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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 잡힌바 된 사람

LNCK 2024. 11. 18. 09:05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https://blog.naver.com/karamos/80055827264 정리

 

예수께 잡힌바 된 사람          빌3:7~14          2002.09.08.

 

‘...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12

 

▲예수님께 종으로 매여서 살았던 바울... 그 속에서 자유를 누리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구속당하는 것입니다.

얽매이고 간섭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자유라는 단어를 고귀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경제, 정치, 문화, 이성, 양심, 종교 등의 자유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완벽한 자유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중력과 인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잡혀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붙잡혀 있고 무엇인가에 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 강한 육신의 욕망, 술, 약물, 세상의 명예나 권세에 끌려서 실지요.

이런 사람들은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유를 박탈당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양심도 빼앗기고, 인격도 저버리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가정에 매이고, 직장에 매이고, 일에 매이고,

배우자에게 매이고, 자녀에게 매이고, 가정 일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나는 지금 무엇에 붙잡혀 살아갑니까?

혹시 세상 것의 노예로 살거나 썩어지고 사라질 헛된 세상 것에 얽매어서

하나님의 말씀도 떠나고 죄 가운데 살지는 않습니까?

 

이 모든 것에 붙잡혀서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도 준비하지 못하고

지치고 피곤한 모습을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진실된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더욱 나은 삶과 축복된 삶을 위하여서 자신의 살아가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독서의 바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노예이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선택된 바에 의해서 노예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누구의 노예인가 하는 사실만 남아있을 뿐이다.”

 

바울은 자신의 전 존재가 예수님에게 붙잡혔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상과 세상적인 명예에 붙잡혀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헛된 철학과 그의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살았다.

그러다가 그는 다멕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혔고,

그는 예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80도 바뀝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으며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는 그의 서신을 기록할 때마다 자신을 가리켜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예수님이 값 주고 산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몸만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부를 바쳤으며,

자신의 마음의 중심과 사상과 생각까지도 완전히 그리스도께 헌신했습니다.

 

자신은 일단 자신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포로라는 것입니다.

 

이 사로잡힘은 예수님이 힘으로, 무력으로

우리를 장악하고 사로잡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에 의하여 포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자신이 완전히 그에게 사로잡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그에게 완전히 반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그분의 말씀이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포로나 종이 되어 잡히면 자유가 박탈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원해서 그 분의 종이 됩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살면서, 삶의 모든 것이 공유됩니다.

 

바울은 자기를 예수께서 붙잡으신 이유를 알고 있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죽을 때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들을 잡으신 목적을 알고 있습니까?

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는지,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까?

 

바로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으로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인생이란, 그가 누리는 자유의 한계만큼 인생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주제

 

돈을 벌었다고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었는데, 돈의 노예가 되어서 살면 그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권력을 얻었다고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손에 쥔 권력보다 ‘얼마나 자기가 권력에서 자유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 놓칠까봐 벌벌 떨고 산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때에 천하를 호령하던 권력자들을 보니까 요새 검찰청에 다니느라 바쁜데 아주 불행입니다.

어쩌면 '어쩌다 나는 인생이 이렇게 망가졌나'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성공과 실패는, 그가 누리는 자유에 있는 것이란 말씀이올시다.

 

사람은 전적으로 매이는 것, 매일만한 사람에게 선택된 그런 분에게

완전히 매여서 사는 것이 자유요

그 자유가 오히려 인간의 수명까지도 더 연장해 준다 하는 그런 결론입니다. 주1)

 

▲예수께 매이지 않고, 죄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의 노예입니다.

명예에 매인 사람, 비참합니다.

자기 지식과 편견에 매인 사람,

아무리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해도 못 바꾸고 끌려가는 이 불쌍한 사람,

절망의 노예요 죄의 종이 된 사람,

나쁜 습관에 걸린 사람... 얼마나 비참합니까?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시편 128편에 보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도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잠이 무엇입니까? 자유인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모든 근심 걱정 두려움 다 없이, 맘이 다 평안할 때에 잠이 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저 오는 잠이 아니라 소중한 것입니다. 자유인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같이 이렇게 주일에 5부 예배 설교를 하고

저녁 7:30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갈 때가 많습니다.

 

비행장에 나가서 부지런히 비행기를 타고 한시간 후에 식사가 나옵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눈을 감습니다. 흔들어 깨워서 일어나보면

그 때가 언제냐, 가만히 계산해 보니까 8시간을 내리 잤습니다.

 

제가 어떤 때에 거기에 있는 스튜어디스보고 물어봅니다.

"이 비행기에서 영화 상영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둘을 다 상영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그래서 제가 늘 감사합니다. 여러분, 잠이라는 것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심령이 자유할 때, 온전히 자유할 때 그에게 주시는 귀한 축복입니다.

여러분, 얼마만큼 자유하십니까?

 

▲오늘 본문 성경에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포로된 존재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카테레프센’이라고 하는 말은 '붙잡혔다, 포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3:12

 

사실로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길을 막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다메섹으로 가라. 네가 할 일을 일러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강제로 사도 바울의 선택 여지없이 그를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를 한평생 전하며 살지 않습니까?

완전히 예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뒤늦게 생각했습니다.

갈라디아 1장에 보면 '내가 다메섹에서 포로가 된 것이 아니고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노라' 깨달았습니다.

 

'내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고

도대체 이 모든 사실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애초부터 어머니의 태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를 위하여 택함과 정함을 입었다'

라고 깊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고린도전서 7:23절에 보면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므로 나는 팔린 몸이다, 나는 노예다,

나는 자유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본 회퍼, 독일의 신학자요 또 순교자인 그 분의 <옥중서신> 이라는 작은 책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 이 책에서 본 말을 늘 기억합니다.

 

"나는 어떤 자일까?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어떤 자일까? 하나님이여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떤 자냐 물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자일까? 라고 묻는 것 자체가 웃음거리

라는 말입니다. 너무나 확실하니까!

 

여러분, 그만큼 주님께 붙들렸다고 하는 확신이 있습니까?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어떤 곳에서 큰 부흥회를 인도하셨습니다.

마치고 나서 숙소로 돌아갔을 때에 점잖은 손님이 하나 찾아와서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목사님께서는 장차 올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의 끝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잘 들었습니다.

한 가지만 물읍시다. 목사님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제 자신의 미래는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나의 미래를 누군가가 꼭 붙들고 계시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과거를 붙들고 있듯이 현재를 붙들었듯이 그 분이 앞으로 남은 미래도 붙들고 계십니다.

그것만은 확실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12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고 붙들렸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아주 논리적으로 말합니다. 먼저는 목적이 붙들렸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를 위하여 사는가? 이 자체가 주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To live is Christ to die is gain. 유명한 말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 아니라

앞으로의 생까지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렇게 목적이 주님께로 붙들렸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그는 말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믿는 사람은 목적의 혁명이 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뀔 때에 그를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크리스티아누스' 라는 말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나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가 목적입니다.

목적 자체가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바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또한 그는 지식과 가치관이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바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자세히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빌3:8

 

여러분,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아는 것이

너무너무 고상해서, 고상해서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삽니까?

 

사도바울은 그랬습니다.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너무너무 만족해서

전에 좋아하던 것, 믿기 전에 소중히 여기고 좋아하던 것 다 잃어버리고

그 다음에 분토와 같이 배설물로 여기고 더럽게 여기고

그리고 해害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너무 좋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여러분, 세례를 받고서 세례교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세상이 재미있고, 세상 쾌락과 오락이 즐거워서,

거기에 푹 잠겨서,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예배, 교회, 성경 묵상, 기도, 성도의 교제, 봉사, 헌신, 충성

이런 것은 자기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세속 체질’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여러분, 천국은 아무나 가는 줄 아십니까?

천국 가서 행복할 사람이 천국에 가는 거예요.

 

아직도 ‘세속 체질’이라서, 흥청망청 사는 것이 더 즐겁다는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그건 지식적인 믿음이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는 것이 너무 행복해야 하는데

어쩌다가 교회는 와서 앉아있어도, 항상 취미는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입니다.

시간만 있으면 다른 곳에 가려고 하고... 이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간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합니다. 너무 만족합니다.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싹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했다’ 유명한 말입니다. 빌3:8~9

 

▲그런가 하면 그는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했습니다. 저는 이 요절을 사랑합니다.

‘그는 어찌하든지 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부활에 이르려 했습니다.’ 빌3:11

 

여러분, 예수를 믿어 잘 살고 복 받고 오래 살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그리스도를 본 받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3:10~11

 

▲여러분, 한평생을 살면서 보면 나이든 사람들이 자서전을 쓴다고 하지 않습니까?

혹은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들, 그게 누구입니까?

하나같이 남보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잘 산 것은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늘나라의 영광된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하늘나라에서는 가만히 보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한 순교자만

높임을 받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잘 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욕먹고 오해받고 핍박당하고 매를 맞고 고생하고

얼마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으심을 본받아 고생했느냐,

그것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기에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에 이르려고 했습니다.

 

한평생 주를 위하여 수많은 매를 맞고 고생을 당하고 오해받고 비난받고

그리고 로마에서 목 베임을 당해서 죽습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그는 그리스도의 운명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리히 프롬이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그의 유고로 남긴 글을 모아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는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거기에서는 현대인에 대해서 말합니다. 현대인은 전부가 상품화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상품적 가치만 인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시는 대로 이념이든

개성이건 감정이건 심지어 미소까지도 얼마 짜리 웃음이냐는 것입니다. 돈으로 계산합니다.

 

책을 썼을 때에 그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몇 권이나 팔렸는가, 그리고 그 책을 통해서 얼마를 벌었는가?

 

심지어는 출판사에서도 책을 가지고 가면 딱 보고는

"이것을 팔면 좀 팔릴 것 같습니까? 장사가 될 것 같습니까?"

이것을 묻고 있다는 말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제일 굴욕적인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상품화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무가치합니다.

또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말했듯이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   빌2:17

 

'너희를 위해서라면 내가 이대로 죽어도 좋다'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여기에 운명을 다 바쳐도 좋다' 그런 확신이 없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권태감과 기쁨이 없는 감동이 없는 생을 산다고 말합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현대인들 집은 좋은데 잠이 오지를 않습니다.

자, 일은 하고 있는데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가져도 소용없고 되도 소용이 없고

무언가 권태감에 시달립니다. 왜? 가치관과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 잡혔다,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빌3:12

'잡혔다'는 말은 노예입니다.

'쫓아가노라'는 것은 자유인입니다. 잡히는 것은 피동적이요 쫓아가노라 라는 것은 능동적입니다.

 

여러분, 잡힌 바를 잡으려고 쫓아가는 바로 거기에 성공적 삶의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잡혔습니까? 죄송하지만 아내에게 잡히셨습니까? 이젠 잡으려고 쫓아가십시오.

끌려가지 마시고요. 여러분이 무슨 일에 잡혔든지

그 잡힌 바 속에 있는 뜻을 알고 이제는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잡으려고 쫓아가는

바로 그런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노년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생을 많이 살았다. 그런데 내가 살면 살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내 맘대로 한 일이 하나도 없더냐, 이거예요.

여러분, 발버둥 쳐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문제는 이미 붙들렸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에게 붙들려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깊은 뜻을 알고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무엇인가에 끌려오는 것처럼 살았습니까? 이제는 잡으려고 쫓아가십시오.

운동선수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처럼 잡으려고 쫓아가는 그런 자원적인 생을 사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러나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붙잡힌 바를 잡으려고 좇아갔습니다. 그러한 성공적인 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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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에 매여'

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성령의 매여' 
이 말의 원문은 '영에 매여' 입니다. 
성 Holy 라는 말이 안 나와요.  I go bound in the spirit

그래서 이게 '성령' 일수도 있지만, '나의 영' 그냥 '나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옛날 개역성경에는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라고 했죠. 
이건 '내 마음'이라는 거죠. 제 생각에는 이 번역이 맞습니다. 
'성령에 매인'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매인' 거예요. 

여러분, 성령은 우리를 묶으시는, 결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를 풀어 주시는 분이세요. 
성령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무슨 말입니까? 억지로 순교의 길을 가라는 게 아니고, '안 가도 된다'는 말이에요. 

꼭 가고 싶으면 가도 되지만, 안 가도 된다.. 라는 말을, 성령님이 하신 겁니다.
바울은 자기 결정으로 가는 거예요. '심령에 매여'      .

부모들 중에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야, 너 왜 공부 안 해? 맨날 TV에 앞에 앉아 있고...' 그런 부모가 있죠. 
또 '야, 공부 좀 쉬엄 쉬엄 해. 그만 해도 돼!' 라는 그런 부모도 있죠.

목회자들도 그런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도들이 작정하고, 가정에서 헌금을 가지고 오는데, 
교회를 위해서 감사함으로 받기도 하지만, 

'꼭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 가정의 형편을 알기에, 돌려 보내든지 
'일부만 받겠습니다'.. 할 때가 있습니다. 
일단 돌려보냈다가, 기도하고 다시 가지고 오면 그때 받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 성령님과 바울의 관계를 예로 들어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내 마음에 매임(결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결박'은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결박당했을 때, 바로 그 장면을 연상케 하는 단어죠.

여러분, 이삭이 결박당할 때 억지로 했을까요? 
아니면 자발적으로 순순히 했을까요? 

아마도 백 세가 훨씬 넘은 노인 아브라함이 
젊은 이삭을 힘으로 제압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이 결박당함 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그 말의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정체성의 핵심에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결박 당한 민족이다.' 
그 안에서 엄청난 고난을 해석하고 이겨나가는 거예요. 

여러분 사랑은, 본질적으로 결박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묶는 것입니다. 
결혼이 뭐예요? 이 세상에 수많은 이성들이 있지만 
'지금부터는 나는 당신만 사랑 하겠습니다. 당신만 바라 보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묶어 버리는 거예요. 스스로 묶이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결혼 풍습에 이런 게 있어요. 
결혼식 중에 신랑 신부의 손을 함께 묶습니다. 
이거를 가족들이 묶어주기도 하고요. 친지, 동생, 친구들이 묶어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결혼이 무엇인가? 묶이는 것이다. 

힘이 없어서 묶이는 게 아니죠. 자발적으로 묶이는 겁니다. 
부모의 사랑도, 그야말로 묶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자식 일이라면 달려 가잖아요. 그게 사랑에 묶여있는 거예요. 

자녀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자녀가 죄 지으면 나도 죄인이 되어서 고개를 못 드는 거예요. 
꼼짝 못합니다. 묶여 있는 거예요. 풀 수가 없어요. 결박당하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본질은 '자유'예요.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잖아요. 
그게 스스로 묶이신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Without God, we cannot
Without us, God will not 

'하나님 없이,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없이, 하나님은 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니어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니어도 교회를 세우실 거예요. 
나 아니어도, 자신의 사익을 이끌어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없어도, 멀리 가실 수 있어요. 멋지게 가실 수 있어요. 빨리 가실 수 있어요. 
우리가 미적대고 못 따라가니까... 그게 문제죠.

근데 하나님은, 우리 없이 가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혼자서 천국에 계실 수 있지만, 우리 없이 있고 싶어하지 않으셔서 
이 땅에 오신 줄 믿습니다. 

God will not without us.
이게 스스로 묶인 사랑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의 심령에(마음에) 스스로 묶인 것입니다. 

◑두렵지만, 옳은 길이니까 간다!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굉장히 감동적인 대목인데, 근데 생각보다 
이 대목에서 바울이 감정의 언어를 쓰고 있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두렵지 않다' 든지... 뭐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라는 말은
냉철한 이성적 판단의 언어입니다. 

바울이 지금 나는 두렵지 않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두렵지만, 이 길이 가치 있는 길임을 안다'는 말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울에게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여러분 두려움, 불안이라는 거는, 본래 왔다 갔다 해요. 

'믿습니다' 해놓고도 다시 불안해서 떠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큰 병에 걸려서 투병해 보신 분들 아시죠? 
목사님들이 오전에 심방 가서 같이 예배드리면, 너무 평화로워 보여요. 
'아멘!' 하고 믿습니다. 큰 병을 잘 이겨 나가는 것 같아 보여요.

그런데 오후에 전화해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굉장히 힘들어 하시고 흔들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잘 왔다 갔다 합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 거예요. 

바울은 예외 이었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나는 전혀 두렵지 않다'가 아니라, 

'나는 두려워도 옳은 일은 여전히 옳은 일입니다. 
나는 낙심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나는 시시때때로 불안해 하지만, 나에게 그 불안을 맡길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선택할 때, 그 길을 감당할 힘도 용기도 주시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