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렇게 교회가 되어간다 행21:1~16 2024.10.27.
도입 주1)
사도 바울은 3차전도여행이 끝나면서 예루살렘으로 향해서 가는데
에베소(밀레도)에서 예루살렘을 통과해서 로마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에 바울이 도착하면 사도행전 전체의 대 여정이 끝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항해 내용입니다.
21: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밀레도에서 장로들과 작별한 바울 일행은 :1
몇몇 항구를 거쳐서 베니게로 가는 것입니다.
◑전혀 안 바뀔 것 같은 도시가 변하다
베니게의 주요 도시가 두로거든요.
베니게의 두로로 가는 길에 구브로(사이프러스)를 왼편에 두고
그러니까 지중해 남쪽으로 쭉 내려갔다는 말이겠죠.
이 베니게는 세계사 교과서에 페니키아 라고 나오는 곳입니다.
세계사 교과서에 보면요. 세계 최초로 표음문자 알파벳을 사용한 민족으로 나오죠.
밀레도(밀레토스)는 철학의 진원지 였고요.
오늘은 알파벳의 진원지인 베니게(페니키아) 입니다. :2
그러니까 이 도시들이 역사적인 의미로서도 굉장히 중요한 도시들이며,
우리가 (재미있게) 기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도시들을 쭉 다닐 때 이전에는 개척자의 발걸음이었어요.
처음으로 어느 도시에 들어가서 '여기서 어디로 갈까, 뭘 할까, 여기는 어떨까?'
'누구를 만날까?' 하며 뭔가를 모색하는 그런 발걸음이었는데 (처음 갔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뭔가를 정리하는 느낌입니다.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배가 갔다)' :3
이때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구브로는 바울이 처음 선교여행을 했을 때, 바나바와 함께 갔던 곳이잖아요.
거기서 총독 서기오 바울을 만났고 *세르기우스 파울로스
'내가 사울이란 이름 대신에, 앞으로 바울이란 이름으로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선교사로서 본격적으로 첫번째 발걸음을 내디딘 곳이 사이프러스였습니다.
바울은 그 섬을 바라보면서 어떤 회한에 잠겼을까요?
'내가 그때 참 미숙하고 실수도 많았는데, 그래도 주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셨네...
감사합니다.' 그런 마음이었을 거예요.
▲베니게, 구브로 이런 지역이 앞서 행11장에 나왔었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11:19
이렇게 복음이 안디옥에 이르기 전에,
먼저 사마리아와 베니게를 거쳐서 베니게로 갔죠.
그 다음에 구브로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로 이 베니게가, 두로가 거기 핵심 도시인데
본문 21:4절에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두로에 제자들이 있는 거예요. 교회가 세워져 있는 거예요.
그 제자들을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위험하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두로 지역에 벌써 교회가 세워져 있는 거예요.
거기에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두로가 어떤 지역입니까?
구약 때부터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의 진원지로 유명하죠.
또 신약 복음서에서 기억나는 분이 계실 거예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10:12~14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무슨 뜻입니까?
구약 때는 '소돔'이었고,
신약 때는 '두로와 시돈'인데,
당시 최고로 악한 도시들이었다는 거죠. 그렇게 널리 평판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고라신, 벳새다는
그보다 더 악하다는 뜻인데)
어쨌든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최고로 악한 도시라고 생각했던 곳이 '두로'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두로'가 실제로 복음화되어 있습니다.
물론 두로에 기독교가 아직 주류를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에 교회가 세워져 있고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수소문해서 찾아보면, 찾을 수 있을만큼 (바울 일행이 수소문해서 만나 7일을 두로에서
머물렀죠) 그들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우상숭배의 진원지 두로에서, 복음이 막 꿈틀대기 시작하는 거예요.
더 놀라운 것은 두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마세요. 거기는 위험합니다. 거기는 흉악한 곳이에요' 라고 말합니다.
엄청난 역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타락한 도시,
요즘 말로 Sin-city 가 두로예요. *영화제목
근데 지금 바로 그 두로 사람들이 '예루살렘은 흉악한 곳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어요.
완전히 역전된 거죠.
▲그 다음에 바울이 가이사랴 라는 도시로 갑니다.
이곳 역시 여러분 이름 자체가 '가이사의 도시'예요. 로마 군대의 주둔지예요.
여러분 옛날에 우리나라 사정으로 생각하면 미풍양속 지키면서 점잖게 사는데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서 막 그냥 주둔하고, 도시를 활개치고 다니면
그 문화가 어떻게 되어있겠습니까? '아이고 저 쌍놈들 온갖...'
여러분 화려하긴 하지만 우상숭배고요. 음란하고요.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도시가, 뭐 도덕적이고 품위가 있겠습니까?
정말 너무너무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그런 도시가 가이사랴 였어요.
근데 그곳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는 거예요.
물론 도시 전체가 복음화된 것은 아직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생명의 사역이 계속되고 있는 거예요.
두로와 가이사랴는 바울이 전도한 곳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핍박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거기까지 이르러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이사랴에 있는 사람도 '바울사도여, 예루살렘 가시면 안 됩니다.
가지 마십시오' 라고 말하는 상황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1:8~12
여러분 한 도시의 형편은 바뀔 수 있습니다.
폐역한 도시가 평화의 도시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한때 기독교 도시였던 곳도 최악의 도시, 죄악 가득한 도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잖아요. '촛대를 옮길 것이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긴장해야 됩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한국교회 초기에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그랬어요.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놀랍고 슬픈 일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놀랍고 슬프고 희망적인 일이에요.
왜냐하면 아무리 패역한 도시라도, 복음이 들어가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아무리 흉악한 도시라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은혜가 바꿉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화 人和를 이루었습니다. 성경적 용어로 샬롬!
이번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책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Why Nations Fail>
라는 꽤 재미있는 책입니다.
이전에 세계 지성사회에서 꽤 유명했던 담론이, '지리결정론'이 있었습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Guns, Germs, and Steel> 같은 책,
팀 마샬의 <지리의 힘> 이런 책들은 논지가 그겁니다.
'지리적인 이점이 나라의 번영을 결정한다' 그런 이야기를 해요.
제가 어떤 사업체에 갔더니 <지리의 힘>이라는 책이 꽂혀 있어요.
제가 사장님에게 물어봤습니다. 이 책 읽어보셨습니까?
그 분은 '이 책을 읽고 무척 우울했습니다.'
'왜요?'
그 분은 '내가 이 사업체를 열면서 위치를 잘못 선정한 것 같아요..'
지리가 중요하다는 거죠.
'저기 좀 대로변에서 해야 되는데,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최근 노벨상을 받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이 책은
과거에 유행했던 '지리결정론'과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지리의 힘, 지정학적으로 보면,
'미국이 왜 번영할 수밖에 없는가?' 할 때,
미국은 중국하고는 다르게, 중국은 지리적으로 꽉 막혀있는 나라이고,
미국은 이쪽에는 태평양, 저쪽에는 대서양, 확 트인 나라 라서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러면 비슷한 조건의 멕시코는 왜 그렇게 살죠? 그렇잖아요.
이 책에 보면, 지리적인 조건은 똑같은데, 완전히 다르게 사는 나라들이 많이 나옵니다.
동독과 서독, 또한 대표적인 게 남한과 북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책이 경제학자가 쓴 책인데, 사실은 역사책 같아요.
역사를 쭉 훑으면서, 어느 나라나 쭉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로가 있다는 겁니다.
그때 어느 쪽으로 선택했는가?
-가진 자들이 움켜쥐고, 억압적인 체제를 선택했는가?
-아니면 포용적인 체제를 선택해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창조적이 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었는가? ... 에 국가의 흥망승세가 달려있다.
굉장히 잘 쓴 책이에요. 재밌는 책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난 말이 있어요. 맹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시는 불여지리 하고, 지리는 불여인화 라'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 - 맹자
전쟁을 하는데요.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좋다. 쳐들어가자, 지금이 天時다 그래도,
저쪽의 지리, 땅의 이ㄹ로움, 즉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으면 이기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군대가 난공불락의 지리적 이점이 있어도,
그 나라, 그 성의 사람들이 인화하면, 일치단결하면,
그 지리적 이점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죠. 지리적 이점보다 인화가 더 중요하다는 거죠.
어휴 놀랍지 않습니까? 이게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하는 말 그대로입니다.
사업체도 그래요. 여러분 좋은 아이템 갖고 적절한 타이밍에 뛰어들었어요.
정말 업체 자리도 잘 잡았어요.
그런데 직원들끼리 맨날 뒷담화하고 불만하고 싸워요. 더티한 경쟁을 해요.
그러면 그 업체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사장님은 직원 채용할 때 실력은 뛰어난데
가는 곳마다 갈등을 일으켜요. 그런 사람은 안 쓰잖아요.
기업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인화人和 만한 것이 없다는 거죠.
2300년 전에 이미 맹자가 결론을 내린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맹자는 천재인데, 중국이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거예요.
중국의 실제 역사는, 맹자의 이야기보다. 공자의 이야기보다.
삼국지에 훨씬 가깝습니다. 막 뒤통수 치고, 막 서로 이용하고, 계략의 역사였죠.
군웅이 할거하며 서로 싸우고, 물고 때리는, 서로 이용하는 역사였죠.
배신하는 역사였죠.
인화人和 가 좋은 걸 알아요.
문제는, 알면서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국의 문제이고, 인간의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의 샬롬 人和 이에요.
사도행전이 중요한 이유는, 이 사도행전이 나오는 공동체가
예수께서 선포하신 그 샬롬을, 실제로 행하는, 삶에서 보여주는 공동체라는 데 있죠.
그래서 이 사도행전이 복음의 능력이요,
결국에는 로마 제국조차도 여러분 기독교에 굴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운명은, 한 인간의 삶은 한 도시의 운명은 바뀔 수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 이렇게 흉편없는 흉악한 도시에
소돔하고 조금도 다를 바가 없던 이 도시에,
건강한 교회가 뿌리 내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두로에서, 가이사라에서 경건한 백성들이 모여 살면서
저 도시, 한때 거룩한 성이라 불렸던 그 예루살렘의 흉악성과 폭력성을 염려하면서
'그 도시에 들어가지 말라' 그렇게 말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여러분, 부강한 나라도 몰락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지리적 조건이 바뀐 게 아니에요.
가정도 마찬가지예요.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요? 언제적 얘기를 하십니까?
소위 명문가의 자녀 중에, 조상들 욕 보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반면에 별 볼일 없다 하던 집안의 자녀들이, 우뚝 서는 예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우리는 바뀔 수 있습니다.
인화人和, 샬롬을 이루는 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로, 이 복음으로, 이 도시를 바꾸는 꿈을 꾸어야 됩니다.
포항을 바꾸고, 한국을 축복하는 꿈!
◑전혀 안 바뀔 것 같은 사람도 변해서, 원수가 변하여 서로 친구가 되다
바울이 가이사라에 간 장면을 보십시다.
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참고로, '집사'라는 말은 원전에, 영어성경에 안 나옴)
'빌립'이라는 말, 오랜만에 듣죠. 어디에 나왔습니까?
초기에, 약 25년 전에, 스데반과 함께 교회의 일꾼으로 일곱 명을 뽑을 때,
두 번째 사람이죠. 6:5
스데반 순교 후에 이 분이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하고
광야로 가서 에티오피아 전도하고 그 이후로 사라졌는데, 지금 21장에 나온 거예요.
8: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라에 이르니라'
가이사랴는 예루살렘하고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약 90킬로
아마도 빌립은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전도하다. 보니까 사마리아 갔다가, 광야로 갔다가, 가이사랴까지 간 거예요.
전도 마쳤으면 어디로 가면 됩니까? 자기 집이 있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가지 않고, 지금 아직도 가이사랴에 남아 있습니다. 왜 안 갔을까요?
못 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였잖아요.
초대교회에서 스데반과 가장 비슷한 사람이 빌립이었습니다.
6:5절에도, 스데반 바로 다음에 빌립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갈 수 없죠. 가면 여러분 무사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행8장에서 21장에 이르기까지, 약 25년의 시간이 흘렀어요.
그동안 빌립이 뭐했을까요? 거기서 전도자로 살았죠.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바울이 며칠을 머무릅니다. 21:8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21:9
빌립은 계속해서 전도자로 전도하며 살았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며 살았습니다.
딸 넷이 결혼하지 않고, 하나님께 헌신을 해서 지금까지 사역자로 살았습니다.
여기서 예언은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역입니다.
오늘날의 설교자에 해당하는 사역입니다.
초대교회에 여성 설교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결혼은 원칙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창조질서를 따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행복과 기쁨의 자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보면, 특별한 은사가 있고 부르심이 있을 때에
독신도 유익하다 그랬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 그 역시 아름다운 일로 인정하는 전통이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요즘도 그렇잖아요. 결혼한 여성이 사실은 주님을 온전히 섬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편, 자녀 뒤치닥거리 해야 되잖아요. 그것도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죠.
그래서 열정과 은사가 있는 분들은, 결혼 안 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요즘도 그런데, 그 옛날에 로마 시대에 결혼한 여성이 남편에게 매여 있어서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게 훨씬 좋아서 그랬던 게 아니고
결혼이 좋은 것이고 귀한 것이지만, 복이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서 비혼을 선택하는 거예요. 미혼이 아니라 비혼입니다.
▲이렇게 빌립의 집이 사실상 교회 역할을 했습니다.
가이사랴가 어떻게 이런 지역이 되었나?
이렇게 혼탁한 이 사회 속에 빌립과 그 가정의 사역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사회의 소금과 빛인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도 인해,
한 도시가 점점 바뀌어져가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에 소설을 쓴다면, 성경 이야기로 소설을 쓰고 싶은 게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빌립과 네 딸의 이야기"입니다.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마 초반에 고넬료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고넬료가 가이사랴에서 처음 예수를 믿었잖아요.
그런데 왜 지금 이 대목에서 '고넬료'가 등장하지 않는가 하면,
고넬료는 로마 군인이잖아요. 그러니까 임지가 옮겨져서 아마 다른 데로 갔을 것이고,
25년 가량이 지났으니, 지금 좀 은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예루살렘이 소위 거룩한 성이라 그랬는데
가이사랴는 로마 군대의 주둔지고, 패역한 성이라 그랬는데
그곳이 이렇게 변해가는 모습들은, 너무너무 원더풀한 놀라운 일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바울이 함께 며칠을 지내는 거예요.
방을 내줘 가지고!
여러분 이게 왜 놀라운 일인가 하면, 둘이 원수잖아요.
빌립의 평생에 가장 좋아하는 친구,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신앙의 모범이 스데반이었어요.
빌립의 인생에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스데반이 죽어가는 것을 자기 눈앞에서 본 일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바울의 그 존재 자체가, 빌립에게는 악몽이에요. 트라우마예요.
길을 가다가도 바울 비슷하게 생긴 사람만 봐도 깜짝깜짝 놀래고요.
밤에 자는데 꿈에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면, 그 얼굴이 바울의 얼굴이에요.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게 트라우마잖아요.
그런데 지금 서로 같이 형제로 대하고요. 그 집에서 며칠 함께 지냈습니다. :8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게 인화예요. 인화人和 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만 되면, 빌립은 아마도 바울을 보면서, 친구 스데반이 자꾸 생각났을 거예요.
그리고 그때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서던 그 사람(바울)이
이제 복음이 사람이 되어서 '나는 죽어도 좋습니다' 하면서
바울이 스데반이 갔던 길을 가려고 할 때에,
빌립은, 얼마나 얼마나 옛날 친구 생각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생각이 절절히 밀려왔겠습니까?
누가 소설로 좀 써주면 좋겠어요.
◑고민과 어려움을 서로 함께 나누는 공동체
21:9~12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빌립과 네 딸이 함께 설득합니다. '올라가지 마십시오. 예루살렘은 위험합니다.
우리가 거기 살았을 때도 그랬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더 살벌해졌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랬는데 지금 예루살렘 쪽에서 한 사람이 가이사랴로 옵니다. 아가보라는 선지자.
그가 최근의 예루살렘 상황을 전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과 발에 묶고
'바울 선생님, 예루살렘에 가시면 이렇게 결박될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가겠다고 해요.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일까요? 불순종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성령 하나님은, 지금 바울에게 그 위험과 어려움을 충분히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안 가도 좋아!' 심지어 '네가 예루살렘으로 안 갔으면 좋겠어!'
라는 그런 느낌까지 있습니다.
▲제가 한 20년 전에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디즈니 월드에 간 적이 있습니다.
롤러코스터 같은 대단한 놀이기구들이 많거든요.
그 중에 "화성 탐험 체험 코스"가 있었어요. 앞에 '공지사항'을 붙여 놨습니다.
「이거는 대단히 힘들고 어지러우니까 자신 없는 분은 타지 마세요」
그걸 읽고서 몇 사람은 돌아갔어요. 여전히 줄을 선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열 몇 명이 탑승 대기실로 들어갔어요.
진행요원이 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한참 설명합니다.
「이 코스는 다른 거와는 다르게, 우리가 우주선을 타면 경험할 멀미를
조금이라도 체험하게 해주는 코스이기, 때문에 대단히 힘듭니다.
몸이 약하신 분들은 그냥 돌아가십시오」라고 얘기해요.
또 몇 사람은 그 설명을 듣고 포기하고 갔습니다.
저는 젊을 때여서 그냥 남았어요. 로켓에 제가 올라탔습니다.
올라타서 이제 위에 안전바가 탁 내려서 장착을 했는데, 또 방송이 나오는 거예요.
「이거 진짜 힘드니까 지금이라도 내릴 사람은 내리세요」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옆에 버튼을 눌러서
진행요원이 달려오고, 그래서 또 몇 사람 내리는 거예요.
저도 '그냥 내릴까?' 하다가 그냥 앉아있었습니다.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로켓이 출발했어요.
저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굉장히 후회했어요.
진짜 우리 일행 중에 몇 명은, 다 타고 나서 내리자 마자
땅바닥에 엎드려서 구토하고, 헛구역질 하고 그랬어요.
여러분, 지금 본문의 상황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어요.
'바울, 예루살렘에 올라 가겠다고?
지금이라도 내려라! 힘들 거다.'
제가 성경공부하면서 이 말을 하니까, 어느 군 출신 분이 이렇게 말해요.
"군대에서도 그렇습니다. 정말 위험한 작전에 투입되면, 군인들을 다 모아놓고
'여러분 가운데에 마음의 부담이 너무 크고, 컨디션이 안 좋으면 빠져도 좋다.
힘들면 안 가도 좋다...'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는 거예요."
지금 성령 하나님은 바울에게 "안 가도 좋아, 다시 생각해 봐! 그래도 가야 되겠니?"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바울을 아끼는 마음이시죠.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13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제가 끝까지 가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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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가는 쪽일까요? 안 가는 쪽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할 때, 때로는 O, X 문제 풀듯이
'꼭 이거다. 꼭 저거다'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분명하고 선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어요.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십계명에 나오는 이야기죠.
여러분, 이런 일들은 명백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명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
'지금이 침묵해야 될 때인지, 말해야 될 때인지'
'지금은 행동해야 될 때인지, 좀 더 기다려야 할 때인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야 될지, 좀 더 버텨야 될지...'
'취업 준비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진로를 바꿔야 할지...'
'우리 아이를 어떤 학교에 보내야 하나?'
젊은 사람들은 '누구와 결혼해야 하나?'
하나님의 뜻은 '이 사람하고 결혼해!' 딱 정해놓고 '찾을 때까지 찾아봐!'
여러분, 그거 아닙니다.
두 사람 놓고 'A일까 B일까?' 40일 작정기도하면
40일 마치는 날에, 하나님이 A의 이름을 쫙 보여주고...
여러분 그런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런 경우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응답하시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여러분 결혼이든 취업이든 최대한 성경적 원리를 따라서 선택하세요.
그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되는 겁니다.
성도들은,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류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그 사명을 붙잡고 가고 싶은 마음으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양쪽에 다 사랑이 있는 거예요. 그게 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입니다.
말리는 사람도 사랑이고, 가겠다는 사람도 사랑입니다.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결국 그 갈등이 끝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14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내 말이 맞아, 내 말 들어!' 그게 아니고요.
'너는 틀렸어!' 그게 아니고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백성으로 100% 다 알지는 못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찾아가는 것뿐이에요.
예언을 해도 그렇습니다. 바울이 그랬잖아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우리는 부분만 아는 거예요. 그게 인간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당할 것이다. 그까지는 알아요. 알려주셨어요.
그 다음은 몰라요. ☞비교해서 보면 좋은 설교 rfcdrfcd.tistory.com/15981875 (중반)
정말 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실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찬송가에도 나오잖아요.
'한 걸음씩 늘 인도하셔서' 우리는 한 걸음씩 따라가는 거예요. 순종하는 거예요.
▲오늘 이 본문처럼, 의견 차이가 있다가, 딱 종료되는 지점이 뭔가 하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영어로 The Lord's will be done 입니다.
이것을 원어로 보면요. 예수님의 기도와 대단히 비슷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Your will be done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해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눅22:42~44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아픔을 피하기 위해서 만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죠. Your will be done!
예수님의 이 겟세마네 기도는, 핵심이, 결론이 You will be done입니다.
이게 주기도문의 기도 그대로예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Your will be done!
예수님은 기도하신 대로 가르치셨고, 가르친 대로 사셨습니다.
바울도 지금 그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모두가 그래요.
자신의 생각이 있지만, 이렇게 했으면 좋겠지만 결국에는 Your will be done!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 우리는 하나가 되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이 주기도를 배웠어요. 예수님께 직접 배웠어요.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그 기도대로 사는데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저기서 코를 골며 잤죠.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이 성도들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실험하는 거예요.
아가보가 이 예언을 하면서,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빌립과 그 딸들이 바울에게 가지 말라 그러면서
'혹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바울을 위해서 애타게 울면서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손발을 묶는데, 누구의 손발을 묶습니까?
누구의 손발을 묶어요? 자신의 손발을 묶어요.
여러분 뭐가 편하겠어요? '바울 당신은 가서 묶일거예요.'
그러면 더 선명한 게 바울의 손발을 묶는 거예요.
손발을 묶어도 내 손발을 스스로 묶는 건 여러분 힘듭니다.
바울의 손발을 묶으면서 '당신은 이렇게 결박당할 겁니다' 라고 말하면 되는데,
왜 하필 자기 손발을 묶어요?
저는 이것이 굉장히 상징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일에 결혼은 함께 묶이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사랑은 결박당하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함께 고난당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씨름하는 거예요.
여러분 예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것은
그냥 정보만 전달하는 게 아니에요.
내 삶이 여기에 달린 것처럼 함께하는 거예요.
'당신이 묶이면 내가 묶이는 겁니다.
당신이 고난당하면 내가 고난당하는 겁니다.' 그 마음을 전하는 거예요.
여러분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되는 것 같은 고통을 겪으시는데
제자들은 쿨쿨 잤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였습니다.
그 외로운 십자가의 길, 마지막에는 아버지로부터도 소외되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처절한 외로운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참 아버지를 찾아주신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어떤 순간에도 알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뭐예요.? 임마누엘이에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손잡고 길을 갈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말씀에도 의견 차이가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여러분 예수님도 갈등했어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 옵소서, '그러나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마음 한켠에서는 힘들어요. 피하고 싶어요.
또 마음 한쪽에서는 '그래도 순종하겠습니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 갈등을 예수님은 혼자 하셨어요.
지금 사도행전의 성도들은 '함께 하는' 거예요. 그 차이입니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씨름하는 거예요. 성령의 공동체의 특권입니다.
이 씨름을 통해서 우리가 자라가는 것이고, 우리가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숙제, 어떤 고민, 내적 갈등, 치열한 투쟁...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의 근육이 성장하는 거예요.
그런 말들 하잖아요. 요즘 '근육'에 관심들 많은데
정말 무거운 것들, 들기 힘든 그때, '내 힘에 약간 지난다'는 걸 들을 때에
근육이 자란다 그러잖아요.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 예요.
◑아무도 혼자 울지 않는 교회를 꿈꾸며
제가 목회하면서 늘 놀라는 점이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철없는 소녀가 엄마가 되는 겁니다.
결혼하기 전에 보면 '참 발랄한데 어떻게 저렇게 생각 없이 사냐?'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자기 앞가림도 잘 못해요.
그런데 결혼해서 애 낳아서 사는 거 보면요.
와 정말 놀라운 변화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변하기까지, 자기도 스스로 잘 못 챙기는 사람이
아이들 챙기고, 미리 준비하고 돌보고 하는 엄마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이 울었겠습니까? 얼마나 많이 힘든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짐이다' 하는 것들을 감당하면서
성장해 가는 거예요. 사람의 근육이 생기는 거예요.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예요.
그 과정을 함께 통과하면서, 가정다운 가정이 되어가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혼자 울지 않는 교회' ... 우리의 꿈이고 소원입니다.
여러분 이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눈물과 고난 가운데, 서로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면서
함께 기도하면서...
마치 내가 결박당하고, 마치 내가 순교할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바울의 길에 동행하면서, 하나가 되어 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교회가 되어 간다!'
아직 덜 됐어요. 되어 가는 거예요.
여러분 지도를 놓고 보면, 베니게와 구브로와 가이사라
에베소와 드로아, 밀레도에 막 교회가 생겨납니다. 어떤 교회입니까?
가서 사진 찍어보시겠어요? 간판 붙은 교회, 멋진 예배당 건물... 그런 거 없어요.
그러나 진짜 교회가 있었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고,
너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교회,
원수가 형제가 되는 교회 ...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그게 여러분 맹자가 꿈꾸었던 인화人和 거든요.
성경적 용어로는, 우리 가운데 있는 사람간의 샬롬입니다.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여러분 회사 사장이면 직원들한테 '제발 좀 싸우지 말고 서로 좀 잘 해보세요!'
그래서 회식도 하고 하잖아요. 그런데 쉽게 인화가 잘 안 됩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아이들이 서로 싸우면 선생님이 부르잖아요.
'야 화해해, 악수해! 잘못했다고 그래! 너희는 서로 친구잖아?'
그럼 악수하죠. 그러나 교무실을 나가자마자 또 싸워요.
어른들은 다릅니까? 여러분 지금 나라와 나라의 전쟁이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전부 다 자기 중심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서로의 관계에서 샬롬을 이루려면
내 안에 먼저 샬롬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불안하고, 내가 시기하고, 내가 질투하는데
아무리 말로 외쳐봐야 여러분 안됩니다.
그게 뭡니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Your will be done!
먼저 우리 안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샬롬이 다스릴 때에,
나도 모르게 우리가 샬롬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거예요.
바로 그 복음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나를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 가정에게 복 주시고, 우리 이 지역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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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누가 지은 찬송인지 아시죠?
마르틴 루터가 종교계획하면서 하나님 의지하고 불렀던 참 귀한 찬송입니다.
우리 성가대가 지난 수요일날 마르틴 루터의 종교계획을 주제로
참 귀한 찬양제로 함께 예배 드렸습니다. 우리 축복 박수 한번 할까요? 감사합니다.
사도행전을 요약하면, 가장 간단하게 보는 방법은,
주인공 중심으로 보면, 앞부분은 베드로, 뒷부분은 바울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예수님의 당부 대로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땅끝까지
가는...
여정 도시로 보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로마로 끝납니다.
바울의 이야기만 보면 첫 번째는 핍박하다가, 그 다음에 회심하죠.
다메섹에서, 안디옥에서 사역하고, 파송받아서, 1차 선교, 2차 선교, 3차 선교를
마무리하는 지점까지 봤습니다.
바울이 많은 도시를 가사 사역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도시 두 개는
2차 때 고린도, 3차 때 에베소였습니다.
그래서 3차가 끝나면서 에베소와 작별해서 가는 도시로 보면
에베소에서 예루살렘을 통해서 로마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에 바울이 도착하면 사도행전 전체의 대 여정이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