루터에 의해 번역되었습니다.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거죠. 그래서 서민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중요한 가르침이 담긴 12권의 책들도
다 여기서 저술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종교개혁에 필요한 준비를 다 시키신 겁니다. 

오늘 바울의 이야기는, 바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루터에게도 일어난 이야기고요.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리가 뭔가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길은 언제나 우리의 길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절망으로 보이는 길이, 기회의 길일 수 있습니다. 
갇혔다고 생각되는 길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에는, 헛되고 무익한 길이 없습니다. 아쉬운 길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선하고 완전한 길입니다. 

이것을 알면,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천국 가는 그날까지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한 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며 걸어가는 
복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