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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사람 찾기

LNCK 2007. 1. 27. 20:41

 

◈정직한 사람 찾기                시111:1              스크랩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111:1

 

어느 나라에 지혜로운 임금이 살았습니다.

그는 백성 중에 정직한 사람을 찾고 싶었습니다.

 

임금님은 어느 이른 봄날에, 온 백성들에게 꽃씨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꽃씨로 싹을 내어 잘 길러서 여름 축제 때 임금님의 행차가 있을 때

집집마다 그 꽃들을 길에 가지고 나와 거리를 장식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마침내 여름 축제가 돌아왔습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 임금님의 행차는 약속대로 시작되었고

사람들이 저마다 활짝 피운 꽃 화분들을 집 앞에 가지고 나와서

임금님을 향해 내어놓고 환영했습니다.

 

각 집은 얼마나 꽃들을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길렀는지

백일홍, 채송화, 장미꽃 등 온갖 꽃들이 길 거리에 만발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힘겹게 사는 가난한 두 모녀가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이 집의 화분에만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정성을 다했지만

이 집의 화분에만 아무 싹이 나지 않았습니다.

 

싹도 안 돋으니 두 달이 지나도 꽃은 필 기미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여름 축제가 되었고 임금님의 행차가 시작된 것입니다.

 

결국 두 모녀는 빈 화분을 든 채 너무도 초라한 모습으로

자기 집 앞에 서 있었습니다.

 

팡파레가 울려 퍼지고 임금의 행차가 시작되었습니다.

온 도시가 축제의 무드임에도 불구하고

임금님은 별로 기뻐하는 내색도 없이 오히려 얼굴에 수심만 가득했습니다.

 

 

마침내 그 행차는 가난한 모녀의 집 앞에 다다랐고

임금님은 그들을 보는 순간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행차에서 내려서

두 모녀의 손을 덥석 잡고 마차로 인도하셨습니다.

 

온 도시 사람들은, 심지어 모녀조차도 그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대궐로 돌아오신 임금님은 문무백관들을 불러 모아놓고

그제야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지난 봄에 임금이 나누어준 씨는 곡식가루를 빻아 만든

가짜 씨였다는 것입니다.

온 도시 사람들은 서로 서로 눈치를 살피면서 가짜 꽃들을 피운 것입니다.

 

임금님이 기대한 것은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정직한 마음을 원하신 것입니다.

 

곡식가루로 백일홍, 채송화, 장미꽃을 피웠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항간에 '삼척동자' 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아는 척, 잘난 척, 있는 척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많은 교인들은 잘 믿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거의 강박적으로 시달립니다.

 

"우리 애들은 공부도 잘 하고, 부모 말도 잘 듣고,

우리 남편은 사업도 잘 되고, 아무 문제도 없으며,

우리 부부사이에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특히 신앙이 좋다는 직분자들은, 몸이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못 꺼냅니다.

언제나 하나님 축복으로 건강하게 사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한결같이 모두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 화분을 들고 나온 시민들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음 소리를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출6:5

신음 소리를 좀 내도 괜찮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 지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자꾸 바리새화가 되어가는 이유는

항상 자기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자기의 좋은 면만 보여주려고 하는 이유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짐승 곁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그의 외로움과 쓸쓸한 시간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왕따, 부적응자'로 따돌립니다.

 

폭군에게 쫓겨 먼 나라로 피난했던 아기 예수님은

그의 나그네와 같은 삶의 적막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등뒤에 대고 '떠돌이'라고 말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지만 집이 없었던 예수님은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는 그의 불안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경제 파탄자'로 무시합니다.

 

목수의 집에 태어나 시골에서 자라난 예수님은

그의 땀과 고생과 그 피로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밑바닥 인생'으로 분류합니다.

 

돌로 빵을 만들라는 시험을 당하신 예수님은

욕심의 수렁 앞에 선 그의 위험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유혹에 약한 자'로 비웃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치던 예수님은

그의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신앙적 갈등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세리와 죄인'을 쳐다보듯 합니다.

 

친구들의 떠남과 배신을 체험하신 예수님은

비록 혼자서라도 굳세게 살아보려는 그를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뭔가 인격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봅니다.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하고 호소하신 예수님은

그의 약함과 용기를 달라는 호소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나약한 겁쟁이'로 평가합니다.

 

수건을 동이고 제자의 발을 씻기셨던 예수님은

그의 숨은 봉사와 그가 지불한 희생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쓸데없는 일'이나 벌리고 다닌다고 타박 줍니다.

 

갈보리 언덕을 십자가 지시며 홀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남을 위해 남 몰래 흘리는 그의 눈물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자기 머리도 못 깎는 주제에'라고 깎아 내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슨 척, 무슨 척, 무슨 척합니다.

비난의 화살에 맞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입장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나는 혹시 예수님보다, 바리새인의 입장은 아닌가요?

 

 

◑신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성숙한 신의 경지에 이른 섬김

어떤 분들은 오랜 시간의 몰입된 기도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금식을 통해서

주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정말 높은 차원의 신앙생활입니다. 좋은 것이긴 합니다.

 

▲미숙한 인간의 경지에서의 섬김

하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러한 모습이 아니라

울고 싶을 때 울고, 배고플 때는 또 자장면을 게걸스럽게 먹고,

짜증날 때는 짜증을 내고, 아름다움 앞에서 또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지극히 인간적인 우리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모습도 실로 동감이 갑니다.

우리는 ‘신(god)의 모습’으로 하나님(God)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미숙한 모습 그 자체를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울 때 사랑스럽습니다.

만일 어린아이가 너무 어른스럽게 행동하거나 말을 한다면

우린 징그럽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우리 인간 역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아닌,

신(god)들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 역시 거북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 역시 우리들의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을 더 사랑하지 않으실까요?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기뻐하고 화날 때는 화를 내는...

 

▲우리가 공경하는 성인들 역시 신(god)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분들 역시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한 신(god)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았던 세상 한가운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자들을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이나

신(god)과 같은 존재로 정의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봅시다.

예수께서 왕으로 오셨을 때 서로 높은 자리 앉아 있게 해달라고 조르던 모습,

예수께서 가장 어려웠던 십자가의 수난 때 도망쳐버린 제자들,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동료 바나바와 전도에 대해 심하게 논쟁을 하고

결국은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갔던 바울...

 

모두 우리의 인간적인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

그렇듯 세상 한복판에서 사람들과 부대끼어 살아가는

그런 우리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으실까요?

 

우리들이 신(god)처럼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사랑하지 않으실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렇듯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수없이 실패하고 좌절함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사랑에 신뢰하면서 다시 일어나 또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그러한 사람들을 ‘성자’the saint 라고 합니다.

 

우리가 단식이나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극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완벽한 신(god)으로서의 극기가 아니라

부족한 인간으로서의 극기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지

스스로를 완벽하게 만든 후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큰 죄인의 모습으로 있다하더라도 바로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다가가 치유를 받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치유해서 완벽한 모습을 갖춘 후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모습과 우리의 감정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주님께 다가가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겸손이며,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oesohn/6261725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