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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안으로의 개혁 시51:10~12
지방에 있는 어느 기독교 계통 고등학교에서 3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마 거창
이 학교에 부속된 교회가 있었숩니다.
10월 마지막 주일이 되어서 이 교회에서 종교개혁기념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1부 예배와 2부 예배가 있었는데
1부 예배에서는 20대 후반의 국어교사가 설교를 했고, *후에 유관지 목사
2부 예배에서는 50대 후반의 교장이 설교를 했습니다. *전영창 교장
1부 예배 설교를 맡은 젊은 교사는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인데
한국 교회는 이렇게 타락했고, 이런 점을 고쳐야 한다고 열을 올려 설교했습니다.
이 젊은 교사는, 교회와 교파 안에서 비합리적인 일들로 어려움을 겪고 실망을 하고
지방에 내려왔기 때문에, 교회의 타락을 공격하고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좀 높았고 흥분 속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2부 예배 설교를 맡은 교장은 종교 개혁의 기본정신은
"오직 믿음으로!"인데, 믿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차분하게 설교했습니다.
이 교장 선생은 일제시대에는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했고 ☞ rfcdrfcd.tistory.com/15978047
해방 뒤에는 미국에 유학을 가서 신학을 공부한 분인데
소속한 교파의 인사들과 갈등이 있어서 목사 안수를 받지 않고
평신도의 신분으로 기독교 교육에 전념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두 예배가 끝난 다음에 몇 명의 교인이 점심식사를 같이 하는데
이 자리에는 1부 예배 설교를 맡았던 교사도 참석했습니다.
예배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교인들이 대부분 동료 교사들이어서, 흉허물 없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1부와 2부 예배에 다 참석한 한 교인이 말하기를
1부와 2부 예배 다 좋았는데,
1부 예배에서는 외과 수술을 받았고, 2부 예배에서는 내과 치료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교인은 말하기를 1부 예배에서는 충격을 느꼈고
2부 예배에서는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한 교인이 그 말을 이어받아 말하기를, 1부 예배에서는 아픔을 느꼈고,
2부 예배에서는 시원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교회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교사는 말하기를
1부 예배는 나와 상관이 없는 것 같았고,
2부 예배는 나를 향한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교인들의 이와 같은 반응은 1부 예배 설교를 맡았던 교사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 교사(본 설교자의 과거 회상)의 종교개혁 기념주일 설교는
‘밖의 개혁보다 안의 개혁’을 강조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아마 여러분 이 교사가 누구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82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2000년 설교
요즘 유행하는 말을 인용한다면 20세기 마지막 종교개혁 기념주일이고,
1000년 대 마지막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관점에 따라서 다르지만, 일반 세계사에서도
16세가 종교개혁은 1000년 대(2nd 밀레니엄)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을 분기점으로, 중세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저희 기독교인들, 개신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두말할 것 없이
종교개혁이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개신교인이 아닙니다.
종교개혁 때문에 개신교가 탄생했고, 오늘 우리 교회가 이 모습으로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을 곧 교회개혁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닙니다. 교회개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신앙개혁입니다.
개인의 신앙개혁이 선행되어야, 교회개혁이 온전히 이뤄질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개혁하려고, 482년 전 오늘 95개조를 내걸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톨릭교회를 뒤엎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이룩하리라' 하지 않았습니다.
루터의 개혁운동은 혁명적 개혁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의 본래 진리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습니다.
바깥을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을 개혁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총으로!"라는 구호가
모두 개인의 신앙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안을 개혁하다보니, 바깥의 개혁이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개혁되어야 할 점들이 많습니다.
어제 기독교 언론의 "교회개혁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제목의 기사 가운데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섬김과 나눔의 상실, 무한정한 대형화의 추구,
교파우선주의, 세습, 지역이기주의, 영성 약화, 물질우선주의 등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이전 중세 유럽사회를 지배했던 교회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상태에 처했다는 분석이 높다,
최근 사회의 각종 의혹과 비리사건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관련됨으로써
일반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평가가 땅에 떨어졌다.
기독교의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되면서
복음전도자체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교회개혁은 이렇게 심각하고 시급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교회개혁은 개인의 신앙개혁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개혁, 안으로의 개혁이 선행되지 않는 개혁은 헛된 것입니다.
어느 회사에서 새로운 제품이 나왔다고 선전하는데
포장을 바꾸었다면 사람들이 실망하고 속았다고 할 것입니다.
내용물을 바꾸고 거기 따라 포장을 바꿔야합니다.
포장만 바꾸는 개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개인의 신앙개혁, 안으로의 개혁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습니까?
회개와 영성회복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습니다.
▲1. 첫째, 회개입니다. 철저한 회개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시편 51편은 다윗의 참회시(懺悔詩)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습니다. 그 일을 덮기 위해 충직한 부하 우리아를 살인교사했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와서 그 일을 꾸짖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참회하며 지은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다윗을 다윗으로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무엇이 다윗을 그렇게 유명하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다윗 앞에 성군(聖君)이라는 소리가 붙게 만들었으며,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말하게 하고 있습니까?
골리앗을 죽인 것, 수많은 승전, 많은 신앙시들을 지은 것도
다윗을 유명하게 만든 요인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다윗으로 만든 것은 그의 회개입니다. 바로 시편 51편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많은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1절) 하며 호소하는 마음입니다.
만일 이 회개가 없었더라면, 다윗은 그저 유명한 장군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군인들이 상대하기조차 두려워하는 용맹한 적장을 어린 소년이
단번에 거꾸러뜨린 것은 훌륭한 무용담의 소재입니다.
우리 나라 청소년들은 화랑 관창의 이야기를 배우는데
다윗은 이스라엘의 관창 정도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아니면, 만일 이 회개가 없었더라면, 다윗은 그저
유명한 시인으로 고대문학사에 기록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시작되는
다윗의 시편 23편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사랑 받는 노래입니다.
△월남 전 당시 미군 조종사들이 출격할 때 만일 격추되어 밀림에 낙하했을 때를 대비한
배낭을 휴대하는데 그 속에는 적진에서 살아남는데 필요한 비상식량도 있고 지도도 있고
약품도 있고 낚시도구도 들어 있는데, 시편 23편을 적은 쪽지도 들어있다고 합니다.
"희랍에서는 <일리야드>와 <오딧세이>를 지은 호메로스가 있었고
이스라엘에는 시편 23편을 지은 다윗이 있었다" 이 정도로 기록되었을지 모릅니다.
△이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존경하는 다윗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하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이같이 신앙의 역사에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2대 영웅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원죄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시편 51:5절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하는 것은 원죄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냥 지식이 아니라, 깊은 자각에서 우러나오는 회개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다"하는 것을 전제하지 않은 철학과 윤리와
사람의 모든 정신작업은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원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인간관은, 기초공사가 잘못된 집과 같습니다.
"내가 죄인이다" 하는 인식이 없는 사람은 흑인이
"나는 피부가 검은 사람이다"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새 천 년에는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계획을 많이 세웁니다.
원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어제 신문들은 고위 공직자들의 병역문제를 집중보도 했습니다. *2000년 10월말
여러 가지 형편이 있어서 군대가 면제된 공직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도의 기본적인 논조들은 "국민의 기본적인 의무인 병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어떻게 지도자로 처신할 수 있다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회개가 확실하지 않은 신앙도 이와 비슷합니다.
내가 매일 짓는 죄에 대한 회개가 있습니까?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3절)하는 다윗의 고백이 내게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구원의 기쁨을 선물로 받았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이제 앞으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회개가 있습니까?
주일이 좋은 것은, 교회에 나와 한 주일의 죄를 회개하며
사죄를 선언 받고 깨끗한 마음,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배 순서를 보면 기도 순서가 정확하게는 "참회기도"로 되어 있습니다.
예배 순서 중에 참회와 사죄의 선언 순서를 따로 갖는 교회도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헌금 뒤 목회와 봉헌기도를 할 때, 사죄의 선언 내용을 넣고 있습니다.
회개는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하지 않습니다(17절).
하나님께서는 참회하며 드리는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것이 오히려 창피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를 부흥시켜 주십니다.
한국 교회가 1907년에 크게 부흥했습니다.
한 해 사이에 한국교회가 두 배 반 가까이 배가 되었습니다.
이 부흥운동은 회개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1903년에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원산에 모여 기도회를 가졌는데
하디(R.A. Hardie 河鯉泳)이라는 캐나다 출신 감리교 선교사가 일어나서
"나는 문명이 발달한 나라에서 온 백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한국인들을 멸시했습니다.
우월의식과 자만심과 권위주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힘과 재주를 갖고 선교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회개합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우리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온 당신을 미워했습니다"
하며 회개의 응답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성령이 강림했고 이것이 평양으로 옮겨져
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부흥회를 열 때, 우리는 은혜 받기를 먼저 구할 것이 아니라
"이번 강사가 어떤 사람인가?"할 것이 아니라
"내가 회개할 것이 무엇인가?"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회개의 중요함을 더 깊이 깨닫고 진솔한 회개를 하는 주일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시편 51편을 지어 하나님께 바치는 주일이 되어야합니다.
우리 교회의 시편 51편을 지어 보래하는 주일이 되어야 합니다.
▲2. 둘째, 영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절)"
하는 기도가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힘이 소멸되어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영적인 힘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저항력이 약해지면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영적인 힘이 약해지면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무엇이 다윗의 영적인 힘을 약하게 만들었습니까?
편안한 시간들이 계속되니까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자만감이 생겼을 것입니다.
삼하11:2절은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저녁 때에 침상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낮잠을 실컷 잤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하들은 전선에 나가 싸우는데 임금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전선에서는 계속해서 승전의 소식이 날아옵니다.
"우리가 암몬 자손을 멸했습니다" "랍바를 포위했습니다"(삼하 11:1)
"한국 교회 성도의 숫자가 천만을 넘어섰습니다"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한국에 있다고 합니다"
"유럽 교회는 저녁 일곱 시이고, 미국 교회는 오후 두 시이고
한국 교회는 아침 일곱 시라고 합니다",
이런 소식들을 듣고 교만해진 것이 한국교회의 영성을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영성이 어떠합니까?
처음 믿을 때의 감격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12절)하는 기도를
다윗보다 더 간절하게 드려야합니다.
자원하는 열심히 회복되도록 해야합니다.
△개혁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교인들은 목사들을 보고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고,
목사들은 교인들, 특히 장로들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나는 개혁의 주체이고 너는 개혁의 객체, 개혁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장로교는 감리교를 보고, 은혜가 없고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감리교는 장로교를 보고, 율법적이고 독선적이니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전에 '그건 너, 바로 너, 너 때문이야"하는 대중가요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너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사회가 교회를 보고, 교인 목사 모두, 감리교 장로교
모두 개혁하라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방휼지쟁(蚌鷸之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요새와 조개가 서로 싸우는데
도요새가 주둥이를 넣는 순간 조개가 입을 꽉 다물어 버렸습니다.
지나가던 어부가 새와 조개를 동시에 잡아가지고 갔습니다.
도요새와 조개는 교회 안의 구성요소들이고 어부는 사회인 것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에 대한 올해의 기사들을 살펴보면 두 가지 특징이 발견됩니다.
하나는 전에는 교회 안에서 교회개혁을 말했는데
이제는 교회 밖에서 교회를 보고 개혁하라는 소리가 높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는 개혁되지 않으면 사회 속에서 교회의 존립기반이 상실될 위기에
처할 정도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더럽다고 인식되어진 세속사회가 깨끗하고 거룩한 세계라고 알려진 교회를 보고
"너 좀 깨끗해져야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렇게 말하는 그들은 더 더럽지만 말입니다. 잘못된 말이지만 그래도 듣는 것입니다)
언론 문건 사건의 주역들이 기자들인 것이 밝혀져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신문을 사회의 공기요 목탁이요 경종이라고 하는데, 언론의 기능 가운데 중요한 것이
사회를 감시하는 것인데, 이제는 사회가 언론을 감시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언론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이 사회가 나침반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회가 위기를 만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누구를 보고 개혁하라고 해야 합니까?
내가 나를 보고 개혁하라고 해야 합니다!
바깥으로 향했던 손가락을 안으로 향해야 합니다.
내가 회개하고, 나의 영성이 회복되고 강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감리교 입법의회가 지난 목요일부터 어제까지 정동교회에서 있었습니다.
둘째 날은 밤 열두 시까지 회의를 하기로 하고서 열띤 토의를 했습니다.
감리교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논의들이 많았고
그런 의견들이 집약된 개정안이 상정되었기에 기대를 많이 하고 참석했습니다.
정동교회가 제가 목사안수를 받은 장소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감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리교는 개혁에 대해 예민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실망을 했습니다.
입으로는 개혁을 말하면서 표결에 들어가면, 자기 기득권 보호의 원칙에 따라 손을 듭니다.
감리교 총대 숫자가 너무 많아 줄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결정되면 자기가 총대가 되지 않을 수가 있으니까 반대를 합니다.
감독전임제는 이구동성으로 필요하다고 누구나 말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자기가 감독될 가능성이 적어지니까 반대하도록 합니다.
그런 회의를 지켜보면서 "우리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 것인가?"
회의 기간 내내 이것을 생각했습니다. 아니 이것만 생각했습니다.
만나는 목사님마다 저희 교회 신축성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우리교회가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갖고 있는 교회로 유명해지는 것을 자랑해야 할 것인가?’
아닙니다.!
회개가 살아 있는 교회로 유명해져야 합니다!
영성이 뛰어난 교회로 유명해져야 합니다!
안으로, 안으로의 개혁이 이뤄지는 교회로 유명해져야 합니다!
이것을 수없이 다짐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편 51편의 중심부분을 오늘 저는 이렇게 고쳐 부르렵니다.
‘하나님이여 저희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빠짐없이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빠짐없이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빠짐없이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성도들 아무에게서도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빠짐없이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주사 빠짐없이 붙드소서’
안으로, 안으로의 개혁을 이뤄나가는 여러분과 저,
그리고 저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