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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3장 애곡과 간구하는 소리

LNCK 2024. 7. 23. 10:58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예레미야, 애가

 

애곡과 간구하는 소리      렘3:21-25 2010.09.08.        출처, 정리

 

본 장은 유다가 북이스라엘의 멸망함을 보고도 (B.C.722)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유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심판의 필연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울러 회개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고,

진정으로 회개할 경우 여전히 언약 백성으로서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1-5절, 유다의 영적 간음,

6-10절, 유다의 완고함,

11-18절, 회개에 대해 약속된 축복,

19-25절, 회복에 대한 간절한 호소

 

※본 설교는 렘3장 중에서, 3;19~25절 단락을 주해한 것인데,

설교의 강조점은 2가지입니다. 

 

1)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21

산 위에서 애곡하며 간구하는 소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상에게 기도하는 애곡과 간구.. 라는 거죠. 나도 이럴 수 있다는 거죠.

 

2)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24

우상숭배하면 꽤나 부자되고 잘 살 줄 알았는데,

도리어 살림은 거덜나고, 자식농사도 망쳤다는 것입니다...

 

.............................

 

▲렘3:19~20절을 보시면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로,

남편과 아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19~20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런데 이스라엘이 배반합니다.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확실히 나를 속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여야 할 자들이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 우상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스라엘 온 산에 산당이 가득하였습니다.

 

그 결과 비옥한 산과 들이 되어야 할 약속의 땅이 벌거벗은 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3:21,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

 

아마 산꼭대기에 우상의 제단을 만들기 위해서, 나무들을 베어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산이 되기도 했고, 또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비가 안 와서, 산이 벌거벗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벌거벗은 산 위에서 애곡하며 간구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 산위에서 애곡하며 간구하는 소리가 주께 기도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돌아오라고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이들이 산 위에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은 21절을 보시면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잊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은 누구에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우상(바알)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곡하면서 구하는 것을 보면, 마치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의 대결과 같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제단위에 제물을 올려놓고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고 몸에 칼로 상처를 내면서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르짖으면 무언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한국의 교회가 부흥한다는 소식을 듣고 견학을 와서는

제일 많이 도전받고 가는 것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 철야기도, 금식기도, 수많은 크고 작은 기도원들을 보고서

우리도 기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국의 강사들끼리 한국에 와서 청중들이 냉랭하면

주여! 몇 번을 외치고 기도하자고 하면 금방 뜨거워진다고 하는 말들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회에 참석하면, 기도하는 그 순간은 무엇이라도 되는 것 같은데

돌아서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해서 은혜 받는 사람도 있었고, 또 못 받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장일단이 있었던 거죠.

다만 다분히 기복주의적 기도를 드린 것에 대한, 반성은 필요합니다.)

 

그러니 다음에 또 그런 기도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반복이 되다보니

이제 지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금요철야에서 심야기도회로

이제는 수요일 예배 후로 바꾸어갑니다. 그러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옛날에는 가난해서 부자 되기 위해서라도 부르짖었는데

이제 먹고 살만한 것입니다. 병 고침을 위해서 기도하였는데 병원에 가면 됩니다.

그러니 옛날에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던 내용들이 경제가 나아지면서

기도할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견학 온 사람들이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는지

그 내용을 제대로 보았다면, 그런 기도회를 본받자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기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산마다 고을마다 이상한 나무들만 있어도

제단을 만들고 신들에게 빌고 빌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예레미야는 돌아오라고 합니다.

 

▲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배역(반, 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쳐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응답을 예레미야가 대표로 합니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아니라 ‘우리’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예레미야의 기도 속에 포함될 남은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돌아오면서 하는 말이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라고 고백합니다.

 

나무나 돌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신과 신상들에게서 돌아온 모습이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라고 합니다.

 

이렇게 산 위에서 빌은 것은 ‘이스라엘이 부자되고 잘 살게 해달라고’ 빌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뭐하러 그렇게 고생하면서 산 위에 올라가서 빌겠습니까?

그렇게 빌은 것은, 주변 나라들을 보니까, 두로와 시돈도 그렇고, 앗수르도 그렇고,

이방 신에게 빌었는데, 그들이 잘 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보가? 우리도 그들처럼, 그들 신에게 빌어보자’ 한 거죠.

 

▲3:23절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작은 산들과 큰 산에서 떠드는 일이 무엇입니까?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 기도하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이방 신앞에서 풍요를 구하며 소리내어 기도하는 일을..

예레미야가 조소하는(비웃는) 것입니다.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 땅의 수많은 산들에 기도원들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도심 곳곳에까지 파고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직도 자기의 소원을 빌어야하는 자들이 많기에 여기저기에 세워진 것입니다.

(1980~90년대에 그런 곳이 제법 많았습니다. 큰 시장에도, 선수촌에도 있었죠)

 

작은 산과 큰 산에서 떠드는 일이 어떤 것입니까? 온갖 축복 대 성회를 합니다.

은사를 받기 원하는 사람, 병 고침을 원하는 사람, 사업이 안 되는 사람,

가정에 불화가 있는 사람들 다 오라고 합니다. 기도하여 능력받자고 합니다.

 

여름휴가도 명절도 특별축복성회에 참석하여 기도하여 복을 받자는 것이

‘큰 산과 작은 산에서 떠드는’ 일입니다.

기도원만이 아니라 교회라고 이름 하는 곳에서도 이런 집회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과거를 뒤돌아보시면 보일 것입니다.

 

(*이런 교파를 초월한 축복대성회에 가서 또 은혜받는 사람들이 일부 있기도 했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기도하러 가서, 삼상1~2장의 한나처럼 은혜받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매금으로 매도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 흐름은 기복주의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자연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2:20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높은 산 푸른 나무 아래에서 몸을 굽혀 행음한다는 것은,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런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돌아오라고 합니다. :22

그런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예레미야만 대답합니다. :22b~

 

▲3:24-25절입니다.

24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25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부끄러운 그것 즉 우상이,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소떼와 양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다 집어 삼켰다고 합니다.

 

즉 바알 숭배로 그들이 멸망하여 양떼와 소떼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다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풍요를 약속하는 신 바알을 따라가면, 이방나라들처럼 꽤나 부자가 될 줄 알았는데,

자기 산업인 소떼와 양떼를 다 잃고, 심지어는 아들과 딸들까지 다 잃게 되었다고 한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라고 합니다. :25

 

이것이 당연함은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출애굽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범죄 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유다가 바알 우상이나 다른 우상을 섬긴 것은,

두로나 시돈, 앗수르 등이 우상을 섬기는데도, 잘 살고 국력도 강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좀 그렇게 부자도 되고, 강한 나라도 되어보자는 것이었죠.

 

물론 오늘날에도, 우상을 섬기는데도 부자가 되고, 건강하며,

자식들이 잘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큰 돈을 내서 절을 지어주기도 합니다.

그 목적은 사업이 더 잘 되게 하기 위함인데, 그래서 진짜 사업이 잘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버린 자식들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를 하는데도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를 하는데, 잘 된다는 것이 좋은 게 아닙니다.

참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상숭배를 하는데도 잘되지 않고

자기가 원한 소원과 반대의 결과가 옵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24b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25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과 하나님의 택함이 없는 백성과는

삶의 원리가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성공 원리와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애굽백성의 성공 원리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우상 숭배를 하면 안되는데

우상숭배를 심하게 해도 잘사는 나라가 있지 않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라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은 우상을 섬겨도 잘되는데

그건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잘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인기 있는 발람의 교훈과 https://rfcdrfcd.tistory.com/15975160

 

※우상숭배하고 안 하고의 증거 https://rfcdrfcd.tistory.com/15973653

 

 

.................. 아래는 렘4장인데, 위의 설교와 계속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예레미야의 이 고백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4:1-2절입니다. 돌아오려거든 내개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죄가 없다고 한 것은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들이 기도도 하고 종교적인 행위도 하지만 그러나 마음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우상을 섬기면서 여호와께 돌아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증한 것 즉 우상을 버리고 내게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이기에 나무나 돌에다가 빌던 사람들이 그 마음으로 교회로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우상숭배입니다. 주께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돌아가는 것입니까? 3-4절에서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4:3절에서 묵을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합니다.

묵은 땅이 어떤 곳인지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다 압니다.

 

최근에 신안의 증도라는 곳에 갔다 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90%가 넘는 곳이라 합니다.

그곳에서 순교한 문준경 여전도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사가 운영하는 민박집 주변의 밭을 보았습니다.

 

봄에 밭을 갈고 참깨를 심었는데 일손이 부족하여 잡초를 뽑아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참깨보다 잡초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런데 묵은 밭은 이런 밭과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며

오늘 우리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태어나면서부터 장착이 되어 있는 나의 우상성이

얼마나 뿌리 깊이 내린 묵은 땅인지 갈아엎으려고 하면

호미나 괭이가 튕겨 나올 지경입니다.

 

렘1:9-10절에서 예레미야의 사역이 이렇습니다.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의 입에 주십니다. 그것으로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능력도 이 말씀을 받는 자의 능력도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자기는 아이라서 늘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예레미야를 장악하여 선포하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회개하고 돌아올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 것이며

듣는 것은 사람의 말과 사람의 야망과 성공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살아있는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어떤 날선 검 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심령과 관절과 혼을 찔러 벌거벗은 듯이 드러냅니다.

이것이 묵을 땅을 기경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4:4절에서 ‘마음의 가죽을 베라’고 합니다.

몸의 할례는 사람이 할 수 있지만 마음의 가죽을 어떻게 베어낼 수가 있습니까?

마음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의 가죽을 베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오직 묵을 밭을 기경하는 것도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도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주께서 이루어내셔야 합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하였습니다. 말세에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의 내용을 성령을 통하여 부어주십니다.

그러면 묵을 땅도 기경이 되고 마음의 가죽도 베어집니다. 이 은혜를 구합니다.

 

 

 

◑절별 해석 (참고 자료)   .........................

 

1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선 본장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앞에서 2장의 배경을 살펴보았던 바,

그것은 주로 요시야의 개혁이 무르익어 갈 때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됨과 동시에 크게 증폭된 회개 운동이

선지자의 예리한 통찰력에는 너무나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비친 듯하다.

 

즉 유다는 개혁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여호와로부터 등을 돌렸던 것이며,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예레미야는 이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재혼한 경우

첫 남편과 다시 결합하지 못한다는 율법의 금지 조항(신24:1-4)을 내세워

유다의 잘못을 징책하고 있는 것이다.

 

2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이 땅을 더럽혔도다'

유다 민족의 배도에 대해서는 높은 산 어디에서나 그 증거를 목도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이처럼 산 위로 올라간 것은 신들과 더 가까이 접촉할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그리고 이들이 우상 숭배의 부도덕한 의식에 빠져드는 모습을

사막의 아랍인 대상을 이 숲속에 숨어 약탈하려는 행동으로 비유하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보다 직접적으로는 음행할 기회를 기다리고 앉아 있는 창녀의

모습과 닮은 것이었다(창38:14, 잠7:12-15). 예레미야는 이같은 더러운 범죄 행위를 가리켜

땅을 오염시켰다고 지적한다.

 

3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창녀의 전형적인 모습과 그 행위에 대한 처벌로서

가뭄이 든 것을 말하고 있다. 단비(큰 비)10.11월에 내리는 이른 비를 말하는 것으로서

토지 경작의 준비에 필요하였으며, ‘늦은 비’는 3~4월에 내리는 비였다.

그 이후 여름 기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다.

여기서 저자는 그의 사역 초기에 있었던 팔레스틴 지역의 가뭄을 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4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이스라엘은 수십 년간 하나님을 무시하다가 가뭄이 닥쳐오자

비로소 옛날의 행복했던 시절에 사용했던 다정한 말로 여호와께 호소한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보호자'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의 원어 '알루프'는 흔히 '친구'라고 번역되며

때로는 '길들여진 짐승', '황소', '남편', '가장'등의 다양한 의미로도 쓰였다.

 

아마 예레미야는 대단한 주의를 기울여 이 단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말속에는 여호와의 자비를 악용한 이스라엘이 마치 응석과 고집만 늘어난 아이처럼

제멋대로 가증스러운 길로 나아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5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

 

'노를 한 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이스라엘의 얄팍한 신앙의 일면이 엿보인다. 즉 그들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와 항의만 하면 자기들의 무수한 악행을 눈감아 주시고 재빨리 구원해 주실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번지르르하게 말만 할 뿐 악행을 그치지 않고 있다.

 

6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7 그가 이 모든 일들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아직도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오히려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이 구절에는 이스라엘이 이방 제사 의식에 깊이 중독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로 인해 몇가지 시련을 당하고 난 후 :6

여호와께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한편 남유다는 이스라엘의 범죄와 멸망에 넋을 잃고 흥미 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유다의 반응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그를 내쫓고'

여기에는 B.C.722년에 사마리아 성이 앗수르 군대에 의해 함락되는 역사적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왕하17:1-6).

그러나 사마리아 멸망 전에도 이미 북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의 침공에 시달렸다(왕하15:19).

디글랏빌레셀 3세(B.C.745-727년) 당시의 앗수르군은 이스라엘 대부분의 도시들을 정복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왕하15:29).

이는 북이스라엘의 배도에 대한 값비싼 대가였다. 그러나 유다는 언약을 어진 이스라엘의

심판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에 빠져든 것이다.

 

9 그가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돌과 나무로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본절의 주체는 8절과의 연관 속에서 보면

유다인 것 같고, 10절과 관련지어 보면 이스라엘인 듯하다.

문맥상 전자로 보는것이 더 자연스럽겠다.

유다의 배도는 아주 심각한 것이어서 여호와의 언약 조항을 잊었을 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편 가나안 종교에 있어 주요 관심사는 풍요와 성(性)에 있었는데,

따라서 그 제사 의식도 주로 땅, 짐승, 여인의 다산(多産)을 빌기 위한 목적에서 수행되었다.

본 절에 언급된 돌과 나무 역시 그들의 주요 숭배 대상이었다.

 

10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진심으로...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북이스라엘이 언약 파기로 인해 심판을 초래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유다는 진심으로 여호와께로 돌이키지 않고 그 흉내만 내었다.

아마 예레미야는 여기서 요시야의 개혁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B.C. 622년 이후와 관계된다.

유다는 므낫세 통치 이전 (즉 히스기야 때까지는)

즉 사마리아 멸망 때까지는 이스라엘보다는 우상 숭배에 덜 물들어 있었다.

 

그 이후 (므낫세 때부터) 유다의 종교적 타락은 급속도로 심각해졌다.

그러나 요시야의 개혁과 더불어 유다는 다소 바른길로 들어서는 듯하였으나

예레미야에게는 이것이 피상적인 것으로 보여졌다.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아 종교적 행사는 활발했을지 모르나 참된 회개는 부족했던 것이며

예레미야는 이에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5:20-31, 6:16-21, 7:1-15).

 

이 구절의 연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율법책이 발견되기 전,

즉 요시야가 그의 개혁 운동을 강화하기 이전에 나온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보다는 종교 개혁 조치의 초기 실패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고

이 구절을 B.C.622년 이후의 내용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성전에서 율법책 발견

 

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북)이스라엘은 반역한 (남)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여기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비교 논쟁이 언급된다.

즉 배역한 이스라엘이 패역한 유다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범죄했다는 것이다.

왜냐면 유다는 북이스라엘이 당한 사건으로 경고를 받았음에도, 자기 길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12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언어 유희가 쓰였다. 그래서 이를 살려서 번역하면

'돌아선 이스라엘아 돌아서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자기 백성이 뉘우치고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하나님의 부성애적인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내용이다.

 

여호와는 자비하시고 그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신다.

한편, 여기에는 사마리아에 임한 심판이 너무 심했다거나 또는 적절치 않았다는 의미는 전혀 없다.

따라서 유다가 더 악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용서받는다는 논리도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서 지적되고 있는 핵심은 유다의 오랜 죄악에도 하나님이 참고 기다렸다면,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만 하면 어떻게 용서함을 받지 못하겠는가 하는 내용이다.

 

13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으로서 세 가지 회개 사항이 지적되고 있다.

'듣지'에 해당하는 '솨마'는 그냥 말씀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지적의 배경에는

순종하면 축복이요, 불순종하면 저주라는 신명기적 언약관이 자리잡고 있다(신28:1,2,15).

 

여호와의 언약 백성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사항은 그 언약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외 다른 방식에 의해서는 언약 백성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남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알'은 '주인(남편, 주)이 되다'라는 뜻으로

가나안 신 바알과 음가가 같은 동사를 사용한 언어 유희인 바,

하나님만이 참된 보호자가 되실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나는'(아노키)이란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신부로 삼아주신 것이다(2:2, 호2:2).

 

'하나와 ...둘을...데려오겠고'

이 말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 있는 것을 전제로 한 지적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체적인 귀환을 가리키지 않고

각 성읍에서 하나와 각 족속 중에서 둘을 데려오는 정도의 극히 부분적 귀환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가장 자비로운 부르심에 응답하여 회개하는 자들이

소수에 불과할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여기서 북이스라엘 사림들의 귀환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11절부터 이어지는 바 ‘북왕국’에 대한 예언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시온'은 통일 왕국 시대에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다.

북쪽 포로들이 시온으로 돌아오면 이스라엘 전체가 다시 통합될 것이며

성소 역시 하나가 되어 정치적, 민족적 분단이 제거됨과 동시에

하나의 백성, 한 분 하나님만이 있게 되는 것이다.

 

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주리니' 회복 시대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가 언급되고 있다.

즉 다윗처럼(삼상13:14) 여호와의 마음에 합하는 통치자가 여호와의 뜻에 따라

백성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23:1-6, 겔34:23, 37:24).

 

한편 예레미야는 여태까지 심판을 선포하다가 여기서는 은혜 장면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을 엄숙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이러한 은혜로운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인기를 누리던 낙관적 선지자들은 심판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심판 이후에 도래할 은혜 역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심판이란 없었고 오직 '값싼 은혜'만 있을 뿐이었다(27:16, 28:2-4).

 

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회복시대의 그림이 이제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묘사되고 있는데

첫째는, 주의 백성이 '이 땅에서 번성하는 것'이요,

둘째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도 생각지도 만들지도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1차적으로 포로 귀환 후의 상황에 관한 내용으로 보기도 하지만,

예언의 복합 성취라는 관점 및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로 볼 때 메시야 시대의 상황에 관한

언급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1) 구원받은 남은 자의 증가와 번영은 메시야 시대의 특징으로 묘사되는 사항이다(23:3 참조).

(2) 언약궤는 이스라엘 종교의 최고 상징이었던 바 그것이 필요없게 된다는 것은,

옛 신앙의 청산과 새로운 예배(요4:23)의 시대가 열림을 암시한다.

언약궤는 B.C.586년 예루살렘 함락 당시 소실되었거나 바벨론에로 탈취되어 갔을 것인데,

52:17-23의 전리품 목록에서 빠진 것으로 보아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17 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16절에 이어, 선지자는 예전에 언약궤가 지녔던 의미 곧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보좌(왕하19:14,15, 시80:1)로서의 의미를 예루살렘 자체가 갖게 될 것임을 예언한다.

 

이 또한 1차적으로는 포로 귀환 후 재건될 예루살렘 성전에 언약궤가 없지만

예루살렘이 여호와 신앙의 중심지가 될 것임을 에언한 내용이며,

더 나아가서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영적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하겠다(갈4:26, 히12:22).

 

18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그들이 함께 이르리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재통일에 대한 약속은 이미 B.C.8세기 선지자들이 선포한 바 있는 주제이다(호3:5, 미2:12).

이러한 재통일은 두 왕국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가는 고난을 겪은 후에야

마침내 이루어질것이다(사11:1-16, 겔37:15-28).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보아 후대인 포로기 이후에 삽입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용어나 사상이 예레미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23:1-8).

 

한편 본절의 예언은 1차적으로 포로 귀환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보다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선택하신 바 메시야의 은혜로운 통치하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사11장, 겔37장, 슥8장 등).

 

19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여호와께서 바라시는 바는 당신의 백성이 여호와께 순종하며 언약 규정의 한도 내에 살게

하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그들에게 축복의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다(신28:1-6, 30:9,10).

 

'나의 아버지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구약의 주요 주제이다(호11:1).

 

20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 같이'

이스라엘의 죄악이 다시 배도와 간음으로 지적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남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 사상은 19절과 동일하다.

이 백성은 재앙을 만나면 구원을 호소하지만(4절),

그 순간만 모면하면 부르짖은대로 행동하지 않았다(5절).

 

21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어떤 학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 숭배를 한탄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호소하기 위해 높은 곳에 모여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의 순간을 맞아 화급하게 부르짖는 장면을

조롱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울부짖으면서도 바알 숭배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요시야의 개혁으로 한때 그곳에 산재해 있던 바알의 단들이 모두 파괴되었지만

이들은 실재하지 않는 신들을 그리워하며 이곳에 모여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울부짖음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이 있을리 만무한 것이다.

 

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이 구절은 앞 단락이 끝나고 뒷 단락이 시작되는 중간부분이다.

여기에는 죄에서 돌아오라는 여호와의 의미 심장한 부르심이 기록되어 있고

본절 하반절(보소서~) 에서 25절까지는 이스라엘의 회개 장면이 시작된다.

 

23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은...여호와께 있나이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고백 장면이 묘사된다. 이 고백에는 현재 당하고 있는 그들의 곤경이

무엇 때문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여호와가 그들의 유일한 참 하나님이란 고백은

그들이 근본적인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으로서(출20:2-6, 신5:6-10, 6:4),

이제 여호와를 그들의 주인으로 인식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고백은 여호와의 언약 갱신과 다름없다.

이는 여호와의 언약 사항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4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부끄러운 그것이' 이는 바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죄의 고백과 더불어 여태까지 섬기던

바알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 말의 원어는'보쉐트'로서 구약 성경 곳곳에 나타난다.

 

'우리의 어렸을 때로부터' 이는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형성되던 출애굽 사건 이후를 가리킨다.

바알을 '수치'로 여긴 회개자들은 그들 조상들로부터 시작해서 가꾸고 수고하여 온

모든 것을 이 부끄러운 것이 삼켜버렸다고 선언한다.

즉 바알 숭배로 그들이 멸망하여 양떼와 소떼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다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25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본절에 서술되는 회개 장면은 순종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들의 회개의 내용은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으로서

예레미야가 거듭 지적하는 주제이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범죄했다는 자각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자각은 여호와의 주권과 언약의 요구 사항을 거부했다는 고백이 포함된다.

 

하나님은 시내 광야에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19:5)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음의 회개가부족하였다. 즉 회개에 대한 외적 고백과

그들의 신체적인 행동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4:1-4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