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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도착하는 바울

LNCK 2024. 10. 22.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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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1 07 사도행전  (92) / 로마에 도착하는 바울 - YouTube


로마에 도착하는 바울         행28:11~15           

◑1. 내 인생 항해길의 인도자, 수호자

28:11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바울은 배를 타고 로마로 출발했습니다. 그때 바울의 신분은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바울은 황제로부터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중간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기 때문이었죠.
결국 광풍에 떠밀리고 떠밀려서 멜리데 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28:11

멜리데 섬에서 바울의 일행은 3달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때가 아마 11월쯤 되었을 거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말합니다.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이죠. 

겨울에 지중해 항해는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그래서 멜리데 섬에 머물면서, 겨울을 보냈습니다. 
석 달 후에, 바울의 일행은 다시 로마로 출발합니다. 

11절에 보면, 로마로 떠나는 그들의 배가 나오는데요. 
그들이 탄 배를 '알렉산드리아 배'라고 말합니다. 
알렉산드리아 소속의 배라는 뜻입니다. 

이 배는, 곡물선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로마까지 실어 나르는 배입니다. 
사실 바울의 일행은, 전에도 이 (알렉산드리아 선적) 배를 타고 로마로 향했습니다. 27:6
그러나 그 배는 파선이 되었습니다. 광풍을 만났기 때문이죠. 

그래서 두 번째 배로 갈아탄 겁니다. 
그런데 이 배는, 똑같은 알렉산드리아 (선적의) 배인데, 차이가 있습니다. 

11절 마지막에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디오스구로'는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을 가리킵니다. 
카스토르와 플룩스라는 쌍둥이 아들인데요. 이 쌍둥이 아들을 디오스구로라고 부릅니다. 
이 쌍둥이 아들은, 항해의 수호신이었습니다. 
바닷길을 항해하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신이었습니다. 

 


특별히 이들의 이름을 딴 별자리가 바로 '쌍둥이 자리'입니다.
이 쌍둥이 자리는,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행운의 징조로 인식되었습니다. 

캄캄한 밤바다에서 보이는 그들의 별자리는 
선원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항해를 나가는 사람들은, 쌍둥이 아들 디오스구로를 의지하며 항해를 했습니다. 주1)

그래서 이 쌍둥이 형상을, 아예 조각으로 새기거나 그림으로 그려서 
뱃머리에 장식을 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알렉산드리아 배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굳이 그 배의 머리 장식을 본문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전에도 바울의 일행은, '알렉산드리아 배'를 탔습니다.  27:6

그런데 그때는 '알렉산드리아 배'는 언급하면서도, 이런 설명은 없었습니다. 
뱃머리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서는 굳이 누가가 이 설명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의 다분한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바울의 항해를 인도하셨던 분은 누구셨기 때문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게 행27장의 이야기였죠. 

하나님은 광풍을 만난 바울의 배를 구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광풍까지도 다스리셔서, 그들을 로마라는 목적지 밑에 있는 
멜리데 섬으로 안전하게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지금 사실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의 항해를 인도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누가 우리의 인생의 항해를 인도하고 계시는가? 

디오스구로 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누가의 해학적인 그림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중해를 항해하는 그 당시의 배들은, 한낱 세상 신에 불과한 디오스구로를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뱃머리에 쌍둥이 장식을 했습니다. 

다른 곳이 아니라 뱃머리에 장식을 달았다는 것은, 이 배를 인도하는 신이 
바로 디오스구로 라는 고백입니다. 

오늘도 세상 사람들은 '디오스구로'를 의지합니다. 
세상이 힘이라고 말하는 것들, 
또 세상이 신이라고 여기는 것들, 그것들을 의지합니다. 
그것들에 기대어 인생의 항해를 나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누가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의 항해를 책임지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항해를 지켜주거나,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항해를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누가의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것들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살아계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줄을 믿습니다. 

세상이 의지하는 디오스구로 라는 건, 말 그대로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재미있죠? 누가가 '장식'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11  
그러니까 악세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이 세상의 것들은 그 무엇도, 하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결코 선한 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뱃머리 장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의 인생의 뱃머리는 누가 붙들고 계십니까?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인생의 뱃머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사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우리의 항해를 지키시고, 신실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도 
뱃머리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동서남북 바람’에 대한 색다른 조명      주2)

◑2.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

행28:13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이제 바울의 일행은요. 이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합니다. 
멜리데 섬에서 로마까지 가는 그 항해 일지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요.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보시면 많은 지명이 나오는데요. 
지도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도로 보면 이해가 훨씬 더 쉬우니까요. 

 


멜리데 섬에서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 수라구사 항구인데요. 
이 수라구사 항구는 오가던 배들이 정규적으로 정박하는 곳입니다. 
시실리 섬의 수라구사에서 3일간 정박했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에 다시 출발해서, 이탈리아 반도의 레기온으로 향했습니다. 

레기온은 수라구사에서 약 113KM 떨어진 곳입니다. 
이탈리아 반도를, 부츠 처럼 생겼다고 말하는데, 
레기온은, 그 부츠의 발끝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레기온에서 다시 배를 타고 보디올에 도착합니다. :13 
이 보디올에서부터 로마까지는 육로로 걸어서 이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레기온에서 보디올 항구까지 약 370KM입니다. 꽤 먼 거리죠. 
당시는 배를 움직이는 동력이, 사람의 노동력과, 순전히 바람의 힘에 의지해서 뱃길을 갔습니다. 

그걸 고려하면 370KM는 5일 이상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이 먼 뱃길을 며칠 만에 가게 됩니까? 본문에 보시면 이틀 만에 갔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날 도착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남풍이 불었기 때문입니다. :13

여러분 이 남풍을 누가 불게 했겠습니까? 디오스구로 일까요? 
아니겠죠. 하나님이 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로마로 가는 바울의 배를, 빠르게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얘기이죠. 

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우리도 주변을 보면요. 사소한 것 하나라도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게 없습니다. 
우리의 사소한 일상도, 남풍 하나 부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라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디올에서 바울은 믿음의 형제들을 만납니다. 

28:14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당시엔 그리스도인을 '제자' 또는 '형제'로 불렀습니다.
여러분 놀랍죠. 어떻게 이 보디올에 복음이 전해졌을까요? 
이곳에 교회가 이미 세워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렀습니다. :14

이 기간 동안 바울의 일행은 휴식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보디올부터 로마까지는 육로로 가야 했기 때문이었죠. 약 209KM입니다. 

꽤 먼 거리죠. 이 거리를 걸어서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다시 보디올에서 로마로 떠납니다. 
이제 고된 도보 여행이 시작이 되는 거죠. (서울에서 추풍령 거리입니다)

그런데 도보로 가는 그 길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14절 하반절에 나오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 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이제 로마로 가는데요. 누가는 '이와 같이 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라는 말은,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 굉장히 평범해 보입니다만, 

그러나 이 성경을 기록했던 누가는, 굉장히 감격적으로 썼을 겁니다. 
왜일까요? 

'이와 같이 thus' 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행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사도행전의 로드맵입니다. 
사도행전이 딱 시작할 때,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먼저 로드맵을 주신 거죠. 
'이 순서대로 복음이 증거될 것이다.'

실제로 이 순서대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28장에서 
'땅 끝까지' 바울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땅 끝'의 첫 발이 바로 로마였던 것입니다. 

그 감격을 지금 누가는 '이와 같이'로 기록한 것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이와 같이 정말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 라는 표현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바울에게 여러 번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3차전도여행을 할 때 
주님은 로마에 대한 마음을 바울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그리고 그때부터 반복해서 주님은 '네가 로마로 가게 될 것이다'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옥에 갇혔을 때도, 
'네가 로마로 가야 하리라' 하면서 바울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23:11
또 강풍 가운데서도 '네가 로마에 가야 할 것이다' 거듭거듭 말씀을 주시면서  27:24 
바울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바울은, 드디어 로마로 오게 되었습니다. 
더 감격적이었던 것은,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안 불안 했었죠.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직진으로 온 게 아니었죠. 
예루살렘에서 몇 번이나 불려다니며 심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바울은 죽을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로 가는 뱃길에서는 광풍을 만났었죠. 
광풍에 떠밀리는 바람에, 구원의 여망마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그대로 틀림없이 바울은 로마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 라는 표현입니다.  :14

우리는 앞에서 바울의 항해를 인도하는 분이 디오스구로 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약속대로, 말씀하신 그대로, 바울을 로마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이와 같이 틀림없이, 바울을 로마로 오게 하셨습니다. 
아마 누가는 '이와 같이' 라는 부사를 써가면서 아마 소리를 질렀을 겁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밋밋하게 앉아있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감격스러운 탄성이 터져 나왔을 겁니다. 
'봐라,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봐라!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아라! 
누가 바울의 항해에 뱃머리를 붙들고 계시는가? 
바로 살아계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대목에서 소리를 질렀을 겁니다. 
그것이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 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네가 말씀대로 살면 망한다' 하고 우리를 위협합니다. 
세상 뿐만 아니라 우리도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말씀대로 그렇게 살면 망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대로 살면 손해보는 것 같고, 또 망할 것 같다. 그건 세상을 모르는 이야기다.'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식을 기를 때도, 늘 불안하지 않습니까? 
'우리 자식들, 믿음으로 길렀다가, 주일날 학원도 안 보냈다가 망하는 거 아닐까?' 

자식뿐만 아니라 우리가 뭔가를 결정할 때, 늘 불안하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살았다가 망하지는 않을까?' 
늘 그게 두려운데... 그래서 세상을 열심히 좇아가는 게 지혜라고 생각하는데, 
오늘 우리는 또다시 무엇을 확인합니까? 여러분, '말씀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딱 의지하고 사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가장 안전한 삶입니다

뜻을 정하여 세상을 살아가되, 세상 속에서 선을 그으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삶입니다. 
말씀에 붙들려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 최고로 귀하고 복된 삶입니다. 
말씀대로 하나님은 틀림없이 정확히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 라는 표현입니다. 

◑3. 압비오 광장을 통해 로마로 개선한 사도바울

이제 바울은 걸어서 로마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이 육로로 이동을 하는데요. 
바울이 통과한 육로가 특별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8:15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바울은 브디올에서 북쪽으로 로마 시를 향해 올라갑니다. 
먼저 압비오 광장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로마에서 남쪽으로 약 65KM 떨어진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압비오 광장에서 로마까지 이르는 큰 대로가 하나 있습니다. 
그 대로의 이름이 압비오 대로입니다. 
 
이 압비오 대로는 평범한 작은 도로가 아닙니다. 상징성이 있는 특별한 도로입니다. 
로마의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개선 행렬을 펼칠 때 
이 압비오 대로를 따라 로마 시로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압비오 광장은, 전쟁을 끝내고 승리한 장군이 돌아올 때 
환영식을 가졌던 곳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지금 바울이 그 압비오 광장을 통해, 로마로 들어오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도 누가의 의도가 있습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바울은 지금 한낱 죄수에 불과합니다. 
로마의 가이사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초라한 죄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믿음으로 살아온 바울은 
죄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개선 장군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은 왕처럼, 전쟁에서 이긴 개선 장군처럼, 
로마를 향해 성큼성큼 당당하고 멋지게 걸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라한 죄수의 바울이 아니라요. 

▲뿐만 아니라 로마의 성도들이 이 압비오 광장까지 바울을 마중하러 나옵니다.  
:15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여기 '맞이하다 meet'는 헬라어로 아펜테시스 입니다. 
이 단어는 특별히,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의 입성을 성대하게 맞이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누가는, 바울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로마로 들어오는 바울의 걸음을, 특별하게 기록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걸음을,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의 개선 행렬처럼 묘사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형제들이 장군의 입성을 맞이하는 것처럼, 결국 로마로 입성하는 
바울의 마지막 걸음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은, 이 땅에서 우리의 주어진 사명이 다하는 마지막 날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우리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날 그날, 
주님께서 우리의 마지막 행렬을 이와 같이 성대하게 준비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걸 바울은 딤후4:7~8절에 이렇게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아멘!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는 삶입니다. 
바울이 죄수로 잡혔던 것처럼, 우리도 때로는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또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파산되는 것 같은 위기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핍박과 손해를 당할 때가 있고요. 
또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게, 때로는 외롭고 고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걸어가는 사명의 길, 그 길 끝에서 
믿음으로 살아갔던 그 길 끝에서,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날에 우리의 의로우신 재판장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성대하게 맞이하기 위해 
면류관을 예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우리가 살다 보면 언제 서럽냐면, 
일을 많이 하고 고생해서 서러운 게 아니라 
내가 일을 많이 하고 고생했는데,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을 때 
그때가 서러울 때라고 말을 하시더라고요. 

사람이 고생을 많이 해서 억울한 게 아니라, 내 인생에 마중을 나온 사람이 없을 때, 
그때가 서럽다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러나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서러운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그 사명의 길, 그 길 끝에서 
주님이 우리를 마중하러 나오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우리를 성대하게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그 삶을 위로해 주기 위해 
의의 면류관과 상급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때에는 모든 눈물이 닦여지고, 
그분을 위해 살았던 모든 수고가, 위로와 칭찬과 상급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또다시 한 주간을 시작하는데요.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무거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억지로 삶의 자리를 지켜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삶의 자리가 버거워서 내려놓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비집고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 길 끝에서 우리를 맞이하시는 그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의의 면류관과 상급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위한 우리의 삶은 결코 헛된 삶이 아닙니다. 
주님이 보시고 아실 뿐 아니라, 우리를 맞이해 주시기 위해 
오늘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헛된 수고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고전15:58
그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금 한 주간을 믿음으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주님이 주시는 또 다른 은혜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15절에 나오는데요. 

♣헨리 모리슨 선교사 귀환 일화
헨리 C.모리슨(Henry Morrison)이라는 아프리카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20세기 초 아프리카에서 40년 동안 개척 선교사역을 하는 동안
건강을 잃고, 가족을 잃기도 하고, 이젠 늙은 선교사가 되어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타고 돌아오던 배에는 아프리카의 한 국가를 방문 후
코끼리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테오도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뉴욕 항구로 입항하고 대통령이 내리자,
붉은 레드 카펫이 깔리고 군악대의 팡파르 소리로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일행이 항구를 빠져 나간 후
모리슨 선교사가 항구의 출구로 나서자
레드 카펫도 없었고 군악대의 팡파르 소리도 멎은 후였고
그를 마중 나온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는 저녁노을 진 하늘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답니다.
“주님, 이것이 40년간 아프리카에서 저의 청춘을, 저의 건강을,
그리고 저의 일생을 바친 결과란 말입니까?”

그때 그는 저녁노을 사이로 말씀하시는 조용한 한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내 아들 헨리야, 너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단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레드 카펫이 아닌
황금 길로 군악대가 아닌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내가 너를 마중 나오마!”

◑4. 자신을 마중나온 형제들을 보며, 바울은 감사하며 담대함을 가지다

28:15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바울은 로마 가까이에 왔습니다. 로마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때 바울을 맞이하러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사람들이 있는데요. 
로마교의 성도들이, 바울을 맞이하러 온 것이죠. 

사실 여러분 이건 뜻밖의 환대입니다. 
왜냐면 로마는 바울이 개척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바울은 로마에 간 적이 없습니다. 
가려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 증거가 롬1:13절에 나오는데요.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은 로마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길이 막혀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 먼저 편지를 보낸 겁니다. 몸보다 편지가 먼저 간 거죠. 
그게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써서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서 사역을 했었죠. 
그때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를 뵈뵈 집사님이 가지고 로마 교회에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받았던 로마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먼 길을 달려옵니다. 

보시면 바울을 두 곳으로 맞이하러 왔습니다. 
-먼저 압비오 광장으로 마중 나온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로마로부터 65KM 떨어진 곳입니다. 서울에서 평택 쯤 되는 거리입니다. 꽤 먼 거리죠. 

 

-또 다른 형제들은 트레이스 타베른 까지 맞이하러 왔습니다. 
트레이스 타베른(세 여관이란 뜻, 여관이 세 개 있었나 봅니다)
여기는 로마에서부터 53KM 떨어진 곳입니다. 서울에서 동탄까지 거리입니다. 
그것도 꽤 먼 거리죠. 그 거리를 걸어와서 바울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들은 바울을 본 적이 없습니다. 편지로만 교제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5년 전에 보낸 편지가 전부였습니다. 그동안 일면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받은지 5년이 지났는데도, 
사도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을 맞이하러 먼 길을 달려옵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 5년 동안,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신앙이 흔들렸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더 견고해졌다는 것입니까? 더 견고해졌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바울은, 마중나온 그들을 보고,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15B절에,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이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의 믿음이, 지난 5년 사이에, 흔들리거나 믿음에서 떠났다면, 
이렇게 먼 길을 달려와 마중하러 왔겠습니까? 아니죠. 
바울이 오든지 말든지 하나도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이 시기에 로마교회는, 베드로가 목양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없어도 로마교회가 굳건하게 세워져 있음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바울은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왜 담대함을 얻었을까요? 
지금 바울을 마중하러 온 사람들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로마 제국의 수도에 사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 로마 제국의 심장이라는 로마에서도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고 돌아오는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방인들이 바울을 뜨겁게 맞이하러 나올 때, 바울은 확신을 가졌을 겁니다. 
'하나님이 로마에서도 이방인들의 마음을 이미 열어놓으셨구나.. 
이미 하나님이 로마에서도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구나.. 
하나님이 앞서 일하고 계셨구나..' 하고 바울은 느꼈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함을 얻었던 것입니다. 
앞서 일하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일하신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구나.. 늘 그랬듯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구나.. 
나를 로마로 부르신 그분이 하시는 일이구나.. 
로마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구나..'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 로마 제국이지만 
하나님이 그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 복음의 문을 이미 열어 놓으셨다면, 
그 로마를 통해 말씀하신 그대로 
복음이 땅끝까지 들풀처럼 퍼져나가겠구나' 하고 바울은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담대함이 있었던 거죠. 
그게 바로 바울을 마중 나온 형제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확신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바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요, 담대한 확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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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디오스구로 신을 의지한 항해

실제로 그 당시 문헌에 보면 그런 증거들이 있는데요. 

당시에 호라티우스 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 시인이 자신의 글에서, 쌍둥이 아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플룩스와 카스토르 형제의 도움으로 나는 폭풍이 부는 에게해를 무사히 지나갔다. 
이들은 범선에 달린 이중 노와 같았다.' 이게 그 당시 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항해를 하는 사람들은 디오스구로가 자신들의 뱃길을 인도한다고 믿었습니다. 


주2) ♣‘동서남북 바람’에 대한 색다른 조명 

1. 동풍 같은 성령을 받으라!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 후에 또 쇠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쇠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더라”(창41:6-7)고 했습니다. 

모세가 애굽 땅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에 미쳐 동풍이 메뚜기를 불러들인지라”(출10:13)고 했습니다. 

고라의 자손은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시48:7)라고 
노래했습니다. 

에스겔은 “네 사공이 너를 인도하여 큰 물에 이름이여 
동풍이 바다 중심에서 너를 파하도다”(겔27:26)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때로는 동풍같이 임하셔서 
요나를 지중해에서 흔들어 놓으시듯이 흔들어 깨우시고, 
정신을 차리게 하시고, 혼미하게 하셔서 바로 잡아 주십니다. 

2. 서풍 같은 성령을 받으라 ! 
“여호와께서 돌이켜 강렬한 서풍이 불게 하사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넣으시니 
애굽 온 지경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아니하니라”(출10:19) 

<동풍을 환난의 바람>이라고 한다면 <서풍은 구원의 바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눅12: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북풍 같은 성령을 받으라 ! 
북풍은 추위를 몰고 옵니다. 맑은 공기를 가져옵니다. 
잠언에서는 “북풍이 비를 일으킴같이”(잠25:23)라고 말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겨울이 우기에 접어듭니다. 겨울에 북풍이 불어 비가 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 때에 따른 적당한 비로 축복하십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 그리고 적당한 비로 우리들을 만족시키십니다. 

4. 남풍 같은 성령을 받으라 ! 
남풍은 폭풍 아니면 주로 산들 바람입니다. 
산들 바람은 시원하게 하며 기분을 상쾌하게 합니다. 

욥의 친구 엘리후는 “남풍으로 하여 땅이 고요할 때에 
네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아느냐”(욥37:17)라고 말했습니다. 

아가서는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아4:16)고 노래했습니다. 

남풍 같은 성령의 바람이 불 때에, 우리 영혼에 걱정이 떠나고 시원하게 됩니다. (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