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을 두려워하지 않기 눅4:25~27
운전 중에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성경말씀을 듣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작은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엘리야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4:25~26
엘리야 선지자가 3년 반 사이에 했던 주된 일은
자랑스럽게도(?) 어떤 과부 집에서 지내며 과부나 돌보는 것 등이었다.
大선지자의 이름에 전혀 걸맞지 않게
이방 민족 한 마을에 가서 오래 동안 거기서 조용히 묻혀 지냈다.
엘리야는 무조건 크고 위대한 일을 하려는 강박관념이 전혀 없었다.
그 대신, ‘시키시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한다’는 종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매 변방으로 가는 일을 꺼려하지 않았다. 왕상17:8
우리는 상식적으로 가급적 ‘큰 일,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작은 일’은, 일 같이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엘리야는 ‘작은 일’도 기꺼이 감당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눅4:25절(위)에서 이런 엘리야를 두둔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우리 생각으로는 엘리야가 '무사안일'로 야단맞아야 할 것 같은데...
제 한 몸 편하라고, 저 먼 나라 시골구석에 가서
오랫동안 몸 사리고 지냈으니 말이다.
엘리야에게 중요한 것은, ‘큰 일 or 작은 일’ 이전에
‘주님이 명하신 일인지, or 아닌지’ ... 그것이 중요했다.
주님이 시키신 일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는 주저하거나 마다하지 않았다.
자기의 체면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작은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엘리사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눅4:27
능력의 종 엘리사, 적군의 침입을 사전에 척척 알아맞히는 엘리사는
당연히 많은 병자를 고칠 수 있었겠다.
제가 만약 엘리사였으면, 무슨 ‘힐링healing 클리닉’ 같은 것을 만들어서
날마다 집회를 열어서 많은 병자들을 고쳤을 터인데...
사방에 광고도 많이 때리고...
그런데 이스라엘의 많은 문둥병자들은 ‘단 한 사람도’ 고침 받지 못하고
이방사람 나아만 한 사람만이 고침 받았다는 얘기는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그 이유를 아래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①엘리사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자기에게 능력이 있다고 무조건 고쳐주려고 하지 않았다.
고쳐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세심하게 분별했다는 것이다.
만약 엘리사가 성급하게 자기를 나타내려고show up 했다면
그는 전국을 돌면서 ‘특별 신유 집회’를 열고서
많은 환자들을 불러 모아서 고쳐주었을 것이다. (신유집회가 나쁘다는 뜻은 아님)
그러나 엘리사는 신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과 감동이 임할 때만
그는 신유나 기적을 행했다.
그래서 고작 한 명(나아만) 고쳤다.
자기 역량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고작 한 명에 그치고 말았다.
②사람들이 엘리사를 믿지 않았다
눅4:22~27절에, 예수님이 엘리야와 엘리사를 비유로 드신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엘리야를 믿지 않아서 그가 이방에 보내심을 받았고,
당시 사람들이 엘리사를 믿지 않아서 그가 이방인만 고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너희들이 나(예수님)를 믿지 않아서
나도 많은 기적을 행할 수 없다는 맥락의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의 존경심과는 다르게,
이스라엘의 많은 문둥이들이 엘리사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뭄이 들어 배고픈 이스라엘 사람들이 엘리야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어려서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사이라서 그랬던 모양이다. 눅4:24
그래서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구원과 기적을
당시 이방인들이 수혜했던 것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예수님의 우려는
후에 결국 사실이 되고 말았다.
접붙여진 가지가 원가지로 시기 나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롬11장
▲마치는 말
① 작은 일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오늘 같은 물량주의적 사회에서는
‘많이 모이고, 큰 일 하는 것이 무조건 좋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배여 있다.
물론 ‘작게 모이고, 작은 일 하는 것이 무조건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숫자 많이 모아서 큰 일’을 하려는 강박관념이 거의 없으셨다.
대신에 ‘하나님이 시키신 그 일’에 집중했다.
그것이 비록 작은 일이더라도, 조금도 주저하거나 마다하지 않았다.
大엘리사 선지자가 고작 한 명 고치는 일에 불만을 품고서
뛰쳐나가 많은 문둥병자들을 고치려고 스스로 조직하고 발버둥치지 않았다.
大엘리야 선지자가 고작 과부 한 명 돌보는 일에 불만을 품고서
뛰쳐나가 많은 과부들 돌보려고 무슨 운동movement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무리 크고 위대한 사역이라도(크고 위대한 것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주님이 원치 않으시고, 허락지 않으신 일이라면
그것은 우상이요, 도리어 사탄이 틈타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교회나 사역을 무조건 크게 벌이다가 많이들 망한다.
또한 주님의 사역은 종종 작은 일이 기폭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사렙다 과부의 기적은 이방선교에 대한 여호와의 관심을 보여주었으며 왕상17:24
나아만의 병고침은 후에 요나 선지자의 니느웨 부흥에 밑거름이 되었다. 왕하5:17
한나 한 사람의 고통과 문제해결은, 아들 사무엘로 통해
사사기 암흑 시대의 이스라엘에 '말씀의 회복'을 가져왔다.
작은 한 가지 일이, 종종 큰 역사와 변화의 기폭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일 행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주님이 시키신 일이라면, 크고 작은 일에 관계없이 모두 위대한 일이다.
노련한 종은 어떻게 해서든지 무조건 큰 일만 하려고 발버둥치지 않는다.
②오늘도 내가 예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지 못하니까
예수님이 큰 능력을 내게 베풀어주시지 못하시는 면이 없는지,
심지어 거두어 가시는 면이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김지윤
[주제별 분류] 리더십, 목회자 http://blog.daum.net/bible3/10853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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