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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잔대회와 한국 교회

LNCK 2024. 7. 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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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 제4차 로잔 목회자 컨퍼런스 주제특강  rfcdrfcd.tistory.com/15981631


로잔대회와 한국 교회  [제3차 로잔 목회자콘퍼런스] (youtube.com)
로잔대회와 한국 교회        마28:20, 롬15:18

제게 주어진 제목이 <로잔 대회와 한국 교회>입니다. 
근데 그런 질문이 있더라고요. 
'지금 이런 큰 행사나 대회를 할 형편이냐?'    *2022 코로나 상황

사실 굉장히 마음 아픈 질문이기도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 형편이 이런 아주 엄청난 대회를 유치하고 또 진행해야 될 그런 상황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또 하나의 질문은, '로잔 대회 와 한국 교회를 굳이 인위적으로 연결시켜서 꼭 생각을 해야 되나? 
이건 별개의 문제가 아니냐? 
로잔 대회는 로잔 대회 대로 잘 진행이 돼야 되는 거고, 
한국 교회의 문제는 한국 교회의 문제이지, 
이 두 가지가 정말 연결된 어떤 고리가 있는 건가?'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 문제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과,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여러분들과 좀 나누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번 4차로잔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게 된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개인적으로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한국 교회의 어떤 변화, 교회의 갱신 과 개혁을 위하여 기도했던 
많은 목회자 들과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그렇게 저는 생각합니다. 

이유는 코비드19 팬데믹이,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이 아니었잖아요. 
우리는 그걸 분명하게 믿습니다. 그럼 하나님도 당황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사실 이미 다 알고 계시고, 
이 일은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음을 
나중에 우리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주관자 이십니다.
그렇다면 4차로잔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게 된 일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이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죠. 

그럼 우리는 질문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왜 4차로잔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게 되는 건가요?' 

그건 한국 교회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 일이 이루어진 거죠.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그걸 찾는 일일 것입니다. 

아마 틀림없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깨우쳐 주실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아마 오늘 이 시간도, 그 과정 중에 하나라고 생각이 듭니다. 

▲지난 주간에 태국에서 '아시아 2022 선교대회'가 열렸을 때, 
그때 4차로잔대회를 위한, 프로그램 준비를 위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으신 어느 분이 
제게 물으시더라고요. 

'한국 교회가 이번 4차로잔대회를 준비하면서, 
한국교회에 주어지는 어떤 중요한 의미를 생각하면서 
한국 교회의 변화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들었는데 
4차로잔대회 때, 우리가 한국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십니까?' 

아마 '4차로잔대회 때 한국 교회를 위한 어떤 것을 우리가 좀 해주면 
한국교회에 도움이 되겠느냐?' 뭐 그런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대답을 드렸어요. 
'우리는 4차로잔대회 때, 그 대회를 통해서 한국 교회가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4차로잔대회가 열리기 전에
한국 교회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준비하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4차로잔대회 때, 약 4천 여명이 넘는 
전 세계의 복음주의권 목회자, 선교 현장의 지도자들, 리더들, 또 전문인들, 
또 젊은 차세대 지도자들이 다 모이겠지만, 
실제로 우리 한국교회에서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한 2백 여명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교회에 많은 목회자들과 우리 평신도 리더들이 
그 4차로잔대회에서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은, 사실 거의 기대하기가 어렵죠. 

물론 영상으로도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다 열려 있긴 합니다만, 
대회장에 (직접) 참여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거고요. 

저희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4차로잔대회 그때, 그 대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메시지를 던지시고, 
한국교회를 어떻게 변화시키시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그것만 기대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이번 4차로잔대회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계기로 
이 로잔 정신을 통해서, 한국 교회가 변화되는 작업을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4차로잔대회가 열리게 되었을 때, 
한국 교회의 지금 현재의 어려움은, 이미 세계적으로 다 알려져 있더라고요. 

제가 만나는 분들마다, 한국 교회가 지금 겪고 있는 지금의 이 어려움과 
또 아주 난감한 상황에 대하여... 

그런데 '한국 교회 안에, 영적인 놀라운 대 각성이 일어났더라. 
그것도 로잔 대회를 계기로 해서 그렇게 일어 났더라' 
그 일이 우리가 로잔 대회를 섬길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행사를 잘 준비하고, 예산을 잘 뒷받침하고, 
아주 대회가 물 흐르듯이 잘 진행되고, 
그 대회에서 아주 탁월한 어떤 선교 전략이 발표 되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뒷받침 하는 것도,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만 

진짜 우리가 세계에, 로잔 대회를 위해서 섬길 수 있는 것은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 나더라' 

'하나님의 역사는, 교회가 스스로 자기를 개혁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내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더라' 

저는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을 수 있겠나 싶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열리는 4차로잔대회를 계기로 
전 세계의 모든 교회에 영적인 대각성의 불이 붙는... 

그 로잔 대회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도 굉장히 중요한 우리의 관심사이지만, 
그것을 서포트하는 한국 교회를 통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가 
그들을 통하여 전 세계에 증거되는 일은... 사실은 황홀할 정도라고 생각이 듭니다. 

로잔 운동은 기본적으로 선교 운동입니다. 
그래서 로잔 대회 때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이렇게 변화 되어지는 상황에서, 도대체 우리는 선교를 어떻게 해석해야 되고, 
새로운 선교의 현장... 닫힌 문도 있고, 열린 문도 있고... 
또 새로운 선교의 전략, 선교의 패러다임의 전환... 
이런 문제들을 아마 굉장히 치열하게 다루겠죠. 

그리고 앞으로 세계 선교의 어떤 뚜렷한 방향이 
아마 이번 4차로잔대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잔 운동은 단순한 선교 운동만 아닙니다.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 로잔의 구호예요. 

성경적인 복음, 성경적인 교회, 성경적인 선교! 
그것을 다시 굳건하게 하자고 하는 것이, 사실 로잔 운동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가장 기본인 거죠. 

자 그러므로 반드시 '온전한 복음이 회복되는 일'이 전제가 되어야 하고 
온 교회가 이 일에 함께 하게 되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사실 선교 운동도 의미가 있는 거죠. 

그래서 사실, 교회가 선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주체이지만, 
동시에 '선교가 교회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4차로잔대회와 한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선교 운동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올바른 선교, 성경적인 선교를 할 수 있을까?' 
그럼 당연히 교회가 변화 되어야 되는 거죠. 
교회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우리가 온전한 선교를 할 수 있겠는가요?

문제는 '그게 가능한가?' 하는 거죠. 
이제 2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동안에 한국 교회 안에 
그런 의미 있는 어떤 영적인 각성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많은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이 점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가능한가?' 
그동안에 우리도 여러 번 많은 시도도 하고, 집회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목사님들이 다 기도하고 계신데 

우리의 마음에 느껴지는 느낌은 
'이 기울어져 가는, 가라앉아 가는 배가 
이게 다시 회복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시기의 문제인 거지, 한국 교회는 서서히 그냥 계속 가라앉아만 가고 있다.' 
그런 느낌이 있잖아요. 
근데 이것을 한 2년 동안에 바꿀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어 서울의 어느 한 기독교 대학 교수 신우회에 
온라인으로 모이는 집회에 설교를 부탁 받아서, 제가 온라인으로 설교를 했는데 
실제로 참여한 분들은 한 열 명 정도 밖에 안 되더라고요. 

설교가 끝나고 근데 예배가 끝나고, 그리고 줌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에 
교수님 한 분이 제게 그런 질문을 하셨어요. 

'한국 교회와 우리 사회의 현실이 너무 막막한데 
우리는 너무 무기력 합니다. 지금 우리 교수 신우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목사님은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질문을 하셨어요. 

지금 엄청난 좌절이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문제가 심각하다는 건 느끼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냐는 거죠. 

제가 그분에게 이렇게 대답을 드렸어요. 
"우리 교수님들이 지금 온라인으로 들어오신 분이 한 열 분 정도 되시는데 
서울에 있는 어느 한 대학에 교수 한 열 분이, 
정말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되어지신 교수님, 진짜 성경 그대로 
주님은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이고, 그렇게 주님 안에 온전히 연합됨을 살아내는 
열 분의 교수님이 정말 계시다면, 
저는 그 대학교 안에 엄청난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자원이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그 열 분의 교수님들이 정말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 되어 
그렇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계신다면, 
다른 교수 분들이 어떻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대학 안에 있는 기독 학생들이 많은데 
'우리 대학 안에 정말 주님과 동행하는 교수님이 열 사람이나 있다.' 
저는 이건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은, 다른 대학에 있는 기독 학생들과 교수 신우회에 
어떻게 영향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교수님들의 마음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싶지만 
사실 그건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성경 그대로 믿는 거예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과 나는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하나다.' 

문제는 정말 그걸 믿으시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도 똑같다 라고 봅니다. 
여기 한 2백 명의 목사님들이 모이셨습니다. 

이 숫자는 한국 교회 전체를 뒤집어도 남을 만한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120 명이 성령을 받고 
그리고는 사실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이 된 거 아닙니까? 

여기 계신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복음 그대로 
'성경적인 복음을 회복 하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주님과 나는 온전히 한 몸이다' 
라는 사실을 진짜 믿으면... 
허드슨 테일러가 그게 믿어지는 순간에, 중국 선교가 달라져 버렸어요. 

로잔 정신은 총체적인 복음의 회복 입니다. 
그 총체적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세요. 

우리는 예수님과 사실 하나 된 존재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죠. 

자 우리 모두가 다, 정말 그냥 단순하게 그 믿음으로 우리가 서기 시작하면 
그러면 저는 우리가 뭐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자. 우리가 영적인 각성을 일으키자'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제가 목회를 해보니, 올해로 제가 목회를 은퇴하게 되지만 
목회가 목사에게 우상이 되더라고요. 하여튼 목사님들은 모이면 목회를 얘기 해요. 

'어떻게 하면 목회를 잘 할까? 어떻게 하면 교회를 잘 세울까?' 
온통 관심이 그거 밖에 없습니다. 

담임 목사가 아닌 목사님이, (특수 목회를 하거나 부교역자 목사님이)
담임 목사님들을 만나면, 뭔가 거리감이 느껴진 대요. 

저는 처음에 그게 뭔지를 잘 몰랐어요. 근데 지금은 알 것 같아요. 
담임 목사들 하고 만나면, 맨날 그 분들의 관심은 목회 밖에 없어요. 
'어떻게 하면 목회를 잘 하나?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를 잘 세울까?' 그 생각밖에 없습니다. 

근데 이게 왜 우상이죠? 예수님이 초점이 아닌 겁니다. 
예수님의 초점이 아니에요. 목회가 초점이 거예요. 

자 이렇게 되니까, 은퇴할 때가 되면 문제가 오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다 거기에다가 걸었기 때문에, 은퇴는 그에게는 이건 엄청난 충격인 거죠. 

우리가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하여 눈이 뜨이게 되면 
'오직 예수'가 됩니다. '오직 목회'가 아니에요. 

주님이 목회하게 하시니까, 목회를 하는 거지 
사실 초점은 주님께 있는 거죠.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알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도와 동행 하기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그렇게 갈망하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그렇게 돼요. 날마다, 정말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감사하고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이 너무 애통스럽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 때문에 너무 즐겁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그렇게 살게 돼요. 

그때 비로소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영적 각성의 핵심은 그거예요. 

▲인도 선교사였던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말했어요.
'우리들이 연합 하려면, 그 무엇이 아니라, 그 누구를 목표로 해야 한다.' 

사실은 앞으로 로잔대회를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연합 활동을 할 때, 그 무엇(일, 목표)이 중심이 되면, 
그게 아무리 훌륭하고 고귀한 것이라도, 반드시 분열을 가져온다는 거예요. 
아주 사소한 것으로 갈라져 버린다는 겁니다. 
이건 기독교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는 거고, 지금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면 
놀라운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서로 다른 것은, 오히려 아름다운 조화를 경험하는 일일 뿐이에요.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정말 우리 가운데 실제로 임재하시는 것을 
우리가 정말 믿는 것은,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엄청난 사명을 주셨죠. 
'너희는 모든 민족에 가서 제자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리고 내가 가르친 모든 것을 다 지키게 하라' 
그 위대한 명령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토록 선교를 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사실 이 엄청난 명령 보다 더 놀라운... 정말 놀라운 약속을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게 훨씬 커요. 마28:20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 약속 때문에, 사실 그 앞에 있는 사명이 감당이 되는 겁니다. 

▲지금도 사실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가서 세례 주고, 제자 삼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에게도 정말 숨이 탁 막힐 만한 일인데 
2천 년 전 제자들은 어떻겠습니까? 근데 그들이 어떻게 그 일을 감당했을까요?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실현 되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그것은 사도들이 일이 아니고, 전적으로 주님의 일이에요. 

사도 바울이 '내가 자랑할 것이 있지만 그건 오직 하나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신 거 외에는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 

롬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게 사도 바울의 사역의 전부였어요.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역사는 실제였다는 거예요. 

초대교회 당시 상황은, 지금과 비교하면 뭐 말할 수 없이 열악했지요.
뭐 교회가 되겠나 싶었어요. 신학도 제대로 없었잖아요. 성경도 완성되지 않았잖아요. 
솔직히 그들이 어떻게 교회를 세웠고, 또 선교도 했을까요? 
그 비결은 예수님이었어요.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지금은 그때와 다른가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죠.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가운데 있겠다.' 
이 말씀을 우리가 다 믿습니다. 정말 믿어요.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 우리 다 믿어요. 
문제는, 믿는데 왜 두려우냐는 거예요. 믿는데 왜 그렇게 염려가 많냐는 거예요. 

'신학교를 가라, 선교사로 가라, 원수도 사랑하라, 항상 기뻐하라!' 
우리에겐 숨이 탁탁 막히는 말씀들입니다. 왜 그렇죠?

'주님이 함께 계시겠다' 하는 약속이 내게 실제가 아닌 겁니다. 
그러니 사명만 크게 느껴지고, 말씀만 너무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쉽게 느껴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주님의 임재이거든요. 
예수님 정말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세요. 

근데 그게 진짜 실제이면, 
우리가 이번 컨퍼런스 삼일을 지나는 동안에  *제3차 로잔 목회자 컨퍼런스, 2022

우리에게 있었던 마음의 무거운 짐은 다 사라지고 
우리 속에는 정말 뜨거운 사랑이 일어나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이 다 감사하고 
고난 조차도 감사합니다... 아마 그렇게 될 거예요. 

'주님이 지금 우리와 같이 계시다...' 주님이 우리 앞에, 이 컨퍼런스 가운데 계셔서 
우리가 오늘 주님과 정말 잠깐 개인적인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다면 
지금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부담, 또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상처, 근심, 분노가 
다 사라질 거예요. 

예수님은 능히 그렇게 하실 뿐이죠. 그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믿기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모든 염려가 다 사라진 사람, 불평 불만이 다 사라진 사람, 

모든 것에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 
은밀한 죄가 사라진 사람, 고난을 오히려 축복이라고 여기는 사람, 
여기 계신 2백 명만 그렇게 된다면...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개혁 안 되겠습니까? 

한국교회의 영적 대각성은 사실 어려운 문제가 아닌 거예요. 
2년이라는 시간에 그게 가능할까요?  *로잔대회까지 2년 남은 2022년 상황
오늘 당장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니까요. 

만약 우리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 주님의 약속이 
정말 믿어지는 그 일을 위하여, 시간을 더 썼다면... 

그동안에 신학교에 신학생들을 훈련할 때, 
우리가 선교사를 파송 할 때, 목회를 우리가 시작할 때,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주님과의 그 연합에 대하여 진짜 눈이 열리는데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썼다면 

아마 우리의 목회와 선교의 현장은 완전히 다른 양상 이었을 거예요. 
그 증거가 바로 조지 뮬러, 허드슨 테일러 그런 분들이잖아요. 

주님과 연합이 준비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엄청난 영향을 가져온 거잖아요.  

저는 그래서 예수 동행 운동을 합니다. 목표는 분명해요. 
주님과 함께 동행 하니까! 위대한 사명이 너무나 작게 여겨지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과 동행하니까요! 

'세상 모든 민족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 명령 자체가 너무 작게 여겨질 정도로... 그게 목표예요. 

▲자 로잔 대회를 앞두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단순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순한 믿음!

로잔운동의 중요한 정신 중에 하나가 '단순함'이에요. 
'이렇게 단순할 수가 있나?' 이럴 정도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선교도 제대로 되는 거죠. 
모든 것은 주님의 역사예요. 우리가 선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시는 거죠. 
우리는 그냥 주님만 따라가는 겁니다. 

존 스토트가 <제자도> 에서, 급진적인 제자도의 특징 중에 하나를 꼽은 것이 
'하나님에 대한 강한 의존성' 이라고 했어요. 

'하나님 없이 무언가를 하려는 시도야말로 정확히 죄 그 자체다.' 
하나님 없이 모든 걸 해보세요. 아무리 그게 선한 거든, 좋은 거든, 
하나님 없이 해보려고 하는 게 죄다... 그렇게 지적을 했는데, 
사실 이것이 한국 교회 부흥의 시작이었어요. 

1903년에 하디 선교사가 원산에서 선교사 수양회 때, 그가 공개 회개를 했습니다. 
이유는, 자기가 한국 선교 실패의 원인이라는 거예요. 

'아 세상에 그 하디 선교사가...'
그때 당시에 선교사 사회에서도 존경 받으시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그 선교사 수양회에 설교를 맡겼겠죠.

근데 어떻게 자기가 '한국 선교 실패의 장본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자기가 예수를 안 믿었다는 거예요. 이게 또 무슨 말입니까? 

하디 선교사가, 한국에 까지 온 의사가, 
한국에 20대에 선교사로 온 사람이, 자기 입으로 자기가 예수를 안 믿었다니요...
마20:20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를 안 믿었다는 뜻이죠.
믿기는 믿었지만, 실제로는 현실로는 안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디 선교사의 기록을 보면, 그가 지방의 한국 교회를 이렇게 순회하고 돌아온 날, 
그는 가슴을 치면서 울었다고 그래요. 

'도대체 이 한국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길 수 있을까? 
도대체 한국교회가 제대로 설 수 있을까? 
세례 받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주일도 제대로 안 지키고, 
그리고 노름 판에서 놀고, 그리고 음란한 일만 저지르고, 
교회 돈 횡령해서 그걸 가지고서 엉뚱한 데 써버리고... 
또 왜 그렇게 서로 싸우는지... 

이래서 한국 교회가 되겠나, 
한국에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하디 선교사의 기록에 보면 '당신은 출교요. 당신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오!'
이렇게 징계한 기록이 엄청 많이 나와요. 
그분의 기준에 보면, 도대체 한국 교인들은, '이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아니야!' 
조선 선교에 대해 실패했다는 생각, 자책감... 그게 너무 컸어요. 

근데 그날 선교사 수양회 때 전할 말씀을 준비하다가  *1903년 원산
성령께서 책망하세요 '너는 어째서 나를 의지하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가 세워지는 게 내가 하는 일인데...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또는 네가 배웠던 거 
그리고 네가 의사라는 거, 네가 선교사라는 거, 그 교만함을 가지고 
네가 예수 믿는 사람 만들 수 있고, 네가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어떻게 그렇게 너 스스로 노력만 했냐?' 

그게 말씀을 준비하다가, 성령께서 자기에게 깨우쳐 주신 책망을 듣고, 
거기서 고꾸라 졌어요. 말씀 준비하다 그는 통곡을 하고 울었어요. 

설교 준비가 안 된 거죠. 성령께서

'네가 회개한 것, 그걸 선교사들 앞에서 (설교 대신) 이야기해라' 
그래서 하디 선교사는 울면서 그 고백을 한 거예요. 

그러자 수양회에 참석한 선교사들이 다 '우리도 그랬다. 우리가 교만했고 
한국 사람들 무시 했고, 다 한국 사람 수준이 낮아서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고 
우리 노력으로 뭔가 해보려고 그랬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다.' 
그게 선교사들의 회개였어요. 

그리고 각자 교회에 돌아가서 한국 교인들에게 
주일 설교 때 그 고백을 했을 때, 
선교사가 울면서 '여러분이 예수 제대로 못 믿는 게 우리 죄 때문입니다.' 

얼마나 황당해요? '우리가 예수 제대로 못 믿는 게 선교사님 죄 때문이라니...' 

그래서 한국교인들도 뒤집어지고, 
그래서 시작된 회개 운동이 결국 1907년 평양에 그 회개대부흥이 된 겁니다. 

그때 당시 한반도에서, 예수 가장 잘 믿은 사람을 꼽으면 
아마 하디 선교사가 들어갔을 거예요. 근데 그가 통렬하게 자신을 회개했어요. 
'나는 진짜 예수 믿은 거 아니었습니다.' 

이게 지금 현재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인 거죠.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믿고 있나요?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고 있나요?' 

▲지금은, 우리에게는 위기의 시대에요.    *2022년 펜데믹 상황
사실 한국 교회가 풀어가기에는 진짜 난감한 문제들이 계속 다가오고 있습니다. 

동성애 문제도, 가정의 위기도, 저출산 문제, 교회를 떠나는 젊은 세대들... 
지금 온라인 비대면 상황에서의 새로운 목회 환경들, 
북한의 문제, 환경 문제... 어느 하나 사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나요? 
진짜 정말 숨이 탁 막히고 '이렇게 끝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예요. 

그러나 길이 항상 있죠.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시잖아요. 
그 분은 모든 것에 대한 답이잖아요. 그죠. 

그렇다면 진짜 우리가 지금, 그 단순한 믿음으로 서면,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 스스로가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되는 것만 필요한 거예요. 

이번에 태국 로잔대회 준비 모임에서, 아시아에서 아주 존경 받으시는 어느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자기가 20년 전에 한국교회 목사님을 만나면, 보니까 너무 자신감이 넘쳤대요. 
그렇게 강해 보이더래요. 뭐 못할 일이 없을 것처럼 보이더래요. 

근데 20년이 지나서 요즘에 한국 목사님들을 만나 보면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너무 겸손하시다고... 
그 20년 동안의 변화를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여기에, 그 말을 저와 같이 들으신 분들도 앉아 계세요. 

저는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이게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라고 느껴지면서 
너무 감사했어요. 그러면 준비가 된 거죠. 

우리 한국교회 목사님들, 보는 외부의 사람들이 보기에 
'한국교회 목사들이 너무 겸손해졌다...' 그러면 준비된 거예요. 
그러면 이제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세계 4차로잔대회가 한국에 사실 덜컥 왔어요. 
우리가 원해서 유치한 게 아닙니다. 그런 제안이 왔는데, 
이걸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이었기 때문에... (유치하게 된 면도 있어요.)

그러나 상황이, 단순히 4차로잔대회만 잘 우리가 서포트 하는 게 아니고 
이 일이 한국교회 전체를 새롭게 해서, 
진짜 세계 복음주의권의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전 세계 디아스포라 청년들, 한인 2세들, 그들이 단기선교로 한국에 올 때 

한국이 영적으로 살아나고 있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이 '주님과의 친밀한 하나됨'은 공동체의 문제예요. 

▲<하나님의 임재 연습 플러스>라는 책 서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진 에드워즈의 글을 인용해서 쓴 글인데요.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임재를 의식 하며 산다는 것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일 같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을 포기하며 삽니다. 
도무지 이룰 수 없는 일일 거라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계속 의식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지난 2천 년 동안 그리스도 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거의 발견되지 않은 걸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끊임없이 의식하는 일이, 
대부분 개인적인 차원에서 경험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교제하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있는지조차 모르니 
(공동체가) 추구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 바로 공동체적 노력입니다. 
다 함께 오직 그리스도 만을 알고자 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와의 친밀하게 동행하는 놀라운 일은 
개인이 혼자 추구하거나, 혼자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계는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제가 예수동행운동을 시작할 때, 어떤 분이 제게 그런 충고를 하셨어요. 
"유목사님, 그런 일은 혼자 하는 거예요. 
목사님 혼자 산 속에 들어가서, 주님과 친히 동행하는 것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에요. 
목사님 그렇게 하셔야지... 그거 떠벌릴 일이 아닙니다. 
그거 뭐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과 동행해야 된다고.. 일기도 써야 된다고..'  
그건 목사님이 너무나 모르고 하시는 일이에요.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온전한 연합을 하려고 하는 
그 사막의 수도사들과 같은 그런 영성은 매우 귀합니다. 
그렇지만 목사님, 자중하세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정말 마음에 아직 굉장히 깊은 아픔이 있었어요. 
'주님이 제게 강권하시는 것과, 그분이 하시는 이야기가 어떻게 조화가 될까?'
 
주님과 친밀한 동행은,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영성 훈련이에요. 
그러나 지금 현재 우리 한국은, 공동체가 함께 가야 합니다. 

그때 주님과의 어떤 친밀함이 이루어졌을 때를, '부흥'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공동체가 함께 주님의 임재를 같이 경험했을 때, 그걸 '부흥'이라고 말을 하는 거예요. 

그 일이, 지금 하나님이 우리 한국 교회에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시간이, 저녁 기도회 시간은 아니기 때문에 
제 마음 같아서는 기도회를 좀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통성으로 우리가 기도하고, 그 뒤에 그룹 나눔시간에, 
그때 그룹별로 이 문제를 좀 깊이 나눠주시면 좋겠어요. 

과연 4차로잔대회와 한국 교회는, 정말 하나님께서 이렇게 연결시키는 일을 시작하신 것인가? 
또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4차로잔대회 그때, 우리 한국 교회 메시지를 누군가가 던져주고, 
그때 우리 한국 교회가 각성 되어지는 게 아니고 
로잔대회가 열리기 전에, 한국 교회는 이미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단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로잔 대회를 유치하고, 저는 그 일은 한국교회에 주신 소명이라고 믿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도 좀 깊이 나눠 주시고, 의미있는 나눔이 있으면 
같이 좀 정리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같이 함께, 한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4차로잔대회 전에, 하나님, 한국 교회에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게 해 주소서. 
대회 전에 일어나게 하소서!'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전국을 돌면서 준비하고 호소할 때,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 일을 위하여 함께 연합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전체를 위한 대기도 운동이 시작되게 하소서. 
한국 교회가 진정 의미있는 영적인 대각성과 부흥을 경험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찬양하고 또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희들이 오늘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아주 중요한 모임을 모였습니다. 
주께서 저희들을 가리고 뽑아 이곳에 오게 하셨고, 우리가 듣게 하시고, 
또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신줄 믿습니다. 

아버지, 저희들의 마음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이 그저 우리가 단순히 행사를 진행하는 것, 
하나님 대회를 잡 운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한국 교회가 그토록 기도하고 또 눈물로 구했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북한 동포들을, 우리가 무슨 힘으로 복음으로 통일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 한반도에 하나님, 극적인 십자가의 영광이 나타나는 역사가 
한국교회 안에 주어져 있는데, 우리가 그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시대의 변화는 점점 더 어려워져 가는 여건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초대 교회 때도 복음의 강력한 역사를 이루었던 주님, 
지금도 그 일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저희들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하나되고 연합되게 하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온전히 하나 되게 하시고,
하나님, 주님과 동행하고 연합하는 거룩한 운동이 일어나게 하시고, 
로잔대회를 계기로, 한국교회 안에 하나님의 새로운 변화의 역사를 허락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깊이 만나주시고 만져주셔서 
새롭게 하시고 온전케 해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주님이 다 하신 것임을 믿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모아 주신 것도, 하나님, 우리의 숨쉬는 것조차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으면 되는 일이 아닌데 

하나님, 이 2백 명의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이렇게 모인 일, 
이 가운데 주님의 계획하심과 뜻하심이 있음을 믿습니다. 
4차로잔대회를 허락하신 것도, 주님의 놀라운 계획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너무 생각이 작고 부족하여, 
하나님의 그 역사하심을 감히 내다 보지 못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하나님, 북한이 여전히 우리에게는 큰 기도제목입니다.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복음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나님, 이 한반도에 정말 십자가의 영광이 
하나 되는.. 화해하는.. 그 십자가의 영광이 
이 한반도 땅에, 그 영광 가운데 드러나기 원합니다. 
한국 교회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게 하옵소서. 

4차로잔대회를 계기로, 그 동안의 교회를 위한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놀랍게 이루어 주시려고 하심을 고백합니다. 주님, 그렇게 해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이 연합되게 하시고 
세계4차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게 될 때에 
위기를 맞았던 교회가 영적으로 대각성이 일어나는 놀라운 사례의 주인공이 
한국 교회가 되게 해주시고, 
그 부흥이 전 세계 열방에 전해 지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