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도 인기 있는 발람의 교훈과 이세벨 계2:18~29 출처휘발
*원제목 : 간악한 이세벨과 교회의 야합 *관련글 : 우상숭배하면 망한다
◑버가모 교회의 “발람의 교훈” 계2:14
서머나 교회에는 ‘사단의 회’가 있었는데,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회 정도가 아니라,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되는 겁니다.
왜 그런 얘기를 하게 됩니까?
-발람의 교훈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는 니골라 당의 교훈인데
그 내용이 발람의 교훈과 똑같습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은 똑같은 것입니다.
내용도, 이름도 똑같습니다.
발람은 히브리어로 정복한다는 뜻의 ‘빌’과 백성이라는 뜻의 ‘암’이 합쳐진 말입니다.
니골라당은 니코+라오스인데
니코는 이긴다는 뜻이고 라오스는 백성이니까, 백성을 이기고 정복한다는 뜻입니다.
그 교훈의 중독성이 너무 강해서, 백성들을 쉽게 잠식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버가모 교회에서는 니골라 당이라 불리웠지만
그 의미가 구약에서의 발람과 같다는 겁니다.
발람은, 바알브올 사건의 주인공으로, 다시 말하면 ‘바알우상’입니다.
정리하면 발람의 교훈=니골라당=바알우상!
▲발람의 교훈, 발람이 가져온 바알 우상은.. 어떤 것입니까?
종교와 정치와 생활이 통합되어 있던 그 시대에서,
<종교/신앙>과 <삶>을 분리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계속 이름을 너희가 불러라, 이름을 붙잡아라.'
그걸 버리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래! 하늘의 하나님을 붙들어라, 그러나 현실 속에서 살 때는
이 세속의 삶은, 그 삶의 방식이 따로 있는 것이다.’
‘세속의 삶에서는 우리가 돈을 벌어야 되고 잘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풍요를 누리고, 번성하며, 다 자손들이 형통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그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을 따른다는 게 뭐가 나쁜 거냐?
그 방식이 바로 뭐냐 하면, 바알숭배다’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잠식한 것입니다.
민25장 당시에, 광야에서,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 남자들과 음행을 시작했습니다. 민25:1
이제 관계한 여인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뭘 요구했겠어요?
한 마디로 ‘돈 벌어오라’는 것입니다. ‘먹고 살아야 된다’는 것이었지요.
‘하나님은 그대로 계속 믿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은 많이 벌어와야 된다는 식으로.. 추측이지만
세상 물질주의(바알신앙)를, 이스라엘에 주입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오는 남자를, 최고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이런 바알주의 분위기가, 점점 더 잠식해 들어온 것이지요.
모압 여인들과 혼합 결혼이 이루어지는 그 바알브올 사건 때 (민25장)
여호와 이름을 버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붙들고 있지만,
세속의 삶에서 필요한 삶의 방식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
그런데 버가모의 발람과, 두아디라의 이세벨은 공통점이 있어요.
둘 다 바알 숭배에요.
발람은, 모압 광야의 브올 지방에서 바알 신앙을 전파했다면,
이세벨은, 지중해 연안 페니키아 지방에서, 바알신앙을 이스라엘에 직수입해 왔습니다.
둘 다 풍요와 다산, 쾌락 등의 현세적 가치를 추구한다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알은 정말 교묘합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데, 천재입니다. 물론 사탄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알을 섬기고,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면서도,
그게 그거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위키피디아(백과사전)에도, 바알은 자기 본질적 정체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저 농경신 정도로만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수 백 번 나오는 바알이, 거의 연구되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발람은/바알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대로 불러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에 대한 예배를 중단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한 겁니다,
버가모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있었다 겁니다. ↓
계2:13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의 실상은,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발람의 교훈,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라 가지고, 음행과 우상의 재물을 먹었다는 거예요.
똑같이 오늘의 교회(신자)도, 바알신 숭배의 음행과 우상의 재물을 범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발람의 교훈과, 이세벨의 교훈이 같은 점은
풍요와 다산을 주장하는 그 바알 신을 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발람과, 이세벨이 다른 점은 뭡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이세벨을 용납했다 그럽니다, 용납했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보세요, 발람은 모압왕 발락에게 어떻게 훈수를 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건드리지 말고,
대신에 세속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바알 숭배를 제시해라.’
그래 갖고 여자들이, 그 바알 숭배를 하는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초청을 합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을 참여를 시킵니다.
그러니까 선민이, 바알숭배 쪽으로 온 거에요.
근데 이 이세벨과 아합왕의 결합은 어떤 의미를 갖느냐?
선민 가운데로 바알숭배로 뼈까지 쪄든 이세벨이라고 하는 여자가 왕비로 들어왔습니다.
발람의 교훈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여하는 거예요,
이 세속의 삶의 방식을 터득하라고 하는 그런 권유를 따라 참여한 건데, (약함)
이세벨은 안으로 밀고 들어온 겁니다. (강함)
일종의 점층법입니다.
버가모의 발람의 교훈보다, 두아디라의 이세벨이 더 강한 '바알주의'이지요.
▲그럼 둘은, 어떤 차이를 갖게 되느냐?
발람의 교훈, 즉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를 때는,
우리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어요,
‘교회 안에는 교회 원리가 있고, 세상 안에는 세상 원리가 있다’ 그대로 따라 간다는 거예요.
근데 이세벨과의 결탁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마음속에 풍요와 다산, 부자 되고 싶은 마음과
이 땅에서 번성하고 싶은 그런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이 실현되는 것을 위해서, 당시 아합 왕 때, 즉 이세벨 때,
나라 전체가 바알 우상숭배로 빠져들게 된 것이지요.
버가모 교회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일부가 바알 신앙을 받아들였다면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을 용납해서
교회 전체가 바알 신앙으로 도배를 해 버린 겁니다.
계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도다.
봉사를 안 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두아디라 교회는, 그 목적이 ‘이세벨을 용납해서’
바알 신앙, 즉 풍요/다산/쾌락을 목적으로, 여호와 신앙이 혼합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세벨과의 결탁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네가 이루고 싶은 이 세상에서의 꿈과 비전이 있지 않느냐?
부자 되고, 수(數)적으로 번성하고,
네가 하는 모~든 일이 다~ 이 땅 위에서 형통하는,
그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까지도 동원하라는 얘기입니다.
결국, 이세벨 때 북왕국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아닙니다,
성전 그대로 있고, 제사도 그대로 다 드린 거예요.
◑바알 신앙이 넘쳐나는 오늘의 교회
▲우리가 간증을 해요, 근데 간증이 대부분은 어떤 간증이냐 하면, 이렇게 간증을 합니다.
‘사업이 망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먹고 살길이 없었습니다.
내 주머니에 남아 있는 건 단 돈 10만원 있었습니다.
근데 이 10만원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10만원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갔더니
이제 내가 이렇게 갑부가 되었습니다.’
듣는 회중들이 아멘~ 아멘! 합니다.
‘내가 한 달 동안 금식하며 부르짖었더니 암 덩어리가 쑥~ 빠졌습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이 설교하실 때, 이런 예화를 들어요.
‘오프라 윈프리가 정말 구겨진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하나님 믿으면, 이렇게 지금 별 볼일 없는 개천 같은 상황이라도,
개천에서 용 나는 것처럼, 우리가 용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
성공하는 자리에 서게 됐다는 얘기를 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데요..
또 그런 앞에 있는 간증들, 하나님이 역사해 주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가 이렇게 지금 이렇게 번영하고 성공한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이런 간증이 뭐가 잘못된 것인가 하면,
현세적 가치로, 자기 만족과, 자기 인생 목표를 삼는다는 겁니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거지요.
오프라 윈프리, 알렉산더, 칭기즈칸, 스티브 잡스.. 그들은 거의 신앙이 없습니다.
칭기즈칸은 수백만 명을 도살한,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을 범했습니다.
그래도 성공만 하면, 신앙의 롤 모델로 둔갑합니다.
그 세상 성공이, 기독교의 가치입니까? 아니죠, 세상의 가치/바알 신앙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주님의 모습을 ‘불꽃같은 눈으로’라고 표현이 되고 있는 겁니다.
그 눈으로 봐야, 이세벨의 영향력이 분별됩니다.
계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우리가 그 불꽃같은 눈을 가지지 못하면,
뭐가 잘못됐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이세벨과 결탁된 신앙,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는 바알 신앙을, 신앙세계로 끌어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도 드립니다.
더 열심히 드릴 수도 있습니다. 2:19참조.
근데 알맹이가 빠져버렸습니다, 알맹이가 변화 돼버렸어요.
근데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일어난 유명한 사건이 바로,
욥을 두고 하나님과 사탄이 내기를 한 사건입니다.
자식이 열 명이나 있어요, 다 잘되고 자식들이 화목합니다,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동방에서 제일가는 자라고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탁월한 친구들이 주변에 존재합니다.
완전 성공한 사람입니다.
자! 이 상태를 놓고, 하나님과 마귀가 대화를 합니다.
나를 공경하는 욥을 보았느냐?
사탄이 말합니다, 그게 무슨 공경입니까?
나한테 그런 재산 주시고, 나한테 그런 잘되는 자식 주시고,
나한테 그런 명성과 인기.. 그런 걸 다 허락하신다면, 나도 공경하겠습니다.
이런 뜻의 말로 하나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건드립니다, 사탄이.
‘give and take라고,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꿈도 못 꿀 정도로 많은 걸 주셨으니까
욥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거지, 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그게 아니에요.
욥이 이 모든 것과 관계없이,
이 모든 것보다 앞서서 나를 좋아하고 나를 사랑하고 있다!
사탄은 ‘아니다’
‘그러면 시합해 보자!’ 해 가지고
욥의 모든 걸 다 뺏어 갑니다,
자! 이 상황과 비교해 보는 거예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무너무 기쁘고 감격하게 살아갑니다.
제가 그런 선배 목사님을 봤어요.
유명한 목사님인데, 어려움을 많이 겪다가, 새로 교회를 시작한 거예요.
근데 그게 잘됩니다, 그러니까 뭐라 그러냐 하면
‘요즘 나는 꿈속을 걷는 것 같다’ 이렇게 얘기를 하십니다.
자! 이런 모든 간증들, 여기서 뭐가 문제입니까 여러분?
‘불꽃같은 눈’이 아니면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뭐가 잘못된 겁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이 많은 풍요를 주셨습니다,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이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바알의 우상과 간음하고 있는 거잖아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행음과 우상재물은 2:20, 21
도덕적으로 성적인 쾌락이 좋아서 추구하느라고 선을 넘는 행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상재물과 연관해서,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마음에서 나온 행동들인 거예요.
즉 영적인 행음/간음입니다.
풍요와 다산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론입니다.. 그게 영적인 간음이라니까요!
도덕적인 탈선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주석가들이 오해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바알신앙이, 바로 ‘간음’인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바알을 섬기며 풍요를 바라는 것 자체가.. 영적 간음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육적 간음도 쉽게 따라오지만요!
하나님 말고
이 현실 세계 안에 있는 어떤 가치들 때문에 기뻐하는 게.. 간음입니다.
그게 마음에 들어와서 만족하는 거.. 그게 간음입니다.
이 ‘영적 간음’을 모르는 거예요. ‘불꽃 같은 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뭐라 그래요?
너희의 사업, 사랑과 믿음과 인내와 섬김이 많다, 2:19
무슨 얘기냐 하면,
사업이라는 건, 교회 활동 전체를 말합니다.
근데 사랑과 섬김과 인내와 믿음 이 모든 덕목이, '사업'에 다 포함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장에서도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잊어버리지 않는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내가 영적으로 간음하도록, 그 간음을 완성시켜주는 그런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지 않고, 돈 많이 벌어서 기뻐하고.. 그래서 간증하고 있는 겁니다.
그 간증은, ‘내가 이세벨과 결탁해 가지고 영적으로, 영적인 간음을 행하는데,
이 영적인 간음을 하나님께서 잘 도와주셔서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쁜 자가, 그 기쁨 안에서 사업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쁨을 막지 않아요, 만족을 막지 않아요, 행복을 막지 않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생긴 기쁨, 마음을 시공간 바깥에 둠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주님 때문에 생긴 기쁨 안에서 자녀를 키울 수는 있습니다.
근데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가 잘됐기 때문에 기뻐서 하나님께 고마워하는 거는,
하나님은 더 이상 기쁨의 근거가 아니고 내 자식 키우는 가정교사입니다.
사업 잘되게 해 주는 모사꾼에 불과합니다.
내 기쁨의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기쁨의 이유가.
풍요와 다산 아닙니까? (기쁨의 이유가, 하나님, 주님의 동행, 임재, 친밀함이 되어야지요)
이 풍요와 다산을 위해서 하나님을 하늘에게 끌어내린 거예요.
이게 이세벨이고 이세벨의 간악함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조차도, 이 세상에서의 풍요와 다산과 번영과 인기를 부흥을 위해서
쓰임새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참 신이겠느냐?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돈 안 벌리면
‘하나님이 계시는 거야? 안 계시는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예화 들 때 조심하세요.
그래, 오프라 윈프리가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성공한 자리에 섰으니까,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우리 기독교인과.
그게 기독교인의 인생입니까? 왜 그런 예를 들어요?
왜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 땅 위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예를 드는 겁니까? 그게 끝입니까?
아! 이건 간음의 예를 드는 거예요, 간음의 예를.
예수 안 믿어도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 쌨어요.
그게 다~ 예화 거리가 되면 되겠습니까? 안 되는 거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회개해라!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1
‘회개해라! 회개하지 않으면 침상에 던진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22
침상이라는 게 뭐에요?
완전히 쓸모없이 병든 인간으로 만들어서 끝장내겠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세벨과 간음하는 모든 자들의 자녀를, 이세벨과 간음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데,
그 자식들에게 진짜 죽는 꼴을 보여주겠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발로 밟아버리겠다는 거예요.
두아디라 교회에게, 예수님은 ‘주석과 같은 발’을 가지신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2:18
주석(주물, 놋)과 같은 발이 뭡니까?
그 가증스러움을 참을 수가 없으니까 아예 밟아버리겠다는 겁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무서우면서 한편으로 그 정도로 주님은 자신이 있으신 거예요.
뭐로 자신이 있으신 겁니까?
하늘에 있으시면서 하늘에 있으신 당신으로 인해서
우리가 어떤 환란과 역경이 처해져도 나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게,
이 지상에서 어떤 환란이 주어지고 어떤 실패 같은 상황이 주어져도
기쁨과 행복에 절어서 살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는 자신이 있는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모질어 보이는 말씀까지 하시면서 회개하라고 촉구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내 마음을 지금 어디다 두고 있는 겁니까?
아직도 내 마음에 기쁨의 이유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입니까?
간음하고 있는 겁니다, 이세벨과 더불어 동침하고 있는 겁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하나님 때문에 기쁜 상태에서 사업도 하고
하나님 때문에 기쁜 상태에서 자식도 키우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일어나서 진짜 촛불들이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삶이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
주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볼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위해,
언제나 우리는 기도를 해야 될 줄로 압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불꽃같은 눈이 아니면 그 잘못을 찾아낼 수 없는
참으로 교묘하고 간교한 음행의 자리로부터 우리가 온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어찌하든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풍요에 대한 다산에 대한 번성에 대한 꿈과 비전 대신에
주님의 십자가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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