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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519 회개 - 가치관의 혁명

LNCK 2007. 2. 7. 11:56
 

◈회개 - 가치관의 혁명          마4:1~11              07.02.04.설교 녹취 

 

 

◑1. 1970~80년대 부흥에 대한 반성


1907년, 평양 대부흥 이후에 전도와 교회성장의 큰 열매가 있었다.

1910년에는 ‘백만 大구령운동’이 일어났고,

수많은 성도들이 전도에 헌신했다.

당시 교회성장 기록 도표를 보면, 거의 그래프가 수직선을 그릴 정도로

급상승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1970~80년대에 다시 한국교회에 부흥(or 성장)이 찾아왔다.

60년대 초만 해도 한국 개신교인의 숫자는 백만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초부터 10년 단위로 교회가 배가되기 시작했다.

 

1백만이 2백만으로, 2백만이 4백만으로, 4백만이 8백만으로 되면서,

90년대 중반에는 천만을 넘어서게 되었다.

사실 세계 교회가 놀란 폭발적인 큰 성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성장이 '과연 부흥이었느냐?'는 질문이 제기되어져 왔다.

왜 이런 의문을 갖게 되었느냐 하면,

교회가 이렇게 부흥했는데도 불구하고,

도덕적 각성이나 기독교적인 사회윤리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거 교회사를 통해 부흥운동이 진행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①먼저 개개인의  회개를 통한 심령부흥이 일어난다.

②다음으로 이것이 주위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서 집단적인 회심을 일으킨다.

③이어서 전도운동으로 전개되어서 교회성장을 가져온다.

④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도덕적 각성 운동이 일어나고 사회변혁으로 열매

맺게 된다.


▲회개가 빠진 부흥운동

그런데 7~80년대 한국교회의 부흥은, 양적으로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뭔가 빠져있었다.

부흥의 첫 출발이 되는 회개가 분명치 않았던 것이다.

죄를 깨닫고 그것을 통렬히 뉘우치고 돌이켜 예수께 나오는

회심의 과정이 확실치 않았다.


당시 가장 일반적 메시지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구원이 무엇인지, 기독교가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샤머니즘적인 복의 개념을 그대로 인용했다.


교회에서 세례문답을 할 때에도 회개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예수 믿느냐는 단순한 질문으로 신, 불신 여부를 판단했다.

 

성경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했지만

당시 한국교회는 ‘진정한 회개’ 단계를 생략해 버리고,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복음과 은혜’를 아주 값싼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감성적인 회개운동에 그침

또 회개를 설교한다 해도, 주로 감성에 의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설교자들은 청중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은 회개했구나, 저 사람에게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겠구나..’ 라며

쉽게 판단했다.


교인들도 교회 와서 뭔가 감동 받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그래서 회개를 한다 하면서도 그것이 감성적인 차원을 넘어서

더 이상(가치관의 혁명, 뒤에 나옴)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한 번 운다고 사람이 획기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한 번 뉘우치고 회개했다고 해서 완전히 회개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생각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롬12:2

라고 성경은 가르치는데,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치관,

라이프스타일을 따라 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라

- 그런데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뜻, 성경적 가치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고 하면서도,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 않았다.

여전히 세상 나라에 머물러서, 세상이 구하고 찾는 것들을 비슷하게 찾았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경향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부흥이 사회적인 각성과 변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가 사회적인 분위기에 같이 휩쓸려 떠내려갔다.


7~80년대 우리 사회 분위기는 ‘잘 살아 보세!’ 분위기였다.

당시 아침 출근길에 이런 노래 가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그것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교회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복 받아 잘 살아 보세’는 메시지가 대세를 이루었다.

그리고 물량주의에 빠져, 양적 성장에만 몰두했다.

건강과 만사형통이라는 번영신학이 번영을 이루었다.


그래서 ‘잘 사는 것’은 ‘바르게 사는 것’이며,

‘축복’은 ‘거듭나 새 사람이 되는 것’이고,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진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기독교의 가치를 차별화하는 데 실패했다.


▲회개는 감성적 차원이 아니다.

후회하고 슬퍼하는 것은 ‘회개의 시작’에 불과하다.


참된 회개는 회심(conversion)이다.

회심이란 문자 그대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삶의 철학과 가치관이 새롭게 되어지는 것이다.


저는 이런 회심을 ‘가치관의 혁명’이라 부르고 싶다.★

회개란 우리 마음속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 속에 있던 세상나라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가 깨어지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가 세워지는

영적인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내속에 있던 아성이 무너지고, 내 에고(ego, 자아)가 깨어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도 바로 이런 뜻이다.

나의 주장이 깨어지는 것이다.

나의 정욕이 깨어지는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2. 버려야 할 세속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세상 나라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예수님을  유혹하던 사탄의 시험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귀의 시험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과 안위를 하나님이 아닌,

경제에 두려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유혹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의 생존과 안위가 떡에 달려있다고 끊임없이 우리를 세뇌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떡(경제)을 최우선순위에 둔다.

(경제를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고,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것도, 먹을 것이 해결된 후에야 고려해볼 일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좋지만, 우선 먹고 살아야 가능한 일이 아니냐고 말한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말씀에 우선순위를 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는 것을 실제로 믿고, 고백하고, 실천하는 삶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다.

 

그래서 자기 가치관의 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를 따르려면, 자기 생각, 자기 욕망이 무너지는 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공과 명예에 대한 유혹이다.

우리는 모두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한다.


뭔가 잘 해서 성공하고, 그래서 명예를 얻고 싶은 것이 모두의 바램이다.

명예란 떡 보다는 좀 더 고상해서,

첫 번째 떡의 시험을 이긴 사람들이 여기서 낙방하는 경우도 많다.


떡 문제를 과감히 해결했지만,

그 때부터 사람들의 인기와 영광을 찾아나서는 신자가 많다는 것이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란다.

자기의 이름을 날리고 싶은 본능을 이겨낸 사람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역에 진정한 의미로 쓰임받을 수 있다.


▲세 번째 시험은 사탄 앞에 무릎 꿇고 절하면 천하를 주겠다고 했다.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유혹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대로 만사를 주무르려고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어디에 가서든지 자기가 으뜸이 되고자 하고,

남을 섬기기 보다는, 남들로부터 섬김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이것이 심해지면,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을

인간이 중간에서 가로채려 한다.

 

 

이렇게 세상은 돈, 명예, 권력을 추구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들에 목숨을 건다.

사탄이 이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구세주로 오셨다는

인간(100% 인성을 지니신) 예수를 이것으로 유혹했다. ‘안 넘어가는가 보자...’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셨지만, 이 유혹들을 다 이기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떡, 명예, 권력은 우리가 찾고 추구해야 할 바가 아니라

오히려 물리쳐야 할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다.


만약 사람이 떡을 위해서만 산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하겠는가?

예를 들어, 목회자가 떡을 위해 목회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세상 사람들의 인기에 아부하는 사람들이

무슨 뜻있고 고상한 일을 해 낼 수 있겠는가?

목회자가 인기를 얻고 명예를 얻기 위해 목회한다면,

높은 자리나 탐하거나 권위주의에 빠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떤 직업을 가졌든, 우리 인생의 가치는 이런 것들보다 더 중하고 귀하다.

돈, 명예, 권력, 이런 것들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우리 인생(생명)은 영원과 연결되어 있다. 영원한 것이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6:25


인생(생명)은 떡보다 귀하고, 몸은 의복보다 더 귀하다는

당연한 말씀이다.


먹을 것, 입을 것, 명예와 권세를 탐하여서 자기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데 내 인생을 소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3. 그럼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관의 혁명'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산상수훈이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고 돌아오셔서(마4장)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산상수훈에 잘 나타나 있다.(마5~7장)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 명예, 권력과는 극명하게 대조되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산상설교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3~10


▲축복관의 혁명

이것은 당시에 사람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주 특별한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그야말로 ‘축복의 혁명’이다.

당시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고 살고 있었다.

지금 우리 시대보다 훨씬 가난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때를 맞추어 먹을 음식이 있다는 것,

자기 몸을 가릴 옷이 있다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명예와 권세를 얻고 누리는 것이

참으로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고,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고,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1~33


떡, 명예, 권세 -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하고 찾아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가장 요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축복된 다스림’이다.

그리고 이 다스림으로 이루어지는 의, 사랑, 평화가 충만한 나라(통치)를 말한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도 함께

의, 사랑, 평화 속에서

생명을 얻고,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이런 천국(하나님 나라)을 사모하고, 소망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는 삶을 힘쓰는 것이다.

올바른 관계 속에서 평화를 만들고 추구하는 삶을 뜻한다.


‘의’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올바르다’이지만,

신학적 의미는 ‘올바를 뿐만 아니라, 서로 화목된 관계’를 말한다.


화목이라는 것은 올바름을 바탕으로 한다.

올바름 없이 화목할 수 없다.

‘화목’과 ‘올바름’ 두 개념이 보태진 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과 올바르고 좋은 관계,

또한 사람들과 올바르고 좋은 관계를 ‘의’라고 말한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가치를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인데

그 내용은 ‘생명과 사랑과 의’이다.

이것이 최고의 가치요, 영원한 가치다.


우리가 영원히 구하고 찾아야 할 가치다.


▲마치는 말

회개는 단순히 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감성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이 회개는 내적인 가치관의 혁명이다.

내 마음의 나라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 마음에 왕이 바뀌고 나라(통치)가 바뀌는 혁명이다.

지금까지 나를 지배해 왔던, 나를 이끌어왔던

나의 신념과 나의 가치가 깨어지고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는 혁명이다.


이것은 쉽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말씀과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서 함께 역사할 때

이런 혁명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여러분, 회개를 결코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슬퍼하고, 끝나서는 안 된다.

내 마음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내 생각, 내 세상적 가치관의 견고한 성이 무너져야 한다.


예수 믿는다고 말하기 이전에 우리 생각, 마음, 가치관이 바뀌어져야 한다.

이런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세상적인)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그런 회개운동!

나의 사랑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그런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그래야 진정한 부흥이 우리에게 올 것이다.


우리 각자 심령에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면

이 때 교회가 새롭게 될 것이고,

그 영향력이 퍼져나가 이 시대의 풍조를 바꾸는

새로운 각성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진정한 부흥은 결코 교회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나라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면서

희망이 없다는 이 민족에게 나아갈 새로운 활로를 뚫어줄 것이다.


이런 진정한 부흥운동이 2007년에,

우리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어 널리 확산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주제별 분류] 죄, 복된 회개(3) http://blog.daum.net/bible3/786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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