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와 현실의 조화 마17:1~8 2012.11.16.녹취록 스크랩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임박한 쯤 일어난 일입니다.
제자들에게 하늘의 영광을 맛보기로 보여주신 사건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환상적인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입고 있던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되어있습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변하신 예수님께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시는데
대화상대가 구약시대의 양대 산맥인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율법과 선지시대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영웅들이 다 등장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이끌었던 영웅이자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얼굴에서 광채가 났었던 주인공입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오른 구약의 대표적 선지자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이것이 어떠한 경험이었을까요? 정말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여자아이들이 무비 스타들을 보니까
정신을 못 차리고 소리를 지르며 야단이던데
지금 제자들의 상태가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베드로는 감정 기복이 매우 심하고 감동 받으면 앞뒤를 재지 않는 사람인데
이런 광경을 보니까 너무 황홀했습니다. 그래서 ‘초막 셋 프로젝트’를 제안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세 분을 위해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베드로의 감동과 충격이 엄청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화,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영적인 거장과의 조우는
충분히 황홀경에 빠질만한 신비로운 사건이었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 보이도다’하는 이런 상황을 묘사한 찬송입니다.
이런 영적인 체험과 황홀경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세상에 보면 마약과 술과 도박같이 사람을 빠지게 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황홀경이 영적체험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많은 일이 있었는데 특히 부흥의 시대에는 다양한 신비 체험이 있었습니다.
각자 사람마다 다르게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는데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경험들이 많았습니다.
바울도 삼층천의 경험을 했습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어린 시절 존 에프 케네디를 한번 만난 것이
자신의 일생을 결정짓는 사건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세계적인 거장을 한번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이런 영적인 체험을 한번 하고 나면 한동안은 세상의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밥을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고, 세상의 필요가 필요 없어집니다.
이런 체험을 한 번은 하셔야 합니다.
초콜릿을 먹고 나면 에이스 같은 비스킷은 못 먹습니다.
이런 강력한 영적인 체험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에 따라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큰아들 같은 경우는 이년 전쯤에 새벽기도를 가려고 나서는데
‘아빠,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직접 말씀하셨어요.’
새벽 4시에 거실에서 하나님과 독대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인생이 많이 변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하나님께서 만나주신 독특한 방법이었습니다.
각자의 삶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경험되어집니다.
저 같은 경우는 사춘기 때 아주 뜨거운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맛을 느낄 때면 항상 그때의 기억이 저를 붙잡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다른 사람이 모르는 자신만의 영적체험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만이 경험한 영적세계가 있어야 합니다. *즉 자신만의 '신비 체험'이 있으면 좋습니다.
이것은 이론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생활만 해도 그렇습니다.
기도는 이론으로 할 수 없습니다. 기도에 관한 책을 많이 읽고
기도에 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도, 기도를 체험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영적체험은 힘이 됩니다. 그래서 삶에 지치고 위기가 올 때
그 경험이 다시 나를 세우고 붙잡아주는 힘이 됩니다.
기독교에는 신비가 있습니다. 신비가 빠지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 안에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설명이 안 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산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신비한 일입니다.
올라갔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만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신비주의로 빠지면 안 됩니다.
신비주의란 신비한 것만은 쫓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한 체험이 없으면 만족을 못하는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체험만 하기를 구하다 보면 성경보다도, 예수님보다도 더 집중하게 되면서
이단으로 빠지게 됩니다. 베드로가 놓친 것은 신비로운 상황 한가운데 계신 예수님입니다.
베드로는 현상에만 집중했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홀연히 음성이 들려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흥분한 베드로에게 입 다물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홀로 남았습니다.
예수님만 홀로 남으신 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가 계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환상과 체험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체험과 경험에는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것은 단지 해프닝입니다.
암이 낫는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그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남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암이 나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령 암이 낫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를 온전히 만나고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면 그 여정은 복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리스도적 신앙을 유지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체험과 사건들이 쌓여갈 때 우리의 신앙은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 머물면 좋겠다는 베드로 간청을 묵살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베드로의 환상은 순식간에 깨어졌습니다.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신앙적인 특별한 체험을 할 때가 있지만 자칫하면
그 신앙적 체험과 세계가 하나의 피난처, 도피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예배하고 은혜 받고 믿는 자 안에서 서로 교제할 때는 좋지만,
현실에는 원수들이 있고 자신의 삶을 짜증 나게 하는 현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단은 집단촌을 만듭니다. 함께 모여서 세상과 격리시킵니다.
그 안에서만 영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안에서만 모아놓고 외부와 격리시킵니다.
중세시대 기독교가 타락했을 때 수도원 운동이 굉장히 많이 일어났습니다.
원래의 수도원 운동이라는 것은 좋은 것인데
수도원이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 기독교는 곁길로 나갔습니다.
이유는 우리 신앙의 현주소가 삶의 현실이어야 하는데
현실을 무시하고 현실에서 도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
은혜도 받고 훈련도 시켜야 하지만
교회에만 모여 있고, 사회에 부적응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텐트를 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혼자 신비한 세계 속에서, 도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맘에 들지 않고 가기 싫은 현실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믿음의 진가를 발휘해야 합니다.
▲철야기도회에 오시는 분의 영성은 삶의 현실에 부딪힐 때
믿음으로 살아내려는데 내 힘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영적인 힘을 공급받아서 파이팅하자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치열하게 살려는 의지가 없다면, 철야까지 나와서 은혜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주일 하루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 보면
신앙이 성장할수록 현실과 신앙의 괴리현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적당히가 아니라 야무지게 은혜 받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인정받는데 가족이나 이웃에게는 외계인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실력발휘를 못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능하고 얄밉고 이기적이고 잘난체하는 비호감 대상 1호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유는 신앙과 삶이 따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늘 있습니다.
텐트 치고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여기서 고상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왜입니까?
현실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현실을 마주합니다. 귀신들린 아들이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데 밑에 남아있던 제자들은 힘에 겨워하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 헉헉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무력한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현장에서 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책망이십니다.
우리가 현실로 돌아가면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 한가운데서는 별일이 다 일어납니다.
교역자들이 심방 다녀온 보고서를 매주 확인하는데
식구가 많아서 그런지 별일이 다 일어납니다.
‘삶의 현실이 처절하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만 있게 되면, 우리 신앙은 추상화가 됩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를 가지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실패도 해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구하기도 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우리 믿음의 야성을 키워야 합니다.
믿음의 진가를 세상에서 드러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실력이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는 제자들의 형편과 실력을 다 알아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의 실력이 세상 사람들에게 다 드러납니다.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믿고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세상의 사람들이 압니다. 주일학교 아이들도 선생님이 영적인지 아닌지 다 압니다.
아이들의 영은 아주 맑아서 선생님의 영성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립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날 때부터 일어나지 못한 앉은뱅이를 보면서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리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것이 성령을 받고 난 후 믿음의 야성이 생긴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 빼고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부서마다 공간이 부족해서 난리입니다.
그런데 모든 부서의 필요로 채우려면 해운대 백사장을 다 사용한대도 부족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부족했던 초대교회는, 그 부족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제한받지 않았습니다.
공간의 부족 때문에 부흥하지 못한 적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예산 확보가 어려워서 사역이 안 된다는 말은 사도행전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입니다. 우리의 결론은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는 제자들에게는 희망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권세와 능력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현실에서 발휘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베드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예수 이름의 능력이 있었고, 그것이 초대교회 부흥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밤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이름의 권세가 여러분에게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다른 타령을 해서는 안 됩니다. 딱 한 가지만 필요합니다.
예수님 이름의 능력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귀신 쫓는 능력도 나타날 것이고, 필요한 재물도 주실 것이고,
필요한 사람도 붙여주실 것이고, 필요한 환경도 열어주십니다.
오늘 우리 기도의 제목은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구하지 마십시오.
조건이나 환경을 구하지 말고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믿음이 있으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현실의 삶 속에서 자꾸 피하지 마세요.
산 위에만 있으려고 하지 마세요.
힘들고 어려운 현실의 한가운데 들어가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 능력이 내 안에서 나타나도록 애쓰고 힘쓰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여 주십니다.
싸우다가 피 터지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무릎 꿇고 금식하다가 보면
능력이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믿음의 야성이 길러지면 모든 환경을 이길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절대 안주하려고 하고 도망치려 하지 마십시오.
▲이번 주 사역박람회를 하는데 이것도 우리가 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작정을 하나 안 하나 교회는 굴러갑니다.
하지만 힘들고 어렵지만 작정하고 들어가면
주님이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감당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열어주십니다.
그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 보람과 기쁨을 맛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현실의 한가운데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산 위에서의 체험만이 아니고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산 위에서만 신비로운 체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외되고 어렵고 힘든 이웃의 삶의 한가운데 들어가서 사역하다 보면
그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들이 나타나면서
실제 현실에서 산 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며
하나님 역사의 도구가 되어 쓰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그냥 적당한 은혜로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당한 은혜에 만족해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입니까. 더 큰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받은 은혜를 풀어놓아야 할 사역과 삶의 현장의 한가운데로 나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기이한 은혜를 준비하시고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본인의 손으로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셔야 합니다.
보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을 받아먹는 수준이었지만
다음에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서 자기가 기도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구경하는 것과 행하므로 체험하는 것은 다릅니다.
기독교의 이론은 많은데 전도는 한 사람도 못해봤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뜬구름 잡는 신앙에서 벗어나십시오. 가정과 삶에 어려운 문제가 많지만,
그것을 정면돌파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하나 영적으로 해결하면서
승리를 맛보게 되면.. 그 안에서 생긴 야성 때문에 삶이 얼마나 더 부요케 되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 아는 비밀입니다.
산 위에서의 체험에만 머물러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삶의 현장 가운데서 전투력을 가진 신자로서 영적 개인기를 탄탄하게 갖춰놓고
세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믿음의 진가를 드러내고
예수 이름의 권세를 나타내는,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는 백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