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2) -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1:12-2:17) - YouTube
※분량이 많아서 2개로 나눠서 녹취, 정리했습니다. 위 동영상 처음~약 30분까지.
◈두 번 방문 하려다가 못 간 바울 고후1:12~1:24 2025.03.12. 고린도후서2강
▲지난 시간 복습
지난 1강에서 우리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아주 각별하게 생각했고
또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전서, 후서 두 편만
쓴 것이 아니고, 4편이나 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이미 고린도 교회의 두 번을 방문했고,
그리고 추후에 또 한번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1강 보기
그래서 도합 4번 편지 쓰고, 3번 방문한 교회,
이런 교회는, 바울이 수없이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했지만, 유일한 교회였습니다.
왜 이렇게 바울이 마음을 쓰고, 많이 방문하고, 편지도 많이 썼느냐?
교회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자식이 문제가 많아도, 여전이 자식인 것처럼, 어디 갖다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가르치고 고쳐서 또 써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그 뜨거운 열정, 아버지의 심정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던 마음들이 여기에 구구절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이런 배경을 가지고, 지난 시간 1강에서는 고후1:1~11절까지 "위로의 하나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기서 '위로'라는 개념이 그냥 곁에서 '괜찮아. 힘내, 잘 될 거야!'
이게 위로가 아니고, 진리의 성령, 즉 진리의 말씀에 복종시키도록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위로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 자신도 역시 힘들 때, 결국 진리의 말씀으로 승리하고 버텨냈고 이겨냈습니다.
즉 위로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특별히 자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기 자랑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근데 바울이 교회와 관련해서 자랑할 것 몇 가지, 항상 입에 달고 다닌 것이 있습니다.
오늘도 고린도 교회를 향한 자신의 진심을 얘기하는데
▲고후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너희'라는 말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아닙니까. 특별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여기 '행함'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행함이라는 말 앞에 있는 세 단어를 잘 보셔야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직접 행동했느냐?
첫째는 거룩함, 둘째는 진실함,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바울의 목회 방향이었던 거죠.
그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대할 때 '이것만큼은 내가 하나님께 자랑할 만하다'
'너희에게 대하여 진심이었고, 자랑할 만하다'
1) 첫번째는 거룩함 simplicity (KJV)
'하플로테스' 라는 말을 썼는데, 순수한 동기라는 뜻입니다.
즉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 이라는 뜻입니다. 즉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을 섬김에 있어서,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내가 이 교회를 통해서 혹은 내가 이 성도들을 통해서 다른 이익을 취해야 되겠다' 라든지,
아니면 '정말 이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 이외에 혹은 미워하는 마음,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는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절대로 나는 섬기지 않았다'
'단순한 마음, 그 동기가 아주 순수했다' ... 이런 얘기입니다.
모든게 동기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 속마음이 어떤지... 계획하는 바가 어떤지...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나는 순수한 동기였다, 분열되지 않은, 나뉘지 않는 마음이었다' 이게 첫 번째고
2) 두 번째가 진실함입니다. godly sincerity
진실함이라는 말이 재미있죠. '에일리크리네이야'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헤일레' 햇살 이라는 단어와 + '크리노' 판단하다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을 보면 잘 안 보입니다. 금이 갔는지 얼룩이 묻었는지 보이지 않죠.
이 물건을 햇살에 끄집어내서, 바깥에서 비춰보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안에서 내 심장을 꺼내 보낼 수 있다.
내 진심을 하나님의 빛에 비춰보여도 나는 진실하다'
그 정도로 자신의 진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3) 세 번째가 하나님의 은혜 the grace of God
은혜라는 건 위로부터 주시는 겁니다.
자기 능력이나, 자기 힘이나, 자기 의지로 바울은 고린도에서 목회한 적이 없다...
바울이 이걸 자랑합니다.
순수한 동기,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햇빛 아래에서 판단 받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의 은혜... 이게 그의 자랑거리였습니다.
사실 이건이 목회자뿐만 아니라, 주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주의 일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가 여기에 다 담겨 있습니다.
1) 순수한 동기로 해야 됩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겠지, 누가 나를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누군가에게 칭찬 받기를...'
혹은 '내가 일을 행함으로 내가 교회 안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어서
경제적인 이익을 누리기를...' 이건 순수한 동기가 아니죠. 동기가 거룩하지 않은 겁니다.
이미 마음이 분열되고 나뉘어져 있는 겁니다.
2) 그걸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의 빛 앞으로, 내 심장을 꺼내서 한번 비춰 보세요.
혹시 얼룩투성이는 아닌지... 그렇게 행하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고요.
3) 하나님의 은혜는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경험으로, 자신의 물질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할 때는, 바울처럼,
거룩함과, 진실함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혜로 일하고, 이게 자랑이 돼야 됩니다.
나중에 우리가 자랑할 때... 우리는 어떤 걸 자랑하십니까?
'나는 평생 동안 교회를 섬겼습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야 그래도 내가 한 교회를 40년 이상 다녔더니 내가 장로가 됐어'
'내가 한 교회를 한 40~50년 대를 이어 섬겼더니,
그래도 내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셔서, 내가 부자가 됐어!'
'우리 자녀들이 다 잘 살고, 전부 다 하나님의 복 받아서 지금도 보란 듯이 다 잘 살고 있다'
이런 간증이 너무 좀 유치하지 않으세요?
만약 그게 자랑거리가 되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복음의 사람들인데,
믿음의 사람들의 자랑거리는, 12절의 바울을 고백대로,
'나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했다. 순수한 동기로 일했다' 이게 고상한 자랑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일했다!'
이런 자랑과 간증은 얼마나 담백합니까. 깔끔하고요!
하나님께서 그런 자랑을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그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고후1: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바울의 서신이 진실하지 못하고
모종의 저의가 숨겨져 있다는 적대자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그것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서신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외에는
다른 의도가 전혀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만은 좀 알아줘라. 너희가 좀 이건 좀 알아줘!'
바울은 뭘 기대하고 있어요?
▲고후1:14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잘 몰랐다는 거죠.
'우리'는 바을과 그의 동역자들을 뜻합니다. 디모데, 실라 등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즉 종말의 날에는, 이제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혹은 우리의 인연이 끝나는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우리가 서로 자랑할 만한 사이가 되자.
바울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자랑할 수 있기를 바라고,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그 목회자 바울을 자랑할 만한 목회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 사이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자랑할 거냐가 문제잖아요. 그건 앞에 12절에 나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그랬으니까
거룩함, 진실함, 하나님의 은혜로 일함 ... 이게 자랑이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들을 목회했던 사도 바울을 나중에 회고할 때,
'이 교회를 세우고, 지금까지 인도하고 이끌어 주셨던 바울 사도는
우리 교회를 이렇게 성장시켰습니다. 우리 교회를 천 명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건물을 이만큼 크게 지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손얹어 안수할 때 병마가 떠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고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게 자랑거리가 아니란 얘기예요.
'우리 바울 사도님은, 거룩하셨고, 진실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일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성도들을 자랑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목회한 이 목회의 철학을 잘 배우고 닮아서
거룩했고, 진실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일했다'
'이게 서로 자랑거리가 되자' 이 얘기예요.
이런 걸 보면, '우리가 지금 자랑하는 것,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세속적인가?
얼마나 헛되고, 허무한 것인가?'
그렇잖아요. 그죠. 우리가 교회 자랑할 때 어떻게 자랑하십니까?
목회자 자랑할 때, 또 우리 교회 같은 성도들을 자랑할 때... 세속적이지 않습니까?
질문 자체부터가 세속적이예요. '너희 교회 몇 명 모이냐? 너희 교회 재정이 얼마냐?'
그런 거는 묻지도 말고, 듣지도 마세요.
자 바울은 똑같은 패턴으로 얘기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런 얘기를 했는데
살전2:19~20절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자기의 자랑'이라 그랬어요.
자기가 그 교회를 목회했으니까요.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즉 이 말은, 사람이 곧 교회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제 살펴볼 고전1:15~18절까지 내용은 <비본질과 본질>에 대한 얘기예요.
이게 좀 복잡한 얘기라서 설명을 길게 해야 됩니다.
▲고전1: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이걸 잘 해석 해야 되는데, 바울이 두 번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방문을 못 했어요. ↙
▲고전1: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원래 바울의 계획은, (3차여행 중) 에베소에서 → 고린도를 거쳐 → 마게도냐를 거쳐
→ 다시 고린도로 왔다가 →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어요.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자 이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기근 때문에 너무너무 핍절했기 때문에
그가 개척한 마게도냐 교회들을 돌면서, 연보를 거두어서 전달하려고 한 거예요.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갔다가 → 마게도냐로 갔다가 → (백 back 으로) 고린도에 갔다가
이렇게 두 번 방문하려고 했던 게 원래 계획이었어요.
원래 근데 바울이 이 계획을 수정합니다. ↙
▲고전1:17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이렇게 계획할 때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충분하게 기도하고, 충분하게 계산하고, 충분하게 계획하고 너희에게 말했다는 뜻이에요.
근데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계획대로 못 했다는 거죠.
고린도를 두 번 방문하지 못했다는 거죠.
근데 이걸 가지고 바울의 대적자들이 물어뜯는 겁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이 누구예요?
그의 사도권을 가지고 문제 삼는 사람들.
'바울은 사도가 아니야...' 이러쿵 저러쿵 말했죠.
원래 사도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그와 함께 다녔던 사람을 사도라고 하는데, 행1:21~22
'바울은 그렇게 따지면 사도가 아니야. 정식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어...' 이렇게 얘기하면서
바울이 전한 복음 자체를 문제 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걸 물어뜯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동조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사람들.
'봐 바울이 거짓말쟁이잖아. 자기가 두 번 고린도에 온다고 했잖아? 1:16
그런데 그 계획을 자기 마음대로 변경하고 오지 않았으니까,
그가 전한 복음도, 그가 전한 말도, 그가 전한 설교도 다 거짓말이야...' 그렇게 말한 거예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무조건 심정적으로 바울의 편이니까, 바울 편들고 싶으실 거예요.
근데 우리가 2000년 전 고린도교회 현장 속으로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고 한번 보세요.
자 목회자가 편지를 먼저 보내왔어요. 고린도로.
'내가 두 번 너희에게 가겠다' 기별도 했어요.
그런데 못 갔어요. 안 오는 거예요.
근데 '안 간 거냐, 못 온 거냐?' 이 문제에 대한 논쟁들이 있겠죠.
근데 이걸 구별할 수 있어야 돼요.
'이게 (바울의 고린도 방문이) 본질적인 거냐, 비본질적인 거냐?'
본질적인 건 뭡니까? 복음에 관련된게 본질적인 거예요.
지금 일부 사람들이 시비 거는 것은 (바울의 고린도 방문 누락) 비본질적인 거예요.
또 연보에 관련된 거거든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바울이 자기가 개척한 북쪽의 마게도냐 지역 교회들을 돌고,
남쪽의 아가야 지역 교회인 고린도교회를 다니면서 연보를 거두어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 거예요.
16절의 '너희의 도움으로' ... '고린도 교회의 헌금을 받아서' 라는 뜻이죠.
근데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사도권에 대한 문제로,
한번 갔다가 식겁하고 왔잖아요. *두 번째 방문, 첫 번째는 행18장 때 고린도 교회 개척
그래서 가는 것보다, 편지 쓰는게 더 좋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근데 그걸 가지고 사람들이 물어뜯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걸 가지고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문제 삼고 있습니다. 지금 그 얘기예요.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경솔한 일이었습니까?
또는 인간적인 동기로 계획을 세워 편리할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려는 줄 압니까?'(공동번역)
바울이 자기 이익을 따라 임의로 계획을 변경하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고 성도들의 유익을 구하다 보니까,
계획을 변경하게 되어, 고린도교회를 건너 뛰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고전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공동번역 '내가 하나님의 진실성을 걸고 맹세하거니와
여러분에게 한 내 약속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말은, 그의 여행 계획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까지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13절).
이렇게 볼 때 바울은 그의 사역을 수햄함에 있어 매사에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
신실함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갑자기 왜 하느냐 하면
'여러분, 가고/ 안 가고 하는 건.. 사실 본질이 아니잖아요.
그건 복음하고 관련된게 아니잖아요...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거죠.
지금 못 가면 다음 번에 또 가면 되고...'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한 번도 No 한 적이 없다. 다 Yes 만 했다. 지금까지 100% 다 순종했다.
내가 순종하지 않은 적이 있더냐?'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도 입장에서,
믿음 생활을 쭉 하면서 교회를 바라볼 때, 또 목회자를 바라보실 때,
또 서로 성도끼리 서로를 바라보실 때,
비본질적인 건 다 양보해도 됩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요.
일의 선후가 좀 바뀌는 것... 그거 양보해도 됩니다.
그래서 내가 좀 손해 보면... 좀 참아도 됩니다.
그런데 복음에 관련된 것,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심에 관련된 거,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심에 관련된 거, 죄를 죄라고 하는 문제에 관련된 거,
그런 건 양보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 건 우리가 철저하게 붙들고, 지켜나가고, 그건 '아니라'고 얘기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본질 아닙니까!
예를 들어, 교회에서 밥을 먹냐? 국수를 먹냐? 이건 본질이 아니잖아요.
뭐라도 먹으면 되는 거죠.
저녁예배 시간을 7시에 하냐? 7시 반에 하냐? 이거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근데 그걸 가지고 목숨을 걸고 싸우면, 사탄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겁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겠다는 약속은...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얘기죠.
여정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고후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실루아노 : 헬라어 실라 Σιλᾶς 의 로마식 이름
'그(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바울과 실루아노, 디모데 세 사람의 삼중 증거에 의해 전해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 대해서는
결코 모순과 우유부단함과 이중성이 없음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고넨'은 강조적 현재 완료형(Intensive Perfect)
으로서 확실하고 분명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또는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 바울이 No 한 적이 있습니까?
(바울이 잘못 전한 적이 있습니까?)
없죠.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 보내셨지 않습니까?
그거 예수님이 거절하셨습니까?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잖아요. '예' 하셨지 않습니까?
복음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절대로 순종하셨습니다.
'그걸 본받는 나는, 본질은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너희에게 두 번 가려고 했던 거, 계획을 바꾸고 편지로 대신한 게
그게 본질이냐/ 비본질이냐?' 바울은 이걸 말하는 겁니다.
자, 본질에 충실하고 본질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총이
그 다음 구절에 계속 이렇게 나옵니다.
▲고후1: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자, 본질을 꼭 붙잡고 사는 자, 복음의 진리를 붙들고 사는 자는
-첫째, 굳건하게 세워 주십니다.
-두 번째,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기름을 붓다'는 것은 '직무를 맡기다' 라는 뜻입니다.
굳건하게 세우시고, 직무를 맡깁니다. 왜 직무를 맡길까요?
본질적 사역을 하니까 '너는 그러면 일해라!'
기름을 부어서 '너는 이 일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이다' 인정해 주시는 거죠.
-세 번째 '인치시고' 그랬어요. :22
도장을 딱 찍어 주시는 거예요. '너는 나의 일꾼이다. 너는 나의 종이다'
세 번째가 진짜 중요해요.
▲고후1: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보증은 헬라어로 '아라본' 이죠. 이게 상업 용어거든요.
오늘날의 '보증금'과 거의 비슷하죠.
거래 대금의 일부를 미리 주는 선금입니다.
어떤 큰 거래를 하면 먼저 선금을 받잖아요. 10%를 받든지 5%를 받든지
큰 공사 계약을 하면 선금(보증)을 받습니다.
그 선금을 준다는 의미는 뭡니까?
'반드시 이 계약은 내가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본질을 꼭 붙들고 사는 자에게
하나님이 직무를 맡겨 주신다.. 했습니다. 1:21
기름을 부어 주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도장 찍어 주시고,
'그리고 나는 너를 끝까지 사용하겠다. 네가 본질을 붙들고 살면
네 생명 끝나는 날까지 내가 너를 지키겠다' 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 같은 선금(보증)이 있는 거예요.
그게 뭐라고요? '성령(의 인치심)' 입니다.
이게 그 당시에 상업 용어로, 바울이 사용한 '아라본'(보증) 이라는 단어인데,
굉장히 탁월한 성령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 성령을 받게 됩니까? (본문의 문맥을 통해서 볼 때)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본질적 사명을 붙들고 사는 자가 성령 충만한 거예요.
본질적 사명을 붙들고 사는 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다...
그럼 나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직무를,
내 삶을 마칠 때까지 수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그 증거가 성경에 여러 군데에 나옵니다. 기드온 이야기를 좀 해 볼게요.
구약의 사사 기드온은,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다가 부름 받았습니다.
밀은 원래 넓은 들판에서, 넓직한 타작 마당에서 타작해야 되는데,
포도주 틀은 포도를 집어넣고 발로 밟는 거잖아요. 그래서 포도즙을 짜내는 거거든요.
근데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했다는 것은, 대단히 소심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 미디안의 압제가 극심할 때니까, 밀을 넓은 들판에서 타자가다가 들키면
다 빼앗기니까... 그래서 기드온이 자기 처자식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고
밀을 포도주 틀에서 몰래 숨겨서 타작했습니다. 그런 사람이었어요.
근데 갑자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더니 '큰 용사여,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이래요.
내가 내 꼴을 봐도 한심한데, 내가 무슨 큰 용사예요?
자기가 자기를 알 거든요. '나는 큰 용사가 아니거든요.
이 소심한 인간이 무슨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낸다는 말입니까?'
그때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염소를 잡아서 고기를 만들라. 무교병을 구워라,
또 국을 끓이라'고 합니다.
무교병과 염소고기에 국을 부으라 그래요. 그럼 국이 막 흘러내리겠죠?
근데 갑자기 그때 바위에서 불이 나옵니다.
국에 잔뜩 적셔져 있는 무교병과 고기를 다 태워 버립니다. 삿6:19~21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신 거예요.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그에게, '정말 그가 본질을 붙들고 사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테스트합니다. 그가 진짜 본질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면, 하나님이 진짜 일을 맡기시려고요.
그래서 하나님 그를 테스트해요.
삿6:25~26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이걸 명령하셨어요. 기드온이 소심하다 했지요?
자기 아버지 집에 바알의 제단이 있었습니다. 아세라 목상도 있었습니다.
'그걸 찍어버리라'고 명하셨거든요.
'정말 그가 본질적인 사람인가?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사람인가?'
그가 정말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인지를' 하나님이 한 번 달아보시는 거예요.
테스트 하시는 거예요.
기드온이 어떻게 했습니까?
삿6: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기드온은, 혼자가 아니라 종들을 데리고...
밤에 숨어서 몰래 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게 중요하다니까요.
아버지가 잘 때, 한밤중에 몰래 가서, 또 동네 사람들을 무서워해서 밤에 행했어요.
근데 누구를 더 두려워했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기드온은, 본질적으로 '사명에 온전히 헌신된 자다'
이걸 하나님이 아신 거예요.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 놀랍습니다.
삿6:33~34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여호와의 영'이 언제 임했어요? 이때 임한 거예요.
본질적 사역에 충실하게 임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임하신 겁니다.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영이 '아라본(보증)으로' 임하십니까?
기드온의 예를 보면, 기드온은 집안의 우상을 척결하는 단호함과 순종함을 보였을 때,
미디안 과의 전쟁이 터지자,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삿6:34
'내가 끝까지 너를 붙들어서 승리하게 하겠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은 이럴 때에 임하는 겁니다.
아무렇게나 임하는 게 아니에요. 소나무 뿌리 뽑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무슨 성령은사 받는다고 임하는 게 아닙니다. *본 설교의 메인 메시지
본질적인 사명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주셔서 (보증으로 인 쳐 주셔서)
그 사명을 끝까지 지속적으로, 영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 그게 성령입니다.
지금 이 고린도후서 1장의 뒷부분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워요.
비본질과 본질이 얽혀서 나오니까요.
그리고 본질적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고요.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가 있으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이게 본질인가 비본질인가?
이게 복음인가, 그냥 놔둬도 되는 비복음적인 건가?' 이걸 잘 구분하셔야 돼요.
그런 지혜가 있어야 돼요.
근데 덮어놓고 막 싸우는 사람들이 있죠.
주로 언제 싸웁니까? 자기 자존심이 상하면 싸우는 거예요.
만약 하나님의 이름이 욕보임을 당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면
그건 본질적인 거잖아요. 그러면 싸워야 돼요.
근데 내가 좀 손해보고, 내가 좀 무시당하는 건 ... 참아야 돼요. 그건 비본질이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니까요.
무조건 덮어놓고 싸우면 성령이 임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질 않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자가 되어, 성령의 보증을 받으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항상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자, 이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로 한 계획을 변경한 이유를, 23절에 말합니다.
▲고후1:23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바울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렇게까지 말할까요? 내 진심을 몰라주는 너희여...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내가 가서 얼굴을 대면해서 자꾸 너희와 얼굴 붉히고,
왈가왈부 하는 것보다 차라리 편지를 쓰는게 좋겠다...
뒤에 2:4절에 나오죠.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눈물의 편지 3rd
'내가 너희에게 직접 가는 것보다 편지 쓰는게 좋다'
그래서 그 편지(눈물의 편지 3rd)를 누구를 통해서 보냈습니까?
디도를 통해서 보낸 거예요. 고후12:18
방법은 다양하게 할 수 있잖아요.
가는 것보다 편지 써서 보내고,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바울이 가지 않습니까?
세 번째 고린도를 방문하지 않습니까? 고후13:1
연보 걷으러 가잖아요. 그때 가면 되는 거죠. 그래서 이걸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후1: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믿음을 주관하려는 vs 기쁨을 돕는 자'
여기에는 바울의 목회관이 나타납니다.
'주관한다'(퀴리유오멘)는 것은 '지배한다'는 뜻이며,
이는 바울이 자기의 복음 전도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신앙적 기쁨을 위해 돕는 봉사자로 나아가기를 원했음을 말해줍니다.
여기에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그의 신학적 이해가 깔려 있죠.
즉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신앙을 갖게 된 성도들에 대하여
일정한 사도적 권위를 가지기는 하지만, (10:2-8, 고전 5:4, 5),
궁극적으로 신앙인의 실존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만 규정된다고 보았죠.
또한 신앙은, 지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인 만큼
바울은 그들 스스로가 신앙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자기가 돕는 것이
최선의 목회라고 보았죠.
이처럼 바울이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을 위해서 봉사하려는 (기쁨을 돕는자의) 자세를 가진 것은,
'그가 자신의 육체적 이익을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의 주장이
어불성설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줍니다.
※이어지는 고후2:1~17절은 rfcdrfcd.tistory.com/15982264 를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