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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와 같이 되기를

LNCK 2024. 12. 1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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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와 같이 되기를              행26:13~23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26:14

몇 주일 동안 이어지던 다섯 장에 걸쳐서 나오던 
"바울의 법정 시리즈"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지금까지 가이사랴 총독의 법정에서 치열하게 증거와 법리를 다투었고, 
법정 밖에서는 바울을 길에서 암살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숨막히는 대결이 있었지만, 이 모든 긴장이 바울의 말 한마디 
'내가 가이사에게 상소하노라. I appeal to Caesar' 이 한마디 말로 긴장이 확 풀어집니다. 
이제 사건을 로마에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때 아그립바 왕이, 그 여동생 버니게와 함께 신임 베스도 총독을 인사차 방문합니다. 

총독이 말합니다. '왕이여, 오신 김에 여기 특별한 사건이 하나 있으니 한번 들어보십시오. 
제가 보고서도 써야 하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행25: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이 자리에서 바울의 변호는, 지금까지 4개의 변호보다 훨씬 더, 
모든 변호 중에서 가장 길게 기록되어 있고요. 
바울이 자기 심정을 토로하면서 가장 열정적으로 간곡하게 말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바울은 여기서 개인적인 간증을 합니다. 
자기가 다메색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자신의 이야기인데, 사도행전에 세 번째 나왔습니다. 
첫 번째는 9장, 
두 번째는 22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로마 군대 진영으로 올라가는 층계 위에서,
세 번째는 26장에서, 아그립바, 베니게, 그리고 베스도 총독 앞에서 연설을 합니다. *본문 

26: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라는 말은, 3번의 증언 중 여기서만 나옵니다. 
'가시채'는 짐승을 몰 때 쓰는 막대기인데, 그 끝에 가시나 뾰족한 것을 달아놓았죠. 
가끔 짐승이 말을 안 듣고 뒷발질을 하면, 목동은 가시채를 사용하는 거죠.

여러분, 바울이 언제가 고생이었나요? 
예수 만나기 전이에요? 아뇨, 예수 만나고 나서 더 많이 고생했습니다. 
우리가 보면 그렇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 잘나가던 상태의 바울에게 
'너 지금 참 고생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런데 바울이 이 말을 그 후로 내내 기억하고, 
자기 인생의 굉장히 중요한 자리(법정)에서, 이 말을 한다는 것 자체는 

그 말이, 자기에게 마음의 동의가 되었고, 
이것이 중요한 말씀으로 각인되어 있었다는 말이에요. 
자기도 되돌아보니까, '그때가 오히려 더 고생이었다'는 거예요. 
마치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 같은 고생이었다는 거죠.

여러분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갈 때, 자기 잘난 척하고 잘난 줄 알고 달려갈 때, 
막 경력이나 재물을 쌓아가고, 뭔가 잘 나간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 열심히 뛰어다녔을 때,
지나고 보니까 그때가 고생이었다...라는 거죠. 여러분, 그거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잘 나간다 하고요.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는 권력을 가지고서도, 불안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서 불쌍한 거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비참한 게 아니에요. 

아버지를 떠나서, 하나님을 등져서 불쌍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돈이 없으면 힘들고 불편한 건 맞지만, 
돈이 없어서 그것 때문에 불행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 돈과 권력을 많이 가지고도요. 인간은 빈곤하고 고생일 수 있어요.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다' 라는 이 말을, 
바울이 다른 데서는 안 하다가, 하필 여기에서 꺼내놓은 이유가 뭘까요?
 
지금 이 자리에, 수많은 고위급 인사들이 다 모여있었기 때문입니다. 25:23
그들은 당시 나라와 사회를 지배하는 최고위급 들이었지만,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거절하고, 자기 출세에만 몰두하는 삶은,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다' 라는 거죠.  26:14

여러분 이 자리에 이게 아그립바가 버니게 하고 와 있는 게 굉장히 이상한 조합입니다. 
와이프가 아니고 여동생이에요. 
드루실라도 여동생이었고, 둘 다 아주 미녀 자매로 알려졌습니다. 

버니게는 이미 세 번 결혼했습니다. 두 번 사별했고, 한 번은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오빠 아그립바 2세 옆에 와 있어요. 둘이 같이 다녀요. 

 

늘 붙어 다니니까 사람들이 '이상하다. 저게 부부야, 연인이야?' 이런 소문이 막 돌았어요. 
왜냐면 당시에 로마 황제들이 그냥 자기 누이하고 많이 살았거든요. 
더구나 아그립바 2세는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뻔뻔하게도 보통 킹 앤 퀸이 나오는 자리에, 여동생이 따라와서 앉아있어요. 
굉장히 이상하잖아요. 후안무치한 거죠. 
이렇게 기괴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이 남녀... 자신들은 편안했을까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26:29절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당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당신 부럽지 않다, 당신 불쌍하다, 가련하다.. 하는 말이에요. 
당신이 얼마나 힘든지 내가 안다는 거죠. 꿰뚫어보는 거예요. 

복음 안에 있으면, 하나님 밖에 있는 인간이 얼마나 가련한지 알게 되어 있습니다. 
권력이 있다고, 돈이 많다고.. 그 가련함이 덮어질까요? 

그 앞에 와서 아부하는 사람이 많다고... 그 가련함이 덮어질까요? 아니에요. 
있을수록 더 해요. 

여러분 이 공허한 인간은, 돈이 많을수록, 권력이 많을수록, 
더 공허해지고 비참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권세와 능력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지금 바울이, 성도의 권세와 능력으로, 고관들 앞에서 호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불행하고 가련한 삶을 떨쳐버리십시오. 가시채를 뒷발질하면 자기만 고생입니다.
그러니 나와 같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시고, 그 안에서 평안과 생명을 얻으십시오!'

◑네 발로 서라       26:16

지난 11일 동안 우리 한국 국민들은, 충격과 두려움 불안 가운데 살았습니다. 
경위야 어떻게 되었든,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을, 
국민 대표들의 손으로 탄핵해야 되는 현실은, 가슴 아픈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왜 그런 일을 했을까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남 부럽지 않게 자랐고, 
좋은 대학교 나왔고,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아서 대통령까지 되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당선되었을 때 기도했습니다. 
'이분이 청와대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 더 큰 박수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국민의 기대를 모았던 분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언론 보도를 보면, 이유가 대략 이래요. 
하나는 <극우 유튜브>의 악영향입니다. 
사람이 편향된 정보를 접하게 되면, 점점 더 극단적으로 가게 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가서,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은 들을 줄 모르는... 균형감각을 상실하죠. 

두 번째는 <술>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지금 평가합니다. 
한 의사가 그래요. 계속 술 마시고 살면, 정신이 온전할 수 없다는 거죠. 
인간의 판단력에 굉장히 중요한... 소위 전전두엽을 면도칼로 자르는 듯한 충격을 
계속 주는 거라는 거죠.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튜브 같은 잘못된 정보, 그리고 술, 
이것과 함께 우리가 크리스찬으로서 염려해야 될 것은 <주술>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계속해서 권력자들 옆에 무당들, 점쟁이들이 계속 있었습니다. 
이번 정권 들어서, 무당들, 무슨 도사들, 주술가... 그런 보도가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 나라에, 백성들의 정신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지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뜻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최소한의 영적 감각이 있는 영적 지도자라면,
이거 걱정해야 됩니다. 여러분 주술에 의지하면 총명이 흐려집니다. 

주술이 뭐예요? 내가 내릴 판단을, 무당에게 양도하는 거예요. 
불안하니까 무당을 찾아가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하면 안심이 될까요? 잠시는 안심이 될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그게 얼마 못 갑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기면 또 찾죠. 더 불안해요. 
그럴수록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거예요. 무당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 

여러분 알코올 중독이 되면, 술 없으면 못 살고요. 
점점 더 자주 술을 찾듯이... 주술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심각합니다. 
점점 더 불안해지고, 점점 더 어리석어지는 거예요. 예외가 없습니다. 

26:16절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이 말씀도
세 번의 다메섹 체험 간증 중에, 여기만 나오는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판단이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죠. 

다메섹으로 가다가, 빛에 의해서 엎드려져 있는 바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구약성경 에스겔서 2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겔2:1~2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에스겔 1장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돼서 엎드려집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엎드려진 게 아니고요. 
그냥 당황해서가 아니고요. 하나님의 그 밝은 영광에 압도된 것입니다. 

그래서 엎드려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워주셔야 설 수 있는 겁니다. 
에스겔에게 '그 영이 임하사 (성령이 임하셔서)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셨다' 했습니다. 
그때부터 에스겔은, 바울은 다른 걸음을 가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 발로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가 자기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의 보폭으로 걸어가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계속해서 사도행전에서 봤던 이야기가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억지로 어떤 뜻으로 밀어넣지 않으십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가는 것도 그랬습니다. 
'가야 한다면 바울아, 네가 결정해라'는 거죠. 
'안 가도 괜찮다'는 거죠.        주1)  강추       
자신의 보폭으로 가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성령의 인도 가운데, 내 생각과 내 판단대로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고, 종종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살기가 쉬워요.

여러분,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면, 내 생각 없이, 그게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저놈들은 나쁜 놈이야, 저 자들은 안 돼! 저놈들은 미워해야 돼!' 
이데올로기가 시키는 대로, 내가 따라 하는 거예요. 자기 생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자기 발로 서야 됩니다!'  

당시에 청년 사울이 가졌던 이데올로기는, 유대의 민족주의 + 유대종교가 결합한 겁니다. 
그 고약한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사울은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달려간 거예요. 
거기서 하나님이 구출해 내신 겁니다. 

26:17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이 말은 구출한단 말이에요. 
사울을 구출하셔서 그들에게 다시 보내십니다. 

이거는 사상적으로 구출하시고, 
피지컬리 육체도 구출하신 겁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부터 
예수를 전하고 다녔으니까, 유대인들이 사울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광주리를 타고 내려져서, 다메섹에서 도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구출하신 거죠. 
예루살렘에서 보병과 기병과 창병 수백 명이, 바울을 구출해 주어야 했습니다. 
위험의 연속이었어요. 

그렇게 구출해 주셨으면, 주님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번에는 너를 위험에서 구출했으니까, 저 사람들 위험하니까, 절대 그들 가까이에 가지 마!' 
그럴 거 아니에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까, 바울을 구출하시고, 
주님은 '그들에게 바울을 다시 보내신다'고 했습니다. 
26: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이게 말이 됩니까? 거기 가면 위험한데.. 죽는데.. 
거기서 겨우 구해놨는데.. 주님을 바울을 다시 거기로 보내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10: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 ...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죠.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를 보내시는 겁니다. 이게 미션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과 신앙을 갖고 살아가기가 
대단히 힘든 상황입니다.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초점은 "내가" 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는 이리 앞에 노출된 어린 양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심을 믿을 때에, 우리가 당당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는 거예요. 
마28:18~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할렐루야! 
이게 선교적 삶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가시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사명입니다. 

 

◑당당한 사도 바울, 당황한 베스도 총독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26:24절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베스도가 크게 소리내어' 
여러분, 그는 총독이잖아요. 지금 청문회가 진행 중입니다. 
베스도가 크게 소리 지를 필요가 있나요? 없어요. 
그냥 낮고 굵은 음성으로 쿨하게 그냥 말하면 됩니다. 

근데 여기서 그가 갑자기 '크게 소리 내어' 뭐라고 하는 말은
그가 지금 바울에게 압도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고,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5
-이게 자기 '발로 서서,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의 담대함입니다.  :16참조

여러분, 베스도 총독은, '내 생각은 이런데.. 내 생각은 이게 맞는데.. 
유대인들의 환심(카리스, 은혜)을 얻으려면 
이렇게 말하는 게 좋을까, 저렇게 말하는 게 좋을까?' 하고 머리 쓰는 사람이에요. 

직장에서도 그런 사람들 많죠. 그죠? 
자기 소신 없이, 그냥 '어떻게 말해야 저분이 좋아할까?' 

여러분 거기에 맞춰서 살면, 자기 말에 힘이 없습니다. 
잠시는 성공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그 밑천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어가면서 남의 눈치 보면서 말을 하는 사람은, *베스도
자신의 말,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을 당해 내지 못합니다. *바울

지금 권력이 문제가 아니에요. 지위가 문제가 아니에요. 
학위, 지식이 문제가 아니에요. 

자신의 발로 선 사람, 자신의 (소신의) 걸음을 걷는 사람, 
자신의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발로 선 사람, 자신의 걸음을 걷는 사람,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소명과 잠재력> 교육과정을 시작했는데 바로 이거예요. 
'나를 알고,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자' 라고 하는 주제입니다. 

◑사도 바울, 아그립바 왕에게 사랑으로 권면하다

26:28절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바울이 했던 '참되고 온전한 말'이라는 데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참되고 온전한 말'은 무슨 뜻인가요?

1) 많은 영어 번역에 '술 취하지 않은 온전한 정신'이라고 번역했어요. 
'또렷한 정신으로 말한다'는 거예요. 

행2장에서, 사도들이 성령 충만해서 전도할 때, 너무 말을 잘 하니까 
'와~ 저게 뭐지?' 사도들이 너무 담대하니까 '술 취했나?' 그랬잖아요. 
자신들의 생각으로 이해가 안 되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이제는 '야, 이 사람이 너무 공부를 많이 해서 미쳤나?' 라는  :24
정말 말도 안 되는 판단을 하는 거죠. 

2) 또 하나는 '감정적으로 흥분하지 않은 차분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막 화가 나면, 아무 말이나 막 하잖아요. 옛날에 그랬습니다. 

11절은 바울의 옛날 이야기입니다. 
26: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바울이 과거에 그냥 너무 화가 나가지고, 막 말하고 막 행동하는 거예요. 
거기에 비하면 지금은 차분하게 제정신으로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죠.? 사회생활에서 화내면 지는 겁니다. 
대부분 먼저 화내는 사람이 지게 돼 있어요. 

3) 또 하나는, 온전하고 정신 있는 말을 한다는 말은, '팩트를 말한다'는 거예요. 
'이 모든 일을 자세히 미루어 살핀...' 이런 말이에요.   눅1:3

4) 그리고 또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말하는' 겁니다. 
그게 온전한 말입니다. 

지금 바울이 '나는 죄수입니다. 예수 때문에 세상 것 다 포기하고 이렇게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 말이 쉬운 말이 아니에요. 
듣기도 어렵지만, 하기가 더 어려운 말이에요. 

왜냐면 이런 말 하면 굉장히 시니컬 하게 들려요. 그렇지 않습니까?  *냉소적 
약올리는 것처럼 들립니다. 아주 냉소적으로 비웃는 것처럼 들리기 딱 좋은 말이에요. 
듣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돼요. 

지금 바울은 당당해요. 진리를 말해요. 근데 여러분 아십니까? 
진리를 말하는 것도, 듣는 사람에게 때로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 부흥회 때 우리가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마지막 날, 금요일에 강사 목사님이, 자기 딸에 대한 간증하셨는데 
우리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결론이 그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만 일하십니다. 사랑으로만 사람을 변화시키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아무리 바른말, 좋은말, 정확한 말을 한다고 해도.. 자녀가 안 들어요. 
사실, 팩트를 말하는데도, 그게 더 상처가 돼요. 

그래서 바울이 후에 말합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십시오!' 엡4:15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때, 거기에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핍박했는데, 
예수님은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구나, 너 참 힘들게 사는 구나' 
하고 다가오신 거예요. 

아그립바는 왕이에요. 부자예요. 그런데 고생하고 살아요. 
만족이 없어요. 힘들어요. 불안해요. 

이 별것 아닌 바울의 청문회에, 위용을 다 갖추고 온 것 자체가 
그 공허함을 말해주는 거예요. 

'멋진 차, 명품 백이 없으면, 내가 뭔가 없어 보인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게 그 사람의 공허함을, 가벼움을 말해주는 거 아닙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 내게로 오라' 하는 말에, 아그립바 왕 같은 사람도 포함될까요, 안 될까요? 
부자도 포함되는 거예요. 왕도 포함되는 거예요. 악인도, 원수도 포함되는 겁니다. 

▲사실 헤롯 아그립바 가문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가까이하기 힘든 이름이에요. 
그의 증조부인 헤롯 대왕은, 예수님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아래 아기들을 다 죽인 그 악한 사람이예요. 

그의 조부인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빌라도와 공모해서 십자가로 몰아간 인간이예요. 

그의 아버지 헤롯(헤롯 아그립바 1세)은, 행12장에서 보셨죠? 백성들이 박수치니까 
아무런 죄 없는 사람을, 포퓰리즘에 의해서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 사도를 가두었던 인물이, 바로 본문의 아그립바 왕의 아버지예요. 

지금 그 자신(헤롯 아그립바 2세)도 많은 죄를 짓고, 폭정을 일삼는 사람으로 여기 와 있습니다. 
무서운 이름이죠.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만나자 마자 저주를 퍼부어야 될 사람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를 사랑했습니다. 
이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하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김빠진 청문회(로마로 이첩되었으니) 에서 바울이 최선을 다한 이유는,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구나!' 하고 다가오신 그 주님이, 
본문의 아그립바 2세, 이 악당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사랑이 내 안에 충만할 때에, 나를 통해서 밖으로 흐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통로로 쓰임받을 수 있는 거예요.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29
여러분 참 좋은 말인데요. 하기 어려운 말이에요. 

「사랑이 없으면.. 당당함은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겸손은요 비굴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당당한 것이, 진리를 말하는데, 팩트를 말하는데, 남에게 상처를 줘요.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들어보세요. 
「사랑으로 살면.. 자부심은 덤으로 주어진다.」 

여러분 자부심은, 사랑으로 살 때 주어지는 보너스예요. 
자꾸 우리가 내 자존심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면... 더 망가져요. 

'야,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아빠는 네 나이 때는 상당히 잘 나갔어...'
자부심이 목표가 되면, 남에게 상처만 줄 뿐입니다. 

여러분 가정이 부끄럽습니까? 여러분 자녀가 부끄럽습니까? 
이 사람이 내 남편인 것이, 내 자녀인 것이 창피합니까? 
내 부모를 숨기고 싶습니까? 내 인생이 부끄럽습니까? 

자부심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부족한 거예요. 
주님이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으로 살 때, 여러분 그 부끄러움을 졸업할 수 있습니다.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주신 자부심을 선물로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제가 참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거는, 
참 귀한 분인데, 참 순수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시는 분인데,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갖지 못합니다.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에 눈이 어두워져서 그렇습니다. 
이 타락한 문화의 공격 때문에, 그 잘못된 기준의 영향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아버지, 술 한잔 걸치신 날이면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어머니, 파스 냄새 물씬한 귀갓길에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이 약물고 공부해라. 좋은 사무실에 취직해라. 
악착같이 돈 벌어라.」 

못 배우고 가난한 것이.. 그래서 무시당하는 것이 한이 되어가지고 
'자식은 나처럼 안 살았으면 좋겠다!' 
물론 이해가 되죠. 

이 아들이 기억하는 엄마는.. 파스 냄새입니다. 
육체 노동으로 팔다리 허리가 다 아픈데, 
좀 쉬어야 되는데 쉬지 못하고 일해야 되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의 냄새가, 바로 파스 냄새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파스 안 붙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이 아들은 그렇게 삽니다. 
'나는 아빠,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하고, 이 악물고 삽니다. 

그런데 오래 세상을 살아보니까요. 그게 아니더라는 거죠. 
돈도 벌어보고, 돈 잘 버는 사람들도 만나보고, 
좋은 사무실에서 일해 보고, 인생을 좀 살아보니... 그게 아니더라는 거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이 아버지 어머니는 이미 세상 떠나신 후에, 
이 아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돈이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늘입니다. 
당신이 잘못 산 게 아니잖아요. 
못 배웠어도 힘이 없어도, 당신은 영원한 나의 하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나는 없이 살아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나는 대학 안 나와도..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 
어떤 경우에도 아닌 건 아니다.. 가슴 펴고 살아가라고..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누가 뭐라 해도 너답게 살아가라고.. 
너를 망치는 것들과 당당하게 싸워가라고.. 
넌 엄마처럼 아빠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아라고.. 
다시 한번 하늘처럼 말해주세요.」 

여러분, 이제 자녀들에게 
'너희들은 아빠처럼 살지 마라, 엄마처럼 살지 마라' 
하는 그런 말을 졸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죽원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는 대로 살 수 있습니다. 

'아빠 엄마는 예수 믿고 살았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다. 
부족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그 가치관으로, 사랑으로 살려고 했다. 
너희들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걸음 한 걸음 주님 주신 보폭으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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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성령에 매여' 보다는 '심령에 매여'

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성령의 매여' 
이 말의 원문은 '영에 매여' 입니다. 
성 Holy 라는 말이 안 나와요.  I go bound in the spirit

그래서 이게 '성령' 일수도 있지만, '나의 영' 그냥 '나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옛날 개역성경에는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라고 했죠. 
이건 '내 마음'이라는 거죠. 제 생각에는 이 번역이 맞습니다. 
'성령에 매인'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매인' 거예요.                

여러분, 성령은 우리를 묶으시는, 결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를 풀어 주시는 분이세요. 
성령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무슨 말입니까? 억지로 순교의 길을 가라는 게 아니고, '안 가도 된다'는 말이에요. 

꼭 가고 싶으면 가도 되지만, 안 가도 된다.. 라는 말을, 성령님이 하신 겁니다.
바울은 자기 결정으로 가는 거예요. '심령에 매여'      .

부모들 중에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야, 너 왜 공부 안 해? 맨날 TV에 앞에 앉아 있고...' 그런 부모가 있죠. 
또 '야, 공부 좀 쉬엄 쉬엄 해. 그만 해도 돼!' 라는 그런 부모도 있죠.

목회자들도 그런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도들이 작정하고, 가정에서 헌금을 가지고 오는데, 
교회를 위해서 감사함으로 받기도 하지만, 

'꼭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 가정의 형편을 알기에, 돌려 보내든지 
'일부만 받겠습니다'.. 할 때가 있습니다. 
일단 돌려보냈다가, 기도하고 다시 가지고 오면 그때 받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 성령님과 바울의 관계를 예로 들어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내 마음에 매임(결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결박'은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결박당했을 때, 바로 그 장면을 연상케 하는 단어죠.

여러분, 이삭이 결박당할 때 억지로 했을까요? 
아니면 자발적으로 순순히 했을까요? 

아마도 백 세가 훨씬 넘은 노인 아브라함이 
젊은 이삭을 힘으로 제압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이 결박당함 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그 말의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정체성의 핵심에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결박 당한 민족이다.' 
그 안에서 엄청난 고난을 해석하고 이겨나가는 거예요. 

여러분 사랑은, 본질적으로 결박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묶는 것입니다. 
결혼이 뭐예요? 이 세상에 수많은 이성들이 있지만 
'지금부터는 나는 당신만 사랑 하겠습니다. 당신만 바라 보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묶어 버리는 거예요. 스스로 묶이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결혼 풍습에 이런 게 있어요. 
결혼식 중에 신랑 신부의 손을 함께 묶습니다. 
이거를 가족들이 묶어주기도 하고요. 친지, 동생, 친구들이 묶어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결혼이 무엇인가? 묶이는 것이다. 

힘이 없어서 묶이는 게 아니죠. 자발적으로 묶이는 겁니다. 
부모의 사랑도, 그야말로 묶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자식 일이라면 달려 가잖아요. 그게 사랑에 묶여있는 거예요. 

자녀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자녀가 죄 지으면 나도 죄인이 되어서 고개를 못 드는 거예요. 
꼼짝 못합니다. 묶여 있는 거예요. 풀 수가 없어요. 결박당하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본질은 '자유'예요.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잖아요. 
그게 스스로 묶이신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Without God, we cannot
Without us, God will not 

'하나님 없이,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없이, 하나님은 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니어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니어도 교회를 세우실 거예요. 
나 아니어도, 자신의 사익을 이끌어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없어도, 멀리 가실 수 있어요. 멋지게 가실 수 있어요. 빨리 가실 수 있어요. 
우리가 미적대고 못 따라가니까... 그게 문제죠.

근데 하나님은, 우리 없이 가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혼자서 천국에 계실 수 있지만, 우리 없이 있고 싶어하지 않으셔서 
이 땅에 오신 줄 믿습니다. 

God will not without us.
이게 스스로 묶인 사랑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의 심령에(마음에) 스스로 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