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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로서 선교적 공동체 / Anne Zaki

LNCK 2024. 9. 24. 22:20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로서 선교적 공동체       행15:1~31     2024.09.24.
The Missional Community As God's New Society

Dr. Anne Zaki (중동 아랍계 기독교인)      *로잔 서울-인천대회 강의

▲도입
안녕하세요. 형제 자매 여러분들에게 이집트와, 북아메리카, 중동으로부터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 지역에선 2천만 명의 아랍계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는 더 많은 아랍계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동의 교회는 행2장의 오순절 이후로 오늘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을 예배해 왔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해서 우리 (아랍계 기독교인) 안에 임하시기를, 
그리고 우리가 비신자 아랍인들에게 사랑과 평강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오늘 아침에,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도하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행전 15장입니다. 

여러분도 보셨을 텐데요. 
영화 <보이즈 인 더 보트>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영화는, 워싱턴 대학교의 주니어 조정팀의 젊은 선수 8명이 겪은 실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팀의 코치들 간의 대화 장면이 나옵니다. 

코치들은, 이 8명의 선수들 간의 팀워크가 좋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가 자기 강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지만 이 힘을 함께 이용하는 방법을 모르고, 서로를 향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한 코치가 다른 코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본 중 가장 강한 집단이지만, 어쩌면 가장 약하고 형편없는 팀이다' 

안디옥 교회도 이런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집단이었지만, 가장 형편없는 팀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로) 함께 싸우는 대신에, 
(내부로) 서로 싸우는 데 힘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계 기독교인들이 할례와 율법 준수 주장으로.. 교회가 어수선한 분위기)

 

◑안디옥 교회에서 불거진 '구원론' 문제로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다

 

안디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세요. 
바울과 바나바가 거기서 오랫동안 이 젊은 교회를 제자화하고 있었거든요. 

행15:1절에서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라고 가르쳤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가르침에 너무 괴로웠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확신이라는 사실을 약화시키고, 
또 성령님께서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 이루신 하나됨을 
그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침이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을 그들과 벌였습니다. 15:2
이 거짓 가르침이 안디옥을 넘어 다른 교회들로까지 퍼질 가능성을 인식한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과 바나바와 그리고 그 중에 몇 사람(안디옥 교회 신자 대표단)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15:2

여기서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일반 신자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들 일반 신자들은,  교회의 주요 신학적인 주제를, 함께 다루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교회 역사상 첫 번째로 열린 공의회를 보게 됩니다. 
사도들과 장로들, 그리고 다른 신자들이 모였으며 
그런데 그 중에는, 바울과 바나바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담대한, 용기 있는 발언이 교회를 구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이 공의회 안에는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도 있었어요. 
그들 바리새파 교인들은 일어나서,

앞서 안디옥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가르쳤던 것처럼 
잘못된 가르침을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15:5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공의회로 모여서
다 함께 이 문제를 의논했죠. 

15:7절에 보면,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장면은 두 가지 이유로 굉장히 주목할 만합니다. 

첫 번째, 베드로가 리더십의 용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많은 리더들이, 공동체의 갈등 상황에서 
침묵하는 구경꾼, 방관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지만,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일어서서 복음의 동역자인 바울과 바나바를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고넬료 집의) 경험을 통해 배운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섰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목할 이유는 이것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기 얼마 전에,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을 때 
바울은 베드로의 위선적인 행동에 공개적으로 맞서야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 자리에서, 유대인들이 들어오자 급히 식사자리를 떠남

 

후에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여노라'  갈2:11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갈2:12~13

베드로는, 할례파 유대인들의 비난이 두려웠던 거죠.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도, 베드로를 따라서 이런 외식하는 행위에 참여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우리는 변화된 베드로를 보게 됩니다. 
(바울의 책망을 듣고서) 자기 잘못을 바로잡은 베드로를 말이죠. 

그는 형제 바울과의 성공적인 대면을 통해, 설득을 받고 변화됐습니다. 
베드로가 바울의 책망을 기꺼이 받아들인 거죠.

저는 제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용기 있게 발언한 것이 
혹시 안디옥에서 먼저 용기를 내서 베드로에게 맞섰던 
바울의 행동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닐까? ... 추측해 봅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27:17

그런데 반대로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바울이 안디옥에서 베드로에게 맞서지 않았더라면, 
바울과 안디옥 신자들의 믿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만약 베드로가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그 결과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발언하지 않았더라면, 
당시 교회의 연합과, 그 후로 땅끝까지 복음 전하는 교회의 사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 물려받은 신학(구원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오늘날 저는, 우리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동료 지도자들의 잘못된 행동을 덮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니면 '구원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에 용기 있게 맞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구원을 선행으로 얻는다' 또는 '구원을 육체를 경멸함으로써 얻는다(금욕주의)'
등의 잘못된 가르침을, 교회 지도자들이 용인하고 침묵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들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고, 
나이 대를 따라 차별하고, 
부유층과 빈곤층을 나누고, 
성별에 따라 나누고, 
교육 수준에 따라서 사람들을 나누거나 
장애 유무에 따라서 나누거나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난 자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던 자들로 나누는 
그런 분열적인 문지기(감별사)들이 나타나도... 지도자들이 계속 침묵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진리를 말해야 하는 순간에, 지도가가 침묵하면, 
교회의 미래가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인정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침묵을 깨고 소신했게 신앙 양심을 따라 발언했을 때, 대가가 따른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셨을 때, 
그 대가로 생명을 잃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신체적으로든 그리고 심리적으로든, 진리를 말할 때,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저는 모든 선교적 공동체가, 진리를 말할 때, 
언젠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거짓 가르침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동안 
'침묵함으로써 그 대가를 치를 것인가?' 
(나중에 교회가 분열되거나 하는 막대한 손해, 대가를 치렀을 것입니다) 

아니면 '침묵을 깨고,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그 대가를 얻게 될 것인가?'
그 대가는 교회를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베드로는 침묵을 깼고, 공의회에서 용기 있게 발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것 같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사 그들을 받으셨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 차별도 두지 않으셨다'는 점을 상기시켰습니다. :8~9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르치고 계시죠. 
특정 문제들에서의 명확한 구분을 하셨습니다. 
'빛과 어둠, 거룩함과 위선, 좁은 길과 넓은 길'과 같은 특정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구분을 하셨고요. 
교회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구분하신 경계선을, 우리도 선을 긋고 지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교회 안에서는 
우리와 그들 사이, 
유대인과 이방인사이, 
진보와 보수사이, 
현대와 전통사이, 
차등주의자와 평등주의자 사이, 
외국 선교사와 토착 지도자들 사이에 구분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인종이나, 특정 정치적 성향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구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라면 
그들 모두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나누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구분하지 않으신 것을, 구분하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자신의 연설을, 이 강력한 질문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5:10
 
베드로에게 있어서 '우리(유대인)와 그들(이방인)'로 나누는 분열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10

(*본문에서 '시험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도록 인간이 장애물을 설치하거나,

하나님의 일에 인간이 간섭하는 불경건한 행위를 말합니다. '방해하여'라는 뜻이죠) 

약3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약3:14

야고보는 잘못된 동기로 분열을 정당화하면서도 
진리의 수호자인 척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실 그들은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분열시키고, 
하나님의 선교를 방해하는 것은 반역행위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우리가 감당할 수 없었던 기준을 다른 신자들에게 강요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느냐?'  :10

그리고 그는 11절에서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가 이 중요한 선언을 한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그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하신 기적적인 표적과 이적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5:12

그때 온 공의회가 침묵했습니다. 그런데 이 침묵은 좀 다른 종류의 침묵입니다. 
이 침묵은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구경꾼의 침묵이 아닙니다. 

-참여하지 않으며 덮어두는 침묵, No
-대립을 피하는 두려움의 침묵, No
-불의에 굴복하는 억압된 침묵이 아닙니다. No 
-이 침묵은 깨달음의 침묵입니다. 확신의 침묵입니다. 

 베드로의 말이 맞다는 침묵입니다. 그래서 대꾸나 반박할 말이 없다는 거죠. Yes

선교적 공동체로서 다시 방향을 잡아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자유롭게 선포하고 나타내겠다는 침묵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야고보 장로 입을 엽니다. 
사도행전에서 그가 유일하게 목소리를 낸 순간이죠. 

야고보는 공의회 구성원들의 신학적 논의를 듣고,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현장 보고를 듣고 나서 
야고보는 이 모든 논의를, 성경의 증거 안에서 해석합니다. 

그는 먼저 아모스 9장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공의회가 그들의 현재 경험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현재 경험이, 아모스서 예언의 성취를 증언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16절에서 이렇게 아모스서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 후 야고보는 자신의 의견을 나눕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19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공의회 결정을) 설명하는 편지를 쓰자고 제안합니다. :20

'그리고 성령과 우리는 이 네 가지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라' 이렇게 편지에서 권합니다. :28

우리는 이 문장을 사랑하지 않나요? 
초대교회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명언 중 하나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결정했다'    :28

 

그러나 우리가 교회가 어떻게 이 선언에 도달했는지, 그 과정을 이해하고 있을까요? 
이 과정은 어느 개인의 독단적 결정이 아니라, (그 분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서로와 함께 대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안디옥에서 긴 시간 동안 논쟁과 토론을 하고 
이어서 예루살렘에서 모든 의견을 제시하고 듣는, 긴 시간의 논의가 있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안디옥의 거짓 교사들이, 처음부터 경청하고 자기들의 잘못을 처리했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자원이 절약되었을까요?   

만약에 사도들이 그들의 사역을 뒤로하고 
안디옥에서 예루살렘까지 긴 여정을 떠나, 이 근본적인 질문을 해결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일이 이렇게 전개된 것이,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초대 교회가 실제로 건강하게 존재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오늘날의 교회와 별로 다르지 않았죠. 
그들은 여전히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회의를 통해서 
주요 신학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저는 감사함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우리가 '성령과 우리는... 결정했다'
라는 선언에 이르기까지 치러야 했던, 대가와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 지도자가 개인적인 수련회를 다녀와서 
교회를 위한 비전과 결정을 가지고 와서 
'성령과 나는 옳은 줄 알았다' 라고 말하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 지도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교회가 함께 있을 때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경청하고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방식, 
우리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도 서로 이야기하고 경청하는 예술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초대교회들로부터 배워서 
'공동체의 연합과 사명'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고려해서 
우리의 고정된 입장을 재고할 수 있는 훈련을 배워야 할 때가 아닐까요.?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 
모든 것에는 사랑이라는 원칙을 실천할 때입니다. 

▲성령은 키잡이

영화 '보이즈 인 더 보트'로 돌아가면, 코치들 간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그들은 이 8명의 운동선수들이 하나로 단결된 팀으로서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그 중 한 코치는 '어쩌면 문제는 선수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키잡이를 갖추고 
키잡이는 배에 타는 아홉 번째 사람입니다. 

키잡이는 노를 젓는 여덟 명의 운동선수 중 한 명이 아니지만, 

의 성공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덟 명의 선수는 뒤를 보며 노를 젓지만, 
키잡이는 앞을 보고 있기 때문에, 배의 방향과 속도를 설정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키잡이는 목소리로 선수들에게 독려해서

경주에서 그들이 어디쯤 왔는지, 그리고 승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코치들은 새로운 키잡이를 배에 배치했고 
그가 여덟 명의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지금까지 개인 경주를 하듯이 노를 저었어 
이제는 팀으로서 노를 저어봐' 

성령께서는 '교회라는 배'의 유일한 전능한 키잡이입니다. 
성령께서는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방향과 속도를 설정할 자격을 갖춘 
유일한 분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명확함과 연합을 가져오시며 
그들은 성령을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화되고 새롭게 되어야만 하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유대인 신자들의 양보와, 이방인 신자들의 양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보낸 편지는 
여전히 네 가지 요구사항을 명시하며 
그들에게 우상에게 바친 음식과, 피와,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음행을 멀리하라고 권고합니다. 왜 그럴까요? 

방금 전에 '그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이 네 가지 요구사항이 포함됐을까요? 

이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았나요? 네, 물론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약한 신자들을 배려하는 책임 있는 자유였습니다.
저는 야고보가 교회의 연합과 교회의 복음증거에 대한 위협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교회의 연합에 위협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루살렘 국립의회가 할례 요구사항을 유대인 신자들에게 양보하도록 기대했던 것처럼 
이 네 가지 요구사항에 대해 이방인 신자들이 양보하기를 기대한 것이 
지혜로운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그들의 교제 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엡4:3
유대인 신자들은 오래전부터 모든 도시에서 이 요구사항들에 대해 들어왔고, 
이미 그들의 일상생활을 그에 맞춰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 신자들은 이 네 가지 관행을 
이방인 신자들이 지속할 경우에, 불쾌하게 여길 수 있으며 
어쩌면 계속된 불쾌감으로 인해 실족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성령께서 교회를 하나되게 하셨다'는 것을 알았지만 
'교회가 아직 그 하나 됨을 향해 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든 구성원은,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둘째로, 저는 야고보가, 비신자들에 대한 교회의 복음 증거를 염려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사명의 핵심은, 아모스가 말한 것처럼, 
'남은 사람들이 주를 찾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디옥 교회는, 비신자들이 신앙과 구원에 이르는 길에 놓인 걸림돌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여전히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사거나, 
성적으로 부도덕한 생활을 한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구별된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는 (순결한) 존재 그 자체가 사명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 속에서 
믿지 않는 이웃들이 주께로 나아오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 자신에게 부과해야 할 요구사항은 무엇일까요?

또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말, 행동, 그리고 관계에서 
우리가 자제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믿는 형제 자매들과의 교제를 유지하면서도,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전 세계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답을 생각해낼 수 있지만, 
그 외에도 우리의 독특한 문화적 또한 선교적 상황에 맞는 답도 있을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세계 복음 전파의 가장 큰 걸림돌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30절에서 
'온 교회가 모였고 편지를 읽었을 때 
그들이 기뻐하고 위로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편지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그리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지 기다리던 순간은 
아주 불편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교회의 평화가 회복되고 
연합을 위협하는 것이 제거되면서, 성도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셨습니다. 


마치는 말
성령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같은 기쁨과 위로를 주십니다. 
두려움의 침묵 대신 진리를 말할 때, 연합이 회복되고 
우리는 다시금 평강 가운데, 교회의 사명을 재개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가 성취된 것을 나타내고 선포하게 됩니다. 
'아버지여,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기를 원하나이다' 요17:21참조

저는 오늘날 여러분도 이 진리를 듣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선교적 공동체로서 우리의 연합에 깊이 관여하고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 승천하신 예수님, 성령님께서는 교회를 인도하시며 
교회를 진리와 연합을 향해 나아가도록 방향과 속도를 정하십니다. 

그 연합은 평강과 공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증인입니다. 
우리는 삼위 일체의 하나님께서, 위기의 시간 동안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 
남아프리카공화국, 르완다, 이집트에서 하신, 평화롭고 공의로운 선교를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의 
또 교회를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평화롭고 정의로운 역사를 
우크라이나, 수단, 가자 지구의 위기 속에서도 곧 목격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영화 '보이즈 인 더 보트'로 돌아가면, 
8명의 운동선수들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1936년 베를린 하계올림픽 출전 자격권을 얻습니다. 

경기 직전 코치는, 마지막 격려의 말을 전합니다. 
'나라를 위해 노를 저어라. 서로를 위해 노를 저어라. 
그리고 모든 불리한 조건이 뒤로 물러나는 그 순간을 위해 노를 저어라'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노를 저으며, 
전 세계 최고의 경쟁자들을 상대했고, 결국 올림픽 메달을 땄습니다.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경청했고,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합할 방법을 찾아냈고, 
계속 앞으로 사명을 향해 방해받지 않고, 계속 나아갔습니다. 

'방해받지 않고'라는 단어는 사도행전의 헬라어 원문에서 마지막 단어입니다. 
'방해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들의 복음은   *행28:31 '거침 없이'
모든 장애물과 분열을 극복하며 계속 전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로 
요일4:4절의 말씀이 초대교회의 1세대 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성취될 것임을 압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일4:4

이 진리 때문에 우리는 안식하고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영원히 실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세월이 흐른 후에, 
노년이 된 여덟 명의 선수 중 한 명과, 그의 어린 손자 사이에 대화가 오갑니다. 

손자가 묻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8인승 배에서 노 젓는 거 좋아하셨어요?' 
할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여덟? 우리는 결코 여덟이 아니었단다. 우리는 하나였어!' 짝짝짝짝!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들 여러분,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기를 원하나이다.'  요17:22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들여 우리는 하나입니다. 

함께 기도하십시다. '성령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때로는 이 하나 됨을 깨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주여 저희들에게 능력과 은혜를 주시사, 겸손을 주시사 
우리에게 창조하신 연합을 세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예수님, 지금 오셔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소서.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통역 내용을 녹취한 것이라서, 실제 설교와 일부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