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9 11 / 사도행전 강해 (39) / 베드로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 YouTube
◈베드로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행10:9~23
▲지난 시간은 "고넬료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rfcdrfcd.tistory.com/15981650
오늘 설교 제목은 "베드로(의 성숙)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똑같은 본문인데 초점이 다릅니다.
지난 주에는 '고넬료를 중심으로'
오늘 설교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여러분 사도행전의 주제구절은 행1:8절인데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의 순서대로 사도행전의 스토리가 펼쳐집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는 완전한 유대인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이죠.
이어서 사마리아는 혼혈인 지역입니다.
그러면 땅끝 순수 이방인(땅끝)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요?
순수 이방인의 구원이 시작되는 지점이 사도행전 10장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 최초로 구원받은 사람인, 고넬료라는 로마 사람이 등장하죠.
고넬료가 구원받은 이야기가 오늘 본문 사도행전 10장의 내용입니다.
이 고넬료의 구원을 시작으로, 땅끝 이방 선교의 포문이 열립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이야기는요. 사도행전에서 전환점, 터닝포인트입니다.
이 지점을 기점으로, 복음이 모든 민족으로, 땅끝으로 퍼집니다.
▲그래서 R C 스프로울은 '사도행전 안에서 가장 중요한 장은 행10장이다' 라고 말합니다.
고넬료가 구원받은 사건이, 사도행전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신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넬료의 구원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요?
고넬료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넬료의 구원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사도행전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으라면
오늘 본문 10장의 고넬료 사건을 꼽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고넬료가 구원을 받은 장면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고넬료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는데,
고넬료의 이야기보다는, 베드로의 이야기가 분량으로 더 많이 나왔습니다.
고넬료가 구원받은 이야기인데, 베드로의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물론 10장 후반부에 고넬료가 구원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10장 앞부분에는 베드로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고넬료에 대한 부분은 10:1~8절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10:9~23절까지는 베드로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게 고넬료가 구원을 받는 이야기인지,
베드로가 구원을 받는 이야기인지 헷갈릴 정도로, 차지하는 비율이 그렇습니다.
이 비율을 통해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지금 본문의 포인트는요. 고넬료에게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고넬료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베드로를 위해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베드로에게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열두 사도 중에 하나입니다.
사도란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부름을 받았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땅끝'입니다.
궁극적인 복음의 대상은 '모든 민족'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로만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땅끝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땅끝'에 대한 생각이 아직 없습니다.
'땅끝'으로는 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베드로는, 정통 유대인이죠.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방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이방인들은 그저 '지옥의 땔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도, 이런 유대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자 그래서 땅끝으로 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말씀을 주셨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하나님의 꿈은, 하나님의 선교 전략은 '땅 끝'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땅끝으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도행전의 최대의 걸림돌은 누구인가요?
외부의 핍박이 아니라, 열악한 선교 환경이 아니라,
사도행전의 최고의 장애물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0장을 한번 보십시오
고넬료에게 하나님이 환상을 한번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한 번만 말씀을 하십니다.
'수하의 사람들을 보내어서 베드로를 청하라'고 한 번만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한 번에 듣고 즉시 보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세 번이나 말씀을 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보자기 환상'을 보여주셨죠.
그 보자기 안에는, 레위기에 나오는 부정한 짐승들도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일어나 다 잡아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세 번이나 하십니다. 왜 세 번이나 하세요?
베드로가 못 알아 들으니까요. 베드로가 못 먹겠다고 하니까요.
하나님은 깨끗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더럽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말은 어떤 의미이죠?
베드로 자기가 맞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틀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도 깨끗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먹으면 안 되는 부정한 짐승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베드로는, 유대인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죠.
이방인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 번이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먹어도 된다는 거죠.
이제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도 깨끗하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세 번이나 하시고 나서 환상이 없어집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17절을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헬라어로 보면 '의심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세 번이나 듣고서도 의심을 했다는 거죠.
'설마 부정한 짐승 먹어도 된다는 말씀인가?'
'설마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인가?' 하고 의심을 했습니다.
자 그런데 그때에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머무는 집 앞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문 밖에 서서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고 묻습니다. :18
여러분 그때 베드로가 지붕에서 '환상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19
여기서 '생각하다'는 '깊이 숙고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베드로는 환상의 정리가 되지 않은 거죠.
머릿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혼동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그때 성령 하나님이 또 다시 베드로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너를 찾아온 사람들을 의심하지 말고 함께 고넬료에게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다' 라고 하십니다. :20
자 그래서 결국 베드로가 이해를 합니다.
10: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구절이 읽는데,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웃음이 나왔습니다.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아쉬웠는데요.
'왜 누가가 이 한 절로 묘사를 끝냈을까?'
그러니까 '이들이 집안에서 무슨 대화를 했을까?
왜 그런 에필로그를 다루지 않았을까?' 한편으론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자기가 머물고 있는 집 안으로 불러 들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하룻밤을 같이 보냅니다.
그런데 이 집은, 욥바의 무두장이의 집입니다. *가죽 공예사
그러면 당연히 죽은 짐승의 시체를 만져야겠죠.
그래서 유대인의 관습으로는, 무두장이는 '부정한 자'로 취급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무두장이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는 부정한 자로 취급된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무두장이의 집에 누가 함께 머물게 돼요?
무두장이랑 베드로랑 고넬료가 보내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 집 안에 3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게 되었습니다.
부정한 자로 취급된 자(무두장이), 정결한 유대인, 아예 부정한 이방인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조합이, 지금 여기 섞여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재미있지 않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 저는 부정한 음식은 절대로 입에 갖다 댈 수 없습니다' 하고
말했던 베드로가 지금 '부정한 음식'과 함께 섞여 있는 것입니다.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이 지금 함께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집안에 함께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보자기 환상이 여기서 성취가 되고 있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일하심이 너무나도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모습은, 정확히 신약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그림을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완성한 적이 있습니다.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요. 신약의 교회를 설명하는데 '둘이 하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2:14
여기서 말하는 둘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말합니다.
이 둘을 하나로 만들어, 한 새 사람,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면서,
예수 때문에 하나가 되는 영광을 누리는 공동체가, 바로 이 땅에 세워진 교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의 초안이, 오늘 본문 23절에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행10:23절의 밑그림을 따라서, 에베소서가 말하는 교회의 그림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 23절의 이 초안이 그려지는 과정을 눈여겨 보십시오.
지금 베드로가 뭔가를 주도적으로 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등 떠밀려서 고넬료의 집으로 가는 겁니다.
등 떠밀려서 이방인 사역에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꾸 사도행전을, '사도들의 행전'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자꾸 베드로와 바울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도 베드로처럼...
자꾸 바울과 베드로의 탁월함에 초점을 맞추려는 이상한 시선이 있습니다.
'사도들이니까 이런 역사가 일어났다' 자꾸 사도들의 능력과 어떠함을 강조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절대로 사도들을 높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펴봤던 사울의 첫 사역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사울이 한게 뭐 있습니까?
회심한 사울이 교회의 보탬이 되거나, 도움이 됐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행9장
☞ '그리하여'에 담긴 신비 rfcdrfcd.tistory.com/15979129
사울이 한 것은 도망간 거 밖에 없습니다.
도망가기 바빠서 복음을 제대로 전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도망가는 사울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누가는 어떻게 결론을 내렸었죠?
'그리하여 교회가 평안해졌다'고 말합니다. 9:31
원인이 사울에게 있지 않다는 거죠.
여러분 오늘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땅끝에 가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오죽했으며 하나님이 세 번이나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고넬료는 한 번만 말해도 딱 알아듣고 사람을 보냈는데
베드로는 세 번이나 말씀을 해도, 이방인에게 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또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을 또 해주셔야 했습니다. 10:20
자 그러니까 여러분 베드로가 뛰어나서 이방인의 사역이 된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진 비전 때문에, 베드로의 남다른 복음의 열정 때문에
이방인의 구원이 일어난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이방인의 선교를 안 하려고 합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등떠밀려서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관점에서, 지금 사도행전 10장에서 최고의 걸림돌은 누구죠?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포함한 예루살렘 교회의 12사도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베드로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하나같이 '모태 유대인'이었죠.
그리고 베드로와 같 유대의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땅끝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선교를 진행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이방인에게 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앞에서 사마리아 교회가 세워진 걸 보았습니다.
여러분 사마리아 교회도, 누가 개척한 교회죠?
사도들이 아니라 빌립 집사였죠.
사도들은 이방인 사역에 관심이 없습니다.
실제로 10장 뒷부분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를 찾아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때 고넬료가 성령을 받습니다.
그걸 보고 베드로가 보고하러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도들한테 베드로가 무진장 깨집니다. 왜 혼났겠어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가요 가사
'네가 왜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서 나오느냐?' 11:1~3
'어떻게 유대인인 네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느냐?' 그걸로 무진장 혼이 났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복음이 확장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누구이죠?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었습니다.
자 그러니 여러분 사도들에 대한 환상을 빨리 깨셔야 합니다.
자꾸 사도행전을, 사도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사도행전은 늘 누누히 제가 말씀드렸듯이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하시는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주님의 몸된 교회도, 머리이신 그분이 이끄십니다. 주님의 교회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이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장애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긴다는 사도들이
오히려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죠.
◑적용
자 그런데 그런 베드로도, 하나님이 그를 붙잡고 일을 하십니다.
그런 베드로를, 하나님이 계속해서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주제
9장에서는 베드로를 룻다로 데리고 가십니다. 이어서 욥바로 데리고 가십니다.
여러분 룻다, 욥바... 유대에서 멀어질수록 이방인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죠.
그리고 욥바의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게 하십니다.
무도장이는 부정하다고 취급된 자입니다.
그런 무두장의 집에 베드로를 머물게 하십니다.
그리고서는 보자기 환상을 통해 베드로의 잘못된 신학을 깨십니다.
세 번이나 말씀을 주심으로써, 이방인들도 깨끗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서는 성령께서 또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십니다.
그 결과 베드로가 어느 자리까지 왔느냐?
오늘 본문의 23절까지 왔습니다.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10:23
사실 베드로는, 굳이 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집 말고, 다른 여관들도 있으니까요.
'여관에 가서 자고 오라'고 해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일 같이 고넬료의 집으로 갑시다' 얼마든지 그래도 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굳이 부정한 그들은 집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굳이 부정한 그들과 하룻밤을 함께 지냅니다. 무엇을 알 수 있죠?
그만큼 베드로가 변화가 된 것이죠.
자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사도행전 10장의 본문을
'고넬료의 회심'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누구도 회심하고 있어요?
베드로도 신학적으로 회심하고 있습니다.
변화가 필요한 사람은, 고넬료만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베드로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고넬료라는 사람을 통해서요!
하나님은 고넬료의 구원을 위해 베드로를 보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고넬료를 통해서 베드로를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는 단순히 고넬료를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목적은, 베드로였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중요한 인사이트(통찰력)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목적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 때, 우리가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신이 목표입니다. *주제
하나님은 고넬료를 위해 베드로를 보내시지만,
그 과정을 통해 베드로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 과정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으로 점점 빚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는,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가는 것만 중요한게 아닙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베드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베드로를 목적으로 두고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목표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시키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시키는 일 속에서도 내가 목표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으로부터들은 얘기입니다.
그 목사님 부부가, 친구 목사님 부부를 만나서 함께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밥을 먹으면서 그 목사님이, 친구 목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네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많이 변했니?,
네 설교를 듣고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변했니?'
그 질문을 옆에서 듣고 있던 사모님이, 질문을 가로채서 이런 대답을 하셨대요.
'성도들은 모르겠고요. 제 남편은 확실히 변했어요!'
목회를 하면서, 목회를 하는 남편이 변했다는 거죠.
설교를 하면서, 설교를 하는 남편이 변했다는 거죠.
제가 목회를 하면서 깨닫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목회는 정말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사실을 늘 몸소 깨닫습니다.
저는 오히려 목회에 방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저를 통해 일하십니다.
저는 그 사실을, 거듭거듭 보게 됩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는데 나는 뭐 하러 있나?'
하나님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저'입니다.
하나님은 목회를 위한 수단으로 저를 부르신게 아니라, 제가 목적입니다.
'저를 다듬기 위해' 목사라는 직분을 한편으로 맡기신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부끄럽지만 세상을 참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도망가다가 이 길에 끌려온 차입니다.
'더 이상 도망가다가는 진짜 죽겠구나'
정말 그 마음으로 신대원에 입학원서를 꾸역꾸역 넣었습니다.
그때 버스를 타고 이제 신촌을 지나가는데요. 겨울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그때 신촌을 지나가는데 참 우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버스 안에서 눈물을 조금 흘렸습니다. 제가 왜 눈물을 흘렸겠어요?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부르셨다는 사실에, 제가 너무나 기뻐서 감사해서 흘렸을까요?
그게 아니라, '더 이상 이제는 밤에 신촌에 올 수가 없겠구나.. 아니 못 오겠구나..'
그 서러움에 울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여러분 이상하게 놀았다는 건 아닙니다. 건전하게 놀았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는, 술 담배를 일절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임이 주로 신촌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대학생활의 모든 추억이 신촌에 묻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신대원에 들어가며 여기도 못 오겠구나.
친구들이 불러내도 이제는 나갈 수 없겠구나.
그 정들었던 신촌도, 이제는 그야말로 추억으로 끝나는구나'
그 마음에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이제 나중에 신대원에 들어간 후에, 성시경 씨가 부른 "거리에서"라는 노래에,
그 노랫말에 신촌이 나옵니다.
제가 그 노래를 들으면서 '지나간 신촌에서의 옛 추억'에 공감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그렇게 세상을 한편으로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부르셨다'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목사가 돼서 아예 저를 묶어 놓으신 거죠.
여러분처럼 그냥 놔두면 저는 큰일 날 사람이란 걸 하나님이 아셔서
저를 목사로 부르셔서 아예 그냥 묶어 놓으신 거죠.
하나님에게 있어서 목표는 저입니다. 단순히 저를 목회의 수단으로 부르신게 아니라
목표는 늘 '저'입니다.
그런 부분에서 지금은 목사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사라서 예배를 빠질 수가 없습니다.
설교를 해야 하니까, 성경을 안 볼 수가 없습니다.
새벽 기도를 나와야 하니까, 나와서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속에서 제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 갑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제가 날마다 빚어지고 자랍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누가 변하냐면, 여러분 제가 변합니다.
물론 변화되는게 기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자로 자라게 하십니다.
목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저를 더 자라게 하십니다.
물론 키는 다 자랐지만, 영적으로 날마다 자라게 하십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은 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고 계십니다.
▲여러분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 때는 여러분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여러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목표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 일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모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
그리고 번거로워 보이는 일들, 그리고 반복되는 일들,
때로는 내가 피하고 싶은 사람들과, 그런 불편한 일들을 제대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모든 일들이, 사실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가고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식과 씨름하는 일들,
그리고 때로는 불편한 이웃들과 부딪혀야 하는 일들,
그리고 자질구레하게 부딪히는 모든 속상한 일들이야말로
그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나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렇게 긴 인생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겪고 있는 인생의 모든 조건이고, 환경이고, 지금의 위치이고,
여러분에게 각자 일이 맡겨진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오면, 자꾸 다른 사람이 보입니다. 여러분 불편한 사람들이 있죠.
자꾸 여러분 눈에 불편한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여러분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부대낌을 통해서, 여러분을 빚어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통해, 여러분을 위해 일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고난료를 통해, 베드로를 변화시키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누군가를 통해,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목적으로 삼아 일하시고, 그 사람은 수단일뿐입니다.
늘 여러분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껄끄러운 그 사람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그 사람은
나를 자꾸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은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여러분이 이 관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관점을 놓치면, 여러분 자신의 성화,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용납과 자비를 닮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늘 분쟁과 비판과 정죄만이 남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사건들,
그것 자체에 하나님은 목적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일들을 잘 해내느냐?'가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내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초점을 절대로 놓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성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같이,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 간섭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현실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일들을 통해, 여러분을 간섭하고 계시고
인도하고 계시고, 빚어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속하고 있는 환경과 조건과 그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여러분들 자체가, 늘 하나님의 목적이요. 목표입니다.
이것이, 이번 한 주간도, 하나님이 우리를 삶의 자리로 보내시는 이유입니다.
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수많은 일들과, 수많은 사람들을 겪게 하십니다.
그 일들을 통한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한 주간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내고 빚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이 복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