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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1새벽-기도의 응답이란? 1-예레미야 32장26~35 - YouTube
◈기도응답이란? 렘32:26~35 2025.10.31.
▲지난 설교 복습
1) 선포한 예언대로 시천하는 삶을 살았던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할뿐만 아니라
그 받은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살면서
바벨론의 멍에를 져야 된다는 그 말씀과 함께,
그는 자기가 실제로 등에 멍에를 지는 삶을 (몇 년간) 살았고, 27:2, 28:10
'하나님께서 70년 만에 포로를 다시 돌이키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그 말씀을 선포할뿐만 아니라,
(그 증거, 증표로) 친척의 밭을 고엘로서 사는 그 행위, 그 삶을 통하여서
그는 살아갔습니다. *지난 설교 https://rfcdrfcd.tistory.com/15982232
2) 선포한 예언대로 기도했던 예레미야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가라 하신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그는 지나가야 될 현실 앞에서, 그 예언대로의 삶을 계속해서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32:16~25
기도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가게 하는 힘을 공급받고,
내가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하나님의 안전장치이고,
또 그 길을 계속 걸어가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지금은 보이지도 않고 와닿지도 않는,
그 보이지 않는 소망 앞에서,
그 소망을 끝까지 바라보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또 그 소망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설교 https://rfcdrfcd.tistory.com/15982106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현재형이어야 하고
언제나 해야 하고,
항상 하나님께 드려져야 될 것이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 그러면 이 예레미야의 기도 후에는 뭐가 있습니까?
메시지와 삶,
그리고 그 삶 이후에는 삶과 함께 기도,
그러면 기도 후에는 뭐가 있는 것입니까?
기도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있다' 라는 것을
우리는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오늘 본문 26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때에'
그가 기도하고 있을 때, 혹은 기도한 후 입니다.
기도와 관련되어 있는 '그때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임하셨다.. 라고 말씀합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하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예레미야에게 갑자기 임하셔서 말씀을 선포하게 할 때도 간혹 있어요.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오늘은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어요.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에게 응답을 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응답하신 것이고,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신 것이며,
도대체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 내용은 무엇인가요?
즉 '기도의 응답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바른 개념을 잡아야 되겠죠.
대부분 보면 '기도의 응답'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잡고 있냐면
'내가 하나님께 바라고 있는 것이 이루어지거나, 혹은 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내 환경이 내 기도 후에 바뀐 것, 그것만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점검해 보십시오' 라고 말하면
'그 기도한 내용이, 그리고 혹은 내 문제가 해결되었나 / 않았는가?'
그 결과로 보면서 기도가 응답되었다 / 응답되지 않았다 ... 이렇게 판단한다는 거죠.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그것보다 훨씬 크고 광범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응답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잡아야 되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몇 가지를 살피고
내일 설교에서도 기도의 응답이 무엇인가를 살필 텐데요...
◑먼저는, 기도의 응답이란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 자체가 기도의 응답인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 변화되기 전에
'하나님이 내게 임하셨다'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지금 내 속에서 일하고 계시고
혹은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게 하시는 것' 그 자체,
내가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의 어떠함이 느껴지는 그 자체,
그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홀로 있다가도, 사람이 가까이 와도 인기척을 느낍니다.
근데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막 쏟아붓습니다. 부르짖습니다.
그 기도도 물론 소중하죠.
그런데 그 기도 가운데.. 기도를 시작할 때든,
기도 가운데든, 기도가 끝났을 때든,
하나님이 그 기도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응답으로 찾아오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기도의 응답은, 환경의 변화보다는,
하나님 자신이 먼저 우리에게 오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 그런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는 그냥 마구 쏟아내고, 벌떡 일어나서 나가 버리거나,
그냥 하나님은 마치 지금 내게 오시지 않는 것처럼,
나 혼자 허공에 대고 일방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 응답의 첫 번째 요소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주제
사람이 조금만 성숙하면, 내 주변에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인기척을 느끼는 것처럼
기도를 하다보면, 하나님이 지금 내 마음 가운데
따스하게, 혹은 뜨겁게, 혹은 차갑게... 지금 내 마음 가운데 임하고 계신다,
가까이 오셨다... 라는 그것을 느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신비주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황홀한 어떤 느낌, 생각... 이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 가까이 계신다...라는
그분의 신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신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늘 그런 신호나 그런 느낌을 따라가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있는데,
그 기도의 첫 번째 응답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임하신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는 것 같아요.
기도를 하면서도, 지금 하나님이 내 마음 가운데 오시고, 혹은 내 옆에 오시고,
혹은 내 위에 오시고, 내 삶에 임하신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지금 오셨는지 / 오시지 않았는지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이
그냥 지나가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근데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는 기도를 했고,
그때에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오셨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6
▲우리의 기도가 왜 대단한 건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 생각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도움도 주시고 은혜도 주세요.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우리가 구하는 바를 알고 계시고, 우리 필요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혹은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우리 삶에 마구 개입하실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더 큰 특권은, 우리가 기도할 때,
때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삶이 무너져 있을 때나,
내 입에서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알지 못할 때에도
우리가 기도하려고 눈을 감는 순간이든, 혹은 기도가 이어지는 순간이든,
혹은 그 기도를 끝낸 순간이든 간에
하나님이 우리 생각에 찾아오세요. 그게 바로 기도의 응답인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이렇게 응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우리는 응답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또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는데
기도의 응답 중에 하나는,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임재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 속에서, 우리의 생각과 함께 일하시면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기도 하고, 교정하시기도 하고, 확신을 주시기도 하면서,
내 생각을 진리에 맞추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에 또 다른 요소입니다.
사람들은 환경, 나의 외적인 부분을 먼저 점검하지만,
기도의 응답은, 오히려 물론 그것이 빨리 올 수도 있지만,
오히려 외적인 것보다 내적으로, 내 속에서 먼저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선포한 말씀대로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지금 그가 기도하는 중에, 그의 생각이 흔들리고 있는 거예요.
그의 감정이 요동치고 있는 거예요.
예레미야는 이미 예언을 통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지금 포로로 잡혀간 것이 실제가 되어지고,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에는,
지금 그 진리들이 나를 굳건히 붙잡고 있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다시금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서, 그의 생각에 말씀하시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의 생각을, 하나님의 진리와, 지금 맞추고 align 계신 것입니다.
▲알랭 드 보통이 세네카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고요.
「세네카가 그렇게 절망스럽고 좌절되는 상황 속에서도
결국은 일어나서 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철학의 위안이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실망할 때에,
어떻게 그것을 버티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가? 에 대한 해답으로서
환경의 변화보다는, 생각의 굳건함!
그러니까 '철학적인 사고를 통하여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해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인데도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예수를 믿지 않는 철학자들도 뭐라고 얘기하냐면,
'우리가 좌절을 넘어가고 어려움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것이 무엇이냐면, 멈춰서는 것이다' 래요
일단 멈춰서고,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라는 거죠.
이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말로 내가 생각하는만큼,
나를 지금 뒤흔들 만한 위기인지, 그리고 해결책은 없는 것인지,
그리고 왜 왔는지,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해보면, 사고를 하다 보면, 내 마음이 정리가 되면서
생각이 바르게 정리된다는 거죠. 그래서 나를 일으킨다' 라고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 없는 인생들도, 철학자들도 이렇게 얘기해요.
영 틀린 말은 아닙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언제나 인생을 이끌어 가실 때에
멈춰서게 하셔서 생각하게 하시는 것이, 그분의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의 놀라운 신학적 관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진리를 이렇게 깨달았을까요?
아 그가 정말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서 하나님의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
그것도 대단하지만,
우리가 그에게 더 놀라는 사실은 무엇이냐면,
어떻게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고,
그 가운데서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는가? 에 대한 실제적인 이유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는 이런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있었느냐... 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살아낼 수 있었느냐... 가 중요해요.
옥중서신이라고 하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에 보면
그가 오히려 옥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기뻐해라, 즐거워해라, 찬송해라' 라고
얘기하면서, 오히려 그가 옥 밖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만큼 기뻐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라는 거예요.
그의 기질적으로, 그는 그런 것들을 다 넘을 수 있는 기질이었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예민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차단된 감옥에서 어떻게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는가요?
그의 글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복음을 만방에 전해야 되는 그가, 갇혀 있는 시간이 참 많았어요.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됐던 그가, 오히려 갇혀 있어서,
기도해야 되는 시간이 참 많았어요.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는가?
그가 쉬지 말고 기도했고, 특별히 감옥에서 많이 기도했다 .. 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럼 '그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뭘 하셨는가요?'
그 바울의 생각을 하나님께서는 교정하시고, 정리하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게 하셨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쓸 때 어떻게 쓰냐면
'그리스도의 사도요 그리스도의 일로 갇힌 바 된 나 바울은' 이렇게 얘기해요. 엡3:1참조
왜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 그 라고 왜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 전하다가, 이렇게 갇혀 가지고
자기가 언제 어디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이거 왜 이렇지?' 라는 원망과 불평도 있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두려움도 있었지 않겠습니까?
근데 그는 원망이나 두려움을 편지로 쓰지 않습니다.
혹은 인간적인 어떤 극기 정신을 통해서, 자기가 처한 환경을 극복하지도 않아요.
'정신 똑바로 차리자, 내가 하나님이 일꾼 이니냐?'
이러면서 인간적인 어떤 의지적 힘을 발휘하지 않아요.
그는 그곳에서 잠잠히 기도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멈춰서는 거예요.
그냥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적인 멈춰섬이 아니라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멈춰서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 하나님이 오세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먼저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의 생각을 교정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네가 여기 갇혀 있는 이유는, 로마의 죄수가 아니야,
네가 세상에서 뭘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야,
너는 그리스도가 보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일로 갇힌 바 된 거야!
그러므로 이 일(갇힘)에 대하여 마음 아파할 필요가 없다' 라는 것을
하나님이 그의 기도 가운데 생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갇힘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시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생각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겠죠.
'제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마땅히 고난과 핍박이 있다 라는 것과
이 세상이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박해한다' 라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시고,
바울이 당하는 어려움은, 무슨 재난이나 그의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또한 기도 가운데서 생각으로 깨우쳐주셔서,
그가 기도 중에, 확고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는데
'지금 네가 당하는 고난, 애매하게 받는 고난은 그저 지나갈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라는 것을
또한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의 생각 속에서 깨달음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받는 고난 자체는 아무 의미 없는 고난도 아니고,
그냥 버텨야 되는 그런 아픔도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다' 라는 것을
기도 가운데서, 그의 생각 속에서 확신케 해 주셨어요.
뿐만 아니라 그러니까 입만 다물었어도,
유대인들이 그를 심하게 박해하지는 않았을 것의입니다.
그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방인들도 너희와 똑같다 (구원받는다)'
이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바울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멈춰서서 가만히 제대로 된 사유를 하면,
사실은 정리가 어느 정도 됩니다. 이것도 어느 정도 유익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멈춰서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시고,
하나님의 진리로서 우리의 생각이 교정되고, 수정되고, 확정되고, 바르게 되어져서
우리가 굳건하게 서게 되는 것 ... 이것이 기도의 응답이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제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처음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나서, 먼저 사역을 시작할 때
'저 분이 그리스도다. 나는 그의 신들매 풀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전파했는데
근데 가만히 아무리 봐도, 자기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또 자기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거예요.
'헤롯 네가 잘못했다. 그 여자하고 결혼하면 안 되는데.. 네가 잘못했다' 라고
의로운 이야기를 한 것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었어요.
그러다가 그가 완전히 낙담하게 되고, 완전히 그의 마음이 녹아내려 버린 거예요.
그래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내가 기다리는 분이 당신 맞습니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돼요.
마11:2~6절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요한이 이렇게 물은 이유는, 그가 봤을 때 지금 자기 생각이 흔들리고,
마음이 혼란한 거예요.
'그가, 내가 선포했던 메시아가 맞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 거죠.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는, '성령이 내리는 그가 메시아다' 라고 선포를 했는데,
그의 생각이 지금 흔들리고 있어요.
지금 그가 서 있는 현실 속에서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기도했다'는 말은 성경에 안 나오지만, 그 과정 모든 배후에는, 그의 기도가 있었겠죠.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지금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메시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다시 상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뭐로써? 하나님의 진리로서!
세례요한 그가 지금 생각이 흔들리고 있는데,
지금 예수님이 그를 교정시켜주고 있는 거예요.
'네가 볼 때에는, 내가 갈릴리 저 구석진 후미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을 하고 있고, 메시아로 보여지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러나 구약이 뭐라고 얘기했더냐?
못 걷는 자가 걸으며, 보지 못하던 자가 보게 되고, 병자가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그 일을... 메시아가 할 것이다' 라고 말씀했고,
나는 지금 그 일을 하면서, 내가 메시아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메시야의 나라가 지금 시작되었다' 라는 것을
진리를 가지고, 그의 생각을 교정시켜 줌으로써,
세례 요한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옥에서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거기서 살아나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이렇게 응답을 하셔서,
(본문에 그가 기도했다는 말은 안 나오지만, 제자를 보내서 물어본 배후에는
그의 기도가 있었다고 보는 거죠)
세례 요한이 기꺼이 자기 목을 바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외적인, 환경적인 어떤 변화보다
먼저 내적인, 내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깨우침, 확신 등)인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내게 찾아오십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멈춰 서서 하나님 앞에서 나 혼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가운데서 내 생각을 계속해서 교정하면서,
하나님의 진리에 맞춰서 내가 굳건하게 서는 것... 이것도 기도의 응답인 것입니다.
그래서 빌4:6~7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
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환경이 변화되기 전에, 먼저 우리는 기도의 응답(마음의 확신)을 받아서
그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그 환경 속에 들어가서 적응하게 하는 것!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찾아오시고
우리가 기도하면서 멈춰서서 하나님을 기다릴 때에
하나님이 진리를 가지고서 우리의 생각을 붙들어 주실뿐만 아니라
교정시켜 주시고, 지켜 주셔서
내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나를 세우시는 것,
이것이 기도의 응답의 한 요소인 것입니다.
◑적용
여러분, 삶 속에서 순간순간 기도하십시오.
새벽에, 혹은 밤에... 어떤 상황이든지,
우리가 긍휼하심을 입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자리가, 보좌가 임하는 자리가 되는 거예요.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마다 제단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가는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그곳이 은혜의 보좌 앞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로 말하고, 우리가 소원했던 환경을 확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
먼저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고,
그 기도하는 곳을 성전으로 바꾸시며, *임재의 자리
그곳이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터가 되도록 우리에게 일하시고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먼저 응답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잡아야 됩니다.
▲우리가 내일도 계속해서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지만
먼저 이런 응답을 좀 기다리면 좋겠어요.
이런 말을 좀 그렇지만,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그 신호!
저는 가끔씩 빛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개인적 체험은 백인백색 각자 다 다릅니다. 일반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 체험은, 자기 개인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일반화는 안 되지만)
여러분, 저를 이상하게 보지 마십시오.
근데 그건 저와 하나님 만의 신호인 것 같습니다.
제가 눈을 감고 있어도 '그분이 오셨다' 라는 느낌을 저는 빛으로 느낍니다.
물론 오셨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안 오셨는데) 제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가끔씩 가끔씩 제가 힘들 때면,
하나님이 제 환경을 하나도 바꿔 주시지 않아도
'지금 제 옆에 계신다' 혹은 '제 앞에 계신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벽 앞에서 있어도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환경이 바뀌지 않아도, 이미 응답 가운데 있는 거예요.
그때 (임재 때) 제 마음의 결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가만히 머물러 서 있으면, 하나님이 제 생각을 교정하기 시작하세요.
'왜 두려워 하느냐? 왜 마음이 어려워 해? 그것이 합당해?'
근데 이것은 저만의 사유가 아니라, 철학적 사고가 아니라,
진리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을, 제게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면 제 마음의 결이 또 다시 굳건해집니다.
그러고 나면 아무 환경이 바뀌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어떤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이미 내게 응답으로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은 머물러 서 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근데 교회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마음껏 부르짖는 것은 좋지만,
하나님 앞에 멈춰 서서, 기도하며, 그분의 진리가 나를 녹이고,
그분의 진리가 나를 세울 때까지,
그분 앞에서 멈추어 서서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
그때 이거 자체가 사실은 응답인 것입니다.
그 응답을 마음껏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