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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와 십계명

LNCK 2024. 7. 5. 20:18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율법론

 

https://blog.naver.com/karamos/222138357301

 

불신자와 십계명      출20:18~24       2015.02.01.

 

서론

 

20세기 한국이나 미국의 기독교에는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이 만연하였습니다.

‘Antinomianism’은 ‘반대’를 뜻하는 헬라어 접두사 ‘안티’와

‘율법’을 뜻하는 ‘노모스’가 합쳐져서 합성어입니다.

 

‘율법폐기론’이라는 단어는 16세기 종교개혁기에 나온 것인데,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이 십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부터 등장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동역자이자 친구였던 요한 아그리콜라가

십계명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구약의 모든 율법은 전체를 포괄하는 한 덩어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의미가

“전체로서의 한 덩어리인 율법을 완성했다”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주님이 율법을 완성 fulfill 하셨으므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으므로. 마5:17)

 

이러한 아그리콜라의 주장에 대해 마틴 루터가

“이는 영지주의 사상과 같고 율법폐기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루터와 아그리콜라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20세기에는 어떻게 해서 한국과 미국 기독교에 율법폐기론이 만연하게 된 것일까요?

그 이유는 19세기 중반에 미국의 다비(J. N. Darby)라는 사람이 세대주의 종말론을 만들어내었고,

이 신학 사상이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에 유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다비는 ‘Brethren’이라는 교파의 창시자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다비는 개신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두 가지를 부인하였는데,

첫째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의인이 된다는 ‘전가설’을 부인하였습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죄인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놀라운 교환’(Wonderful Exchange)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이익을 갖는 교환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교환을 ‘전가’(Imputation)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옮겨지고, 우리는 예수님의 완벽한 의를 입게 되었다는 교리입니다.

다비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이신칭의의 교리를 부정했습니다.

 

둘째는 성도의 성화의 과정에서 필요한 십계명의 기능을 부정했습니다.

칼빈이 말한 ‘율법의 제3용도’를 부인하는 사상이 바로 ‘존 넬슨 다비’의 사상입니다.

 

그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20세기 근본주의에 유입되었고,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세대주의 종말론과 근본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사역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에 율법폐기론이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 인구가 늘어나도 사회 윤리도덕이 개선되지 않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십계명을 존중하지 않는 기독교는 세상과 다르지 않은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19세기 다비의 세대주의 신학사상은 근본주의에 영향을 미쳤고,

결국 이 근본주의 신학은 한국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에

율법폐기론이 만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תורה’(토라)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뜻’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의 삶에 대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Appointed Way)입니다.

율법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구별됩니다.

 

1) 가장 광범위한 의미는 ‘성경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시편 119편 1절에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시편 기자는 성경 전체를 여호와의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고전14:21절에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여기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이사야 28:11절을 인용한 것인데,

바울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율법에 기록된 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사야서도 율법에 포함된다고 한 것입니다.

 

2) 두 번째 중간적인 의미는 ‘모세 오경’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상 다섯 권을 ‘토라’라고 합니다.

 

3) 그러나 가장 좁은 의미로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3종류의 법을 가리킵니다.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입니다.

 

‘의식법’은 제사, 절기에 관한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사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의식법은 신약시대에 완전히 폐지된 법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피를 흘리는 제사를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절기도 안 지킵니다.

 

‘시민법’은 신정통치국가로서 이스라엘의 국가법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AD 70년 로마에 의해 망한 이후 적용대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없어졌습니다.

 

‘도덕법’ .. 그래서 도덕법으로서 십계명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율법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한 덩어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율법을 한 덩어리로 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17세기의 유명한 스위스 개혁주의 신학자 프랜시스 튜레틴은

“율법을 전체로서의 한 덩어리라고 주장한다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과, 간음하지 말라는 것을

똑같은 법으로 취급해야 하느냐?”고 반박하였습니다.

도덕법으로서의 십계명은 아주 독특한 법입니다.

 

◑1. 도덕법인 십계명의 독특성

 

도덕법은 의식법, 시민법과 성격이 전혀 다르고, 독특한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1. 첫째는 십계명을 주신 방식이 독특합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 직접 강림하셔서, 우레와 번개와 진동하는 산의 연기 가운데

친히 음성으로 주신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모든 회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번개가 치는 가운데 하나님은 우레와 같은 음성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의 조항들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지 말지니라!”

“너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하신 음성을 회중들이 다 들었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세상의 어떤 법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또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십계명을 두 돌비에 두 번이나 직접 쓰셨습니다.

왜 두 번일까요? 한 번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 절하는 모습을 보고

두 돌비를 집어 던져 깨뜨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한 번 더 쓰셨습니다.

 

의식법과 시민법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개인적으로 계시를 주셨고,

파피루스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두 돌비에 주셨고,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주셨고,

문자로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음성으로 주셨다는 점에서 독특성을 갖습니다.

 

신5:22절에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직접 기록하셨다는 것은

십계명이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성문화된 하나님의 법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임재와 직접적인 활동’을 상징합니다. 주1)

 

▲둘째는, 십계명의 보관방식입니다.

십계명은 다른 법과 다르게 법궤 안에 보관을 했습니다.

 

출25:21절에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출40:20절에 “그가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법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아카시아 나무는 굉장히 단단한 나무입니다.

그런데 그 법궤 속에 십계명의 두 돌비를 넣고,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함께 넣어 보관하라고 하셨습니다.

 

법궤 윗 판을 ‘시은소’ 또는 ‘속죄소’라고 합니다.

금판 위 양쪽에 금으로 그룹 천사를 만들어 세워두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여호와’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튼 속죄소는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그 위에 뿌려 온 백성의 죄를 용서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속죄소 밑에 두 돌비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두 돌비에 기록된 십계명의 법은 복음의 은혜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다른 법을 법궤에 넣어 보관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십계명의 보관방식도 매우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십계명의 명칭도 독특했습니다.

십계명은 출애굽기에서 계속 ‘증거판’(Testimony)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16:34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Testimony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이 뜻에 거역하면 진노하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드러난 것입니다.

 

십계명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완벽한 규율이고,

인간 전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입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를 구분할 필요 없이 영원토록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영구한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을, 십계명이 아닌 다른 법과 차원이 같은 한 덩어리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십계명을 완전히 무시하는 견해입니다.

 

십계명과 다른 법을 구별하는 것을 두고 인위적인 구별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십계명의 독특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주신 방식과 보관 방식, 그리고 명칭이 독특하다는 특성을 갖습니다.

이는 십계명이 인간 전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법이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2. 십계명이 불신자들에게 갖는 의미

 

십계명은 불신자들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이미 아담의 마음속에 도덕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두 돌비에 도덕법을 기록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새로운 법을 제정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아담의 마음속에 주셨던 법을 최초로 문서화하신 것입니다.

 

물론 문서화하기 이전에도 아담의 마음속에는 도덕법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담을 도덕적인 존재로 만드셨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아담의 마음속에 있는 도덕법과 십계명은 동일한 법입니다.

 

▲아담이 도덕법을 잘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시험해 보신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시험이었습니다.

 

창2:16~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온 인류의 대표자로 삼아 도덕법에 대한 순종 여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불순종의 길을 선택했고, 그를 통해 ‘원죄’가 전가 되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모두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담이 지은 죄를 가지고 왜 내게 책임을 지라 하느냐?”고 말합니다.

아담의 지은 죄에 대한 전가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예수님의 의가 전가되는 것도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혼자서 잘 살다 죽은 것이지, 그의 공로로 천국에 가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죄인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고, 그 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원죄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은 아담의 첫 번째 범죄로 말미암아 도덕법을 지킬 수 없는 불순종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고, 십계명을 어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프랜시스 튜레틴이 “아담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 도덕법이 포함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담의 범죄이후 아담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훼손되었지만,

사라지거나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하나님의 형상’의 유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기에

절대 죽이면 안 됩니다. 짐승은 얼마든지 죽여서 고기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보통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죄로 인식할 줄 압니다.

모세 시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살인을 저지르면 죄인 줄 알았고,

간음을 저지르거나,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면 죄인 줄 알았습니다.

거짓말, 도적질도 모두 죄인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양심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 역시 인류의 대표인 아담에게 주신 도덕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방인들을 정죄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십계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국가의 죄를 정죄할 때도 십계명이 기준이었습니다.

요일3: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 요나서는 죄에 빠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백성들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데,

그로부터 100년 뒤 이들이 다시 죄에 빠지게 되자

니느웨의 심판을 선고한 내용이 나훔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훔3:1~4절에 “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휙휙하는 채찍 소리, 굉굉하는 병거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살륙 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 백성들의 죄악을 열거하였는데,

‘궤휼’은 ‘속이는 것’이기에 제9계명을 위반한 것이고,

‘강포’는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기에 제10계명을,

‘늑탈’은 ‘살인’과 같기에 제6계명을,

‘마술’은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이기에 제1계명을 위반한 것과 같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는 이방국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백성들의 죄를 심판하실 때에도

역시 그 기준이 십계명이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마음속에 양심의 법을 주셨고, 이방국가들도 십계명으로 정죄함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은 인간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법을 주실 수 있는 권위를 가진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입법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스스로 법을 세울 수 없습니다.

약4: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신 법이 십계명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호불호(好不好)를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적질을 좋아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를 좋아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십계명은 신자와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법이요, 하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의’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통해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십계명을 다 지킬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다 어긴 죄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의인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서 우리의 죄를

그 분께 드리고 예수님의 의를 전가 받아 ‘놀라운 교환’으로

‘완전한 의’(Perfect Righteousness)를 입고

의의 예복을 입어 천국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십계명의 불신자들에 대한 적용

 

율법에는 세 가지 용도가 있습니다.

‘율법의 제3용도’는 성도를 향한 삶의 원리와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1용도, 제2용도도 있습니다.

율법에는 ‘시민적 용도’(Civil Function)와 *제1용도

‘영적 용도’(Spiritual Function)가 있는데, *제2용도

 

마르틴 루터의 후계자였던 필립 멜란히톤은

시민적 용도를 율법의 제1용도라고 했고,

존 칼빈은 영적 용도를 제1용도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의 제1용도’인 ‘시민적 용도’는 십계명이 악을 제어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10가지 계명 중에 8가지 계명은 ‘하지 말라’는 부정적 명령의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십계명은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재갈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려고 하다가도 십계명이 떠오르면 범죄행각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십계명을 듣지 못했다 할지라도 양심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살인을 하려다가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이라는 하늘의 거룩한 법이 없다면, 홉스의 말대로 이 사회는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질서가 없는 혼란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딤전1:9~10절에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은 사회 질서를 지키기 위한 시민적 용도가 있고, 시민법의 기초가 됩니다.

어떤 사회, 국가이든지 십계명을 존중하면 그 곳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무시하는 국가는 존귀함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과 같은 신정통치국가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자유를 허락하고 핍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를 핍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를 향해 총을 쏘아대고

예수님 믿는 사람을 참수하는 행위는 저주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짓입니다. 그런 사회는 결코 복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 국가는 신정통치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타종교도 다 같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할지라도 자유는 허락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밭에 가보니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을 보고

가라지를 뽑아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그것들을 “가만히 두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으면 뿌리가 알곡과 연결되어 있어 같이 뽑히기 때문에 저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현대 시민사회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교와 유교 등 타종교들도 각각 종교로 인정은 해주되,

민법이나 형법이나 시민법을 어겼다면 범법함에 대해서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는 종교로서 탄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형법, 민법을 어긴 것에 대해

벌을 준 것을 가지고 종교법을 어긴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아주 잘못된 처사입니다.

 

특별히 예배의 자유를 인정치 않는 국가는 절대로 존중받는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어느 사회이든지 둘째 돌비의 내용을 존중하는 사회는 높은 윤리성을 가진 복된 사회가 됩니다.

 

살인을 해도, 간음을 해도 잘했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간음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사회의 규범은 결국 십계명을 존중하는 규범이 되어야 복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또 주일은 쉬게 해서 성도들이 마음껏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야하고,

공무원 시험이나 학교 입학시험과 같은 것들은 평일에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는 사회 규범을 만들어야 복을 받는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잠14:34절에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국가도 기독교정신으로 세워졌지만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입법을 많이 추진합니다.

 

예를 들면, 동성애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를 받지 않는 교회의 목사는 벌을 받아야 하고, 심지어 잡혀 갑니다.

대한민국 역시 조만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여자는 개를 끌고 와서는 남편으로 삼아 결혼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정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고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합니다.

 

▲또한 율법의 영적 용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멜란히톤은 이를 율법의 제2용도라고 했고, 칼빈은 제1용도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율법을 보며 스스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죄를 어떻게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인간이 무슨 노력을 해도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면 죄는 가고 의가 와서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되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론

 

시편 119편 142절에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법이 진리입니다. 진리를 알고 믿고 따르고 싶은 사람은 주의 법이 진리이므로

주의 법을 공부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율법은 넓은 의미로 성경 전체, 중간적 의미로 모세 오경, 좁은 의미로 십계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은 불신자도 복을 받을 것이고,

성도들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의 법을 사랑하여 가정도 복을 받고

교회와 국가와 사회도 복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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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출8장 19절에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하는 애굽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 개구리가 뭍으로 올라오는 재앙, 먼지가 이로 변하는 재앙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술사들이 피 재앙과 개구리 재앙까지는 따라하였지만,

티끌이 이로 변하는 재앙부터는 따라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구절이 영어성경에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This is the finger of God.”

애굽의 술사들이 애굽에 임한 재앙을 보며, “이는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따라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그 주신 방식에서 독특성을 갖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