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과 위로의 하나님 고후1:2~11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전도여행 중에 개척한 교회 였습니다.
그리고 본문 고린도후서는, 3차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쓴 서신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게 많은 사랑과 정성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들어온 몇몇 사람들의 거짓된 이야기를 듣고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공격하였습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바울은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고린도 교회를 직접 찾아 갔지만
냉담한 고린도 교인들의 태도에 바울은 매우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번째 고린도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서
눈물로 쓴 편지를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소위 '눈물의 편지' 성경에 없음
바울은 에베소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행19:23절 이하에 보면, 데메드리오는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직공과 영업하는 자들을 풍족하게 살게 해줬습니다.
그런데 수입이 줄어 들자 그 이유를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분노하여서 온 시내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안전상의 이유로 그곳 에베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외에도 바울은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돌로도 맞고
파선하여 하루 밤낮을 깊은 바다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당한 이러한 일들을 환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환난으로 번역한 단어는, 위와 아래에서 내리 누르는 압착을 가리키는 단어로
견디기 힘들 정도의 극심한 고난을 의미합니다.
본문 고후1:8~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한 환난에 대해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며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망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죽을 만큼 힘들었던 겁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셨나?'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시지? 나를 그냥 죽이려고 하시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그런 바울이 본문 3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 이시며'
바울은 하나님을 찬송 합니다.
환난을 겪고 있는 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자비의 아버지! 위로의 하나님!' 이라 부르며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심한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을까요?
사형 선고를 내리신 것 같은 하나님을,
어떻게 '자비의 아버지, 위로의 하나님' 이라 부를 수 있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비결을 찾아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자비의 아버지의 무한하신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가... 우리 가운데 충만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첫째, 환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고후1:4~5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바울은 극심한 고난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바울에게 환난이 넘쳤지만, 그 환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도 넘치게 받았습니다.
바울이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겪은 환난보다, 하나님이 주신 위로가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살 소망 까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신 것 같이 느껴질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환난 중에 하나님이 주신 위로를 경험하니,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환난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난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하지 않고,
'자비의 아버지, 위로의 하나님' 이라고 선포 하였습니다.
환난의 고통 보다, 위로의 은혜가 더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환난이 없는 삶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환난이 없으면,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환난 중에서만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 환난이 없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위로 하시는지,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기 때문에
'위로가 없는 삶'보다 '환난이 없는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환난에서 바로 건져 주신다' 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 하신다'고 약속 하십니다.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본문의 '위로'는 파라클레시스 라는 원어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1) 신학자 랄프 필립 마틴은 파라클레시스(위로, :5)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comfort 편하게 해 주다, consolation 달래서 위로해주다'... 라는 뜻도 되지만,
그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encourage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라는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편하게 해주고, 달래서 위로해주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결국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는, 우리를 달래주시고, 편하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다시 일어나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2) 다음으로 '위로, 파라클레시스'는 곁에서 부른다 라는 뜻입니다.
*파라 : 주위에서, 칼레오 : 부르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계속 불러주는 겁니다.
환난의 구덩이에 빠져 나오도록 곁에서 불러주고(격려해주고),
슬픔의 동굴에서 헤쳐 나오도록 곁에서 불러주고,
절망의 늪에서 건짐받아 구원 받도록 곁에서 불러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로, 파라클레시스' 입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계속 격려하며 응원하며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위로' 라는 단어인 헬라어 파라클레시스는
보혜사 성령님을 가리키는 용어인 파라클레토스와 어근이 같습니다.
늘 곁에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분, 늘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늘 곁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보헤사 성령님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위로의 근원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로의 통로가 되십니다.
성령님은 위로 그 자체가 되십니다.
여러분, 지금 환난가운데 계십니까?
그 환난보다 더 큰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여러분 모두에게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 넘쳐 흐르기를 축원합니다.
◑2. 환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고후1:9~10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은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의지하라, 하나님은 반드시 환난에서 건지신다' 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자기의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실 바울은 꽤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열심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잘 났고, 자신감이 넘치고,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이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 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여러 환난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그 환난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드십니다.
환난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지를 가르쳐 줍니다.
'나는 스스로 환난을 이겨낼 수 없다' 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됩니다.
바울은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환난을 통해서
그 사형 선고에서 건지실 분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에서 '그가 이 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건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환난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은 육신과 마음의 질병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은 경제적, 영적인 가난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은 관계적, 사회적인 소외로부터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건지십니다.
이전에도 건지셨고, 지금도 건지고 계시고, 앞으로도 건지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환난 가운데에서 살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환난 가운데에서 살 길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살리는 하나님,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그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환난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 우리와 고통을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우리와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대화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맞추기 원하십니다.
대화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맞추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환난가운데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3. 환난 중에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고후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바울은 자기가 환난 중에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직접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고후7:5~7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고린도 교회의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우리를)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그런데 그때 하나님은 디도를 에베소로 보내셔서 바울을 위로 하셨습니다.
(디도가, 고린도 교회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에베소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디도는, 그 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해야 할 차례였습니다.
그래서 쓴 편지가, 본문 고린도후서입니다.
고후1: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여러분! 이것이 환난 중에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 가장 연약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 안에 충만해 질 때,
우리는 환난 가운데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환난을 홀로 견디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서로 함께 감당하기 원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고난 중에 서로가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환난 중에 위로를 베푸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교회를 핍박하는 아버지 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큰 환난이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박해 받으며 신앙 생활하는 성도님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대학입시 결과로, 여러 번 입시에 실패하는 환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입시 문제로 좌절하는 성도님들을 위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급성 백혈병으로 갑자기 의식을 잃으신 아버지가
침대에 손발이 묶인 채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환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암으로 아파하는 성도님들과,
그런 가족을 간병하는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26살에 아버지를 잃고 외동아들로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는 환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부모님을 잃은 성도님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에, 아무런 지식과 경험도 없이 사업을 하며
여러 가지 소송과 세금 문제에 휘말리는 환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여러 번의 유산을 경험하며, 몸과 마음이 상해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또 아이를 너무 갖고 싶었지만
시술을 통해서도 오랜 기간 아이를 갖지 못하는 환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아이 문제로 아픔을 겪는 성도님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유방암 투병 후에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어머니를
고국에 홀로 두고 외국에 살면서 마음을 졸이며
불효자로 살 수 밖에 없는 환난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는, 같은 상황에 있는 우리 성도님들을 위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은, 환난 중에 있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원하십니다.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아멘!
여러분, 우리의 말이 위로의 말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표정이 위로의 표정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태도가 위로의 태도가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위로의 마음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위로의 신앙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섬김이 위로의 섬김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위로의 삶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위로의 존재가 되게 소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4. 환난 중에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고후1:11 '너희(교인도 교회)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현대인) '여러분도 기도로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많은 사람이 우리 대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아주 큰 선물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은, 바로 환난 중에 있는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해주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현재 에베소에 있지만, 여전히 위험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바울을 직접 도우러 올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11
그들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즉 바울을 환난으부터 구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라고 확신 했습니다.
바울은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붙여 주신 하나님의 사람들(고린도 교인들 포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멀리서 위로하는 이들, 그를 위해 중보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위해서 좀 기도해 주십시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줘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 하셔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고,
여러분은 그 기도 응답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쓴 것입니다.
여러분, 환난 가운데 계십니까?
그런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여러분에게 붙여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세히 모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에게 우리를 위한 기도를 시키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한 누군가의 중보기도를 돕고 계십니다.
우리의 하루는, 누군가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생활 가능한 하루 하루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가, 누군가의 중보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 중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여러분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여러분이 환난 중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면,
여러분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그 하나님을 반드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중보하는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그래서 그 기도로 말미암아, 환난을 극복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누군가의 중보자가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기도로,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의 기도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로 말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여러분은,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서론 부분에 드렸던 질문입니다.
바울이 살 소망 까지 끊어지는 심한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까?
사형 선고를 내리신 것 같은 하나님을, '환난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어떻게 '자비의 아버지, 위로의 하나님' 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환난 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환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네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이 환난에서 반드시 건지신다.
그리고 그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닫고, 순종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환난 중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는 하나님의 사람들 덕분에
그는 환난 중에서도 외롭지 않았고, 환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깊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찬송 하실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