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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3장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LNCK 2025. 3. 31. 18:29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거듭남, 회심

 

사도행전 강해 (16) / 사도행전 3:1~10, 3:16 /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 YouTube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행3:16        2022.02.06.         사도행전16강  

행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도입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첫 번째 기적을 살펴봤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이었죠. 

우리가 이 기적에서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기적의 초점인데요. 
이 기적의 초점은, 단순히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다'는 신유에 그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이 기적의 초점은, 앉은뱅이었던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는데 초점이 있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르는 곳이고요.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앉은뱅이였죠. 
구약에서 앉은뱅이는, 성전에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으로부터 제외된 자,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거절된 자, 
그가 바로 구약의 앉은뱅이었습니다. 사도행전 당시까지도 그랬죠.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앉은뱅이가 성전에 들어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되었던 자가, 하나님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적의 초점은, 신유가 아니라 구원에 있습니다. 
병을 고침 받는 신유가 아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에 이 기적의 초점이 있습니다. 
☞14강 보기   rfcdrfcd.tistory.com/15982285              
☞15강 보기 (베드로의 설교) rfcdrfcd.tistory.com/15982200

▲자, 이것을 우리는 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이죠. 
그리고 이 기적을 일으킨 베드로가 직접, 자신이 일으킨 이 기적을 
우리에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그 해석이 오늘 우리가 읽은 3:16절 말씀인데요. 
베드로는이 사건을 한마디로 정리해서 이렇게 풀이합니다. 

행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여기 보면 이 기적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는 부분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죠. 

자 그러니까 이 사건의 초점은, 신유가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죠?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구원 얻는 믿음'에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이 기적은, 신유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또 어떠한 구원인지, 
또 얼마나 큰 기적이고 은혜인지 ... 그 구원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의 첫 번째 기적이 우리에게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적의 사건은, '구원'이라는 렌즈를 통해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기적의 의미를 우리가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구원'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이 본문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우리가 받은 구원을 바르게 이해하고,
구원의 확신을 다시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앉은뱅이와 같았던 우리

먼저 오늘 본문에 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나오는데요. 
재미있기 보다는 굉장히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오늘 이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난 장소가 어디죠? 
3:2절에 보시면 성전 미문이라고 말합니다. 미문은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이죠. 

예루살렘 성전으로 둘어가는 여러 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해서 미문이라 부릅니다.
이 미문 앞에 앉은뱅이가 앉아 있습니다.

이 앉은뱅이에게 성전의 아름다운 문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왜 그렇죠?
말 그대로 앉은뱅이이기 때문이죠. 
자신의 발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앉은뱅이 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이 있습니다. 
자, 그 문을 지나가면, 하나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자 그러나 미문을 보면서도, 그 미문을 스스로 넘어갈 수 없는 존재, 
그래서 하나님 앞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없는 존재... 그가 앉은뱅이였습니다. 

여러분,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의 구원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나면서부터 '영적인 앉은뱅이' 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앉은뱅이와 같아서,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존재, 
스스로 일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 
이것이 바로 예수 믿기 전의 우리의 정체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엡2:1절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들'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시체'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시체와 같아서, 하나님에 대해 
우리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조금도 반응할 수 없던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처음 교회에 나왔을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구원받기 이전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다 들리셨습니까? 
아마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다 들린 분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면서부터 영적인 앉은뱅이였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시체와 같았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저 자신의 예를 들어봅니다.

저는 유치원 때부터 교회를 나갔습니다. 물론 가끔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에 들었던 말씀이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찬양 두 곡만 지금도 기억에 남는데요. 
'가서 제자 삼으라'는 찬양과, '나의 사랑하는 책'이라는 찬송이었습니다.
이 두 곡만 기억에 남습니다. 말씀은 기억에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단순히 세월이 지나서 잊혀진게 아닙니다.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듣습니다. 자, 그러나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거죠. 예배가 끝나도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습니다. 

제가 군대에서도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런데 교회만 나가면요. 
그렇게 졸았던 날이 많았습니다. 졸고 싶은게 아니라,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딴 나라에가 있는 거죠. 

신기한게 찬양할 때는 졸지 않습니다. 굉장히 신나게 박수를 치면서 찬양을 힘껏 부릅니다. 
그런데 설교말씀이 시작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졸도해 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 설교말씀이 끝나는 순간, 바로 눈이 떠집니다. 
그럼에도 더 놀라운 기적은, 그렇게 졸면서도 2년 동안 교회를 계속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 그런데 군복무 2년 동안 거의 매주 말씀을 들었지만, 하나도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2년 동안 군대에서 들었던 말씀 중에 딱 하나만 기억이 납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귀신은 불러오는 것이다. 그러니 제사는 드리면 안 되는 거다'
이 말씀 하나만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제대 후에 실제로 제가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이 말씀이 기억나서, 핍박에도 불구하고, 저는 집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기억이 하나도 안납니다. 
예배당에서 자리에 앉아는 있었지만, 말씀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장의자에 앉아 있어도, 말씀이 박히질 않는 거예요. 
분명히 목사님이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데, 
그 말씀이 천장에서 파편처럼 공중 분해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나도 제 귀에 박히질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구원 받기 전에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자,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 이 자리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죽은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자력으로 나아갈 수 없는...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나아갈 수 없는 
영적인 앉은뱅이 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반응할 수 없는, 죽은 시체와 같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 죽음의 자리, 이 절망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의 이니셔티브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작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십시오. 
오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해서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스스로 그들을 찾아간 것입니까? 아니겠죠.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는, 스스로 걸어갈 수 없는 자였기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마침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올라가는 그 시간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그곳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기막힌 하나님의 섭리가, 베드로와 요한을 미문 그 앞으로 지나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언제나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 예수를 믿은 때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정말 그것이 여러분의 결단으로 이루어졌습니까? 
'내가 교회를 나가야겠다'는 자기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던 경로가 다 다르지만,
오늘 우리 가운데 동일한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우리가 오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자청해서 온 것도 아니고, 내가 결단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끈질기고 치밀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서, 
우리가 이 자리까지 온 것 아닙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부모님을 통해서든지, 또 친구를 통해서든지,
분명 뭔가가 우리의 귓가에 들려졌기 때문에, 
오늘 그것이 여러분을 이 자리에 앉게 한 것 아닙니까. 

내가 교회를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오늘 이 자리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나를 구원의 자리로, 어려서부터 일평생 인도하신 하나님

저는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전도를 했습니다. 
유치원 다닐 때는, 저희 옆집 아줌마가 교회를 다니시던 분이었는데 
주일에 자기 아이들이 주일학교 예배 드리러 갈 때, 저를 꼭 끼워서 데리고 갔습니다. 

자, 그러다가 제가 초등학교에 갔는데, 또 주변에 교회 다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를 따라 몇 번 교회를 가다가, 또 제가 뿌리쳤습니다. 

제가 중학교 가니까, 또 저를 전도하는 친구가 있었는데요. 
그 친구는 주일 아침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저를 깨우러 왔습니다. 
그 친구를 따라서 교회에 다니다가, 또 제가 뿌리쳤습니다. 

고등학교에 가니까 또 저를 전도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다니다가 또 뿌리쳤습니다. 

자 그렇게 대학을 갔는데요. 이제는 자유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서 보니까, 학교 자체가 아예 기독교 학교였습니다. 

매 주마다 한 번씩은 채플을 드려야 하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졸업을 못하게 되는... 이런 제도를 가진 학교를 4년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때도, 늘 채플에서 땡땡이를 치던 제가, 

4학년 졸업반 때, 극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1)

 

나아가 결국 그 학교에서, 목사님 아들을 만나서, 
그 친구와 함께 신대원에 함께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한 거라고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뿌리치고 도망간 거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저를 이 자리(목회자)까지 있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님의 손을 통해서든, 또 친구들의 손을 통해서, 자녀들의 손을 통해서든, 
아내의 손을 통해서든, 여러분을 지금 이 자리에 앉게 한 것 아닙니까? 

마치 스스로 찾아갈 수 없는 영적인 앉은뱅이에게,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찾아오신 그리스도, 
그렇게 우리에게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그리스도, 
거기서부터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은 게 아니라, 그 이전에 예수님이 믿음을 내게 주셨다

 

그런데 더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십시오. 
6절에 보면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베드로가 복음을 전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하고'  3:6

베드로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합니다. 
자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고 '이제는 네가 알아서 선택해라'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네가 예수를 믿든지/ 거절하든지 네가 선택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한 베드로가, 이어서 어떤 행동을 취하죠? 
여러분, 7절과 8절을 한번 보십시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서서 걸으며'  3:7~8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앉은뱅이는 자기 발로 섰습니다. 자기 발로 걷고 뛰었고요. 
자기 발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자 그런데 그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이 누구입니까? 
앉은뱅이 스스로 그가 일어난 것입니까? 아니죠. 
베드로의 손이 그를 붙잡아 일으킨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이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듣고 믿은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손을 내미셔서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로 고백한 것 같지만, 내가 결단한 것 같지만, 
그 믿음조차도 일으키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밖에서 손을 내미셔서,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행3:16절에서, 이 믿음을 뭐라고 해석합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보면 '예수를 통하여 온 믿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through faith in his name,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주신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이 믿음은 나로부터 나온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이해하여, 내가 만들어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결정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결정이 필요하죠. 그게 필요없다는 게 아니죠)
  
여러분, 애초부터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일어나 예수를 붙잡을 수 있는 능력이, 예수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애초부터 우리 안에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앉은뱅이와 같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붙들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믿음조차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앉은뱅이와 같아서, 스스로 누구도 하나님을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앉은뱅이와 같은 우리를, 먼저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결단코, 우리의 눈물과 노력과 헌신으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이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일방적인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난 가장 큰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한하신 시간과 공간 속으로 찾아오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생들에게 이루어진 가장 큰 기적이다.」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일어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찾아오신 예수님은 
누군가를 통해 우리에게 오늘도 복음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들려주실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믿을 수 있는 믿음까지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복음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받은 구원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하셨다'라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앉은뱅이와 같아서,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어나 예수님을 붙드는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가 구원의 내용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데요. 
'(자기가) 믿는 자는 구원받고,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원리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즉 오해하면, 
우리가 믿는다는 것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돼 버립니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조건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자기가 믿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항할 수 없이 믿게 됩니다)

믿음이 자신의 공로가 되는 거죠. '내가 믿었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았다'
이렇게 믿음을 자신의 공로라고 여깁니다. 그 결과 믿는 것 자체가 교만이 돼 버립니다. 

'나는 믿었는데, 너는 왜 안 믿어?' 
'나는 몇 대째 기독교 가정인데 (우리 가족은 다들 믿는데), 왜 너는 집안에서 혼자만 믿어?' 
사실 제가 예수를 믿고 나서 들었던 지적입니다. 

선물로 받은 믿음이, 다른 사람을 향한 정죄와 교만으로 나타나 버립니다.
그래서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쉬운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들이 묘지의 무덤 안에 있는 시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불쌍한 시체들이여, 하나님께서 너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두 번째 기회를 주시기로 했다. 
너희들을 다시 살려 주시기로 하셨다. 
저기 300M 앞에 전봇대를 돌아서 3등까지 들어오는 선착순 3명은 다시 구원을 주겠노라
그러니 시체들이여 뛰어라!' 

그러자 좀비들이 다 하나같이 일어나서 전봇대로 열심히 뛰기 시작했습니다. 
자, 여기서 여러분 퀴즈가 나갑니다. 

이 시체들이 구원을 받은 시점이 언제입니까? 
1번, 천사가 나타나서 시체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을 때, 
2번, 출발선에 섰을 때, 
3번, 전봇대를 돌았을 때 
4번, 결승선에 들어왔을 때... 여러분. 몇 번이 정답입니까? 
1~4번 전부 다 틀렸습니다.

여러분 시체는, 천사가 전하는 복음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죠? 
시체는 말 그대로 죽은 자이기 때문이죠. 
여러분, 죽은 자가 어떻게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복음을 듣고 반응한다는 것은 무엇이죠? 시체가 살아났다는 증거에 불과합니다. 
살아났기 때문에 들리는 거죠. 시체가 살아난 것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시체와 같이 영적으로 죽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들리고, 그 말씀 가운데 눈물이 흐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이 들리고, 그 말씀이 이해되고, 그 말씀이 믿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먼저 살아났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먼저 살아났기 때문에, 말씀이 들리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죽은 영혼을 살려 주신 것이 먼저입니다. 
교리적인 용어로 '거듭남'이 먼저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죠. 구원이 먼저입니다. 

그 구원의 결과로, 받은 은혜의 결과로, 우리를 살려주신 결과로, 
말씀이 들리고, 눈물이 흐르고, 그 말씀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믿었다. 나는 결단했다. 나는 울었다' 
이것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우리가 살아난 결과로,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신 결과로, 
내가 구원받은 결과로, 눈물을 흘리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입니다.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어지는 반응으로 자연스레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우리의 구원을, 믿음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받은 구원을 확인하는 것으로... 믿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게 아니라, 나를 살려주신 그 결과로... 복음이 믿어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구원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죽은 자와 같은, 시체와 같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나에게 맞는 방법으로 찾아오십니다. 
나의 성격과, 나의 기질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교회에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자꾸 몰아 가십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통해, 또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나에게 맞는 교회를 보내 주십니다. 
그리고 하필 예배의 자리에서, 그 상황 가운데서, 나에게 맞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수같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말씀이 나를 향한 말씀으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마치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내가 처한 상황을 다 아시는 것 같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내가 듣고 싶어 듣는게 아니라, 그 말씀이 나를 뚫고, 어느 순간 내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거절할 수 없도록, 우리로 하여금 반응하게 하십니다. 

그 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살아 계셨구나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구나'라는 반응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반응을 할 수밖에 없도록 
죽은 우리를 살려 놓으신 것입니다. 

마치 앉은뱅이를 찾아오시고, 뿐만 아니라 그를 일으켜 세우신 것처럼 
나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죽은 영혼을 살리셔서, 말씀을 통하여, 나의 믿음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게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 구원의 결과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은,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죽은 자 같아서 반응할 수 없고, 귀가 닫혔고 눈이 멀었지만,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본문 행3:16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through faith in his name

우리가 받은 구원은, 취소될 수 없는 완전한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 취소될 수 없도록, 돌이킬 수 없도록 
이미 2000년 전에 우리의 구원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끝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한 번 받은 구원을, 취소하거나 돌이키거나 실패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만큼 안전하고,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구원의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죽은 시체와 같은 자들이 살아나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 
성경에 그 어떤 기적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적 아닙니까?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늘 구원의 기쁨 속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삶의 문제가 우리 가운데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일이 늘 끊이지 않습니다. 

이 문제가 끝나면 저 문제가 생기고, 늘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걱정에 휩싸여서,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간악한 마귀가, 구원받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얼마나 우리의 믿음을, 오늘 이 시간에도 흔드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믿음을 실족시키려고 틈만 나면 마귀는 우리를 꾀려고 시험합니다. 
때로는 죄에 넘어져서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구원의 기쁨을 잃은 채, 영혼의 실증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를 위해 오늘도 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그 구원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의지가 있지만,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 (칼빈주의)

죽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이 
오늘도 죽어가는 우리를 붙잡고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구원의 은혜 가운데, 기쁨 가운데 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영원한 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기뻐 뛰며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했듯이 
결국에 우리는 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원 열차에 타기 위해서, 우리가 스스로 티켓을 지불하고 타는 사람이 아닙니다. 
티켓에 지불할 수 있는 능력도, 그리고 구원 열차에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능력도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구원 열차를 탈 수 있는 티켓 값을 지불해 주시고, 
그뿐만 아니라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셔서, 구원 열차에 태워 주십니다. 
그리고서는 그 열차에서 다시는 내릴 수 없게 하십니다. *99.8%

그래서 이 구원 열차는, 롯데월드나 에버랜드에서 타는 열차보다 훨씬 더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타면 내려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지적 동의'로 얻는 구원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를 그 속에 묶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안전합니다. 완전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렇게 우리의 구원을 당신의 손에 붙들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혹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분들 계십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은, 애초부터 우리 안에 없었습니다. 

나를 들여다 봐서는, 절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나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것처럼 
나를 찾아오시고 일으키셨던 그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들을 볼 때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는, 예수를 믿기 전의 저와 같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여전히 뿌리치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전히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여러분이 이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누군가를 통해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일으키시어, 이 자리에 앉혀 놓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이곳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지금도 여러분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 구원의 손길이 여러분의 믿음 또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앉은뱅이와 같이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원의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이 구원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를 놓지 못하시며, 우리를 마침내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손길에 붙들려서, 한 주간도 승리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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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여러분 저는 (명지)대학교를 다니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저는 예수를 박해하는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어릴 때 동네 교회는 다녔습니다.

 

제가 대학교를 졸업하려고 하니까, 학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대로는 졸업할 수 없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제가 채플을 하도 많이 빼먹어서, 졸업이 안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제가 군대 가기 전에, 채플을 많이 빼먹었거든요.

 

그래서 그 전화를 받고, 계절 학기로 채플을 이수하고 졸업을 겨우 했습니다.

그만큼 예배를 싫어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이 기독교 학교라는 걸 누구보다 못마땅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참 세상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군대를 제대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저희 '과 기도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죠.

 

채풀도 도망다녔던 제가, 저희 학과 기도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보통 그런 거 할 때는, 학교 게시판에 포스터를 붙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성격이 못 돼서요. 포스터를 붙이고 그런 거 못합니다.

마치 지하교회처럼 남들 모르게 시작을 했습니다.

 

그냥 주변에 같이 어울리던 교회에 다니던 동기 후배를 불러서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목사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요.

'너는 기타 칠 수 있으니까, 네가 기타 좀 쳐라' 그렇게 조촐하게 3명에서 시작했습니다.

제가 교수님 조교였는데, 교수님 연구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 기도 모임을 가졌습니다.

 

나중에는 인원이 많아져서, 학교 예배실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저희 학교에서, '캠퍼스 워십'이 열렸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 전도단이라는 단체에서, 대학교를 순회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저희 학교에서도 '캠퍼스 워십'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목실 목사님이 제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이번에 캠퍼스 워십을 하는데, 학과 기도 모임 대표들이 특송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하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학과 기도 모임 대표들이 모여서 특송 연습도 하고, 같이 준비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정된 날짜에 캠퍼스 워십이 열렸습니다.

 

그때가 저녁이었는데요. 학교 운동장에다 무대를 세팅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특송 차례가 돼서, 이제 제가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쭉 서서 특송을 했는데요.

'그리스도의 계절'이라는 찬양이었습니다. 그 찬양을 딱 시작을 하는데요.

 

보니까 이제 저랑 같이 술 먹었던 불신 친구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한 소절도 부르지 못하고 내려왔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악보로 얼굴을 가리다가 내려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보처럼 계속 울다가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찬양을 부르는데요. 순간 연습할 때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거든요.

근데 단에 올라가서 딱 선 순간에, 이런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내가 왜 여기서, 같이 저렇게 술 먹었던 친구들 앞에서,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는 이러려고 이 학교를 온 게 아니었는데...'

 

내가 특송을 하는 대표로 서 있는 겁니다. 변한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학교는 그대로였고요. 후배들과 동기들도 그대로였습니다.

제가 늘 다니던 학교였습니다.

내가 늘 술 마시고 놀았던 학교 운동장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제가 학과 기도 모임 대표로 찬양을 하는 겁니다.

꿈에도 그리지 않았던 일이고요.

이러려고 기독교 학교를 들어온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명지대학이 기독교 학교인지도 모르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채플도 도망다녔던 저였습니다.

그런 제가 변화된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그런 저를 예수님이 찾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짧은 과정들이 필름처럼 제 뇌리를 지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울다가 내려왔습니다.

내려와서 딱 자리에 앉으니까요. 후배들이 다 저를 쳐다보고 웃고 있더라고요.

다 보였던 거죠.

 

참 그날이 지금도 개인적으로 저는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바울이, 그걸 말하는 겁니다. '나는 꿈에도 몰랐다'는 겁니다.

'나는 내 의도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찾아와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메섹까지 좇아가서 예수를 핍박했던 나 같은 죄인을

예수님이 찾아와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이고, 사실 우리의 간증입니다.

딱 하나,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어떤 남자가 알코올에 중독돼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펀 글)

어느 사람이 그의 아내에게 성경을 한 권 줬는데, 아내는 성경을 읽다 예수를 믿게 됐다.

 

아내는 성경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고 그것을 보물처럼 여겼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새로운 신앙을 비웃기만 했다.

 

하루는 남편이 또 만취해 집에 돌아와 아내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 난로속에 던져버렸다.

“보자 네 성경이 뭐가 될지”

 

다음날 아침 남편은 남은 재를 치우다가 타다 남은 성경 몇쪽을 보게 됐다.

그중 마24:35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나의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 구절을 읽고 그는 깜짝 놀랐다.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는 죄책감을 강하게 느꼈고, 결국 그의 영혼은 구원의 믿음을 얻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