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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502 대접 받고 어쩔 줄 몰랐다...

LNCK 2007. 1. 30. 11:35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어쩔 줄 몰랐다...(손대접)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행27:3


 

대학의 학창시절에 한 동안 저(이 글의 저자 갓맨 님)는

늘 사회적인 가치와 남들을 위하는 쪽으로만 삶의 방향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제가 다른 사람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저를 돌보시기로 작정하신 것 같았습니다.


자기 절제, ‘나는 강하다’는 자기 암시... 이런 것들 속에서 오래 살아오다가

이런 저런 모양으로 사랑의 물결이 제 마음을 적셔 올 때

저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어색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싫은 것은 아니고...



①하루는 도서관에 있는데

그 경영학과 형제님이 자기 자취방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왜 나를 자기 사는 곳으로 가자고 하나’ 싶었지만,

그 표정이나 말투가 매우 정중해서 거절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우리 둘은 조금 걸어서 학교 근처에 있는 그 형제님의 자취방에 도착했습니다.


그 형제님은 키 작은 냉장고 문을 열더니

소고기 한 덩어리가 담긴 그릇을 꺼냈습니다.

그러더니 그것을 불판에 구워서 나에게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삼촌댁에 얹혀 살 때였고,

시대적 상황도 고기 먹는 일이 흔치 않은 때였습니다.


그 형제님은 밥이랑, 기름 장, 김치, 약간의 상추와 불고기를 준비해 놓고

저에게 점심 한 끼를 대접하고 싶었나 봅니다.

자신도 같은 학생 신분이고, 자취하는 처지이면서 무슨 돈이 있다고....


근 20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제 눈엔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다.


아마도 부잣집 친구가 내어 놓은 진수성찬이었다면

이처럼 제 마음을 아리게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상추에 싼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이런 게 형제사랑이구나 싶었습니다.



②또 어떤 날이었는데... 날이 좀 쌀쌀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종이 포장지에 뭔가를 싸서 건네면서

저 주려고 산 것인데, 한 번 입어보라고 했습니다.


포장을 뜯어보니 앞쪽에 여러 개의 다이아몬드 모양의 무늬가 있는

도쿠리(목이 긴 옷) 상의였습니다. 따뜻한 감촉이 온 몸을 감싸왔습니다.


그 때는 이 형제는 왜 내게 이런 일을 하는가 하는 의심보다도...

아! 같은 동년배 남자끼리도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할 수도 있는 거구나 싶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열린 저는

그 형제님과 함께 40분 씩 전철을 타고 집회를 다니면서

앞서의 물질적인 방면의 도움 뿐 아니라

영적으로 너무나 많은 도움을 그 형제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지금 말로 하자면

한 마리 잃었던 양이 목자의 손길아래 목양을 받은 셈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록 육신의 나이와 정신 연령이 비슷해도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과 체험에는 이토록 큰 차이가 날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이외에 <영적인 세계>라는 것이 있구나 하는 것이

저절로 알아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까지 내가 추구했던 세계는...



③또 하루는 주일예배가 끝나고 예배장소를 나오는데

저는 잘 알지도 못하는 어떤 분이

저를 보고 환 하게 웃으면서 자기 집에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된장찌개를 아주 잘 끓인다고 하면서...


그 순간 자기 집 사람 자랑하는 것이 조금 어색하게 들리긴 했지만

바로 이어서 그것은

저를 편하게 해 주려는 배려성 멘트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님 댁에서 얻어먹었던 점심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왜, 개다리 소반이라고 하나요? 작은 쟁반 같은 상...

그 위에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먹음직스럽게 그릇 가득 담긴 열무김치 그리고 보리밥 그것으로 메뉴는 끝!

그러나 꿀 맛, 그 자체!


또 어떤 집은 ‘우리 집 갑시다!’ 하며 당당하게 식사 초대해서 따라 가 보면

밥, 김치, 김, 오징어포 무침 그리고 미역국이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객지 생활하면서 대충 대충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았던

학생신분으로는 식사 초대만 받아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어색하고 생소하기만 하던 저는 이리 저리 초대 받아 함께 밥을 먹으면서

성도들과 차츰 차츰 친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제 경험을 되돌아보더라도,

청년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딱딱한 진리를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그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고 배를 부르게 해 주는 게 비결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또 어떤 성도님 댁에는 주일 예배가 끝나면

4-50명씩 어떤 때는 그 이상 씩 몰려갑니다.

함께 예배를 마치고 가는 입장이니

집 주인 인들 그 인수 식사를 언제 다 준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자장면 먹을 사람 짬뽕 먹을 사람 대충 파악해서

중국집에 시켜 놓고 음식이 올 동안 삼삼오오 모여서

그날 집회에서 누렸던 말씀에 대해 또는 일상생활에서 체험했던

주님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습니다.


한 쪽에서는 평소에 궁금했던 진리나 실행에 대해 질문을 하면

여러 사람이 듣고 분량 껏 답변을 하는 광경도 보이고...

또 한 쪽에서는 방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그야말로 어떤 안배가 없는데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이뤄지는 것이 새내기인 제 눈엔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한번은 어떤 노 자매님이 저를 보시면서

‘아이쿠, 참 귀한 형제가 왔네!’ 하셨습니다.

‘어, 내가 그렇게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그런 말이 듣기 싫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은 지나가는 말로 ‘우리 하나님은 말씀 주시고, 환경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한 마디 던지시는데... 그 말이 지금까지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는 그냥 객관적인 의문 문자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이 모든 말씀들은 우리 안에서 체험되고 성취됨으로써

그 말씀이 산 말씀으로 우리 존재 안에 새겨지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적절한 환경을 안배하신다는 것도....


*출처 http://blog.naver.com/eunicegodm/120023616649


 


◑ 기독교의 아름다운 손대접 전통


우리는 ‘손대접’이라는 단어에 낯설 뿐이지,

성경을 통해 손대접의 광경을 친숙하게 보아왔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기거하여 식사하시거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머물러 먹고 쉬는 등

많은 이들에게 손 대접 받는 광경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많다.


▲누군가 대접하는 것이 손대접이다.

손대접은 영어로 ‘Hospitality’다. 이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손대접은 ‘누군가를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은 힘들면 꼭 자기 집을 오픈하지 않아도 된다.

과거에는 오늘날과 같은 식당이나 숙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손님을 주로 자기 집에서만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는, 식당과 외부 숙소에서

얼마든지 손대접을 손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손대접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

「손대접」(크리스틴 폴 지음, 복 있는 사람)에 따르면,

4세기 교회 지도자들은 식탁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맞아들이라고 충고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를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것으로 여겼다.


종교개혁 시대에 마틴 루터는 핍박받는 신자들이 손대접을 받을 때

“하나님 자신이 우리 집에 계시면서, 드시고 누우시며 쉬신다”고 말했다.


존 칼빈은 종교적 난민들에게 베푸는 손대접을

신성한 형태의 손대접이라고 보았다.

그는 신자들에게 나그네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음을 볼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손대접은 손님의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시켜주는 것

손대접은 단순한 육체적 휴식과 접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지만,

그것을 넘어 낯선 나그네들을 받아들이는 행위 자체가

그들의 영혼을 쉬게 하며 평안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손대접은 육체적 쉼을 넘어 영혼의 안식까지도 제공하는

기독교의 훌륭한 전통이기에 그것을 회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손대접은 복음의 핵심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 편에 풍족하게 손대접을 베푼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축복했다(빌4:1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절정이었다.


각박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지극히 중요한 측면인 손대접을 회복하는 것은

단순히 낡은 관습을 부활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손대접은 복음의 의미의 중심이다.


이를 통해 복음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렌즈이며,

신자는 그것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할 수도 있다.


▲가장 아름다운 미국생활의 추억

저도 미국에서 유학 생활 할 때, 미국인 크리스천의 가정에 초대되어가서

그 집에서 자면서 손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다.

Boatwritht가정은 자기 침대를 우리 부부에게 내어주고,

자기들은 마루 소파에서 잠을 잤다. 물론 한사코 실랑이를 벌였지만 말이다.

  

그들의 성(姓)은 버지니아의 Campbell 과 찰스턴의 Boatwright 가정이었다.

앞으로도 그들의 이름을 영영히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백인 가정들이었다. 


그것은 미국 생활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였으며,

미국인 크리스천이 얼마나 선한가를 깊게 인식시켜준 귀한 대접받음이었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럽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펀 글을 토대로 편집.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리빙(12) http://blog.daum.net/bible3/10790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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