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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48장 1~11 이스라엘을 향한 책망

LNCK 2006. 5. 5. 21:32

 

◈이스라엘을 향한 책망                     사48:장 1~11절                   2006.09.17.

 

하나님께서 두 가지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십니다.

-하나는 칭찬과 격려와 위로입니다.

 

실수를 하고 좀 부족해도 하나님께서는

칭찬하고 격려하고 위로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책망과 징계와 훈계입니다.

이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칭찬도 책망도 ‘성숙함을 위해’

사람들은 칭찬받고 격려받고 위로받는 것은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혼나고 책망과 훈계와 심판을 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칭찬도 필요하지만 징계와 책망도 필요합니다.

 

이것은 마치 밤과 낮과 같습니다.

밤도 있고 낮도 있어야 우리가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본문 48:장 1~11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칭찬과 격려뿐만 아니라 책망으로도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십니다.

 

1절 “야곱의 집아,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사람들아, 유다의 혈통아, 이것을 잘 들으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고는 있지만

진실과 공의로 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독특하게 부르십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주로 ‘야곱아’ 또는 ‘이스라엘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야곱은 변화되기 전의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변화된 후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1절에, ‘유다의 혈통아’라고 부르십니다. 이렇게 부르신 것이 독특합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특히 유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유다 혈통에서 메시야가 나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메시야의 족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이런 뜻으로 살펴보면 이 세 가지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의 사명, 존재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통해서 존재 의미, 사명, 비전, 미래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짐승처럼 우연히 왔다가 그냥 사라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목적과 의미와 비전을 갖고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렇게 창조된 인간이 비전도 목적도 의미도 모르고 사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이 삶의 의미, 목적, 비전을 되새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겉과 속이 다름을 책망하심

 

1절 후반부에 이스라엘이 책망받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고는 있지만

진실과 공의로 하지는 않는다.' :1

 

첫째, 이스라엘 백성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뜨끔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누구나 다 겉과 속이 다르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모양은 멀쩡하고 화려하고 그럴듯해도

실제로 내면으로 들어가면 정리가 되지 않아 엉망인 채로 삽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야곱의 집의 사람이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요, 유다의 혈통이지만

겉과 속이 다르게 삽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돈을 번다, 내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라고 말로는 수없이 말합니다. 그렇지만 실제 삶에서는 다릅니다.

 

실제 내면의 세계에는, 우리도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진실과 공의가 없는 것입니다.

 

1) 진실은 곧 성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화려한 겉모습, 예배, 예식, 언어가 아니라 진실입니다.

 

우리는 예식이나 언어나 형식 안에 자기 자신을 숨기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됐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괜찮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을 잘 외우고 주기도문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과 믿음의 세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2) 또한 공의가 없다고 하십니다.

공의는 의로움입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뒷전에 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의로운 것은 의로운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이 신약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십계명을 지키는 계명을 만들었고, 또 그 계명을 지키는 계명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너희 겉과 속이 다르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마23 :25~28)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약에서는 바리새인들이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그러면 오늘 성령받은 우리들, 교회다니는 우리들,

하나님을 섬긴다는 우리들은 괜찮을까요?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보십시오. 만약 우리도 겉과 속이 다르다면,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형식과 내용이 다르다면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우리도 책망하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의 겉과 속이 하나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형식과 내용이 하나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변명과 핑계를 책망하심

 

▲2절, 그들은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며,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나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명과 핑계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1절에서, 너희가 진실과 공의로 행하지 않는다고 .. 하나님이 책망하십니다만

 

2절에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성 출신이며,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 변명과 핑계댑니다.

 '너희가 진실과 공의로 행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책망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했으면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수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실수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다 미숙하고 부족합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안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나무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 짓는 것을 야단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야단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핑계, 변명, 책임 전가입니다. 말이나 못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좋은 말과 좋은 문장만 골라서 씁니다.

우리가 외로운 까닭은 말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은 다했는데 실천이 따라가지 못한 것입니다. 진실이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가슴앓이가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통이 있습니다.

조용히 머리 숙여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내면세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에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까지 성실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한번 약속한 것은 해로울 지라도 끝까지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손해보고 어렵고 창피하고 힘들고 자존심이 상해도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영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끝까지 의의 편에 서십시오.

마지막 순간까지 순교할 각오를 하면서도 의의 편에 설 것을 결단하십시오.

 

▲말씀하시는 하나님 vs 듣지 않는 인간

 

3절 “내가 오래 전에 장차 일어날 일들을 미리 일러 주었다.

내가 내 입으로 그들에게 알려주었고 내가 그 일들을 갑자기 이루었다.”

 

우리는 갑자기 어떤 일을 당하고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불평합니다.

 

그렇지만 3절을 보면 그 일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예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고 행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갑자기 닥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과거에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내가 무시하고 못 들은 척하고 듣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일어난 일은, 주님이 과거에 하신 말씀의 결과입니다.

 

4~6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얼마나 고집스러운지 나는 알고 있다.

네 목의 힘줄은 철심 같았고 네 이마는 청동 같았다.

그러므로 내가 오래전에 네게 말해 주었다.

 

그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네게 알려 주어서

네가 ‘내 우상들이 그렇게 했다. 내 나무 우상과 철 우상이 한 일이다’

라고 말하지 못하게 했다. 네가 이 일들을 들었으니, 모든 것을 똑똑히 보아라.

그리고 네가 한번 말해 보아라. ‘지금부터 내가 네게 새로운 일을 말하겠다.

이것은 네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일이다.’”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알려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핑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떤 일이 생기면

나무 우상, 철 우상이 그랬다고 핑계를 댑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미래에 일어날 비밀스러운 일을 말씀하십니다.

현재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응답이요,

미래는 현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은 신비스럽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앞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7절은,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에 대해 언제나 내가 가야 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 일은 오래 전이 아니라 지금 막 창조한 것이다.

오늘까지 네가 결코 듣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므로 네가 ‘내가 그런 것인 줄 이미 알고 있었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래는 과거의 반복이 아닙니다. 과거 경험의 연장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전혀 기대하지 않고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미래에 행하십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알 수 없는 비밀이요 축복입니다. 기대하십시오. 미래는 놀라운 것입니다.

 

◑3. 고집과 편견을 책망하심

 

셋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집과 편견을 책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히 고집이 셌습니다.

 

좋은 고집은 때때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위기를 돌파하게 하고 큰 일을 이뤄냅니다.

그러나 나쁜 고집이 있습니다.

틀린 줄 알면서도 감정적으로 자존심으로 그 일을 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런 고집을 우리는 ‘옹고집’이라 부릅니다. 뻔한 일인데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4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에 힘을 주면 힘줄이 생기는데 그것이 철심 같고 이마는 청동 같다고 했습니다.

“네가 얼마나 고집스러운지 나는 알고 있다.

네 목의 힘줄은 철심 같았고 네 이마는 청동 같았다." :4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절망에 빠졌습니다.

저는 오늘 이런 고집이 여러분에게서 다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잘못된 고집, 나쁜 고집은 왜 생길까요? 상처 때문입니다.

상처가 있으면 고집이 생깁니다. 융통성과 이해력이 없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계속 주장합니다. 틀린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피울 때 비참한 결과가 옵니다. 8절입니다.

 

“나는 너를 듣지도 못하게 하고 알지도 못하게 했다.

옛날부터 네 귀는 열려 있지 않았다.

나는 네가 얼마나 반항적이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태어나면서부터 반역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8

 

옹고집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조금만 알아보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옹고집입니다. 편견입니다.

알아보지는 않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합니다.

믿지 않기도 결정했기에 안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위 8절을 보면 옹고집을 일종의 반항적 태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변명, 핑계, 이중인격 등은 죄의 속성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변명하고 핑계를 대고 책임을 전가시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도 ‘제가 먹었습니다’라고 하면 간단했을텐데

‘하나님이 주신 그 여자가 먹으라고 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자를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하나님이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것도, 실수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만입니다. 교만입니다. 그래서 반항하는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반항적 영을 가진 사람입니다.

애들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싫어’입니다.

누가 안 가르쳐 주었는데도 처음부터 반항하는 것입니다.

수용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순종합니다. 사탄의 영을 받은 사람은 반항하고 고발하고 싸웁니다.

하나님께서는 반항하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녀가 순종하는 자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반항하는 아내가 아니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남편이 오만하고 반항하고 심술궂고 비판하는 남편이 아니기를 축원합니다.

 

반항, 불순종, 변명, 핑계 등은 인생을 피곤하게 합니다. 간단한 일을 어렵게 만듭니다.

변명하면 문제가 더 커지고 복잡해집니다.

문제는 이것이 교회 안에도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계속 반항적으로 믿습니다.

안 믿으면 차라리 나을 텐데 믿으면서 계속 반항합니다.

 

쇠코뚜레를 할 때 그냥 빨리 끌려가십시오.

끌려가지 않으려고 하면 더 괴롭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은 반항할수록 더 괴롭습니다.

그냥 가십시오. 그것이 간단합니다.

 

◑4. 용광로 같은 하나님 사랑

 

결론이 무엇입니까? 9절입니다.

“다만 내 이름 때문에 화낼 때를 늦추고 있을 뿐이다.

내 명성 때문에 내가 노여움을 누르고 너를 끊어 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을 늦추고 기다리십니다. 노여움과 분노를 누르고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들이 돌아오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10절입니다.

“보아라. 내가 너를 제련했지만 은처럼 하지 않고 고난의 용광로에서 너를 시험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의 용광로에 넣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불성실하고 완악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심판과 저주를 받을 존재인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용광로에 넣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1절입니다.

“나를 위해서, 오로지 나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내가 모욕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겠느냐? 어떻게 내 영광을 남에게 양보하겠느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내가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한 적도 없고 자격이 없어도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반드시 나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랑 앞에 서면 눈물이 나고 무릎을 꿇고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절대적이고 변함없는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 앞에

경배와 찬양을 올려 드리는 것이며, 우리의 삶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물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이 세 가지 실수를 하지 않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용광로에 들어가서

순결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겉과 속이 달랐던 것을 고백합니다.

매사에 변명과 핑계로 일삼았던 것을 고백합니다.

불필요한 고집과 편견에 사로 잡혔던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용광로에 넣어 제련하시고

연단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제 정금처럼 나와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 올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