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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공의회 개관

LNCK 2024. 9. 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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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공의회 개관        행15:1~21       스크랩, 정리

 

※평소에 <행15장 예루살렘 공의회>에 관하여, 좀 아리송했습니다. 명확하게 이해를 못 헀죠.

오늘은 작심하고, 아래 설교를 읽으면서 공부했습니다. 짧고 간략하게 잘 설명하고 있군요.

 

이 설교와 함께 아래 설교 두 편을 읽어보니,

‘행15장 예루살렘 공의회’를 전체적으로 두루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 rfcdrfcd.tistory.com/15981437

*​예루살렘 공의회 2 rfcdrfcd.tistory.com/15977229

 

................................................

 

사도행전 15장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종교 회의인 예루살렘 공의회가 소집된 이유와

그 때의 결정 사항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1차전도여행에 관한 기사가 사도행전 13장과 14장입니다.

15장 말미에는 사도 바울의 2차전도여행에 관한 기사가 시작되어

18:22절까지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와 2차 전도 사이에 예루살렘 공의회에 관한 기사가 들어간 이유는

이방인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 사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인 전도의 걸림돌을 제거함으로써

이방인 전도에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베드로의 변론 →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보고

→ 야고보 장로의 결론 .. 순서로 진행됩니다.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나다     15:1~5

 

▲15:1~2a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유대로부터 안디옥으로 간 어떤 사람들이,

복음에 벗어난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할례자는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실 때

할례를 설명하시기를, 하나님과 구원받은 백성과의 언약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구원받은 자의 표징(증거)이지, 구원의 절대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아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진수를 알지 못하였고

여전히 민족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부가적인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할례나 율법의 준수나 어떤 행위가 구원받는 조건으로 요구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곡해하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헛되게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내 복음의 본질에 벗어난 것을 마치 정통인양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이라고 말하거나 성경적이라고 말하거나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면서

복음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500킬로미터 떨어진 안디옥교회까지

먼 거리를 찾아간 사람들처럼 열정과 자기 신념이 강하지만

그들은 복음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거짓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서 리더 역할을 하였던 바울과 바나바와

격한 논쟁을 하였습니다. 유대 전통에 큰 자부심을 느꼈던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15:2b ‘(안디옥의)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안디옥 교회는 할례와 구원과의 관계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몇 사람을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로 파송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보자면 교회나 노회에서 풀지 못하는 사안을 상회인 총회로 헌의한 것과 같습니다.

초대 교회에 아직 신학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지역 교회 자체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을 상회 기관인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 답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15: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갈 때 직행하지 않고 가면서 지중해 연안 지역인 베니게와 이방인으로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인의 지역을 거쳐서 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이 지역에서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온 일’,

즉 구브로와 비시디아 안디옥과 그 외 갈라디아 지역의 이방인들에 대한

1차전도여행의 열매를 알리면서, 경유지의 성도들과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15: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교회에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

즉 1차전도여행의 결과를 상세히 보고하였습니다.

 

4절에 ‘말하다’의 원어는 ‘상세히 이야기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5: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의 보고를 듣던 바리새파 출신의 어떤 교인이

이방인의 할례 준수를 주장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다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준수해야 한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15:6~11

 

안디옥교회에서 헌의한 할례 준수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도 제기하자,

이 사안을 의논하러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임으로 예루살렘 공의회가 개최되었습니다.

 

▲15: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a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할례 준수 문제가 쉽게 일단락되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면 많은 변론이 있었을 정도로

사람들의 의견 발표와 긴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의된 결론이 나지 않자 사도 베드로가 발언하게 되었습니다.

 

▲15:7b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7~11절에 있는 사도 베드로의 발언은 이전에 발언했던 사람들처럼

단순히 개인적인 견해를 밝혔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사도들의 사역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듯이

사도 베드로의 발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말이었습니다.

 

교회는 논쟁이 되는 사안에 대해 결론을 내릴 때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님의 가르침에 맞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베드로 발언의 핵심은 구원에 있어서 이방인과 유대인들과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9

 

구원은 인종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도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은혜를 주시고

또한 믿음으로 이방인을 정결케 하시니,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방인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의 멍에를 메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의 가족에게 세례를 베푼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구원에는 차별 없음이 이미 일단락되었는데 왜 다시 거론하느냐는

질책 겸 안타까움을 토로했습니다. :10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혈로 값없이 주신 값진 구원에 불필요한 조건을 달아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복음과 무관한 불필요한 조건을 다는 것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속박시키는 일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      15:12

 

▲15: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베드로의 변론을 듣는 청중들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본문은 7절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것은 논쟁으로 시끄럽던 회의장이, 베드로의 변론으로 침묵하게 되었고,

베드로의 주장이 회의에서 받아들여졌음을 암시해 줍니다.

 

이로써 공의회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활동을 공인하고

바리새파 출신을 중심한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배격하게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줍니다.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미 바울은 4절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접을 받고 이방 선교에 관한 보고를 한 바 있죠.

 

15: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여기서는 공식적 회의장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여 이방인들이 구원받았다는

객관적 사실을 재차 강조하며 설명했을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언급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기적적인 사건이었는데

아마 14:3, 8~10에서 나타난 기적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이방 선교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표적과 기사로, 이방선교를 지원해 주셨다는 거죠.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15:13~18

 

▲15: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바나바와 바울이 보고를 마치자

이번에는 예루살렘 공의회 의장 격인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장로는,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야고보 장로는, (의견을 취합해서) 논쟁의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15: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시몬 베드로)이 말하였으니’

 

야고보는 베드로의 발언처럼, 하나님의 구원에는 차별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4절에 시므온은 시몬 베드로를 가리킵니다.

 

14절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 고넬료를 돌보신 일’을 뜻합니다.

 

▲15:15~16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야고보는 ‘이방인의 구원’이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신약교회에 들어오는 일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죠.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그 날에 내가 다시 돌아와서' 라는 뜻입니다.

메시야(예수님)가 다윗의 장막 즉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리라,

즉 신약교회가 일어날 것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다는 거죠.

 

‘다윗의 무너진 장막’

다윗의 나라 또는 이스라엘 또는 유대교를 가리키며,

 

‘무너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킨다는 것’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몸된 신약교회를 일으켜 세운다는 것을 뜻합니다.

 

야고보 장로는, 아모스의 예언을 베드로의 연설과 접목시키면서

아모스가 예언한 '그 날'이 바로 지금 임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아모스의 예언을 인용해서, 유대주의의 배타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메시야에 의해 재건된 신약교회로 전환됨을 강조합니다.

 

▲15: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 남은 사람들’

문맥상 유대인 중에 ‘남은 자’를 뜻합니다.     주1)

그러면 유대인 + 이방인이 합쳐져서 주를 찾게 되는.. 신약교회가 이루어지죠.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가능성이

구약 시대에서부터 열려있었음을 확언하는 말입니다.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게 되는 목적이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도록 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여,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기독교인 됨이 구약의 예언 성취임을 밝히고 있죠.

이로써 이방 선교의 정당성이 구약의 예언을 통해 확증된 셈입니다.

 

‘예로부터...주의 말씀이라’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가 구약 시대에도 계시되어 왔음을 밝혀준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방인의 구원사업을 계속적으로 펴왔음을 뜻합니다.         주2) 하나님의 보편성

 

야고보는 구약성경 중 선지서를 인용하여 *암9:11~12

그 예언이 베드로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증명하여 줌으로써

베드로의 주장을 회의 결론으로 확정 짓습니다.

 

16~18절 말씀은 야고보가 아모스 9:11~1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로 주님을 찾게 하신다는 구약 선지자의 예언이

이방인 고넬료를 통해 성취되었으며,

앞으로도 이방인들이 지속적으로 주님을 찾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증인들인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이방인들이 주님을 찾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신약 시대에 와서 발생한 쟁점 사항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의회에 헌의된 사안의 결론으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차별이 없음을 알리며,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4가지 사항을 제안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권고할 사항 4가지        15:19~21

 

▲15: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내 의견에는’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뜻은 ‘판단하다’, ‘심판하다’입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의회 의장으로서 최종 판결을 내렸음을 보여줍니다.

 

법정에서 판사가 최종 판결을 내릴 때, 자신의 생각으로 판결하지 않고,

법 조문을 근거해서 내리듯, 야고보는 성경을 근거해서

할례 준수에 관한 헌의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야고보가 제시한 4가지 금기 사항 권고는

당시 이방인이 관습적으로 행하는 일들이었습니다.

4가지 중 앞의 2가지는 우상숭배와 관련된 일이고

뒤의 2가지는 피를 먹지 말라는 율법 규정에 근거한 사항입니다.

 

목매어 죽은 가축이나 짐승의 고기는 피가 빠지지 않았기에 피 채 먹는 것과 같았습니다.

야고보가 요구한 최소의 의무사항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었으며,

단지 이러한 것을 혐오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함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4가지 권고사항에 대한 해석은 2가지 방향입니다.

1) 이것들이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 받은 자가 당연히 나타내 보이게 되는 ‘구원의 증거, 삶의 열매’

 

즉 야고보서에서도 ‘행함’을 강조하는데, 구원 받기 위한 조건의 행함이 아니라,

구원 받은 후에 새생명 얻어 변화된 성도는 ‘이렇게 산다’하는 열매로서의 행함이죠.

 

이와 같이 이방인들도, 할레를 받지 않고도 구원 받을 수는 있는데,

구원을 받았다면 ‘최소 이 정도의 삶의 열매는 있어야 된다’는 권고입니다.    * ↔명령

 

2) 상호 배려

유대인과 이방인은 살아온 환경과 문화 배경이 다르기에

주님 안에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

야고보가 제시한 금기사항의 요지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극혐하는 4가지를 ‘하지 말아달라’는 권고죠.

 

결론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멍에를 메우지 말아야 하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말아야 했습니다.

 

(적용)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집입니다. 교회 내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합니다.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언행이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수용할만한 믿음이 없어 시험에 빠지게 될 교우가 있다면

덕을 위하여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의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할례 준수 제기가 교회 내 문제로 발전하였지만,

사도들과 장로들과 교회가 공의회를 통해 주님의 뜻을 바르게, 그리고 더 깊게 알게 된

계기가 되었듯이,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을 바르게, 그리고 더 깊게 알아가는 기회로 삼으십시다.

 

......................................

 

주1) ‘그 남은 사람들’

마소라 본문(MT)에서는 '에돔의 남은 자'로 되어 있는데

70인역에서는 단순히 '남은 사람들'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살아남은 자가 마소라 본문에 따르면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으나

70인역은 유대인들 중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을 의미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아마도 야고보는 마소라 본문 보다는,

70인역과 유사한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본문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본문을 인용하여 유대인을 언급하고자 했던 것 같다.

 

 

주2) 하나님의 보편성 Universality

※보편주의 universalism 는 비성경적이고 자유주의 신학이지만

보편성 universality 이란 말은 성경적입니다. 비슷하게 생겼지만요.

 

‘하나님의 보편성’이란..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사랑하신다.. 는 개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 계열은 소수였고,

그 외에도 이스마엘의 자손들도 있고,  :12~18

그두라에게서 난 자손들도 나옵니다.   :1~5

 

이삭을 택하셨다고, 나머지 그들을 하나님이 버리셨느냐?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택하신 것은 진리이지만, 나머지 자손들은 ‘유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이삭의 후손을 통해서, 나머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2:4

 

하나님이 창세 전에 구원하기로 ‘선택’하신 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죠.

그럼 그 외 나머지는 버리셨느냐? 유기하셨느냐?

거기서 ‘유기’란,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뜻이지, 꼭 ‘지옥갈 자들’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롬1장에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두셨다’고 세 번 나오는데,

그들이 지옥가도록 내버려두셨다는 말은 아니고,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뜻이죠.

그들도 다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우리는 중동 아랍권에도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들을 전도합니다.

그들이 하갈과 그두라의 자손이라서, 선택된 자들이 아니고, 유기된 자들이라면

우리는 선교사를 파송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파송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보편성 universality of God 때문이죠.

 

▲하나님의 보편성 universality of God 은 성경 66권에 두루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말이죠.

 

먼저 하나님은 가인도 보호해 주셨습니다.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5장에는,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계보가 나옵니다.

또한 창10장에도, 노아의 자손들의 계보가 나옵니다.

 

‘선택과 유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족보가 다 그렇지만,

족보에는 선택된 자는 사실 얼마 안 됩니다(소수). 나머지 대다수는 유기된 자들입니다.

 

유기된 자의 족보를 뭐하러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겠습니까?

지옥에 갈 사람들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입니까? No

 

족보에는,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예정, 선택하신 사람들도 있고,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고, 새사람되어, 구원받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부 특별한 (선택된) 사람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하나님,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택하신 아브라함-이삭-야곱의 라인도 사랑하시지만,

이스마엘의 자손, 그두라의 후손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마엘의 자손, 그두라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것은 그들의 죄성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이 돌이켜 회개하고,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시지,

 

그들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버린 자식, 유기된 자식들, 하나님 나라에 대적들’ 이렇게

라벨 label 붙여져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아브라함 중심의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지만,

이스마엘의 후손, 그두라의 후손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서

본문 창25장 등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축복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창16:10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창21:13 ‘그러나 여종(하갈)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창21:17~18 ‘하갈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본문 창25장에 그두라의 후손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온 세상 열방을 모두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보편성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약속대로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 선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모두는 하나님의 원수, 이스라엘의 원수가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보편성’을 특히 선교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 개념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선교가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있고, 나머지는 그 원수’ .. 이런 개념을 가지면, 선교가 안 되겠죠.

 

일례로, 출애굽 때 바로와 그의 군대가 추격해 왔습니다.

그럼 우리는 쉽게 ‘바로와 애굽은 이스라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 이렇게 생각하기 쉽죠.

 

그런데 출애굽 때 ‘여러 민족’들이 따라 나왔습니다.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출12:38

이스라엘만 출애굽한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출애굽 때도, 아말렉, 헤스본, 아모리, 모압 등 여러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길을 방해하고 훼방했다고, 그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버린 자식'으로 취급하는데,

그렇게 단편적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일례로,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은 어떻습니까?

그녀는 우상을 숭배하는 아모리 족속이며, 하나님이 ‘진멸하라’고 명하신 자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라합은(히11:31) 구원받았으며, 심지어 예수님의 족보에 등재되는

참으로 기상천외한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 가나안 7족속 가운데 구원받은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기브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와 언약을 맺은 후로 이스라엘에

종으로 편입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성전 봉사자들이 됩니다.

 

에스라7:43절 이하에, 귀환자들 명단에 ‘느디님 사람들’이 나옵니다.

‘느디님’이라는 말은 ‘성전 봉사자’라는 말인데,

레위인을 돕는 가장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이 기브온 성읍 출신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돌아온 성전 봉사자 느디님 자손들 명단을 보면 족보가 뚜렷합니다.

 

나중에 그들은 예루살렘 동쪽 지역 요새화된 오벨 성채에서 기거하면서

날마다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지성으로 감당했습니다. 성전 문지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편성’을 잘 보여주죠. 다 진멸되어야 마땅한 백성인데.. 그들은 구원받았습니다.

 

다윗 왕의 신복 중에 ‘헷 사람 우리아’도 대표적인 이방인이죠. 헷족속.

또한 잇대도 블레셋의 가드 출신입니다.

 

다윗이 잇대에게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삼하15:19)라고 하는데,

즉 자기 고향 가드로부터 쫓겨나 망명한 사람이지만,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피신할 때, 결정적으로 다윗의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수 니느웨 성 사람들을 아끼시는 심정은 또 어떻습니까?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욘4:11

 

다윗은 ‘하나님의 보편성’을 잘 이해한 사람입니다.

삼하22:50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그리고 시편에, 모든 민족, 열방, 이방.. 이런 단어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열방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만의 하나님, 유대인만의 하나님, 택한 백성들 만의 하나님이 아니라요.

 

그래서 창5장, 9장, 10장의 족보에 이어,

본문 창25:12~18에는 ‘이스마엘 후손’들의 족보가 등장하고

본문 창25:1~5에는, ‘그두라가 낳은 자손들’의 족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 ‘유기’된 자식, 버린 자식들이라면.. 일일이 족보를 기록할 이유가 없죠.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은 반드시 있습니다. 선택, 예정 교리가 틀리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바깥에 있는 자들은 (일부 신학자들은 ‘유기된 자’라고 부르죠)

그들이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들도 하나님은 사랑해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옥 가기로 유기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길은, 모두에게 다 열려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참고로, 그럼 아브라함의 후손은 다 구원받았습니까? 그럼 에서는요?

다윗의 후손이라고 다 구원받았습니까? 그럼 압살롬은요?

그 안에서 또 선택과 유기가 나눠지는 것이지만,
우리가 성경을 flexible 하게 이해해야지, 기계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한 것이죠.

 

하나님이 창12장부터 '아브라함 가문'을 택하신 것은,

그들만 구원키로 작정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나머지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브라함 가문을 도구로, 지렛대로,

특별히 들어 쓰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방 민족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해서, 거부감 가질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열방의 하나님, 모든 민족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민족은, 자기들이 선택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만 했지,

열방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 도구'라는 책임감은..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죄인, 개, 저주 받은 자 취급을 하고... 자신들만 깨끗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선민의 자격'마저 박탈당하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세상에서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차별'이 되거나 '선민의식'이 되면 곤란합니다.

마음을 넓히고, 시야를 넓혀서.. 모든 세상 사람들,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사마리아인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과 시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