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7 02 (72)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 YouTube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20:1~6
지금 우리는 사도바울의 3차선교여행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 3차선교여행의 중심지는 에베소 입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3년을 사역했습니다. *행19장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20장입니다.
◑20: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소요'는 에베소에서 은장색들이 일으킨 소동을 말합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에, 타격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데미 여신 상을 만들어 팔던 상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에베소 사람들이 더 이상 아데미 여신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다가는 아데미 신상을 제조하고 판매해서 먹고 살아가던 상인들이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상인들이 바울의 일행을, 에베소에서 쫓아내려는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자 그때 서기장의 개입으로 소동이 진정되었습니다.
소요가 그치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납니다. 20:1
그게 오늘 본문의 시작인데, 그러면 에베소를 떠난 바울이 이제 어디로 가느냐?
그 일정은 우리가 앞서 본 적이 있습니다. 기억나시나요?
19:21절의 노정인데요.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여러분, 이 노선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세운 계획입니다.
바로 이 순서대로, 이제 바울의 남은 선교가 진행됩니다.
요약하면 에베소 → 마게도냐 → 아가야 → 예루살렘 → 로마 입니다.
여러분, 이 노선에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게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이제 가려는 목적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걷은 구제의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죠.
당시 예루살렘은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기근에 허덕이는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에서 사람을 보내거나 편지를 써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교회들에게 '특별 구제 헌금'을 부탁했습니다.
그 헌금들을 모아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 마게도냐 → 아가야 코스는, 헌금을 걷는 코스입니다.
걷어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전달하려고 했던 거죠.
그래서 20:1절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서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아시다시피 마게도냐는, 바울이 2차선교여행 때 세웠던 교회들로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마게도냐를 가기 전에, 바울이 잠깐 들렀던 곳이 있습니다.
바로 드로아죠. 여기서 바울은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게됩니다.
(*오늘날 드로아 항구는 폐허이며, 그 근처 20킬로 지점에 고대 유적이 있다고 합니다.
혹자는 이 지역이 '트로이의 목마'에 나오는 '트로이'일 것이다.. 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본문 행20장에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서 마게도냐로 가는 길에,
드로아를 들렀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지만,
고린도후서에 보면, 드로아를 거쳐서 마게도냐로 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고후2: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주1)
자 그러면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한 사역은 무엇인가요?
참고로, 지금은 3차전도여행 상황입니다.
◑행20:2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바울은 '권했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많은 격려의 말, 많은 위로의 말'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말씀을 가지고 양육을 했다는 거죠.
2차선교여행 때 개척한 교회니까, 그곳에 제자들이 있었죠.
그 제자들을 말씀으로 양육한 겁니다.
자 그런데 말씀으로 양육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 마게도냐에서 바울이 쓴 편지가 하나 있습니다.
앞서 '고린도후서'라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바울은 이제 마게도냐를 떠납니다.
자 마게도냐에서 다음은 아가야 입니다.
위 본문 2절에는 '아가야' 대신에 '헬라(그리스)' 라고 나와 있습니다.
같은 지명이죠. *원어로 '헬라스'
아가야에는, 고린도와 아덴이 대표적인 도시입니다.
아덴에서도 2차 때 바울은, 그곳의 몇 명의 사람들에게 전도했고요.
☞rfcdrfcd.tistory.com/15981829
고린도 교회는 아시다시피, '유럽의 라스베가스'로 불리는 타락한 도시였죠.
아니나다를까 바울의 속을 시커멓게 썩게 했던 교회가, 고린도교회 였습니다.
그 말 많고 탈 많은 고린도 교회를, 이제는 편지가 아니라
몸으로 직접 바울이 다시 방문을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3개월을 체류했습니다. 20:3
◑행20: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자 이때 석달 동안, 바울이 고린도에서 쓴 편지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 입니다.
복음의 정수 라고 불리는 로마서가, 이때 고린도에서 쓰여진 편지입니다.
그리고 이 <로마서>를, 직접 로마교회에 전달해 준 사람이
(아직 바울은 로마를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뵈뵈 인데요.
롬16:1~2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인 <로마서>에서
뵈뵈를 영접하라고 말합니다. 여자 집사님으로 알려져 있죠.
그를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했는데,
겐그레아는 바로 고린도의 외항이죠. *서울로 치면 인천 같은 곳
그러니 로마서를 바울이, 고린도에서 썼다는 말이 맞는 것입니다.
<고린도에서 해상로를 택하지 않고, 육로를 택하여 다시 마게도냐, 드로아로 돌아가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또 고린도를 떠납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까지 왔던 중요한 목적은, 구제헌금을 걷기 위함이었고,
이제 남은 일은, 속히 그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배'가, 오늘날의 비행기나 고속열차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발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가 있었습니다. 20:3
여러분, 잠잠했던 유대인들이 또 다시 들고 일어났습니다.
늘 바울을 괴롭혔던 유대인들이, 아니나 다를까,
또 다시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3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3b
아마 유대인들은 바울과 같은 배를 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배에 몰래 잠복을 해서, 배에서 바울을 은밀히 암살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바다에 던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조용히 바울을 처리하려고 했던 거죠.
그런데 바울이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에 대해, 낌새를 알아차렸습니다.
자 그래서 바울이 계획을 바꿉니다.
해로가 아니라 육로로 계획을 바꿉니다.
자신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길입니다.
2차선교여행 때도 같은 길을 왔다가, 역순으로 되돌아갔는데,
지금 3차선교여행도, 공교롭게도, 2차와 똑같은 길을 왔다가 똑같이 역순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일단 힘이 몇 갑절로 더 듭니다.
배로 쉽게 가면 될 것을, 주로 걸어가야 하니까요.
여행 기간도 도보가 배보다 훨씬 느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고린도에서 육로로 되돌아가는 길에, 빌립보에서 누가가 바울 팀에 합류합니다.
이후에 누가는, 이때부터 바울이 순교하기까지,
한 번도 바울을 떠나지 않고, 완전 측근이 되어서 바울을 돕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쓰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힘든 육로 길을 택해서, 돌아가도록 섭리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고, 방해하려고 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간계와 훼방을 통해서, 또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빌라도와 헤롯이 예수님을 죽인 일이, 도리어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는 사건이 된 것처럼요)
그래서 바울은 힘들게 고린도 → 마게도냐의 빌립보까지 역순으로 갑니다.
그리고 빌립보의 외항인 네압볼리에서 → 배를 타고 드로아로 가서
→ 에베소(사실은 밀레도)를 거쳐서 → 예루살렘으로 가죠.
(※그런데 성경에 자세히 안 나오지만,
그리스 반도(발칸 반도'의 북쪽 마게도냐에서 → 남쪽 아가야로 이동할 때는
또 반대로 남쪽 아가야에서 → 북쪽 마게도냐로 이동할 때는
지금 바울이 2차, 3차에 걸쳐서 총 4번을 이동하는데요. 배를 탔을 것이라고 봅니다.
거리가 너무 멀고, 중간에 산악지대라서 사람도 잘 안 살았던 거고,
당시에 배편이 이동수단으로 잘 발달되어 있었으므로, 배를 탔으리라고 봅니다.
만약 성경에 나오는 5개 도시 이외에, 또 다른 도시가 중간에 있었다면,
바울은 육로로 그 도시를 반드시 방문해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게도냐의 베뢰아 교회 이후로,
아가야의 아덴까지... 그 먼 거리에 교회를 세웠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다는 것은,
그 중간에 큰 도시가 없었고, 그래서 바울이 배로 이동했을 거라고 보는 거죠.
바울이 배로 이동을 했다고 해도, 빙 둘러서 우회하는 길이었고,
또한 많이 걷는 고생 길이었습니다)
그러니 여간 힘든 길이 아니었죠.
고린도에서 편안히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할 정도로, 열 배나 더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돌아가야 했습니다. 또 그렇게 하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겠죠.
자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4
◑행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총 7명입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그런데 이들은, 아시아(에베소)까지만 간게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까지 바울과 함께 갔습니다.
왜냐면 여러분 이 명단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은, 예루살렘교회에 구제헌금을 한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명단을 보면, 교회별로 묶여져 있습니다.
베뢰아 교회 1명, 데살로니가 교회 2명, 이상 마게도냐 교회 도합 3명
더베, 즉 갈라디아 교회는 도합 2명
아시아는 에베소 교회죠. 도합 2명입니다.
이들은 자기 교회를 대표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러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까지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7명이, 자 바울의 일행과 (그 외 누가와 디도가 있었고, 또 더 있었을 거예요)
우르르 한꺼번에 다 몰려다니면 위험합니다. 왜 위험할까요?
어딜 가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죠.
여러분 우르르 몰려다니면, 쉽게 극단적 유대인들에게 노출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유대인들의 시선을 분산을 시킵니다.
실제로 본문 5절에 보면, 나눠서 움직입니다.
◑행20: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자 먼저 각 교회 대표들이 드로아로 가서 바울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의 일행이 이제 뒤따라 갑니다.
유대인의 시선을 분산을 시키는 거죠.
그렇게 해서 드로아에서 먼저 도착한 대표들과 다시 합류합니다.
그리고 함께 드루아에서 1주일을 이제 머물게 되었습니다. :6
◑행20: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우리가 바울의 3차선교여행의 노정을 살펴보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 노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울의 계획이 변경된 부분입니다.
원래 바울은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틀어집니다. 유대인들의 음모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뱃길을 포기하고, 육로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본문 3절의 표현대로, 그리고 오늘 설교의 제목대로
바울은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그만큼 많은 것을 잃은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돌아가는 것만큼 시간을 잃었습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에서 마게도냐까지 돌아가야 했습니다.
아마 고린도에서 마게도냐까지 오는 데도, 1~2주간 걸렸을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네압볼리 항구에서 배를 타고, 드로아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뱃길도 5일이나 걸렸다고 했습니다.
행16:11에, 드로아에서 네압볼리로 갈 때는 이틀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드로아에서는 일주일을 머물러야 했다고 말합니다.
1주일을 머무른 이유는, 배의 출항 시간을 맞추기 위한 :6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나중에 (3차선교여행 끝에) 바울 일행이 두로에서도 1주일을 머뭅니다. 21:3~4
그때도, 배의 출항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배에서 물건을 내리고 올리고 하는데, 과거에는 그 정도 시간이 걸렸나 봅니다.
이렇게 바울은, 마게도냐로 돌아오는 바람에, 많은 시간을 손해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하루라도 빨리 로마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예루살렘에, 구제헌금을 건네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도 3개월 밖에 체류하지 않은 거죠. :3
그러나 마게도냐로 돌아가는 바람에, 바울은 그만큼 엄청난 시간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아니 왜 하나님은 바울을 돌아가게 하셨을까?
하나님은 왜 바울을 도와주지 않으셨을까?'
바울을 해치는 유대인이, 처음부터 음모를 꾸미지 못하게 섭리해 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나님이 꼭 바울의 선교를 태클 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울을 해치려는 그들 유대인들이, 바울과 같은 배를 타고 가지 못하도록
미리 막아 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바울이 편안하고 빠르게 예루살렘 교회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그만큼 바울이, 빨리 로마로 가서, 더 많은 사역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왜 하나님이 바울을 돌아가도록 놔 두셨을까요?
◑적용
여러분, 우리의 인생 여정에도, 본문의 바울처럼,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직선이 아니라 이렇게 곡선으로 돌아가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돌아가는 길에서, 우리는, 그 시간이 낭비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여정에서처럼, 그 시간이 내 인생에 손해보는 시간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자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 시간이 전혀 낭비나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자 그 섭리가 본문의 5~6절에 나옵니다. 5~6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20: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6절에 보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의 일행을 가리키는 인칭 대명사가 우리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엔, 사도행전의 저자인 의사 누가가 포함되었다는 뜻입니다.
앞서 16: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이 구절엔, 누가가 드로아에서 바울팀에 조인했음을 나타낸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2차여행 빌립보를 떠날 때, '우리'에서 → '그들'로 바뀝니다.
17: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즉 누가는, 바울팀에서 빠져서, 빌립보에 잔류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바울, 디모데, 실라를 뜻하죠.
그때 빠졌던 누가가, 약 7년 후에, 빌립보에서 다시 바울 팀에 조인합니다. 20:6
이때 조인한 누가는, 그 이후로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늘 바울과 동행합니다.
(그러니 16:10절에서 누가의 조인은, 단순한 교제관계, 알고 지내는 사이의 조인이고,
20:6절의 조인은, 진짜 동역자 관계의 조인으로 볼 수 있죠)
이때 누가는 빌립보에 남아서 바울이 개척했던 빌립보 교회를 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누가가 바울의 선교팀에 다시 합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울이 마게도냐로 돌아가는 바람에
빌립보에서 다시 누가를 만나서, 누가가 조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20:6에서 등장한 '우리;라는 표현은, 사도행전 끝까지 다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죽는 순간까지도, 바울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딤후4:11
▲그런데 누가가 바울 팀에 다시 조인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이 마게도냐로 빙~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돌아가지 않았다면, 누가를 다시 만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만약 바울이 고린도에서 아무 일 없이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갔다면,
누가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자마자, 유대인의 난동으로 감옥에 갖췄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감옥에서 가이사에게 상소해서
이제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조인"이 '신의 한 수'인 이유는,
누가가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바울은, 선교여행 다니느라 시간이 많이 없었겠죠.
그런데 이제는,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 갇혀 있었고,
연이어 로마 감옥(가택연금)에도 미결수로 2년 갇혀 지내면서... 시간이 널널 했습니다.
그러니 누가에게, 자기가 아는 모든 지식과 사실들을, 얘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 바울로부터 들은 얘기들을 토대로, 누가는 자신의 조사를 보태서
결국 완성한 것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누가)도' 눅1:3
여러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가치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바울은 사역을 약 40년 가까이 했지만, 누가가 기록한 두 권의 성경은
지난 2천년 동안 계속 사역해오고 있습니다.
바울의 40년 가까운 사역도 크고 놀라운 일이지만,
누가가 기록한 두 권의 성경도, 그에 못지 않게 놀라운 사역을 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유대인의 방해가 없어서,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막바로 예루살렘으로 갔다면,
누가를 다시 만날 기회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기록이 어려웠을 겁니다.
하나님은 누가를 만나게 하셨고,
때마침 바울에게, 4년을 감옥에 꼼짝 없이 붙잡아 두심으로써,
그의 생전에, 누가를 통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쓸 수 있게 하나님은 섭리하셨죠.
만약 누가가, 바울이 순교한 후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쓰려고 했다면,
상당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특히 사도행전은 바울이 살아있을 때,
바울로부터 일일이 사실을 확인하고,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6절부터는, 자신이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실들입니다. 바울과 동행하면서요.
사실 사도행전 9~28장까지는, '바울의 스토리' 잖아요.
그렇다면 여러분 이것이 바울의 계획이었겠습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아니면 사도행전을 기록하려는 누가의 의지로 되었습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가장 처음 단초는,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치려고 음모를 꾸몄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음모를 피해서 마게도냐로 돌아갔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돌아가는 길이, 누가를 통해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남기시려는...
모든 게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였다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것입니다.
그 돌아가는 고난의 시간이, 바울에게 결코 낭비나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위한 하나님의 최상의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돌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에 먼 길을 돌아간 바울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음모나 훼방 때문에 돌아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는 눈이 없으면,
이때 하나님께 불평하고, 많이 투덜거릴 것입니다. '왜 저를 이토록 고생을 시키십니까?'
자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섭리가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신대원을 돌아서 갔습니다.
돌아갔던 이유는, 저의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도망가다가 돌아서 갔습니다.
그런데요.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은, 그 돌아가는 시간 마저도 주관하셔서
그 시간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먼저는 돌아가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셨습니다.
만약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그 고난의 시간들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보다 훨씬 더 형편 없는 목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돌아가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
마침 호주로 연수를 갔던 제 친구가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 함께, 신대원에 바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오늘 바울이 돌아가는 길에서 누가를 만난 것처럼,
제가 돌아가는 길에서 그 친구를 만나, 신대원을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친구는, 제게 가장 큰 힘이 되는 동역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한 가지 사실을 제가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헛된 시간이 없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비록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돌아갈지라도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돌아가는 시간마저도 주관하셔서
당신의 뜻대로 그 시간을 바꾸어 내시는구나,
그래서 그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를 빚으시고,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를 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주1)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써서 보냈습니다. *3차선교여행 중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를 거쳐서, 빌립보에 있을 때 써서 보냈죠.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낸 이후에
소위 '눈물의 편지'를 써서 (성경 27권에 없음)
고후2: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 편지를 디도를 통해 고린도에 전달합니다.
고후12: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그리고 이제 디도가, 고린도로부터 가져올 소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와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만나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갔다고, 편지에 씁니다.
나중에 마게도냐 빌립보에서 디도를 만납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소식을 듣고서, 쓴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